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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책가방 Aug 16. 2023

<제26화> 제갈량과 사마의,
 고명대신의 뒷모습


제갈량과 사마의는 삼국지의 대표적인 라이벌로 평가됩니다. 사마의는 179년 제갈량보다 2년 먼저 태어나서 251년까지 15년 더 오래 장수했습니다. 현실에서는 사마의가 이겼지만 역사에서의 승자는 다릅니다. 사마의의 손자인 진나라의 사마염이 “왜 내게는 제갈량 같은 신하가 없냐?”라고 물으니 촉에서 귀순한 번건이 “억울하게 죽은 등애의 신원도 회복 못해주면서 무슨 제갈량 타령입니까?”라고 핀잔하자 사마염이 즉석에서 등애의 명예를 회복시켜 주었다는 일화처럼 제갈량은 진나라에서도 높은 평가를 받았지만  사마의의 4대손이며 동진의 황제인 명제 사마소는 사마의의 권력 장악 과정을 승상인 왕도에게 듣고 “만약 공의 말대로라면 진나라의 제업이 어찌 길고 멀겠는가!”라고 사마의를 부끄러워했다고 합니다.        


제갈량과 사마의 모두 당대에 능력이 출중하다고 자타가 공인한 인물들입니다. 유비와 조예는 모두 자신의 신하들 중에서 엄선하여 능력과 충성심 모두 최고의 인물로 판단했기에 죽음을 앞두고 고명대신으로 선정했을 것입니다. 그렇다면 역대 고명대신의 앞날에는 항상 준비된 꽃길만 있었을까요? 역사에는 예상치 못한 차가운 반전이 숨어있기도 합니다. 그럼 예측과 현실 그 차이의 기록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223년 유비가 이릉대전에서 참패하고 마지막을 느끼자 승상 제갈량을 백제성으로 불렀습니다. 백제성은 후한 광무제에게 끝까지 저항했던 공손술이 꿈에 백제를 보고 12년간 황제 노릇을 할 것을 기대하면서 장강삼협의 요충지에 백제를 기리며 쌓았던 성이었기에 이름을 백제성으로 지었던 성이라고 합니다. 육손에게 참패를 당하고 기력을 소진한 유비는 제갈량을 불러 그 유명한 탁고의 장면을 연출하였습니다. 

“그대의 재능은 조비보다 열 배나 뛰어나니 반드시 나라를 안정시킬 수 있을 것이며 종국에는 천하대사를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오. 만약 내 후사를 이을 자식이 도울 만하다면 도와주시오. 만약 그가 재능이 없다면 그대가 스스로 내 자리를 취해도 좋소!”

제갈량이 울면서 유비에게 맹세했습니다.

“신은 감히 고굉지력을 다할 것이며, 죽는 날까지 충정의 절개를 다 바치겠습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충성을 맹세하며 머리를 전각에 부딪히며 조아렸습니다. 43세의 제갈량의 이마와 전각의 바닥에 피가 흥건했습니다. 유비는 그제야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었습니다.     


지금의 시점에서 우리는 제갈량이 충성스러운 신하로 북벌을 추진하다 오장원에서 죽었고 촉한은 위나라에 멸망했으며 제갈량의 아들 제갈첨과 손자 제갈상은 항복하지 않고 장렬하게 전사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제갈량은 황제에 오르지만 않았지 실제 황제와 같은 권력을 행사하였습니다. 같이 고명대신이 되었던 이엄은 제갈량에게 구석에 오르라는 건의를 하며 제갈량의 반응을 보기도 하였습니다. 제갈량과 같은 길을 걸었으며 북벌을 명분으로 삼았던 두 명의 군통수권자가 바로 동진의 권력자 환현과 유유입니다. 서진에서 강남으로 이주한 사마씨 정권은 강남의 토착 호족들과 연합하여 동진을 건국하였습니다. 동진의 권신 환현은 한때 낙양과 장안을 회복하고 그 명망을 바탕으로 초나라를 세웠지만 바로 진압당하였으나, 동진의 권신 유유는 낙양을 회복하고 그 명망을 기초로 송나라를 건국하여 성공한 황제로 기록됩니다. 제갈량이 북벌에 성공하였다면 어떤 상황이 전개되었을까요?      


첫째 제갈량이 탁고대신이 되었을 때 유선은 이미 17세였습니다. 보통 어린 황제가 18세가 되면 탁고대신은 물러나고 황제가 친정을 할 수 있도록 신하의 위치로 돌아가야 하지만 제갈량은 죽는 날까지 9년 반을 유선이 친정을 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지 않았습니다. 삼국시대는 하극상이 판치고 실력주의가 우선인 시대였습니다. 산전수전 다 경험한 유비가 볼 때에도 제갈량의 동의가 없는 황제의 권력은 의미가 없다고 보았을 것입니다. 


둘째 오석을 받았고, 십석을 받겠다고 하였습니다. 남만 정벌을 전후하여 제갈량은 오석을 받았습니다. 즉, 금부월 1구, 곡개 하나, 전후 우보, 고취 각 1부, 호분 60인 형식적으로는 유선이 내린 것이지만 실제로는 제갈량이 주도하여 결정한 것입니다. 이엄이 상소를 올려 더 이상 신하의 도리에 구애되지 말고 10석을 받아야 한다고 하자 제갈량은 “조예를 멸망시키고 황제를 낙양으로 모셔가면 나는 너희와 함께 승진할 것이다. 그때가 되면 십석이라도 받아들이겠다. 하물며 구석이야.” 왕망 이후 구석은 신하의 권력이 황제와 비등하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데 제갈량은 스스로 십석을 언급하였다는 것입니다.      


셋째, 유선은 제갈량에게 통제와 연금을 당하였습니다. 장완, 동윤, 곽유지, 향총 등은 유선의 신하이기보다는 제갈량의 신하였습니다. 유선은 일찍이 “정무는 제갈씨가 조종하고 나는 그저 제사나 지낸다(정재갈씨 제재과인)이라고 언급했습니다. 제갈씨라는 표현은 지극히 감정적인 표현입니다. 유선은 제갈량 생전 한 번도 성도를 벗어나지를 못하였고 그 반발로 제갈량의 죽음 이후 촉의 백성들이 제갈량을 기리는 사당을 짓겠다는 여론이 강하게 일어났으나 후주 유선은 제갈량의 사당을 짓지 못하도록 막았으며 촉의 멸망까지 29년간 한 번도 제갈량의 묘에 제사를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신하인 이막이 ”제갈량이 죽어서 온전함을 얻었으니 모두가 경축해야 할 일입니다. “라는 상소를 올리자 격노하여 이내 처형할 정도로 제갈량엑 애증의 복합적인 감정을 가졌던 것으로 보입니다.      


넷째, 이엄은 군사적 재능이 뛰어난 인물이었습니다. 218년 마진과 고승이 수만 명으로 반란을 일으켰으나 이엄은 5천의 병사만을 이끌고 나가 정벌을 마무리하였습니다. 유비가 한중에 출전한 위급한 상황이었습니다. 이엄은 유표를 섬기다 조조가 쳐들어오자 유장을 섬겼고 세 번째로 유비를 섬긴 인물이었지만 이릉대전에서 유능한 신하들이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진 상황에서 제갈량과 유일하게 양립할 수 있는 인물이었습니다. 유비는 이엄을 중도호로 임명하여 군권을 수여하고 상서령으로 관리임면권을 주었으나 제갈량은 이엄을 군수조달책임자로 임명하며 군권과 관리임면권을 자신에게 독점시킵니다. 234년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숨을 거두었을 때 이엄은 북벌을 추진하던 제갈량에게 군량을  보급하는 임무를 게을리한 죄로 유배당하고 있었고 제갈량이 죽자 유배지에서 실낱같은 복직의 희망이 사라진 것을 깨닫고 신세를 통탄하다 병사했다고 합니다. 유비는 생전에 제갈량에게 주로 후방의 보급을 맡기고 군권을 맡기지 않았습니다.    

  

다섯째, 유비 시절에  촉의 정권은 탁군, 형주, 익주 출신의 3 세력 간의 균형을 유지하였으나 제갈량은 탁군 출신의 위연을 배척하였고, 익주 출신의 명장 오의를 배척하고 형주 출신의 요립을 유배 보냅니다. 홍윤기 교수는 2017년 이제까지 충신의 명문장으로 알려진 출사표에 나타난 제갈량의 독재정치라는 주제의 논문을 작성하여 제갈량을 순백의 충신으로만 보는 기존의 관점에 의문을 제기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미 한고조 유방의 부인 여태후, 왕망의 신, 원술의 중, 조조의 위의 존재를 통하여 이미 유 씨만이 황제에 오를 수 있다는 관념은 붕괴되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제갈량과 동문수학하였던 형주의 학우들은 물론 매형인 괴씨 집안도 모두 위나라에 출사 하였습니다. 한실복원이라는 제갈량의 명분론에 이끌리어 북벌에 동원되었던 익주에 살았던 촉의 병사들과 주민들의 전시체제의 고달픈 삶도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239년 위나라 명제 조예는 병이 들었지만 회복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습니다. 35세의 젊은 나이였지만 방탕한 생활을 즐겼던 조예는 스스로 죽음을 예감하였습니다. 조예는 마지막을 준비하며 두 가지 조칙을 내렸습니다. 첫 번째는 공석이던 황후를 세우는 것이었습니다. 2년간 비어있던 황후 자리에 사랑했던 곽원후를 황후로 책봉하고 두 번째로 후사를 세웠습니다. 친자가 없었고 병세가 악화되자 제왕 조방을 자신의 후사로 선정하였습니다. 조방이 7살이었으므로 국정을 보필할 인물이 필요하였습니다. 이제까지의 관례대로라면 황후인 곽황후가 수렴청정해야 하지만 곽황후의 집안은 원래 농서의 명문가였으나 반란으로 멸족당한 후 곽원후가 궁녀로 입궁한 상황이었습니다. 변변한 친척도 없고 나설만한 외척도 없었습니다. 조예는 차선책으로 숙부뻘이나 자신과 나이가 비슷한 조우와 조진의 아들인 조상, 조휴의 맏아들인 조조, 하후 가문의 영군장군 하후헌, 조조의 양자이자 진의록의 아들인 진랑으로 5명을 선정하여 조방을 보좌하도록 구상하였습니다.     


하지만 중서감 유방과 중서령 손자가 개입하면서 방향이 흐트러지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과 친밀한 사마의와 조 씨 종친인 조상으로 바꾸는 데 성공하였습니다. 유방은 기운이 떨어진 죽음의 문턱에 있던 황제 조예의 손을 잡고 힘을 주어 조서를 쓰게 하고 옥새를 내온 다음 황제의 조서에 찍고 소리쳤습니다. 

“조우의 관직을 파면한다. 조우 등은 궁성 내에 머물지 마라.” 

유방과 손자는 궁문에 조서를 선포하여 처음 고명대신 명단에 오른 조조 등이 다시는 궁문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게 하고 조우를 파직하였습니다. 조우, 조조, 하후헌, 진랑 등은 각자 울면서 집으로 돌아갔고 자신들이 다루기 좋은 조상은 옆에 남겼습니다.      

조예는 갈등하였습니다. 유방이 “폐하께서 막 병이 심해지시자 조조와 진랑 등이 곧바로 입궁하여 궁궐 안의 재인들을 가지고 놀고 병시중을 드는 궁녀들을 희롱하였습니다. 조금도 슬퍼하는 기색이 아니었습니다. 또 연왕 조우는 병사들을 거리라고 스스로 황제처럼 남면 하고는 조신들을 전각 안으로 들어오지도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황태자께서는 유약하시어 정사를 통할할 수 없는데 바깥에는 강하고 난폭한 도적들이  있고 노역으로 원망하는 백성들이 있습니다. 폐하께서 앓아누우시자 사직이 위태로운 지역이나 이를 알지 못하시니 신들이 마음 아파하는 까닭입니다.” 유방은 조예가 죽으면 황태자 조방이 폐위되고 연왕 조우가 황제가 될 것이라는 암시를 주어 조예를 격동시켜 고명대신을 모두 교체시켰던 것입니다.      


하지만 조예는 정신이 혼미한 가운데에서도 사마의에게 전권을 맡기는 것은 조금 꺼림칙했습니다. 조휴의 아들 조조가 한 말도 또렷하게 생각났습니다. “일찍이 위 무제께서는 ‘사마의는 남의 밑에서 신하 노릇할 사람이 아니다. 필히 우리 집안을 지키기 위해 대비해야 한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믿을 만한 종친 중에서 한 사람에게 후사를 맡기고 사마의에게 그를 돕게 하는 것이 적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자 유방과 손자가 조상을 추천하였습니다. 조예는 결국 유방과 손자의 말을 따랐습니다.      

조방이 황제가 되자 사마의는 시중, 지절, 도독중위제군, 녹상서사에 임명되었고 조상과 함께 각각 병사 3000명씩을 통솔하고 사실상 공동 집권하였습니다. 황제가 있는 전각 안에 곧바로 오르고 가마를 타고 궁전 안으로 들어올 수 있는 특전을 받았습니다. 유방과 손자는 식읍을 추가로 받았고 아들 한 명씩은 정후에 봉하고 둘째 아들은 기도위에 임명되었으며 나머지 아들들은  다 낭중이 되었습니다. 유방은 표기장군, 손자는 위장군으로 승진했으며 종서령과 중서감 직은 그대로 유지되었습니다.      

조우는 관직에서 면직되었으나 스스로 물러난 것으로 처리되어 처벌은 받지 않았습니다. 훗날 아들 조환이 위나라의 마지막 황제가 되었고 조조와 하후헌은 다 면직되어 집에서 소일하다 죽었습니다. 하지만 사마의와 함께 고명대신이 되었던 조상은 249년 고평릉 사변으로 몰락하였고 측근이었던 하안, 등양, 이승, 필궤, 환범, 정밀등과 함께 삼족이 모두 멸족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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