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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영화 비평

그 자연이 네게 뭐라고 하니

현실부터 챙기라고요

by 심윈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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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상수 영화를 앞두고 있을 땐 늘 설렌다. 일 년에 하나씩 개봉되기에 기념일을 기다리는 심정으로 사계절을 보낸다. <여행자의 필요> 때는 슬슬 시작되는 더위와 도시의 빈틈을 채우는 초목이 있었고 <수유천> 때는, 이상하게도 머릿속에 남은 인상이 없지만 가을이 다가오는 평범한 일상이 있었다. 이것은 영화의 외적인, 지극히 개인적인 기억과 이미지이므로 같은 영화를 봤다 해도 누구는 나와 심상이 다를 수 있다. 이번 작품 <그 자연이>는 내게 두 가지 느낌을 경험하게 해주었다. 영화를 두 번 봤는데 각각 다른 영화관을 찾았기에 '두 가지 느낌'이라 표현한 것이다. 한 곳은 내가 다녔던 대학의 근방에 위치한 멀티플렉스였는데, 지하철역 계단을 통해 지상으로 올라오자 익숙한 냄새가 몸속을 채웠고 대학 시절 간직했던 감정들을 ― 젊음이 주는 긍정성, 성인이 되어 얻은 자유로움, 이성적 만남에 대한 기대 등 ― 떠올리게 했다. 갑자기 어려진 느낌이 들었는데 번화가였던 영화관 주변이 조금 살풍경해서 세월의 무상함에 씁쓸함을 느꼈다. 공실 있는 건물이 많았다. 공실이라니. 내가 대학생이었을 때 그곳은 항상 사람이 바글바글했다. 금요일 저녁이나 주말에는 걸어 다니기가 힘들 정도였다. 평일 낮 시간에 영화관에 도착한 나는 길에서 통학하는 학생도 몇 명 못 보았고, 경영난 때문에 방치된 듯한 상영관 주변을 어슬렁거리다 어디서 나타난 직원의 안내를 받고 입장했다.

다음으로 간 곳은 집에서 가까운 예술영화관이었다. 처음 가봤다. 홍상수 영화도 줄곧 상영해준 근처 롯데시네마가 이번에는 상영관을 배정해주지 않았다. 큰 영화관에서 투명 인간처럼 조용히 보다 오고 싶었는데 그 즐거움이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래서 그곳에서 가까운 예술영화관을 굳이 찾았던 것이다. 카페 영업과 영화 상영을 겸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극장 상태가 괜찮아서 보는 데 불편함이 없었다. 영화 보러 가는데 비가 왔고 다 보고 나왔는데 여전히 내렸다. 축축함. 네 명뿐인 관객. (원래 다섯 명인데 한 명이 늦어 들어와서 초중반까지 보다가 나간 뒤 후반에 다시 들어와 짐을 챙기고 떠났다.) 대선 후보 현수막.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영화를 곱씹었는데 지금 나처럼 홍상수에 관심 있는 사람이 몇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는 진짜 마니아만 보는 영화가 되었다. 그것도 씁쓸하네. <그 자연이>가 내게 준, 영화 외적 경험은 비와 소외감이다. 살면서, 늙어가면서 세상과 사람에게서 멀어질 때 이 영화가 생각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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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고 싶은 하나의 아이디어로부터 영화가 출발하지 않는다. 이건 홍상수가 인터뷰에서 직접 밝힌 얘기다. 세상의 모르는 것 앞에 겸손해지고 영화를 통한 발견을 추구했던 구경남(<잘 알지도 못하면서>의 주인공)의 기조는 이 영화에서도 계속된다. 홍상수의 영화는 우리가 사는 일상처럼 하나의 거창한 의도 아래 조작된 것이 아니다. 여러 논리와 감각이 담겨 있음을, 찍는 과정을 통해 발견하고 그런 무한한 자연을 닮고자 하는 게 그의 예술적 지향이다. 이번에도 배우들이 현장에서 대본을 받았다고 한다.

신륵사에서, 숭산의 '오직 모를 뿐'을 연상시키는 '모름'에 대해 동화가 역설할 때 이전 같았으면 그 메시지에 동의하듯 영화가 그냥 넘어갔을 텐데 준희가 '앎'의 가치를 내세우며 반박한다. 그래도 알아야 하는 것도 있지 않을까, 라는 말은 우리가 사는 곳은 현실이기에 이상적(도피적) '모름'에만 빠지면 건강한 균형을 잃을 수 있음을 뜻하고 (머리가 한쪽으로 쏠린 것 같다고 준희 아빠가 동화를 비판함.) 그렇게 단정하지 마, 라는 말은 '모름'에 대한 주장 또한 결국 '앎'이므로 자기모순이 되어 자연(삶)을 인식하는 옳은 방법이 아님을 뜻한다. 자연에는 우리가 아는 것도 있고 모르는 것도 있는데 ― '앎'의 현실과 '모름'의 이상이 공존하는 게 인생인데 ― 모르는 것으로 일관하는 태도는 아는 것을 배제해 결여된 철학이 되고 그것이 또 다른 '앎'으로 성립하는 논리적 모순을 일으킨다. 동화의 '모름'은 결국 '앎'이라는 오만과 판단(하나의 메시지)이고 전임(<수유천>의 주인공)의 '없음'은 겸손과 발견(자연이 담고 있는 여러 진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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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의 주제가 관통하지 않는다 해도 여러 메시지 사이에 경중은 있다. 인물들의 대화를 통해 감독이 평소 갖고 있는 생각들이 노골적이다 싶을 정도로 드러나는데 그것들이 다종다양하더라도 영화 스토리의 틀을 잡고 있는 중심 생각은 존재한다.

<강변호텔>에 나오는 대사다. "우린 태어날 때 하늘의 존재야. 태어나서도 그렇고 죽어서도 그래. 우린 원래 하늘에 속해. 그래서 하늘을 느껴. 단순해. 우리가 하늘이기 때문에 하늘을 느끼는 거야. 그게 시야. 그걸 못 느끼면 살아서도 사실은 죽은 놈이야. 사람으로 태어나면 또 사람 짓을 해야 돼. 배워야 돼. 하늘의 존재인데 사람 짓도 배워야 돼. 안 그러면 죽어. 남들이 널 죽여버려. 한 마음이 너무 세지면 다른 마음을 없애고 싶거든. 그러지 말라고. 한 마음이 너무 세져서 다른 마음이 귀찮아져도 다른 마음도 잘 같이 가라고. 그게 병, 나란히 병(竝)이야."

현실과 이상의 조화를 강조하는 이 철학은 <그 자연이>에서 골자 역할을 한다. 예술도 좋지만 돈부터 벌으라는 것이다. 이 관념을 위해 준희 엄마와 동화가 대조된다. 준희 엄마는 일하면서 시를 쓰는 여자다. 준희 아빠는 아내인 그녀를 바깥일(밥벌이와 시 쓰기)과 집안일 모두 잘하는 사람이라고 칭찬한다. 그녀는 어느 정도 재능이 있어서 여러 곳에 시를 발표했다. 동화는 등단은 안 했고 혼자 시를 쓰며 예식장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유지한다. 최소한만 벌겠다는 게 그의 경제관념이다. 딸 가진 부모와 그 딸과 결혼하려는 남자이기에 두 사람의 가치관은 충돌할 수밖에 없다. 돈은 많이 벌수록 좋고 시 쓰기도 치열하게 해야 한다는 준희 엄마, 돈 같은 물직적인 것에 구애받지 않고 소박하게 시를 쓰고 싶다는 동화. 첫 장면의 요리하는(집안일) 준희 엄마 모습과 그녀가 SUV 타고 출근하는(바깥일) 다음 장면은, 남과 다른 게 멋이라고 생각해 일부러 중고차를 구입한 동화와 실은 돈도 없어서 차를 바꾸지 못하는 그의 처지와 확실히 대비된다. 현실(돈)과 이상(시)을 병행하는 SUV, 이상에만 치우친 중고차. 둘의 대결은 마지막에 동화의 중고차가 고장 나는 것을 통해 전자의 승리로 끝난다. 그러니까 동화의 가치관은 틀린 것으로 증명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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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와 준희 엄마만 비교되는 게 아니다. 동화를 비롯한 준희와 능희도 이상에 치우친 신세대를 상징하고, 구세대인 준희의 엄마와 아빠는 그들을 염려하는 마음으로 바라본다.

준희를 이상에 치우쳤다고 한 이유는 ― 신세대의 셋 중 그녀가 가장 낫긴 하지만 ― 물질적인 걸 고려하지 않은 채 동화라는 남자를 선택했고 과거에 준재벌에 해당하는 남자를 단칼에 거절했기 때문이다. 물론 여자가 꼭 돈을 따져야 건강한 상태인 것은 아니다. 하지만 동화의 어리숙한 이상주의를 순수한 인간성으로 해석하고 그 점을 좋아하는 것은 나쁜 의미로 순진하다 할 수 있고, 너무 현실적인 신세대가 있는 반면 너무 이상적인 쪽도 있는데 그 후자의 모습을 준희가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능희는 아마 능할 능(能) 자일 것이다. 준희의 말에 따르면 능희는 어렸을 때 공부를 잘했고 3개 국어를 하고 부모님의 기대를 많이 받았다. 하지만 그녀는 정신이 아파서 요양차 지방에 내려와 부모님 집에 살고 있고 현재 어떤 직업도 갖고 있지 않다. "그냥 아무것도 하기 싫은가 봐."라는 준희의 말은 능희처럼 사회생활 포기하고 부모 집에 얹혀사는 신세대의 일면을 나타낸 것이다.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능희의 가야금도 그냥 취미로 이것저것 해보는 그 세대의 특성을 보여준 것이다. 준희는 동화에게 능희가 가야금을 최근에 시작했다는 것을 굳이 말하고 ― 마치 취미마저도 진득하게 하지 못하는 젊은 세대의 변덕스러움을 꼬집는 것처럼 ― 능희는 준희에게 자신이 10년 연습하면 자유자재로 연주할 수 있을 것 같다고 ― 꾸준함도 없으면서, 미래에 어떻게 될지 모르면서 말만 잘하는 그 세대의 특성 ― 말한다. 능희는 또, 대체로 느려서 화장실에 오래 있고 백숙 먹을 때 아직도 샤워하고 있고 건배할 때 잔을 늦게 드는데 이런 뒤따라오지 못하는 면은 졸업·취업·결혼이 느린 현 젊은 세대의 모습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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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화 같은 삶을 사는 동화. 공들인 탑보다 공을 덜 들인 탑이 맘에 든다 하고, 오래된 중고차를 멋으로 생각하고, 남들 따라 수염 깎을 필요 있느냐 하면서 콧수염을 기른다. 사회인이 되려면 개성을 죽일 줄 알아야 하는데 그는 개성을 고집함으로써 사회를 외면하는 것에 대한 자위를 하고 있다. 안경을 쓰지 않고 흐린 시선으로 사는 것은 준희의 말대로 일종의 도피다. 세상이 잘 보이지 않으면 모든 게 불분명하니까 자기 속에 안주할 수 있고, 무엇이 더 나으냐 하는 세속의 평가에서도 멀어질 수 있다. 근시라서 가까운 것밖에 못 보는 동화가 먼 탑보다 자기 앞의 탑만 맘에 든다고 한 것은 단순한 취향을 나타낸 게 아니라 순진한 이상주의자의 근시안적 특징을 드러낸 것이다. 정작 중요한 것을 볼 때는 ― 탑에 대한 설명을 볼 때, 잠에서 깨어나 집 안 화장실을 찾을 때, 밤중 산길을 걸을 때 ― 안경을 쓰는데 이는 사람이 아무리 이상주의자라 하더라도 현실을 직시하지 않을 수 없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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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이룬, 이 영화에서 긍정적 인물로 평가되는 준희 엄마를 그의 남편인 준희 아빠가 얘기할 때 '선명하다'는 표현을 쓰는데 이는 능희의 가야금 소리를 칭찬하는 준희의 '깨끗하다'는 말과 일맥상통하고 동화의 '흐릿한' 시력과 대비되어 자연과 예술은 분명함의 속성이고 불분명한 상태로는 성취할 수 없다는 메시지를 도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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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세대 셋이 신륵사에 갔을 때 능희가 돌담 안에 자란 풀들을 보는 장면이 나온다. 그녀는 가장 길게 자란 줄기와 대칭으로 선 구도를 취하고 다음 장면에서 동화와 준희가 커다란 나무를 보면서 어린 잎이 이렇게 자라 나무가 됐다는 대화를 나눈다. 그러니까 풀(정확히 말하면 목본식물이지만)과 나무는 자식과 부모에 대한 비유다. 풀이 성장해 나무가 된다. 자식이 커서 부모가 된다. 백숙 먹을 때 동화는 준희 할머니를 묻은 수목장 나무와 절에서 본 나무가 자기한테는 붙은 느낌이라고 말한다. (손가락 두 개를 겹쳐 '붙음'을 표현하는데 절에서 어린 줄기와 나란히 섰던 능희도 같은 방식으로 해석되고 이 '붙음'은 두 대상의 일치를 뜻한다.) 수목장 나무가 준희 아빠의 입장에서 보면 자기 어머니를 묻었기 때문에 '부모'인 것이고 절의 나무도 풀(자식)이 성장해 된 것이므로 '부모'를 뜻하기에 일치하는 느낌을 받은 것이다.

풀이 나무가 되면 꽃이나 열매를 맺고 그 씨앗이 땅에 자라 다시 풀이 된다. 자식은 부모가 되어 자기 자식을 낳고 그들이 자라 또 부모가 된다. 이 순환의 섭리는 부모와 자식이 끊어질 수 없음을 나타내고, 동화의 아빠인 하 변호사의 유전자가 그의 손자, 즉 동화와 준희의 자식에게 전달될 수 있다는 대사를 특별하게 하고, 딸을 정말 사랑한다는 준희 아빠의 고백과 맞물려 홍상수가 본처와 헤어졌어도 친딸을 여전히 사랑하고 있음을, 그것을 영화를 통해 표현한 것임을 알게 해준다.

준희 아빠는 동화를 처음 만났을 때 중고차에 감탄하고 그 차를 한번 몰아본다. 조금 움직일 줄 알았는데 그걸 타고 집 밖의 도로까지 나간다. 아마 자기 딸을 태우는 차가 잘 굴러가고 안전한지 확인하기 위해 그리 길게 운전한 것일 테다. 자식을 걱정하는 부모의 마음. 이 영화 자체가 자식 세대가 잘되길 바라는 부모 세대의 마음이다. 홍상수가 이번에 득남한 것은 이 영화와 무관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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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에 취한 동화는 실수를 하고 식사 자리는 어색해진다. 술이 약하다는 준희 아빠의 말에 동화는 취한 게 아니라고 변명한다. 그러자 준희 아빠가 "취한 거 맞잖아. 인정할 건 인정해야지."라고 말한다. 이 '인정'이란 단어는 자신의 시감은 인정하려고 한다는 동화의 말을 떠올리게 하고, 자신에게 유리한 것(시 쓰기)은 인정하면서 불리한 것(술주정)은 부인하는, 그릇된 예술가의 태도를 지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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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길에서 넘어져 생긴 상처와 고장 난 중고차는 동화의 이상주의가 틀렸음을 방증한다. 중고차의 비유는 단순한 방식인데 상처를 영화에서 하나의 상징으로 만드는 과정은 꽤 흥미롭다. 우선 백숙 먹을 때 동화가 암송한 시를 살필 필요가 있다. 밤에 꽃이 피었는데 밝고 환했다는 내용이다. 능희의 말처럼 매우 짧고 준희 엄마의 말처럼 재능과 기술이 부족한 시다. 동화가 그 시에 진실했다면, 본인의 논리와 감각이 정말 밤의 꽃을 밝게 인식했다면 잠에서 깨어나 집을 나와 걸었던 산길에서 굳이 핸드폰 손전등으로 꽃을 확인하지 않았을 것이고 안경까지 써서 앞이 보일 텐데 넘어져 다치지 않았을 것이다. 이 말은 그의 시감이 진실하지 않다는, 역시 재능이 없다는 뜻이다. 어리숙한 이상주의자의 예술성은 자연에 부합하지 않고 현실에서 상처만 낼 뿐이다. 시에서 밤의 꽃이 빛났다고 했는데 왜 손전등까지 켰는가. 안경 안 쓰고 흐릿하게, 그렇게 분별 없이 보는 게 좋다고 했으면서 왜 꽃을 확인할 때는 안경을 썼는가. 동화가 넘어져 다친 이유는 사실 꽃이 빛나는 게 말이 안 되기 때문이고 영화는 그 점을 의도적으로 드러내기 위해 그에게 안경을 씌웠다. 안경 안 썼으면 앞이 보이지 않아 넘어진 걸로 관객이 해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밤에 정말로 빛난 건 준희가 말한 달이었다. 동화의 거짓 감성이었던 꽃이 아닌 자연에 실제로 뜨는 달. 동화는 의자에 누워 달구경을 하고 영화는 원래 홍상수 작품에 드물게 사용되는 음악을 깔아준다. 마치 이 장면이 가장 주요하다는 듯이 말이다. 그렇다.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려 하는 홍상수에게 달은 의미심장한 대상이다. 견월망지(見月忘指)를 떠오르게 하기 때문이다. 달(본질)을 봐야지 손가락(선입견)을 보면 안 된다. 달 밝은 걸 느꼈더라면 산길에서 다치지 않았을 텐데 동화는 꽃이라는 거짓 문자에 갇혀 있어 그 대가를 치렀다. "꽃이 피네. 꽃이 피네."라는 그의 시는 유명한 김소월의 <산유화>와 비슷하고, "책에서 읽은 걸로 사는 거지."라는 준희 엄마의 평을 섬뜩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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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본 홍상수 영화 중에서 두 번째로 좋았다. 1위 <수유천>, 2위 <그 자연이>, 3위 <여행자의 필요>. 대사에 메시지를 욱여넣은 게 느껴져서 그 부분이 좀 억지스럽고 촌스러웠다. 초기작은 말 속에 잘 숨겼는데 근작들은 티를 못 내 안달인 것처럼 작위적이다. 하지만 세상 여러 분야에 대한 홍상수의 생각을 읽을 수 있어서 긴 러닝 타임에도 지루하지 않았다. 준비됐을 때 결혼하는 게 아니라 일단 같이 살면서 하나씩 해결하는 것이라는 말, 실제 경험해보니 백번 공감된다. 요즘 젊은 세대는 결혼도 하나의 스펙으로 보고 뭔가 갖춰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득남한 홍상수의 다음 영화가 기대된다. 내년에도 이맘때 나왔으면 좋겠다. 환절기가 어딘가 여유롭고 설레는 구석이 있다.


부기

백숙을 준비하는 식사 자리에서 집 밖의 개들이 짖는 장면이 있다. 준희 엄마는 누가 왔나, 개들이 왜 이렇게 짓지, 하고 말한다. 그 전 장면은 외출했던 세 사람이 차를 타고 집에 들어오는 모습이다. 여기서 주목할 점은 차가 입구로 들어와 화면 밖으로 빠져 주차됐는데도 카메라가 따라서 비추지 않는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아무도 없는 진입로를 여전히 바라본다. 마치 누가 더 올 사람이 있다는 듯이 말이다. 개가 왜 짖었고 카메라가 왜 움직이지 않았을까 하고 거듭 고민했는데 확답은 아니지만 대충 이렇게 결론 내렸다. 신륵사에 갔다 주인 모르는 탑을 보고 셋이 얘기를 나누었는데 그 스님의 영혼이 준희 집까지 따라온 게 아닐까 싶다. 카메라가 그래서 차가 화면 밖으로 나갔는데도 계속 그 자리를 비추었던 거고 개들이 외부인이 왔으니까 그래서 짖었던 것이다. 결국 귀신이라니 좀 웃긴 상상이지만 현재로선 그 답이 가장 그럴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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