레즈비언의 사랑은 피보다 진하다
데이지를 죽인 건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했다. 그녀는 루를 사랑한 죄밖에 없다. 잭키의 총에 맞아 죽고 루에게 목이 졸려 또 죽는데 두 번이나 죽은 그녀가 불쌍하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영화의 주제나 기조를 고려해보면 그녀는 죽어야 함이 마땅하다. 이 영화는 페미니즘 사상에 기반한 여성주의(정확히 말하면 여성 우월적) 작품이기 때문에 기존의 남성적 시각에서 여성스럽기 그지없는 그녀는 부정적으로 처리될 수밖에 없다. 루와 잭키도 여자지만 남자들이 바라는 여성성에 멀리 떨어져 있으므로, 오히려 남성성에 가까우므로(루의 담배와 스테로이드, 잭키의 보디빌딩) 영화의 주인공이 된 거고 데이지와 달리 긍정적 결말을 맞이한 거다. 이처럼 이 영화는 '남성'과 '여성'을 구분한 뒤 한쪽을 비난하고 파괴하고 다른 쪽을 옹호하고 응원한다. '남성'이라 함은 여성이 봤을 때 기존적 질서인 남성적 가부장제를 뜻한다. '여성'이라 함은 여성이 봤을 때 지향해야 할 페미니즘 같은 여성주의를 뜻한다. 당연히 전자가 부정적인 것이고 후자가 긍정적인 것이다. 데이지는 '남성' 속 여성이었기 때문에(레즈비언이지만 사랑의 태도가 남성이 바라는 여성 같았기 때문에), 그래서 죽음을 맞이한 것이다. 감독은 영화에서 '남성'을 벗어난 '여성'에게만 해피 엔딩을 부여한다. 남편에게 맞아 얼굴이 퉁퉁 부어 병원에 입원한 베스는 남편의 사망 소식을 듣고 절규하는데, 그녀 또한 데이지처럼 '남성' 속 여성이었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처리된 것이다. 그녀가 양아치 같은 남편에게 가정 폭력을 당하면서도 얼마나 그의 사랑을 갈구했는지, 그리고 루가 조카들을 등교시키려고 그녀 집에 방문했을 때 집안일을 도맡고 있고 화장이 잘되었는지를 물었던 것을 생각해보라. 그녀는 가부장제의 전형적인 아내(여성)였다.
주요 인물이 총 여섯이다. 루, 잭키, 랭스턴, JJ, 데이지, 베스. 앞서 두 여자에 대해 말했으니 남은 네 인물을 살펴보자. '남성'과 '여성'의 본격적인 대결은 이 네 명에 의해 이루어진다. 랭스턴과 JJ는 옹서 관계다. 그들은 넓은 의미의 가족이면서 밖에서 함께 돈을 버는 보스-부하의 경제적 파트너다. 하지만 JJ는 사실 FBI의 비밀 요원이고 랭스턴의 부정을 잡고 경찰에 넘기기 위해 가까이서 돕는 척하는 것이다. 이런 설정은 감독이 남성들의 관계를 비꼬기 위해 마련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남자들이 겉으로는 서로 함께하고 몰려다니지만 속으로는 자신의 이득과 목적만 생각하고 언제든지 배신할 수 있는 관계라는 뜻이다. 반면에 레즈비언 커플인 루와 잭키는 목숨까지 바쳐가며 서로를 위한다. 잠깐의 오해와 다툼이 있지만 그것은 그들의 사랑을 갈라놓지 못한다. 언니가 당한 가정 폭력 때문에 루가 분노하고 속상해할 때 그 폭행의 장본인인 JJ를 때려눕힌 게 잭키다. 물론 그냥 때린 정도가 아니라 턱을 부러뜨려 죽게 만들지만, 그런 잭키의 범죄를 은폐하는 것도 루다. 사귄 지 얼마 안 된 이 여성 커플은 상대를 위해 살인을 하고 상대를 위해 범죄를 감싸줄 정도로 서로에게 지극정성이다. 그런데 주목할 점은 그들이 그만큼 뜨겁게 사랑한다는 것이 아니라 왜 피를 보게 사람을 죽이고 피를 닦게 범죄를 감춰줬느냐 하는 것이다. 그 점에 바로 답하자면, 그만큼 '남성' 세계에 반하여 '여성'의 사랑을 지키려면 피를 흘릴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남자들이 정상이면 굳이 여자들이 피를 안 봐도 되는데 정상이 아니니까 자기들의 사랑에는 피가 흐를 수밖에 없다고 감독이 말하는 것이다. 그 피는 부정과 잔혹성의 결과가 아니라 저항과 투쟁의 산물에 가깝다. 기득권인 남자들에게서 여자의 사랑을 지키려면 피 보는 것을 각오해야 한다.
랭스턴은 총을 가졌다. 그는 사격장을 운영하고 루가 일하는 헬스장도 소유하고 있다. 총과 그의 사업체는 남성적 가부장제의 기득권을 상징한다. 그 밑에서 일하는 JJ는 성 상납을 받고 잭키를 사격장에 취직시켜준다. 모든 권력은 남자들이 가지고 있고 여자들은 그들의 지배 하에 일한다.
총이 현대 문명과 권력의 총합이라면 잭키가 추구하는 근육은 원초적이고 실질적인 힘이다. 총과 근육이 싸우면 당연히 총이 이기겠지만 그것은 무기이고 기술의 힘을 빌린 것뿐이다. 도구의 도움 없이 맨몸으로 싸우면 근육을 가진 쪽이 이긴다. JJ가 잭키에게 얻어터진 것을 생각해보라. 여성(잭키)의 근력이 남성(랭스턴)의 총보다 진실에 가깝다는 이 메시지는 영화 마지막의 대결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랭스턴의 저택에 잠입한 루는 그와 총 대결을 벌이지만 다리에 부상을 입고 쓰러진다. 총은 남성의 권력이니 그녀가 싸움에서 애초에 이길 수 없다. 그런 그녀를 도와주고 싸움을 역전시키는 것은 스테로이드로 인해 거대해진 잭키다. 실제로 커져서 랭스턴을 제압한 것이라고 하면 작품의 핍진성에 문제가 생기니 그것은 영화적 허용이자 상징이라고 봐야 한다. 잭키는 근육으로 총을 이긴다. 그로써 '여성'이 추구하는 실질적 힘이 남성의 권력을 압도하고 남성적 가부장제에서 여성이 해방된다는 페미니즘적 메시지가 완성된다.
헬스장의 막힌 변기를 뚫기 싫어했던 루가 잭키의 발가락을 빨아준다. 사랑하는 사람의 발은 전혀 더럽지 않은 것이다. 하기야 연인의 살인까지 감싸주는데, 그리고 그 연인(잭키)은 루의 공범 행각을 눈치챈 데이지를 제거해주는데 그들의 사랑은 진짜가 아닐 수 없다. 반면에 '남성'을 대표하는 랭스턴과 JJ의 사랑은 빈 껍데기다. 사랑의 결실인 결혼에 성공했고 가족을 이뤘지만 아내를 죽였고, 아내를 때리고, 바람을 피우고(JJ가 취업 알선의 대가로 잭키와 성관계를 맺은 건), 자식보다 일을 중시한다. 어찌 보면 감독이 결혼은 철저히 남성 위주의 제도고 그것은 진짜 사랑과 아무 관련이 없음을 말하고 싶었던 것 같다. 랭스턴은 딸 베스가 남편에게 맞아 병원에 입원했음에도 루보다 침착하고 사위 JJ에 대한 분노를 표출하지 않는다. JJ와 무기 밀매를 함께하고 있기에 그가 경찰에 입건되면 자기 사업에 지장이 생기기 때문이다. 가정 폭력을 일삼는 놈이나 자식보다 돈을 아끼는 놈이나 가부장제가 입이 닳도록 칭송하는 아버지의 역할에 하나도 부합하지 않는다. 그리고 전통적인 가족 개념을 부정하는, 그래서 여성들의 연대를 중시하는 페미니즘적 시각도 엿볼 수 있다.
루와 잭키가 처음 만난 날, 루는 마감한 헬스장에서 잭키의 엉덩이에 스테로이드 주사를 찔러준다. 그것은 묘하게도 성관계를 암시한다. 엉덩이를 내민 잭키의 자세는 후배위를, 주사기는 남자의 성기를, 스테로이드는 정액을 연상시킨다. 이미 그들은 그 행동을 통해 육체적 관계를 맺은 것이나 다름없다. 이 레즈비언 커플은 의도한 건 아니지만 여성스러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물에 의존하는데 그만큼 그들의 사랑은 중독적이고 정열적이고 위험한 것으로 깊어져간다. 이성애 작품이 지배적인 영화판에서 동성애 또한 피와 약물처럼 진하고 강력하다는 걸 감독은 보여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레즈비언의 사랑과 투쟁으로 보수적인 남성주의를 물리치는 페미니즘 판타지를 실현한 영화. 그래서 극장에 여자 커플이 많았나 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