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라는 까다로운 주인 밑에서 일했던 인물입니다. 조비가 죽던 226년과 조예가 죽던 238년에는 후사를 부탁한다는 보정대신에 임명될 정도로 위나라에서 대를 이어 신뢰를 얻은 인물입니다. 하지만 어린 조방을 모시게 되면서 함께 중임을 맡은 조상은 사마의를 태부로 지위는 높이고 실권은 빼앗아 허수아비로 만들어 버립니다. 사마의는 247년 부인 장춘화의 사망을 핑계로 칩거하며 은인자중 하다 249년 조상이 위제 조방과 명제의 능묘인 고평릉에 참배하는 것을 기회로 정변을 일으키어 실권을 장악하였습니다. 이어서 조상과 그 일파를 대역무도의 죄목으로 삼족을 멸하고 새로이 진나라의 토대를 완성시키고 251년 사망합니다. 촉은 263년에 항복하였고 265년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진나라의 황제에 올랐고 오는 280년에 항복하여 삼국시대는 마무리됩니다.
사마의는 언제부터 고평릉의 난과 같은 정변을 모의하여 조 씨에서 사마씨로 위나라를 뒤엎을 준비를 시작했을까요? 조상 일파가 압박을 하였던 247년 병을 핑계로 은퇴하였을 때부터 본격적으로 시작했을까요? 아니면 238년 조예가 36세의 젊은 나이에 죽으면서 9살의 정통성이 약한 조방이 황제에 등극하고 관노비 출신의 비천한 신분의 조예의 두 번째 황후인 명원황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부터라고 보아야 하는 것일까요? 진이 삼국을 통일한 후 400년이 지난 당나라 태종 이세민 시절 편찬된 진서의 사마사의 부인인 하후휘 열전인 경회하후황후열전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입니다. 사마사의 부인은 첫째 하후상의 딸 하후휘, 둘째 오질의 딸, 셋째 양신의 딸 양휘유 세 명입니다. 이중 오질의 딸과는 자식 없이 이혼을 했습니다. 오질은 조비의 최측근 사우의 한 명에 속하는 인물이었지만 평판은 최악이어서 죽은 후의 시호가 추하다는 의미의 추후였다가 아들 오응이 이의를 제기하여 위후로 바뀌기도 한 인물이었습니다.
하후휘 황후는 고아하고 박식하며 도량이 있어 사마사가 무슨 일을 하려 할 때 반드시 미리 계책을 세웠다. 위나라 명제(조예) 때 사마의가 상장의 무거운 직책에 있었는데 여러 아들들은 모두 웅장한 재주와 커다란 모략이 있었다. 황후는 사마사가 절대 위나라의 충신이 아님을 알았고 이미 위 씨의 생질이었기에 사마사가 심히 그녀를 꺼렸다. 234년 마침내 독약을 마시고 죽었는데 당시 나이가 24세였고 준평릉에 장사지냈다. 황후는 아들이 없었고 딸 5명을 낳았다고 기록되었습니다.
24살에 딸 5을 낳았으면 당연히 결혼은 10대에 했다는 것이고 독특한 점은 사마사의 동생인 사마소의 아들 사마염이 진나라의 황제에 오른 다음 살아있던 사마사의 부인인 양휘유 홍훈태후가 사마염에게 말하여 전전처인 하후휘의 일을 매번 말하여 결국 266년 추봉하여 시호를 내렸다는 것을 보면 이례적으로 양휘유가 하후위를 무척 좋게 보았다는 것이고 이는 사마사와 하후휘의 사이도 나쁘지 않았다고 보이는 근거입니다. 하지만 하후휘는 자신의 남편 사마사와 시아버지 사마의가 무언가 모의를 하고 있다는 것을 알아챘고 그 이유로 독살되었다고 기록된 것으로 보입니다.
사마의가 독특한 점은 자신을 드러내려고 노력하지 않았던 인물이라는 것입니다.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201년에 사마의를 불렀지만 7년간 병을 핑계로 거절하였고 조방 시대에도 조상 일파의 눈을 속이려고 247년 부인 장춘화의 사망을 핑계로 은퇴를 선언하였고 자신을 염탐하러 온 형주자사로 발령이 난 이승에게 완벽하게 죽음을 앞둔 환자 연기를 보여주어 249년 정월 초사흘에 조상이 황제 조방을 수행하여 조예의 무덤 고평릉으로 참배하러 갈 수 있도록 방심시켰습니다. 사마의는 이처럼 자신을 깊이 숨기고 드러내지 않는 은장(隱藏)이라는 도광양회의 이치를 누구에게서 배운 것일까요?
낙양성 육혼산에는 경천위지의 재능을 가진 은사가 살고 있었습니다. 성은 호, 명은 소, 자는 공명으로 호소는 어려서부터 재주가 특출한 기재로 박학다식하고 정치적 식견이 뛰어났습니다. 하지만 난세에 황망한 일을 많이 보았고 참극을 겪어서 은거생활을 선택한 인물이었습니다. 호소는 원래 기주에 은거하였는데 기주의 원소가 호소에게 출사를 청하여 왔습니다. 정치의 희생양이 되기보다는 진흙탕 속에서라도 자유롭기를 원하였던 호소는 원소를 피하여 고향인 영천으로 도망갔습니다. 영천에서 살기 시작하자 조조가 만나기를 청하였습니다. 조조는 강경한 태도로 호소를 강제로 불러들이려 하였습니다. 호소는 조조를 찾아가 단도직입적으로 말했습니다. “저는 한낱 시골사람일 뿐 군사와 나라에 쓰일 재목이 못되니 이만 돌아가게 해 주시지요.‘ 조조는 탄식하였지만 호소의 청을 받아들였습니다. 호소는 다시 이주하여 낙양 남쪽의 육혼산에 입산하여 약초를 캐며 은거 생활을 시작하였습니다. 호소는 후한 말기의 서예의 대가로 이름을 날리었고 행서와 초서의 중간인 행초체에 능하였는데 당시 사대부들은 그의 작품을 모사하고자 호소가 연습하다가 버린 파지마저도 비싼 값에 팔릴 정도였다고 합니다. 호소의 명성을 듣고 어린 사마의가 찾아갔습니다.
사마의는 호소와 경전과 역사에 관하여 토론하였고 정권의 잘잘못을 비판하였습니다. 의심스러운 점은 분석하고 훌륭한 글을 함께 감상하였습니다. 사마의는 이 스승으로부터 경사의 수양과 은일의 정신을 배워나갔습니다. 이때 영천의 주생이라는 사람도 호소에게 가르침을 받고 있었는데 어린 사마의의 공격과 멸시를 받다 보니 어느 순간 사마의에 대한 살의가 차오르게 되었습니다. 주생은 몇몇 사람들을 모아 사마의를 없애기로 결의하였고 그 소식을 전해 들은 호소는 살기등등한 주생 일당 앞에 마주 섰습니다. 호소는 주생을 눈물로 타일렀고 결국 주생은 원한을 풀고 칼을 내려놓고 길게 한숨지었습니다. 호소는 주생에게 마침 길가의 대추나무를 가리키며 맹세를 하라고 했습니다. 주생은 칼로 대추나무를 베고 말하였습니다. ”내가 또 사마의를 해치려 든다면 이 나무 같은 꼴이 될 것이외다. “ 호소는 한평생 벼슬 없이 은거하며 살다가 향년 89세로 사마의보다 1년 먼저 세상을 떠났는데 호소에 관한 기록은 같은 은자였던 삼국지 위서 <관녕전>에 기록되었습니다. 사마의는 호소에 대한 존경심을 자신의 큰 아들의 이름을 사, 둘째 아들 이름을 소로 지어 스승 호소에 대한 경의를 표시하였다고 합니다.
사마의를 추천한 인물 중에 형 사마랑의 친구인 최염이 있었습니다. 최염은 원소군이 교만하고 난폭하며 분묘를 파헤친다고 원소에게 간언 하자 원소는 최염을 기도위에 임명하였으나 관도대전을 앞두고 백성들이 변방지역을 지키면서 구현의 안정을 도모하는 것만 못다가고 간언 하였으나 원소는 받아들이지 않았다고 합니다. 원소가 패망한 뒤 원소의 두 아들은 서로 최염을 불렀지만 최염이 병을 핑계로 사양하자 옥에 갇히게 되었습니다. 조조가 원소의 수도인 업을 정복한 후 최염을 별가종사로 삼으면서 기주의 호적을 살펴보니 넉넉히 30만의 병사를 모을 수 있겠다고 하자 최염은 정복된 나라의 신하였지만 조조가 도탄에 빠진 백성들을 구하려 하기보다는 병사들의 수만을 조사하고 있다고 기개 있게 지적하자 좌우의 신하들이 모두 사색이 되었다는 인물이었습니다. 최염은 당시 발군의 인물로 평가받는 친구 사마랑에게 동생인 사마의가 더 뛰어난 인물이 될 것이라고 평가하였으며 사마의를 조정에 추천하였고 조조의 인사담당을 맡아 훌륭하게 일을 처리하였다는 명망을 얻었습니다. 최염은 자신의 조카딸을 조식에게 시집보낸 사이였지만 조비를 후계자로 지지하며 법도에 어긋나는 모습을 한치도 보이지 않았으나 조조의 경계심을 자극하였습니다. 평소 기품과 위엄이 있는 외모에 조정의 대신들이 최염을 앙모하였고 조조조차도 존경하고 두려워하였으나 결국 조조에게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조조를 한나라를 이은 정통으로 삼국지에 기록한 진수조차도 최염은 세인들에게 가장 비통하고 애석하다는 느낌을 주었고 오늘날까지도 억울하게 죄를 받았다고 여겨진다고 위서 <최염전>에 기록하였습니다.
사마의를 천거한 또 한 명의 인물인 순욱은 212년 동소가 조조의 작위를 국공으로 승진시키고 구석의 예물로 공훈을 표창해야 한가고 순욱에게 자문을 구하자 조조가 의로운 군대를 일으킨 것은 조정을 바로잡고 국가를 안정시키기 위함이라며 이에 반대하였습니다. 조조가 손권을 정벌하기 위하여 나서면서 표를 올려 순욱은 시중 광록대부가 되어 병으로 수춘에 머물다 근심 속에 나이 50에 죽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자신의 추천자이며 멘토였던 두 명의 명망 있는 인물이 하루아침에 조조에 의하여 버림받는 모습을 보면서 사마의는 더욱 자신을 숨기려고 마음먹었을지도 모릅니다.
사마의는 오랫동안 고민하였지만 해결하지 못한 문제가 있었는데 이는 쿠데타를 실행할 병력의 문제였습니다. 관직을 그만두고 한 거 중인 사마의가 군사력 문제를 해결할 가능성은 전혀 없었습니다. 이 문제를 해결한 인물은 사마사였습니다. 사마의는 오랜 기간 머릿속으로만 계획을 세우고 연습해서 다듬었을 뿐 단 한 번도 다른 사람과 상의한 적이 없었습니다. 심지어 자신의 두 아들에게도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난제에 부딪힌 사마의는 혼자서 이 계획을 완성하기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사마의는 큰 아들 사마사를 불러 자신이 세워놓은 계획들을 하나씩 들려주었습니다. 사마사는 아버지의 계획을 이미 알고 있었다는 듯 전혀 놀라는 기색도 없었고 사마의가 자신이 생각하는 가장 큰 문제인 무력에 대해 이야기하자 사마사는 호탕하게 말했습니다. ”아버지 죽기를 각오하고 나선 군사 3천 명이면 충분하시겠어요? “ 사마의는 군사들을 어디서 데려올 것인지 묻지도 않았습니다. 사마사는 생각 없이 말하는 법이 없었던 자식이었습니다. 사마사의 첫 부인 하후휘가 234년 독살되었기 전부터 사마사는 오랜 기간 준비하였던 일이었을 것입니다. 결국 249년 사마씨 가문은 고평릉의 난으로 조방을 폐위하고 고귀향공 조모를 황제로 세웠다가 백주대낮에 조모 황제를 죽이고 진류왕 조환을 세웠다가 사마염에 이르러 진으로 선위 하였습니다.
진서를 편찬토록 명한 당태종 이세민은 사마의를 평하여 살아서는 실을 겁내어 전진하지 못하였고 죽어서는 허를 의심하여 오히려 달아나니, 좋은 장수의 도가 여기에서 그르쳐졌다고 하면서 문제와 명제 두 임금의 유조를 받았고 문제 명제 제왕 조방을 보좌하였으며 명제 조예에게서 차마 죽지 못하고 오기를 기다렸다는 부탁을 받았으면서도 보답하지 않고 후사를 부탁했던 명제 능의 흙이 채 마르기도 전에 급하게 후손들을 주륙 하니 신하로서 어찌 이 같을 수 있겠는가라며 사마의가 선을 다했다는 것은 이로 인해 의심스럽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위진남북조 시절 후조를 세운 창업자 석륵은 조조와 사마의를 고아와 과부를 속이고 여우처럼 아첨하여 천하를 차지하였다고 평했으며 후손인 동진의 명제는 신하 왕도의 말을 듣고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수 있겠는가!“라고 평했다고 진서 선제기의 <사마의전>에 기록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