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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Jul 18. 2023

<제18화> 문제적 인물 조조 그리고 조비

조조만큼 호불호가 명확하게 엇갈리는 인물도 드물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삼국지를 기록한 진수는 진나라 신하였고 진나라는 위나라를 승계했으므로 당연히 삼국지는 위를 정통으로 기록하였습니다. 하지만 정강의 변이라는 치욕을 겪은 남송의 유학자들은 거란족과 여진족 몽골족에 당하는 자신들의 처지를 익주 구석에서 한나라 정통을 외치던 촉한의 유비에게 감정이입을 하였습니다. 조조를 주인공으로 하는 첫 삼국지는 일본의 요시카와 에이지가 1939년에 처음 썼다고 합니다. 중국에서는 1959년 조조 재평가를 논의한 역사회의에서 곽말약이 주장한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나라 헌제를 축출하고 새로운 나라를 세운 조조를 찬탈자라고 보는 것은 심히 얼토당토않은 부당한 일이다. 실제로 한의 지배계급은 제3대 장제 이후 백성을 다스릴 여하한 명분도 없었다. 그들은 백성의 고혈을 짜내는 일만을 능사로 하는 불한당과 모리배들을 관리로 삼고 선비 출신의 관리를 몰아냈다. 한나라 조정은 외척과 환관들의 온갖 비행으로 부도덕한 지배계급이었을 뿐이다. 당시의 부패상은 이루 말할 수 없얶음은 수많은 역사적 문헌이 확연히 증거 해주고 있다. 그런데 어찌하여 부도덕한 지배계급을 몰아낸 것이 찬탈인가? 백성들의 곤욕을 구제해 준 것이 배반이라면 무엇이 정의이며 가치인가 묻지 않을 수 없다.     

실제 후한의 역대 황제들의 즉위 연령과 재위기간을 보면 누구나 제대로 된 왕조가 아닌 것을 판단할 수 있습니다. 4대 화제 10세 즉위, 5대 상제 생후 100일에 즉위, 6대 안제 13세 즉위, 7대 소제 6개월 재위, 8대 순제 11세 즉위, 12대 충제 6개월 재위, 12대 질제 8세 즉위 9세 사망, 11대 환제 15세 즉위, 12대 영제 13세 즉위이며 그러다 보니 국정은 엉망이고 2세기 초인 안제부터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2세기말인 영제 재위시인 184년까지 대규모 농민반란만 40여 건이 발생하였습니다.      


조조의 큰 특징은 첫째, 인재제일주의자였고 둘째, 나라와 백성을 앞세운 패도주의자였으며 셋째, 인생을 관조하는 인문주의자였다고 평가되고 있습니다.

첫째, 조조는 210년에 인재를 구하는 포고문에서 유능한 인재라면 ‘불인불효’한 자일 지라도 그 죄를 묻지 않겠다고 공언하였습니다. 조조는 자신을 배반했던 사람일지라도 유능한 자일 경우에는 과거를 불문에 부치고 기꺼이 받아들이는 모습을 보여주었습니다. 조조는 단순히 지략만을 토대로 천하를 평정하는 것이 아니라 뛰어난 천하의 인재들을 모아 난세를 구하겠다는 비전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조조는 전한의 한무제 이후 왕조에서 유가의 통치사상을 기본으로 하였으나 삼국시대와 같은 혼란기에는 유가보다는 법가가 시대에 맞다고 생각하였습니다. 유가에서는 효를 강조하다 보니 사적으로 하는 부모의 원수에 대한 복수에 관대했으며 효를 강조하다 보니 후장을 당연시하였으나 조조는 이는 혼란을 가중시키는 일이라면서 사적인 복수를 금지하고 자신부터 후장을 금할 것을 지시하였습니다. 조조는 수많은 병법서를 저술하고 주를 달았다고 수서 경적지에 전해지고 있습니다. 손자병법 3권과 병서접요 10권 병법접요 3권, 병서약요 9권을 저술했다고 하나 오직 손자병법 주석서만 전해지고 있습니다.  조조는 또한 뛰어난 인문학자로 조조가 지은 시문들이 위무제집 20여 권에 기록되어 있다고 하였으나 현재는 30여 편의 시와 1백 수의 문장만이 남아있을 뿐입니다.      


그런 조조가 정권을 안정시킨 다음 가장 유력한 후계자로 염두에 둔 인물은 조충이었습니다. 삼국지 <조충전>에는 조충에 재능과 인덕에 관한 에피소드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조충이 6살 때 손권이 거대한 코끼리를 선물로 보내왔다. 조조는 무게를 알고 싶어 신하들에게 물었으나 모두 그 방법을 생각해내지 못했는데 조충이 말했다.

“코끼리를 큰 배에 올려놓고, 물이 올라온 흔적을 칼로 그어둔 다음, 같은 양의 물체를 배에 올려놓아 재어보면 무게를 알 수 있습니다.”라고 해법을 제시한 것입니다.      

조충의 인덕에 관한 에피소드는 

조조의 창고 관리자가 조조의 말안장을 창고의 쥐가 갉아먹자 죽게 될 것을 두려워하였다. 조충이 그에게 말했다. “사흘만 기다렸다가 정오에 자수해라.” 

조충은 칼로 자신의 홑옷을 찢어 쥐가 물어뜯은 것처럼 하고, 거짓으로 실의에 빠진 양 얼굴에 수심이 가득하게 꾸몄다. 조조가 그 원인을 물으니 조충이 대답했다.

“세속에서는 쥐가 옷을 물어뜯으면 옷 주인에게 안 좋은 일이 생긴다고 합니다. 지금 저의 홑옷이 쥐에게 물어뜯겼기 때문에 걱정하며 번뇌하는 것입니다.

조조가 말했다.

”이것은 허튼소리이니 괴로워하지 마라.

잠시 후 창고 관리가 쥐가 말안장을 갉아먹었다고 보고하자 조조가 웃으며 말했다.

“내 아이는 옷이 제 곁에 있었는데도 쥐가 물어뜯었거늘, 하물며 기둥에 걸려 있는 말안장임 이랴!”

조충은 어질고 자애로우며 식견도 넓었으므로 일을 처리하는 방식이 모두 이와 같았다. 

208년 조충이 13세에 병에 걸려 죽자 조조는 매우 슬퍼했다. 조비가 위로하자 조조가 말했다.

“그 애가 죽은 것은 나에게는 불행이지만, 이제 그 애는 너희와 왕위를 다툴 수 없으니 너희에게는 행운이다.”      

조조의 첫 번째 처는 정부인이었으나 자식이 없었습니다. 첩 유 씨가 조앙을 낳고 일찍 죽자 정부인이 키웠는데 큰 아들 조앙이 장수와의 싸움에서 죽자 정부인은 분노하여 처가로 돌아갔고 조조는 변 씨를 왕비로 삼았다고 합니다. 변 씨는 원래는 가기 출신으로 20세에 초현에 있던 조조가 첩으로 삼았습니다. 조조를 따라 낙양에 왔는데 동탁이 난을 일으키자 조조는 몰래 동탁을 떠나 동쪽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원술이 조조의 집으로 와서 조조가 이미 죽었다고 변 씨 등에게 알려주자 낙양에 있던 모든 첩들이 고향으로 돌아가겠다고 나섰다고 합니다. 변 씨가 이들을 제지하며

“부군의 생사 여부를 아직 확실히 알지도 못하면서 여러분이 오늘 집으로 달아나 버린 다음 내일 부군이 온다면 우리는 무슨 낯으로 부군을 바라볼 것이오. 설령 화가 눈앞에 닥칠지라도 함께 죽는다면 무슨 두려움이 있겠소.”

조조의 첩들은 모두 변 씨의 말을 쫓았고 훗날 조조가 이를 크게 칭찬하였다고 합니다.      


변 씨가 나은 셋째 아들 조식이 재능이 있고 특히 글을 짓는 능력이 뛰어났습니다. 조조의 마음이 조식에게 기울자 조조의 총신 정의와 황문시랑 정이, 승상주부 양수 등이 은근히 조식을 후계자로 삼도록 권하였습니다. 특히 정의와 정이의 아버지 정충은 헌제가 장안에서 낙양으로 돌아와 있을 때 조조에게 헌제를 모실 것을 건의했던 인물이었습니다. 정충은 일찍 죽었으나 평소 조조는 정의를 사윗감으로 생각하고 조비와 상의하였습니다. 조비는 정의가 한쪽 눈이 정상이 아니라면서 청하공주를 복파장군 하후돈의 아들 하후무에게 시집보내도록 하였습니다. 훗날 조조가 정의와 만나 서로 대화하다 보니 정의의 재주가 비상한 것을 알고 탄식했다고 합니다.

“정의는 뛰어난 인물이다. 설령 두 눈이 멀었다 하더라도 당연히 딸을 주어야 했거늘 하물며 애꾸눈임에야 말한 것이 있겠는가.” 이일로 정의도 조비에게 원한을 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정의의 동생 정이도 박학하고 견문이 넓었는데 어느 날 조조에게 건의하였습니다.

“조식은 천성이 어질고 효성스러우며 총명하고 지혜가 있으니 아마도 대현일 것입니다. 넓은 학식과 깊은 견문이 있고 문장이 매우 뛰어나니 아마도 세상에 보기 드문 인재라 할 것입니다.” 조조가 이들의 말을 듣고 조식을 후계자로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조비를 지지하는 세력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상서 최염은 조조에게 공개된 편지를 보내며 간했습니다.

“춘추의 대의에 따르면 마땅히 장자를 세워야 하고 또한 조비는 인효하고 총명하니 응당 대통을 이어야 합니다.”

상서복야 모개는 위왕 조조에게 이같이 간했습니다.

“근자에 원소는 적서를 분명히 하지 않아 일족이 전멸하고 나라 또한 망했습니다.”

동조연 형옹도 조비를 지지하며 간했습니다.

“적자가 아닌 서자로 대통을 대신하는 것은 옛날부터 경계하는 것입니다.” 

조조가 태중대부 가후에게 의견을 묻자 가후가 묵연히 대답하지 않았습니다. 조조가 의아하게 생각하며 대답하지 않는 연유를 물었습니다. 가후는

“신은 원소와 유표 부자간의 일들을 생각하던 중이었습니다.”

이로써 조조의 마음은 거의 조비에게 기울게 되었습니다.      


조조는 다음과 같은 사건이 발생한 다음 마음을 확정하였습니다. 

조조가 출정할 때 조비와 조식이 배송길에 나와서 조조를 배웅하는데 조식은 조조의 공덕을 칭송하는 문장을 노래하자 좌우의 사람들이 모두 감탄하였습니다. 조비의 심복 오 질은 다가와 조비에게 속삭였습니다.

“왕이 떠나려 할 때 눈물만 흘리기만 하면 됩니다.”

환송인사를 할 때 조비는 눈물을 흘리며 절을 올렸고 조조와 좌우 사람들은 비감한 마음이 들면서 조식의 문장이 화려하지만 조비의 마음에 미치지 못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조식은 다정다감한 성격으로 장군으로 임명되어 출정명령을 받았으나 이틀 동안 술에 취해 있기도 하였고 후계자 문제가 확정된 다음에 황제의 전용도로인 치도로 수레를 타고 달려가다 조조가 대로하여 차도를 관리하는 공거령이 참형에 처해진 적도 있었습니다. 한 번은 조식의 처가 비단을 수놓은 옷을 입고 있다가 조조의 눈에 띈 적이 있었습니다. 조조는 그녀가 법규를 어겼음을 알고 그녀를 친정으로 돌려보낸 뒤 사약을 내려 죽게 하였습니다. 이로써 조식은 조조의 마음에서 완전히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조비가 태자에 책봉된 다음 너무 기쁜 나머지 의랑 신비의 목을 두 팔로 끌어안은 채 흥분된 어조로 이같이 말했다고 합니다.

“군은 내가 얼마나 기분이 좋은지를 알 수 있겠소.”

신비가 집에 돌아와 자신의 딸인 신헌영에게 이야기하자 헌영이 탄식했다고 합니다.

“태자는 군위를 승계해 종묘사직을 받들 사람입니다. 군의의 승계는 슬퍼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되고 종묘시작을 받드는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없으면 안 됩니다. 하지만 조비는 오히려 기뻐하니 어찌 능히 오래가겠습니까. 위나라가 창성하지 못할까 두렵습니다.      

조비가 생각지도 못한 시기에 태자가 되자 스스로도 의아하게 생각하여 관상을 잘 보는 고원려라는 사람에게 물어보았다고 합니다. 고원려가

”앞으로 그 고귀함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

얼마 후 조비는 헌제로부터 선양을 받아 황제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조비는 고원려에게 자신의 수명을 물었지만 고원려가 난색을 표했다고 합니다. 조비가 다그치자

”수명은 40세 때 작은 고통이 있겠지만 이때를 지나면 근심할 것이 없습니다. “


조비는 226년 나이 40세에 천자의 자리에 오른 지 7년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조비의 업적은 위나라의 인사제도인 소위 ‘구품중정법’이라는 제도를 확정 지은 것입니다. 후대의 곽말약은 조비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였습니다.     

”정치의식은 아우인 조식보다 훨씬 고명하였다. 정치적 풍도 역시 부친인 조조보다도 뛰어났다고 할 수 있다. 예를 들면 환관의 월권행위를 차단한 일과 태후의 정치관여를 금지시킨 일, 경력보다는 실적 위주로 인재를 등용했던 일, 조세를 경감하고 절검에 힘썼던 일 등이 그것이다. 그가 겨우 40세밖에 살지 못해 황제 재위 7년 만에 죽은 것이 애석한 점이라고 할 수 있다. 그가 만일  70~80세까지 살았다면 위나라가 사마씨에게 제위를 찬탈당하는 일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      

조조는 평소 사마의라는 인물을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마의에 대한 경계를 늦추지 않았습니다. 조비는 이를 무시하고 사마의를 중용함으로써 사마의에게 길을 열어준 셈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궈모뤄의 말대로 조비가 장수하였더라면 위나라가 사마의에게 넘어가는 일은 발생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랬다면 위진남북조시대의 참혹한 혼란은 일어나지 않았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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