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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더 퍼지

좋은 아이디어를 살리지 못한 영화

by 심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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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리 영화가 막장이라 해도 '퍼지'를 옹호할 순 없다. 세상에 그런 주제 의식을 가진 작품은 나올 수가 없다. 특별한 교육을 받지 않아도 인류는 살인을 위시한 각종 범죄가 나쁘다는 걸 선천적으로 안다. 실정법 이전에 자연법이 존재할 수 있는 이유다. 인간은 선악의 판단과 그에 따른 감정을 이미 장착하고 태어나는 것이다. 어떤 문학이 우생학을 거론하며 인종 차별의 당연함을 주장한다? 그럼 뭇매를 맞고, 아니 아예 관심조차 줄 필요 없다는 듯이 무시를 당하고 그 작가는 스스로 절필해야 한다. 어떤 영화가 지구에 사람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전쟁을 통한 인구 감축을 표방한다면 그 결과 역시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어느 나라에 살든 어느 시대에 살든 기본적으로 공통된 조리를 가지고 있어서 보편적 선(善)의 선(線)을 넘는 것은 생산되지 않고 소비되지도 않는다. 도덕과 윤리에 어긋나는 불법 자료가 다크웹에서 유통되고 그런 행위를 범죄로 처벌하는 것도 선과 관련된 측면이라고 볼 수 있다. 그래서 이 영화 <더 퍼지>는 절대 선을 넘지 않는다. 1년 중 하루 12시간 동안 범죄를 저질러도 되는 허구의 미국 사회를 보여주지만 등장인물을 통해 드러내는 주제 의식은, 그런 허구의 사회가 실제에서 모방되면 안 된다는 것, 그리고 그런 허구가 실제를 바탕으로 하여 극화된 것이니 영화 보는 우리가 현실을 돌아봐야 한다는 것이다.

근데 이 건전한 메시지는 범죄를 허용하는 세상이라는 흥미로운 설정과 잘 맞물리지만 영화 자체의 스토리 전개가 빈약해서 그 진가가 드러나지 않는다. 그러니까 관객의 흥미를 끄는 아이디어와 그것을 무난하게 포장해줄 주제 의식이 있는데 이야기를 잘 풀지 못해서 후진 영화가 되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각본이 쓋(shit)이다. 좋은 아이디어로 이 정도 이야기밖에 보여주지 못한 영화는 내 생애 이게 제일이다. 영화가 끝나갈 즈음 '아, 이건 아니잖아.'라는 생각이 여러 번 들었다. 유튜브에서 활동하는 한 평론가의 추천으로 보게 된 건데 나는 다른 사람에게 권하지 못할 것 같다. 미국 공포 영화에 단골로 등장하는 발암 캐릭터가 여기도 있는데 보면 정말 죽이고 싶을 정도로 밉상이다. 그놈 때문에 안 그래도 평이 안 좋은 영화가 더 혹평을 받는 것 같다.


일단 등장인물을 통해 플롯의 구조를 파악하자. 프리퀄 <더 퍼스트 퍼지>처럼 이 영화는 '퍼지'에 대한 입장에 따라 인물들이 긍정과 부정의 개념으로 나뉘고 전자의 세력이 어쨌든 후자의 세력을 이김으로써 퍼지를 비판하는 논리를 형성한다. 당연히 퍼지에 반대하거나 대항하는 쪽이 긍정이고 그에 찬성하거나 참여하는 쪽이 부정이다. 장소가 한정적이고 스토리가 단순하다 보니 칼로 무 자르는 것처럼 양쪽이 확실히 나뉜다. 이 영화가 만약 줄거리가 복잡하고 그에 따라 장소도 다양했다면 높은 확률로 인물들이 입체적이었을 것이고 쉽게 선악으로 구분되지 않았을 것이다. 저예산 영화임을 티 내듯이 주요 인물들이 집이라는 공간에서만 활동하고 다른 인물들도 그곳을 중심으로 하여 움직인다. 전국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 있다는 설정의 이야기인데 영화의 공간이 집과 그 주변뿐이다. 다른 장소는 단 하나도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퍼지의 긴장과 공포를 실감하는 데 한계가 있다. (<더 퍼스트 퍼지>에서는 밖에 나가 '퍼지'를 하는 인물들이 나온다.) 그러나 한 가족을 내세워 그들이 하룻밤을 어떻게 보내는지 보여주는 게 이 영화의 목적이므로, 그리고 집이라는 폐쇄적 공간이 주는 심리적 스릴 또한 존재하므로 그런 구조적 한계는 별문제가 되지 않는다. 요는 집, 그 일정한 공간을 기점으로 하여 내부와 외부가 나뉘고 긍정과 부정의 개념이 쉽게 도출된다는 것이다. 외부에서 집으로 침입하는 자는 부정이고 내부에서 집을 지키는 자는 긍정이다. 앞서 퍼지에 대항하는 쪽이 긍정이고 참여하는 쪽이 부정이라고 말했다. 그럼 집 밖의 인물은 퍼지를 하고 집 안의 인물은 퍼지를 안 한다는 게 된다. 샌딘 가족은 집에 보안 장비까지 설치하고 하룻밤을 안전하게 보내려고 하므로 당연히 긍정의 개념에 속한다. 퍼지 제도에 찬성하는 파란 꽃을 집 앞에 두었고 아들 찰리와의 대화에서 아빠 제임스가 퍼지를 옹호하는데(그는 꼭 필요하다면 자신도 퍼지에 가담하겠다고 말한다.) 그럼 부정의 개념에 속하는 것 아니냐고 물을 수 있겠다. 엄밀히 말하면 샌딘 가족은 부정(퍼지 참여)은 절대 아니지만 그렇다고 완벽한 긍정(퍼지 반대)도 아니다. 정확하게, 애매한 긍정이었다가 확실한 긍정으로 변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겠다. 처음에는 퍼지 제도에 찬성하지만 참여는 안 하는 중립인데 외부인의 침입 사건을 겪으면서 ― 퍼지의 영향력이 보안 장치를 뚫고 집 안 가족을 위협하자 역(逆)퍼지를 실행하는데 그로부터 ― 샌딘 가족은 퍼지에 반대하고 대항하는 완전한 긍정이 된다. 마지막에 흑인 노숙자의 도움으로 이웃을 제압한 매리가 그들을 처단하지 않고 퍼지 종료 시간까지 소강상태를 유지한 것은 퍼지에 대척함을 뜻하는 결정적 행위다.

주인공 부부, 제임스와 매리에 대해 말하자면 그들은 중산층에서 상류층으로 입성한, 미국인의 아메리칸드림을 대표하는 부류다. 제임스는 퍼지 날 밤에 보너스를 받기 위해 집에서 잔업을 하고 매리는 상류층 부인들이 외모에 집착하듯이 러닝 머신 위를 달린다. 찰리의 장난감 티미가 낮은 시야에서, 집에서도 높은 구두를 신은 매리의 뒷모습을 바라보는 장면은 그녀가 어떤 사람인지, 즉 그녀의 캐릭터가 은근히 드러나는 부분이다. 이 부부는 신분 상승을 대변하는 인물답게 속물근성과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건 특정 계층에 대한 비꼼이 아니라 극 중 인물에 그만큼 현실성을 부여하고 (영화 밖의 인간은 너무 나쁘지도 않고 정말 착하지도 않다.) 아메리칸드림을 꿈꾸는 우리가 그들과 다르지 않음을 나타내는 장면이다. 제임스는 처자식이 있는 중년 남자답게 성공에 매우 집착하고(그런 아빠의 모습을 사춘기 딸 조이는 혐오한다.) 매리는 흑인 노숙자를 결박해 집 밖으로 내보내는 것에 양심의 가책을 느끼고 관두지만 퍼지 젊은이들이 집 안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두려움을 느껴 곧바로 제임스에게 자신이 틀렸음을 고백한다("Maybe you were right."). 조이는 그 나이의 여학생답게 부모를 귀찮아하고 나이 차 나는 남자(헨리)와 사랑에 빠져 있다. 그녀가 방에서 키스할 때 클로즈업으로 비치는 상들은 어릴 때는 우수했지만 크면서 비뚤어진 케이스라는 걸 알려주고, 그 전 장면에서 제임스와 매리가 대화를 나눌 때 아빠인 제임스가 딸의 문제보다 자신의 성취에 더 관심이 많은 모습을 보이는데 이는 조이의 탈선이 성공에 눈먼 제임스 때문이라는 걸 시사한다. 사회적 성공을 이룬 부모 밑에서 망나니 자식이 나오는 경우가 한국에도 종종 있는데 영화 속 제임스와 조이의 관계는 앞서 말했듯이 아메리칸드림을 좇는 우리 현실에 대한 비판적 반영이다. 아들 찰리는, 얘가 그 발암 캐릭터인데 아직 어려서 뭘 모르는데 영웅심만 잔뜩 있는 사내아이의 전형을 보여준다. 얘가 흑인 노숙자를 위해 문을 열어주지만 않았어도 제임스가 억울한 죽음을 당하는 일은 없었다. 풋내기의 어리숙한 판단이 자기 아빠를 죽게 만든 것이다. 퍼지 시작 전 집에서 저녁을 먹을 때 찰리는 학교 영어 시간에 한 남자의 이야기를 썼다고 말한다. "그 사람의 사랑이 너무나 강력해 그걸로 사람들을 죽일 수 있죠." 별것 아닌 대사 같은데 이는 찰리의 성격과 앞으로 일어날 사건을 암시하는 복선이다. 사랑이 너무 강력한 그 사람은 찰리 자신이다. 그가 흑인 노숙자를 구해주려고 집에 들이므로 강력한 사랑이란 건 타인에 대한 측은지심, 좋게 말하면 그렇다는 거고 알지도 못하는 남에 대한 과한 선의를 뜻한다. 한마디로, 오지랖이다. 그걸로 사람들을 죽일 수 있다는 건 그가 들인 노숙자 때문에 퍼지에 참여한 젊은이들이 집에 침입해 아빠인 제임스를 죽이고 다른 식구도 죽을 뻔한 걸 의미한다. 남을 향한 선의가 과해서 그걸로 자기 가족이 죽을 수도 있다는 걸, 감독이 일상의 대화 속에 숨긴 것이다. 찰리의 이야기 속 그 남자는 결국 자신의 심장을 도려낸다. 자기 때문에 다른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까. (타인을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버리는 이 남자의 이타심은, 다시 생각해보니까 찰리 본인의 과한 선의와 닮았다.) 얘기를 들은 조이는 심장이 아니라 성기를 도려냈어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인 제임스와 매리가 식사 자리에서 불쾌한 말을 했다며 그녀를 나무라는데 성기를 도려낸다는 말에는 꽤 함축된 뜻이 담겨 있다. 왜냐하면 찰리의 머리가 여자처럼 길기 때문이다. 그는 남자답지 않게 단발머리를 하고 있다. 남성성과 거리가 먼 그 모습은 찰리의 이야기 속 남자가 거세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속물성과 도덕성을 적당히 갖춘 샌딘 가족에 대해 살펴봤다. (찰리의 지나친 이타심은 진짜 도덕성이라 볼 수 없다.) 서두에서 그들이 점점 퍼지에 대적하는 입장을 취하므로 영화에서 긍정의 개념에 속한다 했다. 그럼 집 밖의 외부인인 퍼지 참가자들은 집 안에 들어와 샌딘 가족과 대결하므로 부정의 개념일 수밖에 없고, <더 퍼스트 퍼지>가 식상하게 인종적 편견으로 갈등 구도를 만들었듯이 이 영화에서도 부정적 인물은 거의 다 백인으로 처리된다. 우선 대표적인 퍼지 젊은이들을 살펴보자. 그들의 수장은 전형적인 백인이다. 머리도 금발에 가깝고 자기소개처럼 제대로 교육받은 부유층 청년처럼 보인다. 그와 함께하는 남녀 무리도 가면을 썼지만 백인이라는 게 티가 난다. 그들이 잡으려고 하는 게 흑인이라는 점은 인종의 대비를 더 부각한다. 또 다른 부정적 집단인 이웃들은 퍼지 젊은이들과 다르게 유색 인종이 조금 섞여 있지만 역시 주류는 백인이다. 재밌는 점은 그들 다섯 중 한 명이 죽는데 그가 동양인이라는 것이고 그만 혼자 짝이 없다는 것이다. 하필 죽어도 미국에서 가장 얌전한 동양인이 죽고 불쌍하게 그만 싱글이다. 흑인 노숙자가 같은 흑인을 죽이는 건 논란이 생길까 봐 그리하지 않은 것 같다. 동양인 아저씨는 정말 멋없게 죽는다.

흑인 노숙자도 집에 침입한(엄밀히 말하면 찰리의 도움으로 들어온 거지만 집주인인 제임스의 동의 없이 들어온 것이므로) 외부인인데 왜 부정적 인물로 언급하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다. 흑인이라서 어드밴티지를 받은 건가? 살짝 그런 측면도 없지 않은 것 같다. 퍼지 제도가 옳지 못하다는 주제 의식을 구축하려면 (미국 사회에서) 극단에 있는 인종끼리 화합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마무리해야 하니까, 그래서 샌딘 가족이 백인이니까 찰리가 집에 들인 노숙자는 흑인이고 그만은 외부인임에도 부정의 개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퍼지(purge)의 뜻은 숙청인데 더러운 것을 맑게 하고 어지러운 것을 바로잡는다는 의미다. 맑게 하고 바로잡는 방법은 더럽고 어지러운 것, 즉 문제가 되는 것을 밖으로 내몰거나 제거하는 것이다. 그래서 '숙청'에는 조직에서 반대파를 처단하다는 뜻도 담겨 있다. 영화에서 퍼지의 목적은 사회 기여도가 없는 구성원을 박멸해 경제적 부담을 덜자는 것이라고 나온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다른 인종에 대한 혐오가 존재하고 영화는 그런 현상을 노골적으로 드러낼 수 없기 때문에(왜냐하면 그렇게 되면 인종 차별 영화라는 오해를 받고 인류가 합의한 윤리적 선을 넘게 되기 때문이다.) 극단의 인종인 '흑인'과(반대의 극단은 백인) 경제적 약자인 '노숙자'가 교묘하게 섞였다. 단순 노숙자가 아니라 흑인 노숙자인 것이다. 형식적으로는 노숙자이지만 실질적으로는 흑인이다. 퍼지 젊은이의 수장은 '더러운 노숙자 돼지(a dirty, homeless pig)'라는 표현으로 흑인 노숙자가 경제적 약자이기 때문에 퍼지의 목표물(our target)이 되었다 말하지만 그 저변에는 유색 인종에 대한 혐오, 즉 흑인이기 때문에 '퍼지'하고 싶은 마음이 깔려 있는 것이다.

마지막에 흑인 노숙자가 이웃으로부터 살해당할 위기에 처한 샌딘 가족을 구해주는 것은 논리적으로 당연한 귀결이다. 영화의 주제가 퍼지에 반대한다는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이 위대해지는 길은 숙청이 아니라 화합이다. 자의로 정한 불순한 것을 제거하자는 게 아니라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공존하자는 것이다. 샌딘 가족은 결국 노숙자를 집 밖으로 넘기지 않았고 노숙자는 어쨌든 호의를 받은 거니까 마지막에 샌딘 가족을 구해준다. 티미의 난데없는 등장과 함께 이웃들을 제압한 흑인 노숙자가 권총을 겨눈 채 "당신 뜻대로 할게요."("Your call.")라고 말하자 매리는 퍼지가 끝날 때까지 서로 잠자코 있자고 말한다. 자기 가족을 죽이려고 했던 이웃들을 살려준 것이다. 샌딘 가족이 노숙자에게 베풀었던 호의가 그들의 목숨을 구해주는 것으로 돌아오고 ― 집 밖으로 내쫓지 않았다는 건 집을 한 국가에 비유하면 다른 인종과 사회적 약자를 품고 함께한다는 뜻이므로 ― 그런 호의의 선순환과 공존의 가능성을 깨달은 매리가 퍼지의 최종이라 할 수 있는 이웃들까지 품어 '반(反)퍼지'의 영화 주제가 완성된다. 숙청하지 않고 화합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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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지의 참혹한 현장이 펼쳐진 집 밖으로 나가지 않고 샌딘 가족이 집 안에 남아 밖을 보는 마지막 장면은 그들의 반퍼지적 입장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안팎이 밝음과 어둠으로 명확히 나뉘었고, 인물들이 화면을 등지고 있기 때문에 그걸 보는 우리도 집 안에 남아 있는 느낌이 든다. 이건 화면을 그렇게 연출함으로써 영화 보는 우리 또한 퍼지에 반대하는 입장이길 바라는 감독의 희망이 아닐까 싶다.

이웃에 대해 좀 살펴보면 그들은 영화의 반전을 위해서만 존재하는 게 아니다. 퍼지가 절대 옳은 정책이 될 수 없다는 걸 밝히기 위해 그들의 존재가 필요했던 것이다. 왜냐하면 흑인 노숙자가 퍼지 젊은이들을 물리치고 샌딘 가족을 구해주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나도 공존과 화합이라는 주제가 충분히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웃의 뒤통수치는(앞서 '반전'이라고 말한) 행동은 퍼지가 제대로 실행된다 하더라도 남은 존재들끼리의 반목이 또 생기므로 절대 사회의 해결책이 될 수 없다는 걸 보여준다. 샌딘 가족 집에 침입한 퍼지 젊은이들을 처리해주고 이웃이 뭐라 말하는가. "당신네 바리케이드가 무너졌을 때 우린 우리의 증오를 정화할 기회를 본 거예요." 퍼지를 통해 부자와 강자만 남아 그들이 말하는 '정화'를 달성했다 하더라도 부자끼리의, 강자끼리의 갈등이 또 발생한다. 그레이스 페린이라는 이웃집 여자가 영화 초반에 다른 이웃의 흉을 보고("할버슨 부부가 쿠키 먹는 거 말고 뭐 잘하는 게 있겠어요?") 샌딘 가족이 보안 장치를 팔아 집을 증축한 것에 시샘을 드러낸 게 그 단서라 할 수 있다. 퍼지를 통해 그럴싸한(?) 사람만 남아도 그들 사이에 또 다른 혐오가 대두하는 것이다. 매리가 이번에도 연례 파티를 열 것이냐고 묻는데 그레이스는 집에서 방송이나 볼 것이라고 답한다. 나중에 CCTV로 확인한 결과, 그레이스가 샌딘 가족만 빼고 파티를 연 것이 밝혀진다. 그리고 흑인 노숙자가 샌딘네 집에 들어갔다는 걸 퍼지 젊은이들에게 알려준 것도 이웃들이다. 서로 수준이 비슷해서 퍼지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했던 사이에게 적개심이 발견됐다는 건 퍼지의 불완전과 무용함을 시사하는 것과 같다.

마지막으로 꼭 짚고 가야 할 사람이 있다. 바로 조이의 남자 친구 헨리다. 나는 그가 각본상으로 조연 중 조연이지만 주제를 구성하는 측면에서 꽤 비중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단순히 조이의 탈선을 구체화하려고 등장한 게 아니다. 자기와 조이의 연애를 반대하는 제임스를 퍼지 제도를 이용해 합법적으로 죽이려고 했지만 그는 터무니없이 자기가 총에 맞아 죽는다. 그는 명백히 퍼지에 참여한 자다. 그래서 부정의 개념에 속한다. 그가 제임스를 쏴 죽이려고 계단에서 내려올 때 반대쪽에서는 흑인 노숙자가 닫히는 문틈 사이로 굴러 들어온다. 제임스를 가운데에 놓고 양쪽의 두 사람이 위-아래, 긍정-부정(퍼지에 대한 입장으로 봤을 때)의 대립 관계를 형성한다. 제임스는 그때까지만 해도 퍼지에 찬성은 하나 참여는 하지 않는 중립이므로 그들 사이에 위치하는 게 맞다. 흥미로운 점은 총격전이 벌어지기 전까지만 해도 관객은 헨리가 제임스와 착하게 대화를 나눌 것이고 흑인 노숙자는 집에 들어와 나쁜 짓을 벌일 거라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헨리가 총 꺼내는 걸 누가 예상했겠는가. 그리고 흑인 노숙자의 인상은 처음 봤을 때 정말 범죄자 같다.

근데 이걸 말하려고 헨리를 언급한 게 아니다. 그에게는 더 중요한 역할이 있다. 그가 퍼지에 참여했으므로 부정적 인물이라고 말했는데 그의 대사 중에 퍼지의 특성을 암시한 게 있다. 방에서 몰래 키스를 하고 있을 때 조이가 사랑한다고 말하자 헨리가 으르렁거리자고 말한다. 그 이유는 사랑한다는 표현이 식상하다는 것이다. 앞으로 "사랑해."란 말을 '으르렁'으로 바꾸자는 것이다. 조이는 우스꽝스러워서 하기 싫다 하지만 결국 헨리의 강요에 으르렁거린다. 이건 얼핏 보면 영화에서 시간 때우기 위한 일상 대화 같지만 사실은 주제와 관련 있는 의미심장한 대사다. 퍼지에 대해서 일단 생각해보자. 1년 중 하루 12시간 동안 살인을 포함한 모든 범죄가 허용된다. 평소에 범죄인 게 퍼지 동안에는 범죄가 아니게 된다. 이게 퍼지법(purge法)의 골자다. 위법과 불법이 적법과 합법이 되는 것이다. 자연법적으로 나쁜 행위가 당연한 살인이 실정법인 퍼지에 의해 나쁘지 않은 행위가 되므로 자연법을 거스르는 실정법이 과연 유효할 수 있는가 하는 철학적 질문을 던진다. 사견인데 '퍼지' 시리즈가 영화가 별것 없는데도 기대되는 이유는 바로 그런 자연법과 실정법의 관계를, 즉 인간 사회의 철학적 문제를 생각하게 해주기 때문이다. 어쨌든 다시 헨리 얘기를 해보자면 '사랑해'를 '으르렁'으로 바꾸자고 한 건 실정법(퍼지)으로 위법을 적법화하는 것과 비교된다. 둘은 비슷하다. '사랑해'는 사랑의 표현이고 기분 좋은 건데 혐오의 표현이고 기분 나쁜 '으르렁'이 된다. 살인은 자연법적으로 나쁜 행위인데 실정법(퍼지)에 의해 나쁘지 않은 행위가 된다. 사랑이 어떻게 혐오가 되고 살인이 어떻게 적법이 될 수 있을까? 헨리는 퍼지 참여자이고 부정적 인물이기 때문에 퍼지법처럼, 본능적(자연법적) 사랑 표현을 자의로, 그와 반대인 혐오 표현으로 바꾼 것이다. 그러니까 퍼지에 관한 주안점은 그것이 자연법을 ― 달리 말하면 인류가 보편적으로 공감하는 선을 ― 거스른다는 데 있다.


몇 가지 디테일과 미장센을 설명하고 글을 마치겠다.

제임스가 자기 딸(조이)을 인질로 잡은 흑인 노숙자와 총을 겨누고 대치할 때 서로 이런 말을 한다. "우린 아무 잘못 없어." ("We don't deserve this.") "나도 아무 잘못 없어." ("I don't deserve this either.") 어찌 보면 굉장히 우스꽝스러운 상황이다. 나는 실제로 이 장면을 보고 실소를 터뜨렸다. 집 밖에서 위협하는 퍼지 젊은이들 때문에 집 안에 있는 두 남자가 총을 겨눈 건데 그들이 한 말처럼 그들은 정말 아무 잘못 없다. 집주인 제임스는 퍼지에 잘 대비해 안전한 밤을 보내고 있었는데 갑자기 웬 남자가 들어오는 바람에 그를 추격하는 퍼지 참여자들로부터 협박을 받게 된 거고, 흑인 노숙자도 집과 돈이 없을 뿐이지 미국 시민으로서 얌전하게 살고 있었는데 퍼지라는 어처구니없는 법 때문에 그를 죽이려는 사람들로부터 도망을 다니다 우연히 제임스의 집에 들어오게 된 거다. 서로 잘못 없는 사람끼리 왜 총을 겨눠야 하는가. 그런 부조리한 상황을 만든 게 퍼지이고, 그 때문에 잘못 없는 사람이 죽을 수 있고, 그래서 영화는 퍼지를 유발한 미국 사회의 경쟁과 차별을 꼬집는다. 백인-부자 제임스와 흑인-빈자 노숙자는 퍼지만 없었다면 사실 싸우지 않아도 됐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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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임스가 집 안에 숨은 흑인 노숙자를 찾으려고 총과 손전등을 들었는데 그림자가 문에 비친 장면이다. 나는 이걸 보고 역병 의사(plague doctor)가 떠올랐다. 모자와 새 부리가 너무 닮았다. 나는 감독이 의도했다고 확신한다. 왜냐하면 집 안의 흑인을 내쫓으려는 제임스의 상황이 전염병을 치료했던, 즉 유럽에서 역병을 몰아내려고 했던 그 의사들의 행적과 비슷한 점이 있기 때문이다. 나쁜 것을 제거한다. 그런 측면에서 둘은 닮았고, 그림자 장면은 다시 봐도 훌륭한 연출이다. 이런 B급 영화에 A급 미장센이 있다는 건 참 반가운 일이다.

퍼지를 대비해 보안 장치를 작동하고 안전한 밤을 보낼 때 제임스는 태블릿 PC로, 구매하고 싶은 보트를 살피는데 이런 말을 한다. "보트에 무슨 차가 필요해?" ("Who needs a car on a boat?") 보트에는 차가 필요 없어서 차고의 유무는 구매 의사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건 보통 대사가 아니다. 퍼지에 찬성은 하지만 참여는 하지 않는, 그러니까 퍼지의 이론만 받아들인 제임스의 가치관을 암시하는 것이다. 즉, 보트는 부자만 살 수 있으니까 상류를 뜻하고 차는 누구나 탈 수 있으니까 하류를 뜻한다. 보트에 차가 필요 없다는 건 상류 사회에 하류의 것은 존재하지 않아도 된다는, 미국은 강대국이니까 빈자와 약자는 제거해도 된다는 퍼지의 이론적 입장과 동일하다. 나는 이것도 꽤 수준 높은 디테일이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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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지 시작 전에 샌딘 가족이 식탁에 모여 저녁을 한다. 화면 구성을 보면 식탁 앞뒤로 유리 장식품이 진열돼 있고 샌딘 가족은 그 사이에 둘러싸인 형국이다. 이 유리 물건들은 샌딘 가족이 퍼지로부터 자신들을 보호해줄 것이라고 굳건히 믿는 보안 장치를 상징한다. 왜냐하면 유리들이 그들의 주변에 둘러져 있듯이 집의 문과 창에 보안 장치가 설치되어 외부로부터 그들을 지켜주기 때문이다. 근데 철로 된 단단한 보안 장치와 깨지기 쉬운 유리를 동일하게 보는 건 문제가 있지 않느냐고 할 수 있겠다. 하지만 실제로 보안 장치는 퍼지 젊은이들의 등장 이후로 그 신뢰성에 의심을 받고("절대 뚫을 수 없는 거냐고? 아니, 그런 건 없어." ("Is it impenetrable? No, nothing's impenetrable.")) 그들의 지원군이 가지고 온 차에 의해 매우 손쉽게 철거된다. 그렇다면 식탁에 놓인 레드 와인은 집 안에서 벌어질 유혈 사태를 의미한다고 볼 수 있겠다.

흑인 노숙자가 잘 숨어 다니고 총도 잘 쏘는 이유는 그가 설정상 참전 용사이기 때문이다. 자세히 보면 그의 목에 군번줄이 걸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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