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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Jul 17. 2023

<제17화> 이릉대전

관도, 적벽, 이릉 삼국지 3대 대전은 4백 년 한나라 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하여 새로운 사회로의 전환을 위한 몸부림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건달인 한고조 유방이 세운 전한은 200년이 지나면서 막강해진 외척 세력인 왕망에 의하여 전한이 망하였고, 호족인 광무제 유수가 세운 후한은 200년의 모순 속에서 명문가들은 향거리선제로 서로 관직을 추천해 주면서 관직을 독점했습니다. 명문가들은 환관들과도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지만 후한 사회의 반대편에서는 기존 체제에 대한 반발이 점차 일어났습니다. 그 세력의 가장 왼쪽에는 황건 농민들이 있었고 약간 우측에는 일민이라고 체제를 거부하는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일민들은 제갈량을 추천했던 수경선생처럼 숨어 지내며 기존 체제에는 동화되지 않는 식자들로 이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죽림칠현으로 연결되었고 때로는 반체제 인사로 처형당하거나 혹은 권세가의 부름을 받고 관직에 진출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그 우편에는 청의파 인사로 환관과 명문가들이 독점한 관직 사회를 비판하면서 때로는 금고형 등 처벌을 받으면서도 세력을 늘려갔고 이들이 위진남북조 시대의 귀족으로 이어졌다고 평가됩니다.      


관도, 적벽, 이릉 대전은 후한 사회의 기득권을 재편하기 위하여 힘에 의한 서열정리를 하는 과정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당대의 관점에서 가장 유력한 인물은 당연히 명문가인 여남 원 씨를 대표하는 원소입니다. 원소는 인재를 등용할 때 가문과 평판을 중요시했습니다. 조조 편에서 서서 원술을 격파한 유비가 동승이 만든 연판장에 서명한 다음 조조에 대항하다 조조군에게 패하고 원소 밑으로 가려고 할 때, 정현이 써 준 추천장 하나가 힘을 발휘하였습니다. 유비의 스승 노식과 같은 마융의 제자인 대학자 정현이 써준 증서로 원소의 마음을 변하게 하는 것이 가능해졌습니다. 이에 반하여 한족 출신인 조조는 유재시거라는 능력 위주의 인재관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구현령’을 내리며 재능이 있다면 인품은 다음 문제라는 것이었습니다. 손권도 유비도 홀대한 방통을 진문 밖으로까지 달려 나가 영접한 인물은 조조가 유일하였습니다. 외모를 중시하는 손권과 외모와 평판 사이에서 고민하는 유비와는 달리 조조는 인재재일의 관점을 가지고 능력만 있으면 다른 점은 무시하고 받아들였었다고 보입니다. 기존의 고정관념을 넘는 실리 위주의 관점으로 구태의연한 원소를 격파한 것입니다.     

순욱과 마찬가지로 처음 원소를 섬기다가 다시 조조를 섬기게 된 영천군의 명사 곽가는 조조와 원소를 비교하면서 원소를 비판했습니다.

 ”후한 말, 정치는 관치로 인해 잘못되었는데, 원소는 관치로 관치의 잘못을 해결하려 했으니(以寬濟寬), 이 때문에 다스려지지 않는 것입니다. 조공께서는 그것을 엄한 행정으로 바로잡으시니(糾之以盲), 상하가 모두 제도를 알게 되었습니다. “ 곽가는 이것이 조조가 원소보다 뛰어난 점이라고 평가했습니다.  

  원소는 동탁이 세운 헌제의 정통성을 인정할 수 없었기에 우물쭈물하였고 실리에 따라 빠르게 판단하는는 조조를 당해낼 수 없었습니다. 한때 조조는 원소의 부하 장수로 남을 것인가를 고민했지만 정욱의 격한 반대로 가족들을 원소에게 인질로 보내려던 마음을 접었습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를 격파하고 원소의 아들들마저 일소하고 나자 이제 조조는 거칠 것이 없다고 판단하고 형주를 얻자마자 강동을 접수하러 나간 것입니다.      

조조가 위나라의 시스템을 정비하면서 매뉴얼로 움직이는 체제를 만들어갔다면 손권의 오나라는 호족들의 연합 정권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강동의 4대 가문인 육 씨, 장 씨, 주 씨, 고씨 가문은 외지에서 무력만으로 성장한 손 씨 가문을 두려워하면서도 가볍게 생각했습니다. 손견이 오 씨 부인에게 청혼하자 오 씨 가문이 강하게 반발한 것이 그 한 예입니다. 다행히 오 씨 부인이 과감한 선택을 하였고 주 씨 가문의 주유가 손책의 동지가 되었기에 강동의 민심을 차츰 얻어갈 수 있었습니다. 손책이 죽은 다음에 주유는 장소와 힘을 합하여 손권을 주군으로 섬겼기에 손권의 기반이 잡혀 갔습니다. 손권은 장소와 같은 강동 호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노숙과 주유의 동조를 얻고 전쟁을 선택하였고 조조는 적벽에서 패한 후 천하통일의 마음을 접고 중원의 패자로 만족하였습니다. 조조는 강동의 호족들이 자신에 대항하기보다는 형주 호족들처럼 안정을 선택할 것이라고 계산하였다가 실패를 맛본 것이었습니다.      


 이릉대전을 도발한 유비는 과거 형주에서 유표의 객장으로 지내면서 비육지탄을 말하던 시절을 벗어났습니다. 익주로 쳐들어가면서 방통에게 자신의 고민을 말했듯이 유비의 정치적 선택은 항상 조조 반대편으로 가는 길이었습니다. 하지만 방통은 난세와 평화시의 선택의 기준이 다르다고 유비를 설득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비가 촉의 양회와 고패의 목을 베고 성도를 향해 진격하면서 연전연승하자 유비의 긴장이 풀어졌습니다. 방통이 유비에게 ”다른 사람의 나라를 토벌하고 즐겁다고 여기는 것은 어진 사람의 군대가 아닙니다. “라고 하자 술에 취한 유비는 무왕의 예를 들며 방통에게 화를 냈습니다. 평소의 유비와는 다른 모습을 보인 것입니다. 유비는 곧바로 후회하고 방통과의 관계를 회복시켰지만 유비의 내면에 실리와 명분 사이에서 많은 갈등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생각됩니다.      


유비는 촉을 점령하고 익주 평정의 공신들에게 금, 은, 동전과 비단 등을 하사하였습니다. 또 여러 부하가 성도성 안에 있는 집과 성 밖의 논밭, 과수원, 채소밭 등을 장수들에게 나눠주자고 건의했지만 유비가 조운의 진언을 듣고 생각을 바꿨다고 기록되었습니다. 배송지주에 인용된 <조운별전>의 기록이 맞다면 유비의 군대는 촉을 점령한 다음에 보여준 행동은 도적의 무리와 차이가 없는 행동이었습니다. 유일하게 도적과 같은 행동에 반대를 한 조운은 유비가 생존했을 당시 황충보다 낮은 대우를 받았습니다. 관우, 장비, 마초, 황충보다 낮은 위치였고 오호대장군은 훗날 진수가 편집한 것이었습니다.   

   

촉이라는 확실한 기반이 생기면서 유비도 조금씩 달라지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삼국지 촉서 <주군전>에 등장하는 장유는 유장 밑에서 종사로 있었는데 당시 유장의 부하들과 유비의 사이는 불편한 관계였습니다. 장유는 수염이 풍성하였는데 유비가 처음 만나을 때 비웃으면서 말하길 
 ”예전에 내가 탁현에 살 때 모(毛)씨 성을 가진 자가 많아 동서남북이 다 모씨 집이었소. 탁현 현령이 ‘수많은 털이 탁을 에워싸고 사는구나!’라고 했소. “

이는 ‘똥구멍’을 뜻하는 한자는 똥구명 고(尻)인데 지명인 물 이름 탁(涿)과 당시에는 음이 비슷한 것을 피예로 장유를 놀린 것입니다. 이에 장유는

”예전에 노현의 장이었다가 탁현의 현령으로 승진한 자가 있었는데, 관직을 마치고 집에 돌아갔고 편지를 주었는데 노현이라고 쓰면 탁현을 무시하는 것이고, 탁현이라고 쓰면 노현을 무시하는 것이므로 노탁군으로 쓴다고 되어 있습니다. “

이는 노출을 뜻하는 한자는 이슬 로(露)인데 지명의 물 이름 로(潞)와 음이 같아서 수염이 없어서 노출되었다는 이야기를 노현이라고 말하면서 유비의 콤플렉스인 수염이 없는 것을 비꼰 것이라고 합니다. 불쾌해진 유비는 늘 장유가 불손하다고 미워하고 있었는데 유비와 조조가 한중을 사이에 두고 다투었을 때, 장유가 군세가 불리할 것이라고 말한 것을 기회로 삼아서 사형에 처하려고 마음먹었습니다. 유비는 같은 의견을 제시한 주군에 대해서는 불문에 부치면서도 장유만을 문제 삼아 사형에 처하려고 했습니다. 제갈량이 표를 올려 그 죄를 용서해 달라고 청하였지만 유비는

”향기 나는 난초가 문에 돋아난다면 부득이 베지 않을 수 없소. “라면서 결국 저잣거리에서 사형에 처하였습니다. 유비도 달라진 것입니다. 촉서 <주군전>을 기록한 진수는 장유가 예언한 220년에 천하는 유씨의 천하가 무너질 것이고 유비가 익주를 얻은 때부터 9년 뒤인 222년과 223년 사이에 그것을 잃을 것이라는 말들이 모두 장유가 예측한 대로 220년 조비가 위를 세우면서 헌제가 물러났고 유비가 223년에 백제성에서 붕어하면서 모두 들어맞았다고 강조하고 있습니다.     

  

유비가 관우의 정벌을 내세우자 촉의 신하들 대다수는 동오 정벌에 대부분 반대하였습니다. 비시와 상서령 유파, 주부 옹무 등은 유비의 칭제에 반대하였고 익군장군 조운과 종사좨주 진복은 동오 정벌을 반대했습니다. 조운은 ”나라의 역적은 조조이지 손권이 아닙니다. 위를 놔두고 먼저 오와 싸우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라고 건의했지만 조운은 동오 정벌군에 합류하지 못하였습니다. 유비의 황제 등극을 반대한 비시는 직급을 강등당하는 수모를 당했고 옹무는 목숨을 잃었고 진복은 투옥되었습니다. 유파만은 별다른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촉의 모든 신하들이 침묵했습니다.      

이릉대전이 시작된 시기는 221년이고 관우가 손권에 의하여 처형된 것은 219년이었습니다. 약 1년 반의 시간이 있었습니다. 관우가 죽은 직후 조조가 죽었습니다. 유비는 조조 사후의 위나라 형세를 관망하였습니다. 조비의 권력 승계과정에서의 빈틈을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조조는 자신의 사후 혼란을 대비하여 대비책을 강구해 놓았습니다. 손권과 동맹을 맺었고 유비의 북진에 대비하여 진령산맥을 경계로 방어선을 준비했습니다. 조비 측근에 유능한 인재들을 배치해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였습니다.      


조조가 죽은 틈을 노려 서북지역인 하서주랑에서 반란이 일어났고 북방에서 이민족들의 침입이 있었지만 유비는 보다 결정적인 상황을 기다리다 시기를 놓였습니다. 유비가 기다리는 사이 조비는 정국을 안정시키고 헌제에게서 선위를 받아내어 천자의 자리에 올랐습니다. 이제 위나라는 안정되어갔고 오히려 유비의 지위가 위협을 받게 되었습니다. 유비는 이제 위나라에 대한 기대를 접고 방향을 돌려 관우에 대한 복수를 명분으로 형주의 지배권을 회복하여 실리를 찾고자 방향전환 하였습니다. 유비의 오나라 공략은 관우에 대한 복수보다는 형주에 대한 욕심이 더 작용했을 것으로 보입니다. 제갈량의 융중대의 천하삼분지계에서 형주와 익주는 필수요소였습니다. 유비와 함께 익주로 들어온 형주 출신들은 동정계획에 동조하였으나 대체로 반대하는 의견이 압도적이었습니다.      

조비는 황제가 된 직후 태위 가후를 불러 자문을 구하였습니다.

“짐은 천자의 명령에 복종하지 않는 자들을 토벌하려 하는데 오와 촉 중 어느쪽을 먼저 처야 하겠소?”

가후는 “오와 촉은 작은 나라지만 산과 강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유비는 영웅이고 제갈량의 재능은 출중합니다. 손권은 허실을 식별하며 육손은 군을 운용하는 능력이 범상하지 않습니다. 둘 다 도모하기에 간단한 사업이 아닙니다.”     

조비는 만족스럽지 않았지만 촉의 동태에 관심을 기울이며 유비가 관우의 복수를 할 것인가에 대한 중신들의 의견을 물었습니다. 중신들은 모두 촉은 작은 나라이고 명장이라고는 오직 관우 뿐인데 출병할 까닭이 없다고 대답했습니다. 오직 유엽만이 다른 의견을 냈습니다.

“촉이 비록 작지만 유비는 오히려 강함을 보여주고자 할 것입니다. 또 관우와 유비는 군신지간을 넘어서 혈족의 사이와 같습니다. 유비는 여론이 두려워서라도 반드시 관우의 보복을 감행할 것입니다.
  향후 경과는 유엽의 예측되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릉대전은 결국 손권의 승리로 마무리되었습니다. 그 원인은 3가지로 첫째, 손권의 유비무환, 둘째, 유비의 무모한 고집, 셋째, 육손의 용병술로 정리할 수 있습니다.      

첫째 손권의 유비무환 

손권은 정치와 군사 두 방면에서 충분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형주 쟁탈전 이전인 217년 손권은 조조에게 사신을 보냈습니다. 투항 의사를 표시한 것입니다. 조조도 화답을 했고 형주 쟁탈전에서의 조조와 손권의 관우 합동공격이 사작되었습니다. 220년 조비가 황제가 되었습니다 촉에서는 격렬한 비난 반응을 보냈지만 손권은 침묵을 지켰습니다. 221년 7월 유비가 오나라 정벌을 선언하자 손권은 조비에게 스스로 신하를 자처했습니다. 221년 11월 손권은 조비가 책봉한 오왕의 칭호를 받고 연호를 황무로 정합니다. 조비와 유비는 황제가 되었고 손권은 독립왕국의 국왕이 되어 3국 정립이 시작되었습니다.      

손권이 조비에게 진심으로 복종한 것은 물론 아닙니다. 손권은 조비의 신하를 자청했지만 형주에서 포로가 된 우금의 송환을 미루고 아들을 인질로 보내겠다는 약속도 미루기만 하였습니다. 그러다가 유비가 221년 7월 정벌에 나선 이후인 8월 우금 등 포로를 송환하였습니다. 손권의 아들을 포로로 보내지도 않았습니다. 조비가 유엽에게 의견을 물으니 유엽은 촉이 오를 공격하는 기회를 이용하여 장강을 건너 오나라를 공격할 것을 건의하였습니다. 오가 망하면 촉만 남는다는 것입니다. 

조비가 항복한 오를 공격 하면 천하 사람들의 의심을 얻는다고 반론하자 유엽은

”우리가 오를 정벌한다는 소문이 나면 유비는 오가 멸망한다고 기뻐하지 계획을 고쳐 오를 구원 하지는 않을 것은 필연적인 형세입니다. “ 

하지만 조비의 허영심은 천하통일의 대업의 기회를 놓치게 하였습니다.      

손권은 군사적 준비도 차근차근하였습니다. 

”승냥이와 이리가 우리 주위에 있는데 어찌 준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라면서 반대 여론을 무릅쓰고 221년 4월 수도를 공안에서 악성으로 옮기고 지명을 무창으로 개명하였습니다. 아울러 무창, 하치, 심양, 양신 시상 사선 등 6개 현을 통합하여 무창군으로 재편했습니다. 

이에 비하면 유비는 전쟁 준비보다는 황제로 칭하는데 급급하였습니다. 221년 5월 성도 서북의 무담산에서 황제 즉위식을 거행하고 6월 병력을 점검한 다음 7월 출병하였습니다. 장비에게도 강주에서 합류할 것을 명령하였으나 범강과 장달에 의하여 피살되었고 그의 머리는 손권 진영으로 보내졌습니다. 유비는 왕을 자칭한 후 4명의 상장만을 임명했습니다. 전장군 관우, 우장군 장비, 좌장군 마초, 후장군 황충이었습니다. 조운은 익군장군일 뿐이었습니다. 진수가 삼국지를 쓰면서 조운을 추가하여 5명을 같은 반열로 올린 것입니다. 이들 중 관우는 형주에서 죽었고 황충은 1년 전에 병으로 죽고, 장비가 갑자기 죽어버린 것입니다. 마초는 북방에서 방어를 맡아야 했고 조운은 유비의 신임을 받지 못했습니다. 모사인 방통은 214년에 죽었고 법정은 220년에 죽었습니다. 결국 유비 곁에는 믿음직한 장군과 지략이 뛰어난 모사들이 없었습니다.    

  

둘째 유비의 무모한 고집      

위나라의 대부분의 관리들이 유비의 오나라 공격을 부정했을 정도로 유비의 세력은 가장 미약했습니다. 하지만 유비는 자신의 고집으로 추진하였습니다. 물론 유비가 단순하게 관우의 복수전의 의미로 동오 정벌에 나섰다는 것은 돗자리 장수에서 황제에 오른 유비의 노회함을 감안하지 않은 평가라고 볼 수 있습니다. 유비는 조조와 손권처럼 가문의 힘이 아닌 100% 독자적인 자신의 힘만으로 황제에 오른 입지전적인 인물이었습니다. 황족의 후손이라는 위광이 있었다지만, 유요, 유표, 유장과 같은 황족인 가문의 유산을 물려받은 인물들과는 달리 유비는 빈손에서 일어선 인물이었습니다.      

유비는 첫째, 유엽의 평가처럼 관우의 복수에 나설 수밖에 없는 의리로 맺어진 끈끈한 사이였고 둘째, 당시 약육강식의 사회에서 자신의 존재감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습니다. 위나라는 너무 강했었고 관우를 죽인 지략가인 여몽은 오나라에서 이미 죽었고 일개 서생인 육손은 유비 자신이 가볍게 다룰 수 있는 인물이라고 판단했습니다. 셋째로 형주를 탈환하여야 형주와 익주에서 위나라를 처들어간다는 제갈량의 융중대의 전략을 실천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융중대의 전략의 기본인 오와 연합하여 위를 멸한다는 원칙은 무시되었고 전쟁의 결정 과정이 너무나 조급하였다는 비판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당시 편장군이었던 황권은 유비의 전략이 너무 위험하다며 

”우리 군대가 강을 따라 공격하기는 쉬우나 퇴각하기는 어렵습니다. 때문에 신이 감히 선봉에 나설 것을 간청하는 바입니다. 전하를 위하여 상황을 타진해 보겠습니다. 전하는 후방에서 지휘만 하시면 됩니다. “

하지만 유비는 황권을 후방으로 배치하였습니다.      


셋째 육손의 냉정한 용병술

당시 오나라의 역전의 장군들은 정면 대결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육손은 수비만 하였습니다. 그러다 얼마 후 수비군들에게 대대적인 철수를 명령하였습니다. 싸울 기회를 만나지 못한 유비는 어쩔 수 없이 장군 오반에게 병사를 수천 명을 동원하여 평지에 군영을 치고 계곡에 8천 명을 매복하여 유인하였습니다. 육손은 넘어가지 않았습니다. 오나라를 더 이상 속일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유비가 복병을 노출시키자 오나라 장군들은 육손의 예측에 탄복했습니다.      

유비군이 수개월 동안 싸울 기회도 만나지 못하고 보급이 원활하지 못하여 식량조차 부족해지고 날씨는 점점 무더워져 갔습니다. 유비의 군사들은 투지와 사기가 갈수록 떨어졌습니다. 유비의 군사들은 어느새  무협에서부터 이릉까지 수십 개의 군영이 7백 리에 걸쳐 이어졌습니다. 

삼국지 <문제기>에는 조비가 ”유비가 병법을 모르는구나! 영을 7백 리에 늘어놓고 어떻게 적에게 대항하는 것이 가능한가? 내가 보기에는 손권의 승전보가 곧 오겠군 “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했다고 합니다.      

육손도 유비 격파 전략을 손권에게 자세하게 보고하면서 승리를 확신하였습니다.

”제가 제일 걱정했던 것은 유비가 수륙으로 함께 진공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뜻밖에도 유비는 유리한 조건을 포기하고 오히려 수군을 상륙시켜 산중에 병영을 구축하여 그의 병영은 온통 연결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는 자신을 패전의 땅으로 내모는 것과 마찬가지입니다. “      

육손의 방법은 간단했습니다 적벽대전 때 이미 사용한 화공법이었습니다. 병사들은 각각 한 묶음씩의 풀을 가지고 유비의 군영에 다가가 불을 지른 다음 공격하였습니다. 결과는 만족스러웠습니다. 촉의 군영 40여 개가 연속으로 함락된 것입니다. 유비는 너무 갑자기 당하는 일이라 속수무책이었습니다. 유비는 겨우 몇 명의 군사들만 데리고 백제성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시체가 수면에 떠올라 장강을 막으면서 아래로 흘러갔다. “고 기록되었습니다.      


육손은 승전한 후 손권이 ”왜 여러 장군들이 그대의 지휘를 따르려 하지 않았을 때 과인에게 보고하지 않은 것이오? “라고 묻자 ”신이 비록 겁이 많고 나약하나 천하의 장군인 인상여가 자신을 낮춘 이야기를 알고 있었습니다. “라고 대답하여 손권이 호탕하게 웃었다고 합니다. 손권의 조카인 손환이 유비군에 포위되어 다른 장군들이 구원병을 요청해도 육손 본인의 계책대로 하면 손환은 자연스레 해결될 것이라고 장담했다고 합니다. 확신이 없었다면 실천할 수 없는 전략이었습니다. 손권은 육손에게 전권을 맡겨 승리를 얻었습니다. 훗날 육손이 손권의 의심 때문에 화병으로 죽은 것을 생각하면 아직 좋은 관계였습니다. 덕분에  229년 손권은 무난하게 황제가 되었습니다. 다음 회에서는 조조에서 조비로의 권력 이양의 의미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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