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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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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가전연 Dec 17. 2024

서브스턴스

영화 끝나고 관객들 표정 진짜 미쳤음

1. 주제 의식

익숙한 주제와 노골적인 연출 때문에 이해하기 쉬운 영화다. 감독의 메시지는 예고편만 봐도 알 수 있다. 아니, 포스터만 봐도 짐작 간다. 절대적 미와 영원한 젊음에 집착하는 현대인과 그 사회에 대한 조롱과 비판 아니겠는가. 그리고 상승-하강, 젊음-늙음, 탄생-소멸을 반복하는 자연의 순리에 따르자는 것을 교훈으로 남기고 영화는 끝난다. 마지막에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얼굴 조각이 할리우드 명예의 거리의 자기 명판에 자리한 것은 영화의 주제를 압축적으로 보여준 장면이다. 엘리자수는 하늘의 별들이 떨어져 자신을 축복해주는 것을 보는데 이는 당연히 망상이고, 아무리 과거의 영광(젊음, 미모)을 되돌리려 해도 그것은 이미 하늘의 별(한때 잘나갔던 스타)에서 바닥의 명판(별 모양)이 되었기 때문에 불가능하다는 것을 나타낸다. 엘리자베스의 전성기는 오래전에 지났고 그녀의 업적은 조각으로 남겨져 있을 뿐이다. 그녀가 수정 구슬을 흔들어 금가루가 떨어지는 현상을 만들지만 중력을 받는 그것은 곧 바닥에 깔리고 구슬 안에는 그녀를 상징하는 인형만 남는다. 금가루의 영광이 계속되도록 하는 것은 자연의 법칙에 위배되어 불가한 것이다. 위에 있는 것은 반드시 아래로 향하고 억지로 한순간만 멈추게 할 수 없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란 이름은 그런 순리를 ― 그녀의 입장에서 보면 그런 순리를 거스르려고 하므로 '불가능한 욕망'을 ― 나타낸다. 엘리자베스(Elizabeth)는 할머니나 어머니 시대에 유행했던 이름이고 스파클(Sparkle)은 스타(연예인)처럼 반짝인다는 뜻이다. '옛날' 이름과 '반짝이는' 성질은 양립할 수 없다. 옛날 것은 그 빛을 다해 어둠에 머물고 ― 짙은 파랑의 옷, 밤의 야자수, 어두운 집 안, 7일간 누워 있는 밀실 ― 반짝이는 것은 생기 그 자체이므로 항상 밝음과 함께한다 ― 튀는 핑크색 옷, 태양 아래의 야자수, 거실에서 내려다보이는 베벌리힐스의 대낮, 촬영장의 눈부신 조명. 몬스트로 엘리자수의 얼굴은 착각 속에서 별들이 내리는 걸 보지만 그녀는 곧 녹아 핏물이 되고 첫 신에서 행인이 쏟은 음식물처럼 취급되어 청소차에 닦인다. 그렇게 세상에서 사라진다. 쓸쓸히 남은 별 모양의 명판은 그녀의 묘비나 마찬가지다. 반짝이는 별(스타)이었어도 자연의 순리에 따라 바닥의 문양이 된 것이다. YOU SWITCH EVERY SEVEN DAYS WITHOUT EXCEPTION. 서브스턴스의 이 설명 문구는 단순히 원본과 사본의 교체 주기를 나타낸 것뿐 아니라 거역할 수 없는 흥망성쇠의 이치를 암시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SWITCH, 교체된다. EXCEPTION, 누구나 예외 없이. 안정제 남용으로 인해 머리털이 빠지고 허리가 굽은 엘리자베스가 자신의 본래 모습이었던 ― 서브스턴스 사용 전의 자연스럽게 나이 들었던 때인 ― 거실의 사진을 보는 장면이 있다. 그때 관객에게 드는 생각은 '원래 모습도 예뻤는데 왜 이상한 약물에 손을 댔어.'라는 안타까움이다. 그리고 그 감정은 우리도 순리를 거스르는 욕심을 가지면 비참한 최후를 맞게 될 거라는 경고로 다가온다. 사족인데, 그래서 이 영화의 무서움은 연출상의 신체 변형(Body Horror) 이미지에서 기인하는 게 아니라 각본상의 광기 어린 인물 행동에서 기인한다. 현재의 젊음을 위해 원본의 몸을 죽일 정도로 노화시키는 수의 행동과 자멸할 것을 앎에도 사본의 젊은 몸을 포기하지 못하는 엘리자베스의 행동을 보면, 나는 스님처럼 금욕하며 살아야겠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더 사족인데, 그래서 칸 각본상을 받았나 보다. 처음에 나는 이 영화의 다양한 앵글과 화려한 미장센을 보고 감독상을 받았어야 했다고 생각했다. 근데 앞서 말했듯이 이 영화의 힘은 세련되고 기괴한 이미지가 아니라 경각심을 일깨우는 스토리에 있다. 왜 각본상이었는지 지금에서야 이해된다.


2. 색깔의 의미

첫 장면에 계란이 나온다. 노른자에 약물을 주사하자 새로운 노른자가 옆으로 나온다. 본래의 것보다 새로운 것이 싱싱해 보인다. 이것은 서브스턴스 약물의 효과를 간단명료하게 보여준 것이다. 유기체에 서브스턴스를 주입하면 세포 분열이 일어나 더 나은 유기체가 탄생한다.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수령할 때 입은 노란색 코트는 이 실험과 매우 연관 있다. 그 노란색이 곧 노른자라고 보면 된다. 노른자가 실험 대상이었으므로 노란색 옷을 입은 엘리자베스도 서브스턴스의 피험자라는 뜻이다.

하늘색은, 수가 토크 쇼와 전야제에서 입었던 옷의 그 색은 계란 실험의 바탕과 관련 있다. 노른자와 선명하게 대비되는 하늘색이 실험 공간의 바탕을 이루는데, 그러니까 하늘색 바탕 위에서 노른자의 복제 현상이 일어나는데 그러므로 그 색은 서브스턴스의 과정과 결과를 아우르는 개념이라고 볼 수 있다. 새로운 노른자가 하늘색 바탕 위에 모습을 드러냈으므로 그(새 노른자)에 해당하는 수(Sue)도 하늘색 옷을 입는다. 부작용으로 탄생한 몬스트로 엘리자수도 어쨌든 실험 결과이므로 전야제에 하늘색 드레스 차림으로 나타난다.

성적 매력은 핑크색과 파란색으로 표현된다. 엘리자베스는 파란색 운동복을 입고 구식의 세트장에서 에어로빅 방송을 찍는다. 할머니들이나 볼 것 같은 그 방송 화면에서 생기란 전혀 없다. 파란색 운동복은 칙칙하고 답답해 보인다. 젊음이 증발되어 중성적 몸뚱이만 남은 느낌이다. 방송국 대표 하비에게 해고 통보를 받을 때 엘리자베스는 또 남색 옷을 입었는데 정말 여성적 매력이라곤 눈곱만큼도 느껴지지 않을 정도로 어두워 보인다. 내가 사장이었어도 잘랐다. 반면에 수는 밝고 선명한 핑크색 운동복을 입고 첫 촬영에 임한다. 자신을 수라고 소개하는 격자 화면들 속의 핑크빛 입술은 그녀가 엘리자베스를 대체할, 아니 엘리자베스보다 훨씬 매력적인 여성임을 과시한다. 우리가 사는 현실의 자연에서도 분홍은 여성성을 상징하는 색이다. 암컷 플라밍고는 수컷에게 잘 보이기 위해 털에 침을 발라 분홍빛을 드러내고 여자아이들은 남자아이들과 다르게 본능적으로 분홍색 물건을 좋아한다. 할리우드의 명예의 거리에 있는 엘리자베스의 명판은 별 모양의 금테 속이 분홍색으로 채워져 있다. 그것은 엘리자베스의 전성기(젊음)를 기념한 것이므로 분홍색이어야 함이 맞다. 서브스턴스의 사용으로 수가 엘리자베스의 몸에서 태어날 때 그녀의 알몸은 경이적일 정도로 아름다운데 흰 살에 핑크빛이 묘하게 감돌고 영화 화면 자체에도 그런 느낌이 강하다. 감독이 일부러 분홍색을 강조한 느낌.

빨강은 이 영화에서 가장 많이 사용된 색이다. 대표적으로 방송국 세트장 복도가 빨간색이고 하비가 두서 번 빨간 양복을 입고 나온다. 외모를 물신화하고 젊음을 찬양하는 데 앞장서는 미디어(방송국과 그곳 대표인 하비)가 빨간색을 두른 것은 그 색이 과열된 외모지상주의를 상징함을 나타낸다. 더 예뻐지고 싶고 계속 사랑받고 싶은 그런 욕망은 엘리자베스의 물건에서도 드러난다. 빨간 자동차, 빨간 수화기(서브스턴스에 전화 걸 때 사용됨), 빨간 드레스(프레드를 만나러 준비할 때 입음). 재밌는 건 방송국의 남자 화장실과 이웃집 남성의 집 안 색도 빨강이라는 점이다(수가 현관문 열고 대화를 나눌 때 이웃집이 얼핏 들여다보인다). 건물의 화장실과 개인의 집 안은 매우 사적인 공간이다. 그 내밀한 곳이 빨간색으로 도배돼 있다는 건 남자들의 마음속에 젊고 예쁜 여자에 대한 욕망이 가득함을 의미한다.

마지막으로 살펴볼 색이 검정이다. 검은색은 죽음과 위험 같은 부정한 뜻을 지녔다. 엘리자베스는 서브스턴스의 중단을 신청하고 'TERMINATION'이란 글자가 쓰인 주사기를 받는다. 그 안에는 검은 액체가 담겨 있다. 그것을 수의 몸에 주사하면 그녀가 죽고 서브스턴스의 체험이 완전히 끝난다. 활성제가 형광 녹색이었다는 것과 비교해보면 검은색이 죽음을 뜻하는 게 확실히 이해된다. 근데 서브스턴스의 시작을 뜻하는, 광고 영상을 담은 USB도 검은색이라는 점이 매우 흥미롭다. 시작과 끝(TERMINATION)이 모두 부정의 뜻을 지닌 것이다. 이는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는, 인간의 탐욕으로 손을 대는 서브스턴스가 시작부터 삶을 망치는 것임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3. 프레드의 정체

나는 사실 이 얘기를 하고 싶어서 글을 빨리 쓴 것이다. 15일 밤에 영화 보고 와서 16일까지 생각했다가 지금 17일에 쓰고 있다. 원래는 시간 좀 두고 천천히 써서 일주일 후에 마치고 게재할 생각이었다. 근데 예고편으로 복습하다가 엄청난 걸 알아버려서 시간 지체 없이 작성하기로 마음먹은 것이다.

일단 잘 만든 영화에는 보물처럼 숨겨져 있는 디테일이 존재한다는 걸 알 필요가 있다. 이건 영화의 스타일에 따라 주제에 관련된 것일 때가 있고 스토리에 관련된 것일 때가 있다. 정말 자잘한 디테일은 모르고 넘어가도 영화 이해에 지장 없는 경우가 많다. <서브스턴스>, 이 영화에서 발견한 건 주제와는 크게 관련 없는 디테일이라서 그냥 지나쳐도 영화를 이해했다 함에 딴죽을 걸지 않지만, 알게 되는 순간 이거 모르고 넘어갔으면 정말 큰일 날 뻔했다는 놀라움과 안도감을 주어 ― 왜냐하면 스토리와 관련 있어서 영화 내용에서 궁금했던 점을 시원하게 밝혀주니까 ― 반드시 짚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영화 보고 집에 와서 복기했을 때, 엘리자베스의 코트 주머니에 USB를 넣은 남자 간호사의 행동이 우연이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있음을 느꼈다. 평소에 USB를 가지고 다니다가 서브스턴스에 적절한 대상이 환자로 왔을 때 그것을 몰래 건넨다는 것 아닌가. 남자 간호사의 입장에서 보면 그날 우연히 엘리자베스가 사고를 당해 병원에 온 것이고 척추를 만져보니 서브스턴스를 실행하기에 '이상적'이어서 평소에 가지고 다니던 USB를 그녀의 주머니에 넣었다는 게 된다. 근데 서브스턴스의 수령 장소에 있는 사물함을 보면 이용자의 번호가 두 개밖에 없다. 503, 엘리자베스의 것과 207, 그 남자 간호사의 것. 그러니까 평소에 USB를 가지고 다니던 그가 서브스턴스의 신규 이용자를 그때까지 한 명도 늘리지 못했다는 게 된다, 병원에서 엘리자베스를 발견하고 USB를 건넨 게 우연이라면. 그래, 그럴 수 있다고 치자. 영화적 허용은 당연히 가능한 거니까. 근데 우연히 차 사고를 당하고, 서브스턴스 이용자가 간호사로 근무하는 병원에 우연히 이송된 엘리자베스는 병원을 나오다 또 우연히 중학교 시절의 친구를 만난다. 우연이 세 번 겹친 것이다. 이걸 영화적 허용이라고 본다면 개연성의 부족으로 각본을 나무라는 게 맞다. 명심하자. 이 영화는 칸에서 각본상을 탄 작품이다.

오랜만에 조우한 중학교 친구 프레드는 반가워하며 엘리자베스에 대한 칭찬을 늘어놓는다. "여전히 세상에서 제일 예쁜 사람이구나." 한물간 스타여서 세간의 관심에서 잊힌 지 오래인데 듣기 민망할 정도로 오버한다. 동창이었고 가장 예뻤던 애였으니까, 그리고 서로 늙어가는 처지이니까 남자인 프레드가 여자인 엘리자베스에게 당연히 호감을 드러낸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래, 그렇다고 치자. 서브스턴스의 사용으로 잠깐 수로 살아보고 본래 몸으로 돌아온 엘리자베스가 또 수로 번갈아 살아갈지, 아니면 중단하고 엘리자베스로 쭉 살아갈지 고민하는 과정에서 그녀의 심리 상태를 극적으로 표현하고 그런 서사에 개연성을 부여하기 위해 감독이 프레드를 등장시킨 것이라고 보는 게, 일단 형식적으로는 그런 해석이 타당하니까 프레드와의 조우를 너무 우연적이라고 꼬집는 것은 삼갈 필요가 있다.

근데 이건 어떻게 할 것인가. 프레드는 나중에 한잔하자며 종이 쪽지에 자신의 번호를 적어 엘리자베스에게 건넨다(FRED 323-555-0102). 그리고 엘리자베스는 프레드와 마주치기 전에 주머니에서 USB를 발견하고 그것과 함께 있던 쪽지를 펼쳐 본다(IT CHANGED MY LIFE). 두 장면을 자세히 보면 알파벳 'D'의 필체가 비슷하다는 걸 알 수 있다(FRE'D', CHANGE'D'). 둘 다 활 모양처럼 생겼다. 그래서 지금 프레드가 서브스턴스의 개발자 혹은 판매자라고 말하는 것이냐고 물을 수 있다. 그렇다. 내 대답은 맞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의 중학교 친구 프레드가 엘리자베스와 비밀리에 통화한 서브스턴스 판매자다. 고작 필체 하나 가지고 그런 엉뚱한 주장을 하는 거냐고? 근거는 또 있다. 아, 미리 밝히는데 프레드는 서브스턴스의 판매자일 뿐 아니라 수와 하룻밤을 보낸 트로이이기도 하다. 왓? 아 유 크레이지? 늙은 프레드가 그 젊은 트로이라고? 그렇다. 워워, 미친놈이라고 욕해도 좋으니 천천히 내 얘기를 들어보시라.

필체를 통해 프레드가 서브스턴스의 판매자일 수 있다는 가설을 세웠다. 알파벳을 비슷하게 쓰는 사람은 한둘이 아님이 당연하니까 그걸로 아직 프레드가 판매자라고 단정할 수 없다. 그래서 다른 근거를 찾아봤는데 프레드와 서브스턴스의 두 전화번호에 눈길이 갔다. 프레드는 '323-555-0102'이고 서브스턴스는 '909-555-0199'이다. 중간 숫자 '555'가 같으니 프레드와 서브스턴스가 동일인이라고 주장하는 건 절대 아니다. 그건 지역 번호라서 같은 것일 확률이 높다. 엘리자베스에게 갑자기 차 사고가 난 것(물론 자신의 얼굴이 벗겨지는 옥외 광고를 보다가 실수한 탓도 있지만), 마침 서브스턴스의 이용자인 남자 간호사의 병원으로 이송된 것, 병원에서 나오자마자 옛 친구를 만난 것. 이것들이 영화 속의 불과 몇 시간 안에 일어난 일이라서 ― 작품성 있는 영화가 그러한 우연을 남발할 리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 혹시 모든 게 계획된 것이었고 그 서브스턴스의 판매자가 놀랍게도 프레드가 아니었을까 하고 의심한 건데, 극장에서 영화 한 번 보고 집에 오면 자세히 기억나지 않아 예고편이나 리뷰 영상을 복습하듯 시청하는데 수와 하룻밤을 보낸 트로이가 거실 창에 붙인 쪽지의 장면을 보는 순간 모든 의문이 확 풀렸다. 프레드가 서브스턴스의 판매자일 뿐 아니라 트로이이기도 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일단 트로이의 쪽지에는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오토바이를 두고 가니 잘 보관해 달라는 내용이 적혀 있다. 그의 이름과 번호도 달려 있다(TROY 323-555-0199). 눈치 빠른 사람이라면 지금 이것만 봐도 내 주장에 끄덕끄덕 동의하고 있을 것이다. 프레드의 번호 '323-555-0102', 서브스턴스의 번호 '909-555-0199', 트로이의 번호 '323-555-0199'. 서브스턴스를 사용하면 늙은 신체에서 젊은 개체가 나온다. 프레드(323)가 서브스턴스(0199)를 사용해 트로이(323-555-0199)로 탄생한 것이다. 그래서 트로이의 번호에는 프레드와 서브스턴스의 흔적이 공존하고 있다. "에이, 그거야말로 우연이지."라고 하면서 동의하지 않을 사람도 있겠다. 근데 영화를 많이 본 사람이라면 수많은 작품에 이런 식의 디테일이 숨어 있고 그것을 통해 감독의 또 다른 의도가 풀이된다는 사실을 알 것이다.

내가 제시할 근거는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서브스턴스의 로고는 검은 바탕에 노란 반달이 두 개 있는 것이다. 검정과 노랑의 조합. 프레드는 엘리자베스와 작별할 때 도로에 정차돼 있는 택시로 향하는데 그 차는 전신이 검은색이고 지붕에 노란 방범등을, 문에 노란 줄무늬를 달고 있다. 트로이는 검정 헬멧과 검정 가죽 옷의 차림으로 검정 오토바이를 탄다. 그가 수에게 남긴 쪽지는 노란색이다. 이 검정과 노랑의 조합들은 세 존재가 동일인임을 암시한다.

세상에서 가장 예쁘다고 말해준 프레드를 통해 자존감을 회복하고 싶었던 엘리자베스는 그의 번호가 적힌 쪽지를 찾아내 그에게 전화를 건다. 전화 받은 프레드는 연예인인 엘리자베스가 진짜로 연락을 줘서 감격스러운 마음에 대답을 빠르게 하지 못한다. 핸드폰 너머의 침묵이 불편한 엘리자베스가 대답을 재촉하자 프레드가 실제로 그런 이유를 밝힌다. 근데 이건 반은 참이고 반은 거짓이다. 연예인인 엘리자베스가 평범한 옛 친구인 자신(프레드)한테 연락해서 그가 놀란 것도 맞지만 사실 그가 놀라서 대답을 늦게 한 까닭은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의 사용으로 젊은 인생을 만끽하고 있어서 그냥 옛 친구인 줄로만 아는 ― 사실은 서브스턴스의 판매자라서 다른 통화로 몇 번 대화를 나눈 ― 자기한테 진짜로 연락할 것이라고 그도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독은 프레드의 늦은 대답을 통해 서브스턴스의 판매자 또한 대답이 늦다는 것을 상기시켜 그 둘이 동일인임을 넌지시 알린다.

프레드가 검은 안경을 올려 쓰며 엘리자베스를 반갑게 대한 것, 트로이가 검은 헬멧 창을 내리고 엘리자베스에게 신경질을 낸 것. 프레드의 문자 속 이모티콘(I know a big star like you likes to make an entrance :)), 트로이가 쪽지에 쓴 이모티콘(Too drunk to take the bike home, keep an eye on her! :-)).

지금까지 말한 사실을 통해 영화의 이야기를 다시 구성해보면, 프레드가 연구를 통해 서브스턴스라는 약물을 개발하고(이건 확실치 않지만 내가 그렇게 생각하는 이유는 그가 매드 사이언티스트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그걸 한 노인(207)에게 공짜로 체험하게 해주고 그 조건으로 엘리자베스의 주머니에 USB를 넣으라는 임무를 맡긴다. 서브스턴스 사용에 엘리자베스가 적합한지 검사해봐야 하기 때문에 프레드는 교통 사고를 사주하고 계획대로 그녀를 병원으로 이동시킨다. 임무를 받은 남자 간호사(207)가 엘리자베스의 척추를 살피고 그녀의 주머니에 USB를 몰래 넣는다. 집에 와 USB 속 영상을 본 엘리자베스는 고민하다 서브스턴스 번호로 전화를 건다. 프레드가 받고 자신이 아닌 척해야 하기에 퉁명스러운 말투로 엘리자베스에게 서브스턴스를 수령할 주소를 알려준다. 엘리자베스는 주소지로 가 상자를 받고 그 속에 있는 서브스턴스 구성품을 통해 수로 재탄생한다. 여러 실험 대상을 통해 서브스턴스의 안전성을 확인한 프레드도 그 약물을 스스로 주사해 젊고 잘생긴 트로이로 살아가고 우연인지 의도인지 모르겠지만 수를 만나 그녀와 하룻밤을 보낸다. 그러니까 프레드와 엘리자베스가 서로 다른 몸으로 섹스를 즐긴 것이다. 그래서 프레드는 엘리자베스가 데이트 약속을 파투했을 때 기분 나쁘지 않았을 것이다.


4. 기타

엘리자베스(Elizabeth)란 이름은 길고 예스럽다. 새로 태어난 수(Sue)는 쇼츠와 릴스의 시대답게 짧은 이름을 쓴다. 방송국 대표 하비는 비서의 이름을 듣고 너무 길다며 짧게 부른다(Cindy).

수(SUE)는 풀이하면 엘리자베스의 서브스턴스 번호인 503을 의미한다. S는 5와, U는 0과, E는 3과 닮았다. 그렇다면 503은 무슨 뜻일까? 바로 엘리자베스(중년 여성)와 수(젊은 여성)의 여성적 활동 기한을 뜻한다. 엘리자베스는 50살에 에어로빅 방송에서 권고 사직을 당한다. 그녀를 대신할 스타를 찾는 광고에서는 18세에서 30세까지로 나이 제한을 두고 있다. 50살의 제한을 30살의 제한으로 만들어주는 게 서브스턴스인 것이다. 50과 03(→30)의 조합. 그럼 서브스턴스의 다른 고객이었던 207은 무엇을 의미할까? 그는 남자였으므로 그 번호는 남자의 사회 활동 기간을 뜻한다. 20에 시작되고 70세에 끝난다. 20과 07(→70)의 조합.

엘리자베스가 아침에 우편물을 받을 때 주방 벽 너머로, 거실에서 청소하고 있는 뚱뚱한 가정부가 보인다. 둘 사이에 놓인 벽으로 인해 마르고 뚱뚱한 몸매와 쉬고 일하는 신분이 각각 대비되는데, 이러한 입장 차이는 젊고 예쁜 수의 탄생으로 인해 재편되는 ― 수가 파티로 어질러 놓은 것을 엘리자베스가 청소하는 ― 모습을 보여준다.

영화 처음에 엘리자베스는 에어로빅 촬영을 마치고, 여자 화장실이 고장 났기 때문에 남자 화장실로 들어간다. 얼마 지나지 않아 하비가 들어오고 그가 오줌 싸며 통화하는 말을 엘리자베스가 엿듣는데, 화장실은 단순한 공간이 아니라 사람의 속엣것(속의 것)이 배출되는 은밀한 공간, 즉 마음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남자 화장실에 들어간 엘리자베스는 사실 남자들의 속마음에 들어가서 그들이 자신을 진짜로 어떻게 생각하는지 엿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제목 <서브스턴스>의 의미. 'substance'의 뜻. 물질, 실체, 본질. 사람을 '물질'로 보고 평가하는 외모지상주의에 대한 비판. 그리고 젊었다 늙어가는 순리가 인생의 '본질'임을 주장하는 것. REMEMBER YOU ARE ONE. 젊음과 늙음은 하나다. 둘은 가를 수 없다. 영원히 젊을 수 없고 늙으면 곧 죽어 다른 생명으로 태어난다. 엘리자베스(늙음)는 완전히 수(젊음)가 될 수 없고 수는 엘리자베스의 노화가 다하면 자신도 죽는다. 둘의 결투에서 엘리자베스가 죽고 수가 전야제에 도착하자 그녀의 이빨이 빠지는데 이는 영화 초반에 나오는 엘리자베스의 치약 광고판을 떠올리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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