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현의 발견
여러분이 가장 궁금해하는 것부터 말하겠다. 박지현, 가슴 나온다. 조여정, 벗는 척만 하지 노출 안 한다. 송승헌, 연기 못한다.
영화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게 계급의 문제다. 지배층과 피지배층, 상류층과 하층, 주인과 노예. 등장인물이 거의 이 두 부류로 나뉜다. 당연히 이들의 역학 관계에서 나오는 갈등이 내러티브의 골자다. 늘 그렇듯이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부리고, 하층의 억눌렸던 감정이 상층을 향한 전복을 일으키지만, 영화가 이제는 진보와 혁명을 믿지 않고 물적 신분 상승만 꾀하는 현실을 보여주듯이 노예가 결국 주인의 도구로 돌아간다. 이 결과에 대한 씁쓸함과 무기력함은 우리 사회를 돌아봤을 때 드는 적나라한 감정이지만 그걸 연기하는 배우들의 행동과 대사가 각본의 허술한 개연성을 드러내서 자못 우스꽝스러운 것도 사실이다. 미주(박지현)와 성진(송승헌)은 수연(조여정)을 밀실에 가두고 시간이 지나자 어찌할 줄 몰라 전반에 보여줬던 호기로움의 정반대 모습을 나타낸다. 그들이 마지막에 뭘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가뒀던 수연을 꺼내주고 아무렇지 않은 듯 본래의 위치로 돌아간다. 그나마 성진의 선택에는 이해가 가는 구석이 있지만 미주의, 결말에 밀실 침대에 다소곳이 앉아 웃는 모습은 그동안의 저항 의식과 요부 이미지를 단박에 날려버려 "이럴 거면 애초에 왜 가뒀니?"라는 말이 절로 나오게 한다. 이 어처구니없음이 우리 현실을 꼬집은 감독의 의도라고 생각하지만 그 때문에 이야기가 싱겁게 매듭지어진 것도 비판을 비껴갈 수 없는 부분이다. 미주가 성진의 밀침에 머리를 부딪혀 쓰러졌을 때 실소하지 않은 관객이 있었을까.
히든페이스, 숨은 얼굴, 즉 욕망의 의미한다. 우리는 누구나 사회에서 가면을 쓰고 내면의 욕망을 숨기며 살아간다. 수연의 욕망은, 상류층으로서 형식적인 결혼 생활을 하며 동성애적 SM취향을 즐기는 것이다. 그녀는 레즈비언이라서 남자를 사랑하지 않지만 남편이 필요하기에 성진과의 결혼을 택했다. 부자인 부모 밑에서 자랐기에 철없고 자기 중심적이다. 그녀가 공항 게이트에서 나올 때 성진이 뒤에서 짐꾼처럼 가방을 끌고 있고 그녀의 명령에 커피 심부름을 간 걸 보면 그녀가 성진을 대등한 입장의 배우자가 아니라 자신보다 낮은 위치의, 그래서 맘대로 다룰 수 있는 부하쯤으로 여기고 있다는 걸 알 수 있다. 수연은 또, 자신과 오랜 기간 파트너 관계를 유지한 미주에게 "너는 내 도구야."라는 말을 한다. 그러니까 영화의 중심 인물인 세 사람의 관계에서 수연이 갑이고 성진과 미주가 을인 것이다. 그 갑은 한쪽 을을 통해서 결혼이라는 대외적 삶의 형태(그녀가 미주와 통화하면서 '진짜 삶'이라고 말한)를 성취하고 다른 을을 통해서는 은밀한 성적 욕망을 충족한다. 어느 측면으로 보나 성공한 삶이고 진정 지배층다운 모습이다.
미주의 복수심으로 인해 계급의 전복이 일어나고 수연은 밀실에 한동안 갇히지만 결말에 탈출했을 때 그녀는 미주와 성진을 벌하지 않는다. 피지배층이 지배층의 권위에 도전했으니 후자가 전자를 전보다 심하게 억누를 만한데 수연은 성격이 좋기 때문이 아니라, 노블리스 오블리제를 실천하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욕망 충족에 미주와 성진이 필요하기에 한번 눈감아주는 식으로 그들의 잘못을 용서한다. 이 이상한 공생 관계는 아무리 갑의 위치에 있다 할지라도 을의 도움 없이는 자족할 수 없음을 드러낸다. 노동자 없이 자본가가 존재하지 못하고 국민 없이 정치인이 존재하지 못하는 것처럼.
성진은 분식집 아들로 자라서 교향악단 지휘자가 된 자수성가형이다. 물론 그 자수성가란 말은 그의 장모인 혜연이 의례적 칭찬으로 붙인 것에 불과하고, 실제 그의 성공에는 곧 그와 결혼할 수연의 역할이 크게 작용했다. 노력 없이 이 모든 걸 이뤄서 기분이 이상하다는 성진의 말에 자기는 그럴 자격이 있다고 수연이 말하는데, 이는 하층의 신분 상승이 상층의 선택을 받는 식으로 이루어짐을, 그런 자격을 갖추어야 가능함을, 즉 우리 사회에 확고한 계층 격차가 있고 진정한 자수성가란 사실 불가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성진은 한강이 보이는 단독 주택에 입성하지만 그 집 인테리어에 참여하지 않아 밀실의 존재를 모르고 악단에서 지휘자로 일하지만 중요한 결정은 혜연과 수연이 내린다. 그의 말마따나 허수아비인 것이다. 와인보다 소주를 좋아하는 그의 천성은 집들이에서 가곡을 부르는 성악가들을 못 견디게 한다. 수연은 미주와 둘이 나누는 대화에서 슈베르트를 좋아하는 성진의 급 낮은 취향을 비웃는데, 성진이 슈베르트를 선호하는 이유는 그 슬픈 음악을 통해 서민 출신이라는 자신의 슬픈 현실을 잊을 수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천진난만한 수연에게는 슬픔이란 없어 보인다. 영화에서 그녀의 감정이 격해지는 순간은 자기 것을 잠시 빼앗겼을 때뿐이다.
어쨌든 성진은 자기 약혼녀가 사라졌는데 욕정을 참지 못하고 그새 다른 여자와 붙어먹고, 출신 성분이 서로 비슷함에(미주가 부모가 사고로 죽어서 고아처럼 자랐다고 말한다.) 동질감을 느꼈는지 그녀를 집으로 또 불러 그 짓 한다. 이렇게 보면 영화가 부자는 나쁘고 빈자는 착하다는 식의 뻔한 선악 구도로 전개되지 않아서 칭찬할 만하지만, 그리고 지휘자 성진이 첼리스트 미주를 유혹하는 것이 피지배층 내에서도 권력 관계가 발생함을 나타내어 영화의 함의를 풍성하게 하지만 결국 두 남녀의 정사가 미주의 진심이 아니라 그녀의 계략임이 드러나므로, 즉 수연을 향한 질투심과 배신감으로 인하여 미주가 억지로 성진과 관계를 가진 것이므로 두 사람의 그 아름다웠던 육체 결합이 실은 서로를 속고 속이는 피지배층의 암투였던 게 되어, 그것은 연대와 투쟁으로 부조리한 계급 체계를 타파하려는 소시민의 이상적 모습과 상충하므로, 그것이 현재 사회를 바라보는 감독의 날카로운 시각이지만 희망 없고 잔인한 현실을 상기시켜 조금 씁쓸한 맛을 남기는 게 사실이다. 그러니까 김대우 감독은 서민들이 기득권에게 예쁨 받고 조금이라도 그 근처에 올라가기 위해 서로 경쟁하고 있다 말한다는 것이다. 수연을 밀실에 가뒀음을 추궁하는 성진에게 미주는 이렇게 말한다. 정말로 꺼내고 싶은 마음이 있다면 당장 벽이라도 부숴야 하는 거 아니냐고. 너도 그 정도의 액션을 취하지 않는 걸 보니 수연이 밖으로 나왔을 때 자신에게 닥칠 불이익을 걱정하는 것 아니냐고 미주가 성진을 비꼰 것이다. 확실히 둘은 동지가 아니다. 마지막에 성진은 밀실의 존재를 모른 척하기로 작정한다. 과거 일본 731부대에서 근무했던 친일파의 아지트가 계속 전수되어 한 부잣집 딸의 성욕 해소 공간이 되었다. 수연은 자신에게 그 집을 양도하고 과거 첼로를 가르쳤던 스승에게 자신이 그녀의 모든 것을 가지게 됐다고 말한다. 이는 한국 사회의 부과 권력이 친일파로부터 그의 후손에게 전달됐고 현재의 기득권은 그들만의 비밀 공간에서 지배적 쾌락을 즐긴다는 걸 뜻한다. 성진은 지배층의 그런 은밀함과 기이함을 눈감기로 한 거고 미주는 천성이 그러한 탓인지 몰라도 지배층의 영원한 노예로 남은 것이다. 한 여자를 사이에 둔 둘의 해괴한 동거는, 기득권의 비리를 알고도 그들과 가까워져 신분 상승을 노리는 부류와 기득권의 노예가 되어 시스템에 복종하는 걸 행복으로 삼은 부류만 남은 작금의 현실을 비유한 것이다.
녹화 영상으로 사라졌던 수연처럼 녹음 파일로 나타난 미주. 이 출몰 방식은, 즉 성진과 대면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존재를 기계 장치에 기록해 간접적으로 표출하는 것은 수연과 미주가 비슷한 방법을 사용한 만큼 밀접한 관계임을 암시한다. 둘은 성진에게 자신을 온전히 드러낸 게 아니라 감출 것만 빼고 보여주고 싶은 것만 드러낸 것이다. 녹화와 녹음이 수신자(성진)에게는 일방적인 것임에 착안하자. 두 여자가 감춘 것은 당연히 그들이 레즈비언이고 오랫동안 파트너 관계를 유지했다는 사실이다. 수연이 성진과 결혼한다는 소식에 배신감을 느낀 미주는 잠깐 밀실에 들어간 수연에게 가짜 열쇠를 주어 그녀를 가두어버린다. 이중 거울로 집 안을 들여다볼 수연 앞에서 미주는 그간 수동적 역할만 했던 노예의 입장에서 벗어나 주인인 것처럼 능동적으로 성진과 관계한다. 이때까지는 박지현이 아주 매력적으로 나오지만 수연을 감금한 날이 많아질수록 뒤처리를 하지 못하고 나 몰라라 하면서 그녀의 매력은 곤두박질치고 미주라는 인물은 그냥 정사 신을 위해 소모되는 캐릭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성진이 그녀 집에 찾아갔을 때 애완동물처럼 키우고 있던 햄스터는 주인에게 사육당하길 바라는 그녀의 욕망을 상징한다. 미주는 수연과의 지배-복종 놀이가 영원하길 바란다. 그녀의 사감과 충동으로 시작된 감금 사건이 불장난처럼 심각해지고 수연의 엄마인 혜연과 사무장이 핸드폰 명의 제도를 이용해 수연의 번호로 성진과 미주에게 문자를 보내자 이 두 남녀는 멍청하게 보일 정도로 혼란에 빠진다. 신호 안 잡히는 밀실에 갇혀 있는데 수연이 어떻게 문자를 보낸 거지? 결국 두 사람은 밀실에 직접 들어가보기로 한다. 이 마지막 과정은, 혜연과 사무장이 가짜 문자를 보내고 성진과 미주가 거기에 속아 하릴없이 밀실을 확인하는 일, 이것은 하층의 저항이나 반란이나 혁명 같은 게 상층의 계략에 의해 쉽게 간파당하고, 그래서 현대 사회에서는 어리석어 보일 정도로 무모한 짓임을 나타낸다. 신분 상승에 매달리고 가진 자에게 지배 받기를 좋아하기 때문에 그들의 계급 전복은 필연적으로 실패할 수밖에 없다.
수연, 성진, 미주에 대해 말했다. 수연은 지배층이고 나머지 두 사람은 피지배층이라 했다. 근데 언급하지 않을 수 없는 지배층이 한 명 더 있다. 바로 수연의 엄마이자 성진의 장모인 혜연이다. 그녀는 영화에서 절대 부수적 인물이 아니다. 그냥 수연과 성진의 주변 인물이 아니라는 말이다. 나는 그녀가 이 영화에서 제일 높은 계급이라고 생각한다. 최종 보스. 수연의 재력도 사실 혜연에게서 비롯한 것이다. 수연과 성진의 신혼 보금자리를 누가 사주었는가. 혜연이다. 악단에서 최종 결정권자도 그녀이고, 결국 그녀의 재가가 떨어졌기 때문에 성진이 지휘자 자리에 앉을 수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녀의 권위에 대해 얘기해야 하는 까닭은 그녀가 성진과 맺고 있는 묘한 관계 때문이다. 그녀는 사위를, 그러니까 딸의 남편을 '자기'라고 부른다. 아니, 세상에 장모가 사위한테 자기라고 하는 경우가 어디 있는가. 미국이라면 '허니' '베이비'라고 부르는 것과 마찬가지인데. 이 둘의 관계는 스크린에 시종일관 성적 긴장감이 흐르게 한다. 장모가 사위를 바라보는 눈빛이 심상치 않다. 마지막 신에서 성진이 아침 일찍 일어나 골프 하러 나갈 때, 다음 주에 혜연과 골프 약속이 잡혀 있다는 사실이 언급되는데 이것은 그 둘의 관계가 정말 심상치 않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다. 조금 직접적인 단서도 있는데 바로 성진의 접시에 둔 초밥이다. 일식집에서 사무장을 끼고 회식하는 자리에서 혜연은 성진에게 먹으라고 초밥 한 덩이를 건넨다. 이게 왜 성적인 코드냐 하면 초밥은 덮밥과 비슷하고 혜연과 수연은 모녀이기에 성진 입장에서 '모녀 덮밥'을 연상케 하기 때문이다. 모녀 덮밥은 한 남자가 모녀 사이인 두 여자와 성적인 관계를 가지는 것을 뜻한다. 그러니까 성진은 모녀인 두 여자에게 신분 상승을 조건으로 하여 남편 역할과 애인 역할을 각각 해주는 것이다. 개인적으로 성진과 혜연의 이 관계가 은근하게 표현된 점이 좋았다.
계급의 뚜렷한 구분과 전복의 실패, 그리고 상류층에 조금이라도 가까워지려는 하층의 비굴한(본인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지만) 모습만으로 이 영화의 주제가 왼성되는 건 아니다. 마지막으로 짚고 넘어가야 할 게 있다. 김대우 감독이 현대 사회의 계층을 바라보는 시각은 앞으로 설명할 것으로 인해 그리 절망적이지 않다. 오히려 통쾌하다고 할 수 있다. 바로, 고양이 똥으로 만든 장식품을 보고 혜연이 했던 말을 통해 그것을 알 수 있다. "똥도 그렇게 멋지게 해 놓고 비싸게 파니까 뭐 그럴싸해 보이잖아. 실제 내용은 중요하지 않아. 사람들이 어떻게 보느냐지. 보는 게 본질이야. 그러니까 사람도 포장을 잘해야 된다는 거지." 이 말은, 그래서 보이는 겉모습이 중요하다는 게 아니라, 물론 혜연이 그런 뜻으로 말한 건 맞지만 이를 통해 감독이 전하는 진짜 뜻은 멋지고 비싸게 포장해도 결국 똥이라는 점에서 같다는 것이다. 보이는 것에 따라 평가가 달라도 똥이라는 본질은 동일하다. 부자든 빈자든, 지배층이든 피지배층이든, 와인이든 소주든, 고양이든 햄스터든 모두 똥이다. 그럴싸한 결혼 생활을 하지만 집 안 밀실에서 이상 성욕을 즐기는 수연, 똥. 성공을 향한 욕망 때문에 아내의 비정상적 관계를 묵인하는 성진, 똥. 복수심으로 주인과의 관계를 역전시켜 자유와 자각을 얻는 듯하지만 결국 주인에게 복종하는 미주, 똥. 자기 딸의 남편을 남자로 보고 은근슬쩍 기회를 보는 혜연, 역시 똥. 가진 자와 못 가진 자가 한통속으로 똥인 것이다. 그래서 영화의 궁극적 메시지가 카타르시스를 유발한다. 계급에 대한 소멸된 저항 의식이 언뜻 절망적이지만 그 계급 속의 인간들을 똥으로 처리해버리니 시원하게 한 방 먹인 느낌이 드는 것이다. 감독은 영화 프로그램에 나와 실제로 이렇게 말했다. "똥과 마에스트로 사이에 인간이 있다." 밀실 입구가 책장(교양 있는 척)으로 위장돼 있고 그 속에 갇혔던 수연이 나오자마자 먹고 싶다고 했던 음식이 김치찌개(서민 음식)인 걸 보면, 똥에 가깝게 본 게 확실하다.
내용에 대한 비평을 길게 했으니 형식에 대해 짧게 말하고 끝내겠다. 상업 영화로서 이 작품의 가장 큰 문제점은 재미를 살리지 못했다는 것이다. 독특한 소재와 수위 높은 정사 신 때문에 초반까지는 흥미가 있지만 송승헌과 박지현의 알몸 이후에 이렇다 할 장르적 전개가 없어서 중반부터 지루해진다. 성진이 수연과 미주의 관계를 의심하고 파헤지는 과정이 있긴 하지만 추리적 성찰이 거의 없고 사건이 쉽게 풀려버려 관객의 긴장과 호기심이 떨어진다. 노출 후에 대안이 있어야 하는데 재미를 줄 만한 요소가 아무것도 없다. 수연과 미주가 어떤 사이인지는 감독이 과거를 뜻하는 흑백 화면까지 동원해 친절히 알려준다. 사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노출은 홍보를 위한 전략일 뿐 추리와 스릴러가 이 작품의 장르였어야 함을 절감한다. 근데 그걸 살리지 못했으니 후반까지 재미를 주지 못함이 당연하다.
상식을 깨는 기발한 소재는 사람들의 흥미를 끌지만 자칫하면 작품이 우스꽝스러워질 수 있는 독이 된다. 독특하면 그만큼 진정성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 독특한 세계관에 엄청난 디테일을 부여해서 나름의 현실성을 갖춰야 한다는 말이다. 아이디어만 튀어서는 안 된다. 그것을 구축하는 논리가 촘촘해야 사람들이 진지하게 받아들인다. 내가 이런 얘기를 하는 이유는 이 영화가 세계관의 디테일과 서사의 개연성을 그럴싸하게 포장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연과 미주의 SM놀이는 얄팍하다. 그런 관계를 즐기는 사람들의 은어도 좀 나와야 하고 일반인이 잘 모르는 기괴한 도구도 등장해야 하는데 두 여자의 플레이는 너무 식상하다. 수갑과 열쇠. 그 정도로 뻔해서 이 영화의 독특한 세계관이 객기 넘치는 대학생의 졸업 작품처럼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마지막 장면에서 박지현이 냉장고까지 있는 밀실의 침대에 앉아 있을 때 나는 '이게 가능한 일이야? 쟤는 출근 안 해?'라는 생각과 함께 헛웃음이 나왔다. 세계관을 꼼꼼하게 구축하지 않은 탓이다. 그러니까 덕질에 비유하면 어설픈 것은 취미 수준에 그치지만, 그래서 사람들에게 별로 관심 받지 못하지만 진지한 것은 인정과 존경을 얻어 덕질 하는 자의 당당한 직업이 된다는 것이다.
화면 안에 담긴 '미술'은 그럴싸하나 그 화면의 틀인 화각이 예스럽다. 즉, 카메라 구도가 촌스럽다는 뜻이다. 나는 현대 영화에 무분별한 클로즈업이 많다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도 그에 해당한다. 사실 배우의 얼굴을 가까이 찍는 숏은 어느 영화에서나 50%로 줄여도 충분하다. 칼 드레이어의 <잔 다르크의 수난> 정도라면 과해도 상관없지만 요즘에는 그런 영화가 없으니까 하는 말이다. 클로즈업은 감독의 게으름이라고 생각한다. 일물일어란 말처럼 영화에도 그 상황에 가장 맞는 단 하나의 구도가 있다. 이 영화 <히든페이스>에 클로즈업이 많다는 것을 꼭 지적하는 게 아니다. 장면 안의 이미지에는 많은 신경을 썼지만 그 이미지를 담는 틀에는 소홀했다는 걸 꼬집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이 영화의 구도는 요즘스럽지 않다. 재연 드라마에서 볼 법한 화면들이 제법 튀어나온다. 근자에 본 영화 중 가장 완벽한 구도로 촬영된 작품을 조던 필의 <놉>으로 꼽는데 그것과 비교했을 때 역시 <히든페이스>의 화면이 객관적으로 촌스럽다. 영화도 다른 예술과 마찬가지로 과장하면 세련됨에서 멀어진다.
스토리와 이미지가 굉장히 한국적이라서 '히든페이스'란 제목이 부적절하게 느껴진다. 원작 외국 영화는 서양인이 등장하니까 그게 어울리는데 리메이크된 우리 영화는 '히든페이스'가 마치 6개월 정도 어학 연수를 간 한국인이 본래 이름을 버리고 영어 이름을 쓰는, 그런 위화감을 준다. 개인적으로 시간을 내어 생각해봤는데 '쇼윈도'가 가장 적절한 것 같다. 성진과 수연이 쇼윈도 부부고, 미주의 음란 행위가 밀실 안의 수연에게 보이는 쇼 같고, 신분 상승을 향한 하층의 욕망이 이제는 쇼윈도에 진열된 상품처럼 부끄럽지 않은 시대가 되었으니 말이다. '숨은 얼굴'이라고 직역되는 '히든페이스'는 얼굴이 욕망을 상징하기에 뜻은 그럴싸하나 한국인에게 와닿는 단어가 아니라서 그리 좋은 제목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근데 '쇼윈도'란 제목도 유행 지난 말처럼 느껴져서 차라리 원작과 같은 제목으로 하는 게, 그렇게 했던 게 최선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