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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Jul 16. 2023

<제16화> 적벽대전

적벽대전은 삼국지에서 가장 유명한 전쟁입니다.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을 모르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이것은 나관중 덕분이지만 삼국지연의에서 가장 허구가 많은 부분이기도 합니다. 실제로 정사에 나타난 기록은 많지 않고 모순되는 내용도 많다 보니 다양한 주장이 난무하고 있습니다. 그럼 각 등장인물의 관점은 어떠한지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위서 <무제기>에는 208년 12월에 “조조는 적벽에 도착하여 유비와 싸웠지만 형세가 불리했다. 이때 역병이 크게 유행하여 관리와 병사를 많이 잃었으므로 조조는 군대를 이끌고 돌아왔다. 드디어 유비는 형주와 강남의 여러 군을 차지했다.”라고 생각보다 간략하게 기록되었습니다. 그 이전의 상황을 살펴보면 조조는 207년 원 씨 아들들을 멸망시키고 업현으로 귀환하여 208년 1월 삼공을 폐지하고 승상과 어사대부를 설치한 다음 6월에 스스로 승상에 오르면서 독재 체제를 확고하게 다집니다. 이제 황제인 헌제는 조조의 자동거수기 정도의 의미로 전락해 버립니다. 내정을 정비한 조조는 7월 형주를 정복하러 남방으로 향합니다. 그때 유표는 죽고 차남 유종이 형주목에 오릅니다. 유종은 조조와의 전쟁을 선포했지만 토착 호족인 채모, 괴월, 장윤은 항복을 관철시킵니다. 호족들 입장에서 주군이 유종이건 조조건 큰 의미는 없었고 채모는 조조와 친구사이로 거부였습니다. 

 

유표는 조조가 형주 공략에 나선 208년에 사망합니다. 유표의 차남 유종이 형주자사를 이어받았으나 항복하였고 유비는 도망가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항복한 유종이 삼국지연의에서는 우금에 의하여 어머니 채 씨와 피살되었다고 조조와 우금을 악한으로 그렸지만 유종은 청주자사에 임명되었고 열후에 봉해졌습니다. 조조는 항복한 형주의 관리들을 중용하였습니다. 괴월 등 15인이 후에 봉해졌고 특별히 괴월은 광록훈에 임명되었습니다. 유표에게 항복을 권했던 한숭과 유선도 각각 대홍려와 상서령으로 중용되었습니다. 조조는 관대하게 형주 출신 호족들을 대우하였습니다. 유비는 한진에서 관우의 배를 만나 면수를 건넜습니다. 유표의 장남 유기를 만나 하구로 도망쳤고 여기서 유비는 승부수를 던졌습니다. 제갈량을 보내 손권에게 군사동맹을 제의한 것입니다. 

 

조조가 생각하기에는 거칠 것이 없어 보였습니다. 백전노장의 치밀한 병법의 대가인 조조의 입장에서는 특별히 문제 될 것이 없었습니다. 적벽대전 당시 주요 인물의 나이를 살펴보면 조조가 54세임에 비하여 유비가 47세로 가장 많았고 손권이 27세, 제갈량이 27세, 주유가 34세, 노숙이 37세에 불과하였습니다. 조조 관점에서는 유비는 동생뻘이고 손권은 아들 뻘이었습니다. 조조가 생각하기에 요동태수 공손강이 원상의 수급을 조조에게 바친 것처럼 손권이 유비의 수급을 바칠 것이라고 기대하였습니다. 참모들이 대부분 원소 정벌 시절의 리바이벌처럼 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정욱만이 달리 생각했습니다. 위서 <정욱전>에 보면

 

“손권은 막 자리에 올랐으므로 천하의 영웅들이 거리끼지 않을 것입니다. 조공은 천하에 적수가 없으며, 마침 형주를 공략하여 그 위세가 장강의 두 언덕까지 진동했으니, 손권이 비록 모략을 꾸민 들 혼자 조공을 상대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유비에게는 영웅의 명성이 있고, 관우와 장비는 모두 만 명의 적을 감당할 수 있는 자이니, 손권은 반드시 유비에게 도움을 청해 우리 군대를 제어하려고 할 것입니다. 그들을 핍박하는 형세가 되면 흩어지게 될 것이니, 유비가 손권의 원조에 의지하여 세력을 키우고 나면 손권 또한 기회를 얻어 유비를 죽일 수 없을 것입니다.” 상황은 정욱이 예측한 대로 흘러갔습니다. 

 

조조는 손권에게 협박 편지를 한 통 보냈습니다. 편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최근에 본인은 조정의 명을 받들어 죄를 지은 자들을 정벌하고 있소. 군대의 깃발이 남쪽으로 향하자 유종은 바로 손을 들어 투항했소. 이제 본인은 다시 80만 명의 수군을 준비하여 그대와 함께 그대가 머무는 오땅에서 사냥이나 할까 하오.” 이 편지의 원문은 진수의 삼국지에는 보이지 않지만 배송지가 인용한 <강표전>에 등장합니다. 조조의 편지를 받고 시작한 의논에서 참여한 여러 오나라의 신하들은 모두 조공의 기세를 보고 두려워하여 대부분 손권에게 조조를 맞이할 것을 권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조조의 책사인 가후는 적벽대전 그 자체를 반대하였습니다. 강동을 정벌하는 것을 반대한 것입니다. <가후전>에는 가후가 조조에게 간언하여 

“명공께서는 옛날에 원 씨를 쳐부수었고 이제 한남을 되찾았으니 위세와 명성은 멀리까지 떨쳤고 군세는 이미 강성해졌습니다. 만일 초나라의 풍부함을 틈타 관리와 선비들에게 상을 내리고 백성을 위호하고 편안한 땅에서 즐겁게 일하게 한다면, 군대를 수고롭게 하지 않더라도, 강동 사람들은 머리를 조아리며 승복할 것입니다.” 하지만 조조는 가후의 권고를 듣지 않았고 결국 후회하게 되었습니다. 

 

천년 후 송나라 때 사마광이 지은 자치통감에서는 손권은 조조의 편지를 받고 긴급회의를 소집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조조의 협박편지를 전해 들은 대소 관원들은 “모두 손권에게 조조를 맞이할 것을 권”하였지만 오직 노숙만이 한마디도 하지 않았습니다. 손권이 잠시 몸을 일으켜 변소로 갔고 노숙은 손권을 따라 변소 처마 밑에 이르렀습니다. 손권은 노숙의 의견이 궁금하였습니다. 제갈공명이 유비에게 남양의 융중대에서 천하삼분지계를 설파했다면 노숙은 손권에게 이미 천하이분지계라는 미래 오나라의 청사진을 보여주었던 사이였습니다. 노숙은 손권의 가장 아픈 부분을 지적하였습니다. 

 

“저 같은 경우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장군께서는 불가합니다. 왜 그렇겠습니까? 제가 조조에게 투항하면 조조는 저를 고향으로 보내 고향사람들의 평가를 받게 할 것이고, 그렇게 된다면 품행과 재능이 있다는 평을 받겠지요. 그런 다음에는 저는 말단의 작은 관직을 얻어 우거를 타고 다니며 수하를 거느릴 것이고, 사대부들과 교류하면서 한 계단 한 계단 올라가 군수나 주목이 되는 것도 문제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장군께서 조조에게 투항하신다면 어디로 가시겠습니까?”

 

노숙의 이 말은 손권의 마음속에 와닿았습니다. 손권은 탄식하며 말했습니다.

“금방 말한 그들의 의견은 나를 매우 실망시켰소. 그대의 이 말만이 심모원려이며 내 생각과 딱 들어맞으니.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나에게 내려 주신 것이오!”

손권은 22년 후에 황제의 자리에 오르면서 과거를 회상하며 

“애초에 노숙이 오늘을 예견했으니 참으로 사세에 밝았다고 할 수 있겠소.”라고 하였지만 당시 여러 신하들이 와서 축하를 했는데 장소가 홀을 들고 와서 손권의 공덕을 찬양하려 하자 손권은 말을 막으며

“그때 짐이 그대의 말을 들었다면 오늘날 빌어먹고 다녔을 것이오!”라고 말하여 장소가 땅에 엎드리어 땀을 비 오듯 흘렸다고 적혀있는 것을 보면 손권이 그 당시의 논쟁을 항상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노숙이 손권을 위하여 정치적 계산을 해주었지만 군사적인 측면은 주유에게 맡겼습니다. 노숙은 손군에게 파양에 있는 주유를 부르도록 건의하였습니다. 주유는 명령을 받고 바로 시상으로 돌아왔습니다. 신하들은 말하기를 

“조조는 승냥이와 호랑이처럼 사악하고 무섭습니다. 그런데 그는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기대어 천자를 끼고 사방을 정벌하고 움직이면서 조정의 뜻이라고 하니 오늘 그에게 저항한다면 일은 더욱 순조롭지 못할 것입니다.”라고 하자 주유는

 

“조조는 비록 한나라 승상의 명의에 의탁하고 있지만, 사실은 한나라 조정의 적입니다.”라고 명분에서 자신들이 우위에 있음을 강조하면서 말을 시작합니다. 그러면서 조조 군의 4가지 폐단을 지적합니다. 

첫째, 조조는 본토가 불안하고 후환이 없어지지 않고 있음이고 둘째, 기병을 버리고 함선을 사용하여 장점을 버리고 단점을 취하였고 셋째, 겨울이 다가오는 10월이라 말에게 먹일 꼴이 없고 병사들의 보급 물자도 넉넉하지 못하고 넷째, 대군을 동원하여 원정을 감행하니 기후와 풍토가 맞지 않아 반드시 질병이 발생할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이 네 가지는 모두 병법가들이 절대 기피하는 것인데, 조조는 한 가지도 빠지지 않고 모두 저질렀습니다. 제가 볼 때 이 도적을 사로잡을 수 있는 기회는 바로 지금입니다. 장군께서 저에게 3만 명의 정예병을 주신다면, 제가 장군을 위해 조조를 대파할 것을 보증합니다.”

 

처음 손권의 마음은 결정이 쉽지 않았습니다. 조조와 유비 사이에서 누구의 손을 잡아야 하는지 고민하였습니다. 친소를 따진다면 손권과 조조는 사돈지간이었습니다. 조조의 조카딸은 손권의 동생인 손광에게 시집갔고, 조조의 아들인 조창은 손권의 조카딸을 아내로 맞이하였습니다. 하지만 유비와는 아무 사이도 아니었습니다. 세력에 있어서도 삼국지 <유엽전>에는 형주를 정벌할 때 이미 구주의 팔 할을 차지했고 위엄이 천하를 떨첬으며, 위세가 사해를 위협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손권이 고민한 내용은 유비를 돕자니 호랑이를 길러 후환이 생길까 걱정이고 유비를 돕지 않자니 순망치한의 경우가 될까 염려스러운 상황이었습니다. 젊은 손권의 입장에서는 쉽게 결정할 수 없는 사항이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대세를 반전시킨 사람은 유비의 참모 제갈량이었습니다. 자치통감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숙이 당양으로 가서 유비와 제갈량과 만나자 쌍방이 단번에 합의하였다. 이에 유비는 노숙의 계책을 받아들여 악현 번구로 나아가 주둔하였고 제갈량은 노숙과 함께 시상으로 가서 손권과 만났다. 

 

제갈량은 27세의 젊은 손권을 마주하여 말하고 있습니다.

“현재 조조가 이미 중원을 평정하고 형주를 공략하여 그 위세를 사해에 떨쳤습니다. 우리 유장군께서는 영웅이면서도 뜻을 펼칠 기반이 없어 여기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장군께서는 자신의 역량을 헤아려,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 것인지 결단을 내리십시오.”

제갈량의 말은 우리 유장군은 어차피 죽음의 길밖에 없었기 때문에 목숨을 걸고 결사적으로 싸워왔다. 반면 손장군 당신은 뜻을 펼칠 기반이 있어도 적지 않은 근심거리를 갖고 있다. 당신들은 관망하고 의심하며 망설이느라 일이 다급한데도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제갈량은 손권에게 말합니다. 

“만약 강동이 중원과 대항할 수 있다면 일찌감치 조조와 양단간에 결정을 내는 편이 낫습니다. 대항할 수 없다면 응당 대치를 끝내고 머리를 숙여 신하라고 칭하십시오. 장군처럼 그렇게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고 실제로는 다른 마음을 품고 있으면서도, 다급한 상황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곧 큰 화가 닥칠까 걱정스럽습니다.” 

 

마음이 불편해진 손권은 제갈량을 비난합니다.

“그렇다면 너희 유장군은 왜 투항하지 않는 것인가?”

이에 제갈량은 늠름하게 대답합니다.

“옛날 제나라의 장사 전횡은 필부에 불과했는데도 기꺼이 투항하지 않았는데 유장군이 어찌 그럴 수 있겠습니까? 우리 유장군께서는 황실의 후손으로 재능과 지혜가 세상을 덮을 정도라서 많은 사람들이 따르고 있습니다. 우리는 분명히 저항할 것입니다. 만약 저항하다가 실패한다면 그것은 하늘의 뜻입니다. 투항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27세의 손권은 성미가 팔팔하고 혀기가 왕성한 인물이었습니다. “이 손권이 어찌 6군의 땅과 10만의 정예병을 갖고 남에게 제압당한단 말이오?” 손권은 자신의 입장을 표명합니다. 

노숙은 손권을 도와 정치적인 득실을 계산해주었고, 제갈량은 손권을 위해 연맹의 득실을 계산해주었으며 또 주유와 함께 군사적인 득실을 셈해 주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노숙은 전쟁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의 문제를 해결해주었고, 제갈량과 주유는 이길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이제 손권의 마음은 계산이 섰고, 이에 비장의 카드를 꺼냈습니다. 

 

“늙은 도적이 한 황실을 폐하고 자립하려고 한 지 이미 오래되었소. 다만 원소와 원술, 여포와 유표, 그리고 나만을 두려워했을 뿐이오. 지금 여러 영웅들은 모두 사라지고 오직 나만이 여전히 건재하오. 나는 늙은 도적과 절대 공존할 수 없소. 그대가 응당 공격해야 한다고 말하니 나의 생각과 딱 들어맞소. 이는 하늘이 그대를 내게 내려주신 것이오.” 

유비에 관한 기록인 <선주전>에서는 적벽대전의 경과를 다음과 같이 서술합니다.

“손권이 주유와 정보를 파견하여 수군 수만 명을 거느리고 가서 선주와 힘을 합하게 하니 조공을 적벽에서 격파하고 그들의 함선을 불태웠다. 선주가 오군과 수륙으로 진격하여 남군까지 추격하였다 당시 역병이 창궐하여 조조군이 대부분 죽게 되자 조공이 병사들을 이끌고 퇴각하였다. ” 

 

조조군의 패인은 크게 4가지 직접적인 요인을 꼽고 있습니다.

첫째 조조의 군중에 역병이 유행하여 병자가 늘면서 전투력이 감소되었다. 둘째, 조조군이 수전에 익숙지 않아 배 위에서 싸우기 어려웠다. 셋째, 조조가 적의 상황을 치밀하게 헤아리지 못해 스스로 등등한 기세를 상대가 막을 수 없을 것이라고만 생각했지, 정면에서 공격을 받게 될 줄을 예상하지 못했다. 넷째, 양군이 좁은 길에서 만났고 강물 위였으므로 병사가 많아도 유용하지 못하였다. 

 

조조가 예상외로 패한 원인은 가장 큰 이유가 바로 조조의 교만과 적에 대한 무시라고 평가합니다. 관도대전에서 원소가 교만했듯이 조조는 교만해졌습니다. 조조는 관도대전에서의 공손강처럼 손권이 유비의 목을 가져올 것을 기대하였고 손권과 유비가 동맹을 맺을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또 한 가지는 조조가 늙었다는 것입니다. 손권 유비 연합군의 평균 나이는 34세였고 결국 34세의 젊은 세대가 54세의 노장세대를 물리친 것으로도 해석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관도대전의 교훈이 교만한 군대는 필패였듯이 적벽대전도 마찬가지라고 볼 수 있습니다. 

 

208년 10월 양군은 마침내 적벽에서 조우합니다. 조조에게 거짓 투항서를 보낸 황개는 화공을 준비하고 조조군을 향해 진군합니다. 조조군의 선단은 화염에 휩싸여 모조리 타버렸고 육지의 진영도 불바다로 변하고 말았습니다. 주유 군도 상륙하여 토벌에 나서자 조조는 강릉으로 도주하였습니다. 유비는 적벽의 후방 번구에서 관우를 비롯한 2,000여 군사와 포진하고 있었습니다. 전투에 참가하지 않고 전황을 지켜보았습니다. 아마도 손권이 불리했다면 관도대전처럼 도망갔을 것으로 보입니다. 유비군은 피해를 입지 않았고 제갈량의 예언처럼 삼국정립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진수는 위나라를 계승한 진나라의 신하였고 분위기 상 조조에게 불리한 기사들을 축소하였습니다. 조조의 가장 큰 치욕이 적벽대전이어서인지 삼국지에서 적벽대전의 기록은 간단합니다. 반면에 삼국지연의에서 제갈량이 노숙에게 배 20척을 빌려 조조의 화살 10만 개를 얻는 장면은 213년 손권이 조조와의 유수 싸움에서 있었던 실화를 편집한 것이라고 합니다. 관우가 조조를 화용도에서 살려주는 장면도 창작이며 실제 관우는 조조가 여포전에서 여포의 부하 진의록의 아내 두 씨를 주겠다는 약속을 어기고 조조가 차지하자 평생 조조를 용서하지 못했다고 합니다. 덕분에 두 씨의 아들 진랑은 훗날 조예의 고명대신이 될 뻔한 위치까지 올랐다고 합니다. 지금도 시사 다큐보다는 판타지 소설이 인기를 끌 듯 당시도 비슷했던 모양이라고 생각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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