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작이 더 재밌음
리메이크된 한국 작품과 스페인어의 원작 중 한국 것이 낫다고 하는 의견이 많은데 내 생각은 다르다. 원작이 개작보다 조금 뛰어나다. 예술성으로 따지면 개작에 손을 들어줄 수 있지만 그것의 예술성이라고 해봤자 사회 구조에 대한 감독의 인식을 서사에 녹여 낸 점, 그리고 공들여 찍은 화면의 미장센 정도이니, 또한 그것들이 원작에 비해 월등히 뛰어난 것도 아니므로 오락성을 기준으로 하여 원작에 더 후한 평가를 줄 수밖에 없다. 개작은 장르의 재미가 부족한데 원작은 적어도 밀실 안에 있는 자와 밖에 있는 자 사이의 긴장과 음모가 있다. 이 영화의 장르가 스릴러라는 것을 기억하자. 한국 작품 또한 스릴러라고 당당하게 소개되고 있다.
혹자는 노출에 비중을 두어 개작을 더 좋아할 수도 있다. 확실히, 두 작품을 보고 나면 원작의 노출이 밋밋하다는 걸 느낀다. 송승헌과 박지현의 짐승 같은 정사에 비하면 외국 배우들의 그것은 그저 알몸의 소꿉놀이처럼 보인다. 개작의 한국 감독이 원작을 보고 노출에 굉장한 아쉬움을 느꼈으리라 추측된다. 여배우의 몸도 박지현이 두 외국인(벨렌과 파비아나)보다 아름답다. 하지만 이들 작품은 에로가 아니라 스릴러이므로 얼마나 야한지가 고평의 기준이 될 수 없다. 밀실이라는 소재를 두고 어느 쪽이 관객에게 긴장감과 호기심을 더 일으켰는지가 우열의 절대적 잣대라고 할 수 있겠다.
결국 밀실 안팎의 대결을 극적으로 전개하는 게 재미의 관건. 원작은 남자(아드리안) 모르게 두 여자가 대결을 끝까지 끌고 가지만 개작은 남자(송승헌)가 밀실 쪽 여자(조여정)의 존재를 알게 되고 밀실 밖의 여자(박지현)가 대결을 포기함으로써, 그리고 데우스엑스마키나처럼 외부 요소의 개입(혜연과 사무장이 수연(조여정)의 번호로 다른 핸드폰을 개통해 그녀인 척 문자를 보낸 것)으로 밀실이 개방되면서 그 안팎의 대결이, 그것이 주는 긴장감과 호기심이 허무하게 사라져버린다. 또, 원작은 통쾌하게 밀실 안의 여자가 밖의 여자를 안으로 넣어 가둠으로써 복수의 쾌감을 일으키는데 ― 그런 역전 관계로 속이 좀 후련해지는 기분이 있는데 ― 개작도 안의 여자가 밖의 여자를 안에 넣고 가두지만 쇼킹하게도 그 역전 관계가 밖의 여자가 바라던 바였으므로 복수가 아닌 화해의 감정으로 귀결되어 통쾌함은 없고 오히려 우스꽝스러움이 남는다. 안에 있던 여자가 밖으로 나와 남자에게 김치찌개를 시켜 달라고 하고 밖에 있던 여자와 안에서 사랑을 즐긴다? 물론 그럴 만한 사연이 영화 내에 존재하지만 원작의 결말과 비교해보면 상식적으로 엉뚱해 보이는 게 사실이다.
개작보다 못한, 원작의 단점을 꼽으라면 영화를 좀 대충 찍었다는 것. 그런 허술함과 무신경함이 초반부터 화면에 드러난다.
개작은 남자(송승헌)에게 성별적 우위를 부여하지 않는다. 페미니즘 영화이기 때문이 아니라 인물 간에 자본으로 구분되는 계급주의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작은, 세상에 대한 감독의 인식이 녹아 있다고 언급했듯이 꽤나 사회파적이다. 서민 출신인 성진(송승헌)은 부자인 수연(조여정)에게 남성성을 과시하지 않는다. 과시하지 못한다. 아예 할 수 없다. 결혼을 통해 신분 상승을 이룩해도 그건 동성애자 수연의 형식적 삶을 위한 수단이므로 성진은 그녀와 대등하지 않고 남자로서 우월적 매력도 뽐내지 못한다. 자본의 힘과 그로 인한 부조리를 역설하듯이 영화는 수연을 레즈비언으로 설정해버려 성진이 조금이라도 남자로 인정받을 수 있는 기회를 원천적으로 차단한다. 영화에서 유일하게 남자라고 볼 수 있는 성진은 그래서 성적으로 사랑받지 못하고(미주(박지현)와의 섹스는 그녀의 계략에 성진이 이용당한 것이므로 정상적인 관계라 할 수 없다.) 악단에서 지휘자로 일하지만 수연이 꽂아준 허수아비에 불과하므로 일적으로도 존중받지 못한다.
반면에 원작의 남자 아드리안은, 이 영화가 (굳이 분류하자면) 사회파보다 자연주의에 가까우므로 자본적 계급에 의함이 아니라 그 자신이 매력적인 남자로 설정돼 있음으로 일적인 것과 성적인 것에서 모두 인정 받는다. 그는 예쁜 여자 친구(벨렌)가 있고 그녀가 떠난 사이 며칠 만에 다른 여자(파비아나)를 사귀어 동거를 시작한다. 이게 끝이 아니다. 여자가 한 명 더 있다. 같은 악단의 연주자가 그의 세컨드다. 총 세 여자와 관계가 있는 것이다. 물론 그가 남성적 우월함에 취해 도덕을 무시하는 난봉꾼인 것은 아니다. 벨렌이 떠났을 때 그는 충분히 슬퍼한다. 술 마시며 눈물 흘리고 그녀를 찾기 위해 경찰의 도움을 구한다. 하지만 그건 잠시일 뿐이고 곧 새 여자가 생긴다. 세컨드인 베로니카와의 관계는 그럼에도 지속된다. 일적인 것에서는 어떠한가? 그는 지휘자로 채용되어 스페인에서 콜롬비아로 이주하고 새로운 악단에서 잘나간다. 한국 작품의 성진과 매우 비교되게 그의 지휘는 활력 있다. 벨렌과 파비아나가 각각 따로 연주회에 참석해 그의 실력을 감상하는데 두 여자의 눈빛은 사랑과 존경으로 가득 차 있다. 아우디 끌고 교외의 넓은 집에 사는 그는 진짜 능력남인 것이다.
영화는 이렇게 남자에게 성별적 우위를 부여하고 그 주변의 여자들을 어리석음에 가까운 수동적(달리 말하면 열등한) 인물로 묘사한다. 지금부터 말하는 것들이 영화의 주제를 본격적으로 파헤치는 과정이므로 여성 혐오적 시각으로 비칠 수 있음을 이해하기 바란다. 우선, 아드리안의 첫 번째 여자 벨렌은 그녀가 스페인에 있을 때만 하더라도 아드리안과 대등한 관계였다. 둘 사이의 이야기가 시작될 때(영화의 3분의 1이 지난 시점) 자전거로 앞서가며 잘 따라오고 있느냐며 묻는 쪽이 그녀였고 요리를 대접받는 쪽도 그녀였다(믿기 힘든, 아드리안이 앞치마를 두른 모습). 둘의 수평적 관계는 아드리안이 지휘자로 채용되었음을 알리고 자신과 함께 콜롬비아로 떠날 것을 제안한 뒤 벨렌이 거기에 고민하면서부터 기울기 시작한다. 눈썹 화장을 고친 그녀는 따라가면 당신이 날 돌봐줄 것이냐는, 지극히 수동적인 입장의 발언으로 아드리안의 제안에 동의함을 나타낸다. 그때 아드리안은 침대에 앉아 펜을 든 채 악보를 보고 있다. 외모 치장을 위해 벨렌이 들었던 눈썹 펜슬. 지휘자 공부를 위해 아드리안이 들었던 펜. 둘의 관계에서 앞으로 갑이 될 쪽이 아드리안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벨렌은 아드리안에게 잘 보이기 위한 여자가 될 것이고, 아드리안은 성공을 위해 열심히 일하는 남자가 될 것이다.
베로니카의 존재 때문에 사랑을 의심하는 벨렌은 남자 친구를 시험하기 위해, 집주인 에마가 비밀리에 알려준 밀실에 들어가 며칠간 잠적하기로 결정한다. 그곳에서 집 안을 훔쳐볼 수 있기에, 자신이 떠났을 때 아드리안이 어떻게 행동하는지 관찰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영화가 여자들의 성급하고 부주의한 특성을 조롱하는 것처럼 그녀는 밀실 열쇠를 밖에 떨어뜨려서 안에 가지고 들어오지 못한다. 무슨 이런 변이! 문을 열 수 있는 유일한 도구인 열쇠가 없으니 그녀는 밖에서 누가 열어주지 않는 한 밀실에서 벗어날 수 없다. 가혹한 사실은 밀실의 존재를 (에마를 제외하면) 그녀밖에 모른다는 것. 그러니까 그녀는 평생 갇히게 된 것이나 다름없다. 사랑 테스트를 위한 장난으로 시작됐지만 스스로를 죽음에 몰아넣은 이 일은 밀실의 본래 주인이었던 한 나치 장교의 사연과 자연스럽게 비교되어 벨렌의, 즉 그녀가 대변하는 '여성'의 어리석음을 더 부각한다. 에마의 남편이었던 그 나치 장교는 독일에서 남미(콜롬비아)로 도망친 후, 끝까지 색출당하지 않기 위해 밀실 있는 집을 짓고 거기서 죽을 때까지 지냈다. 잡혀가는 게 두려워서 만든 공간이지만, 에마의 말에 따르면 그는 곧 거기에 푹 빠졌고 자신이 평화롭게 죽을 수 있는 장소라고 생각했다. 이 영화가 나치를 옹호하는 건 절대 아니지만 어쨌든 그는 밀실을 통해 자신의 계획을 완수한 것이다. 밀실은 그에게 바라던 죽음을 ― 나치 잔당임을 들키지 않고 은둔의 자유 속에서 조용히 사라지는 것을 ― 선사한 긍정의 공간이다. 반면에 벨렌에게 밀실은 원치 않는 죽음을 ― 자신의 떠남에 아드리안이 어떤 반응을 보일지만 확인하고 밀실을 나갈 생각이었는데 열쇠를 밖에 두고 와서 본의 아니게 남자 친구를 영영 떠나게 되는 것을 ― 선사할 뻔한 부정의 공간이다. 세상으로부터 도망치고 자신의 치부를 숨기려고 했던 남자는 그 계획에 성공했다. 애인의 마음이 궁금해 그의 진심을 들여다보고 싶었던 여자는 그 계획에 실패했다(왜냐하면 벨렌이 정말 떠난 줄 안 아드리안은 파비아나를 곧 집에 데려오기 때문이다.). 이 성공과 실패의 차이는 남녀의 능력과 수준이 그만큼 다르다는 것을 느끼도록 영화에서 조장되고, 연인 사이에 눈감아줘야 할 것(아드리안이 베로니카와 바람피운 것)을 굳이 들추려고 하다가 자신이 화를 입은 벨렌을 어리석은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고, 그래서 사람은 누구나 타인에게 의지하고 종속되면("따라가면 당신이 날 돌봐줄 거야?") 안 된다는 싱거운 교훈을 끝까지 여성 비하적 느낌으로 전달한다. 가볍게 만난 것뿐이라던 아드리안의 말처럼 그는 정말로 베로니카에게 쿨한 이별 통보를 하고 둘의 관계를 정리한다. 베로니카도 깔끔하게 이별을 받아들인다. 그렇기 때문에 벨렌의 밀실 테스트는 더 어처구니없던 행동으로 전락한다. 아드리안을 믿고 그냥 모른 척했다면 그가 알아서 정리하고 둘이 전처럼 행복하게 살았을 텐데 괜한 꾀를 부려 연인의 마음을 시험했다가 고통과 이별을 자초하게 된 것이다.
파비아나도 마찬가지다. 그녀도 아드리안이 바람피우는 사진을 보고 정신이 나가 ― 엄밀히 말하면 밀실에 갇혀 있는 벨렌을 일부러 꺼내주지 않는, 그런 불법적 행위를 감행할 만큼 자신이 아드리안에게 유일한 여자가 아니었음을 깨달아서 ― 벨렌을 구출하기 위해 밀실을 열고 들어가는데 벨렌 입장에서는 그녀가 아드리안의 바람피움 때문에 충격 받은 상태인지 모르기 때문에, 즉 같은 여자로서 자신을 도우기 위해 밀실에 들어온 건지, 아니면 여전히 자신을 감금하기 위해 상태만 확인하러 들어온 건지 모르기 때문에 일단 전사(파비아나가 일부러 문을 열어주지 않은 것)에 의거해서 그녀를 공격할 수밖에 없었다. 파비아나는 제 발로 들어간 호랑이 굴에 갇히게 되고 아드리안 따위의 남자에게 집착했던 자신을 후회했을 것이다. 그녀는 첫째로 아드리안에 대한 소유욕 때문에 밀실에 갇힌 벨렌을 저버렸던 걸 반성했을 것이고, 둘째로 고작 남자 하나 바람피운 것 가지고 정신력이 흔들렸던 걸 자책했을 것이다.
영화는 파비아나가 결국 그런 꼴을 당하게 될 전조를 여성 비하적 시각으로 몇 개 보여준다. 그녀의 인생이 소개되지 않지만 몇몇 언행을 통해 그녀가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아왔는지 가늠할 수 있다. 아드리안이 벨렌에게 이별 통보를 받고 술집에 와 울면서 한잔할 때 파비아나는 남자가 울면 보기 싫다고 동료에게 말한다. 그녀는 우는 남자, 즉 약한 남자를 싫어하는 전형적인 여자의 모습을 보여준다. 그리고 아드리안의 넓은 집에서 혼자 있을 때 침대에서 아이처럼 방방 뛰고, 세면대의 이상 현상(벨렌이 수도관을 꽝꽝 쳐서 수면에 진동이 일어난 것)에 대고 "아빠?"라고 물은 것은 그녀가 아빠를 일찍 여의어 부의 충분한 사랑을 못 받고 자라 성인이 된 지금도 아이 같은 정신 상태임을 암시한다. 그녀가 웨이트리스라는 저소득 직업을 가지고 있고 돈 많은 남자를 낚는 게 꿈이었다는(그녀를 짝사랑하는 형사가 한 말) 사실은 아빠의 부재가 그녀를 설명하는 데 중요한 근거가 됨을 나타낸다. 또한 그녀는 귀신 같은 걸 믿는 순진한 면과(화장실에서 이상 현상을 느끼고 그걸 아드리안에게 유령이라고 표현하는데 남자인 아드리안은 여자들의 미신적 측면을 비웃듯이 실소로 넘긴다.) 벨렌의 표현에 따르면 둔한("그래, 생각했던 것만큼 둔하진 않네.") 면을 가지고 있는데 그런 덜떨어진 특징 또한 그녀의 불행한 결말과 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정리하면, 파비아나는 아빠의 부재 때문에 정신이 덜 성숙해서 자신이 의지할 수 있는 돈 많고 듬직한 남자를 원하는데, 그러하므로 아드리안 같은 남자에게 끌려 사랑에 목매다가 벨렌이 같은 이유로 밀실에 갇혔듯이 그녀도 동일한 결말을 맞게 되었다는 것이다. 여자들아, 남자에게 의존하지 말고 독립적인 인간이 돼라. 두 여자가 겪은 똑같은 불행은 ― 번갈아 밀실에 갇힌 것은 ― 그들이 베로니카처럼 사랑에 쿨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닐까.
콜롬비아에서 스페인으로 돌아온 벨렌은 해변에 앉아 황혼을 본다. 그녀가 아드리안과 함께 등장했을 때는 그보다 이른 시간이었는데 진짜 이별을 하고 돌아왔을 때는 그들의 사랑이 끝났음을 상징하듯이 해가 지고 있다. 벨렌의 손에서 빠져나가는 모래는 굳건한 사랑의 약속도 언제든 부서져 흩날릴 수 있다는 걸 뜻한다. 그녀에게 아드리안과의 사랑은 정말 그런 것이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