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책가방 Aug 06. 2023

<제25화> 손권은 왜?

오나라의 황제에 오른 손권은 삼국시대라는 난세 가운데 69세까지 장수한 인물이었습니다. 특이한 일화는  한나라 조정에서 강동으로 사신으로 간 유완이 젊은 손 씨 형제들의 관상을 보고 다른 형제들과는 달리 손권만이 귀해지고 장수할 것을 예측하면서 자신의 말을 꼭 기억하길 바란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유완이 예측한 것처럼 아버지 손견은 36세에 황조와 싸우다 죽었고, 형 손책은 25세에 허공의 자객들에게 암살되었으며 동생 손익도 20세에  부하들에게 살해당한 것에 비하면 손 씨 가문 내에서 장수한 인물이었습니다. 다른 창업 군주들인 조조가 65세, 유비가 63세인 것에 비해서도 오래 살았고 장수한 사마의보다는 3살 부족합니다. 삼국지의 전반부에서 손권이 오나라의 기틀을 잡아가며 조조를 적벽에서 격파하고 관우를 형주에서 사로잡고 유비를 이릉대전에서 굴복시키는 등 성공적이었으나 후반부에는 이궁의 변이라는 사건에서 보이듯 오나라의 명문가 출신인 승상 고옹의 손자인 고승, 고당 형제와 장소의 차남인 장휴, 이릉 대전의 영웅 육손 등을 죽였다는 악평을 받았습니다. 손권은 어떤 관점을 가지고 신하들을 바라보았고 어떤 판단으로 결정을 하였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229년 황제즉위식에서 47세의 손권이 주유의 공을 치하하자 장소는 자신의 공을 자화자찬하였습니다. 그러자 손권은 장소가 적벽대전을 앞두고 항복을 주장한 것을 상기시키며 “만약 장공의 계책대로 했다면, 지금쯤 밥이나 빌어먹고 있을 것이오.”라고 쏘아붙였고, 장소는 땀을 비 오듯 흘리며 그 자리에서 엎드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경사스러운 날 손권은 왜 그런 말을 하여 분위기를 어색하게 만들었을까요?      

요동의 공손연이 오나라의 신하가 되겠다고 나서자 손권은 장미와 허안을 요동으로 보내 공손연을 연왕으로 책봉하려 하자 장소가 반대하였습니다. 공손연이 생각을 바꾸면 두 사자는 돌아오지 못할 것이며 타국의  조롱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장소와 손권의 논쟁이 계속되자 손권은 무서운 말을 던집니다.

“오나라 사람들은 궁궐 안에서는 나를 배알 하고, 궁궐 밖에선 그대를 배알 하오. 나는 그대를 존경하오. 하지만 그대는 여러 번 사람들 앞에서 나를 모욕했고, 나는 늘 내가 당신을 죽이지 않기를 바라고 있소.”      

그러자 장소가 “신이 언제나 어리석은 충성을 다하는 것은, 진실로 태후께서 붕어하시려 할 즈음에 노신을  불러 폐하를 당부하신 유언이 귀에 쟁쟁하기 때문입니다.”라고 대답하였고 손권과 장소는 서로 간의 미운 정 고운 정 때문인지 마주 보고 울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하지만 손권은 기어코 장미와 허안을 요동에 보내었습니다. 장소가 아프다며 집에 있자 손권이 화가 나서 흙으로 장소의 집 문을 막았고 장소도 안에서 흙으로 문을 봉했다고 합니다. 이후 공손연이 정말 사신들을 죽이자 손권이 장소에게 거듭 사과했으나 장소는 거부했습니다. 손권이 장소의 집 문을 불태우자 장소도 이에 맞서 방문을 닫아걸었으나 장소의 여러 아들들이 장소를 억지로 업어 일으켰고 손권은 장소를 수레에 태우고 궁궐로 돌아왔다고 오서 장소 전은 기록하고 있습니다.    

  

장소는 오나라의 중신이었습니다. 손권의 형인 손책은 죽음을 앞두고 장소와 후계구도를 상의하였는데 장소는 손권의 동생 손익을 추천하였습니다. 하지만 손책은 손권이 밖에서 천하의 영웅들과 싸우는 것은 자신보다 못하지만, 내부에서 강동을 지키는 것은 자신보다 낫다고 평가하였습니다. 손책은 심지어 장소에게 “손권의 능력이 부족하면 장소가 스스로 권력을 취하시오.”라고 유언을 남겼다는 것입니다. 그런 점이 거슬려서인지 손권은 황제에 오른 후 아버지 손견에게는 황제의 시호를 올렸지만 형인 손책에게는 왕을 추증하고 말았습니다. 이는 진나라의 사마소가 아버지 사마의와 형 사마사 모두를 황제로 추존한 것과 비교됩니다.  

   처음 오나라에서 승상을 둘 때 여론은 장소였지만 손권은 손소를 임명했습니다. 손소가 죽자 다시 장소가 물망에 올랐지만 이번에는 고옹을 임명하였습니다. 훗날 손권은 육손과의 대화에서 적벽대전시 장소가 항복하자고 했으나 노숙이 항전을 주장하자 통쾌했었다고 말한 것을 보면 장소에 대해 불편한 감정이 쌓였던 것으로 보입니다. 장소는 아버지 손견과 동갑이고 국가 원로였지만 훗날 이궁의 변이 일어났을 때 장소의 일족은 결정타를 맞았고 후손인 장개가 동진에서 참군에 오른 기록을 통해 멸족되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입니다.       

권력은 냉정했습니다. 조조는 생존 시 후계자를 위한 피의 숙청을 감행하였습니다. 200년 동승의 조조 암살 미수 사건으로 황실에 피바람이 불었고 214년 헌제는 복황후를 통하여 복완에게 밀서를 보냈습니다. 유비와 손권 등 제후들을 모아 조조를 암살하라는 황제의 밀서는 발각되어 처형당한 자가 1백 명이 넘었습니다. 218년에는 경기 위황의 난이라는 후한의 마지막 부흥운동이 실패로 끝나면서 300여 명이 처형당했고  219년에는 위풍의 난이 미수에 그치면서 조비에 의해 고관대작의 자제 수십 명이 처형당하면서 진압됐습니다. 220년 조조가 죽자 33세의 조비가 위왕이 되었고 이어서 황제 옹립 작업이 진행됩니다. 220년 3월에 초현에 황룡이 나타났고 4월에는 발해군 요안현에서 흰 꿩이 나타났다며 분위기를 조성합니다. 위나라 신하들은 헌제에서 조비에게로 선위의 당위성을 주장하며 사마의를 비롯하여 신비, 유엽, 진군, 등이 등장하였으며 나중에는 127명의 한나라 황실의 종친까지 동원되었고 삼공과 구경이 다 나섰습니다. 조비는 못 이기는 척하며 헌제의 선위를 받아들입니다.      


조비가 황제를 칭하고 연호를 황초로 바꾸었다는 소식이 촉에 전해졌습니다. 혹자는 한나라 헌제가 해를 입었다는 소문을 전했고 60세의 유비는 곧바로 상복을 입고 헌제에게 효민황제라는 시호를 추증했습니다. 천하에 천자는 하나였으므로 유비는 급히 제위에 오를 준비를 하였습니다. 유비의 입장에서는 시급한 일이었습니다. 익주 여기저기서 상서로운 증거가 나타났다는 보고가 올라왔고 신하들이 연명하여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습니다. 유비가 사양하였지만 제갈량, 허정, 미축, 뇌공, 황권 왕묘 등이 다시 유비에게 제위에 오를 것을 권하였습니다. 유비가 다시 사양했습니다. 제갈량이 여러 신하들과 함께 세 번째로 유비에게 황제에 오를 것을 권하였고 유비가 허락하지 않았으나 제갈량이 유비를 다시 설득하였습니다. 유비는 못 이기는 척하며 승낙하였습니다. 221년 4월 6일 유비는 성도 무담산 남쪽에 수선단을 쌓고 그곳에서 제위에 올랐습니다. 유비는 연호를 장무로 바꾸었습니다. 유비의 칭제를 논의할 때 비시가 유일하게 반대하는 소를 올리며 “어리석은 신하는 진실로 전하를 위해 그런 제의를 받아들일 수 없다.” 고 하자 유비는 변방으로 좌천시켰습니다. 진수는 유비의 넓은 도량, 공정한 태도에 의지하여 비시가 직언을 했다면서 평범한 군주라면 어떠했겠는가라는 질문을 남겼습니다.   


하지만 손권에게는 조위의 조비나 촉한의 유비에게는 등장하는 신하들이 제위에 즉위할 것을 권유하는 권진문이 등장하지 않았습니다. 다만 하늘이 제왕이 될 사람에게 내린다는 상서로운 징조라는  부서(符瑞) 현상이 위서의 18회, 촉서의 2회와는 달리 삼국지 오서에서는 그 배인 36차례나 보였습니다. 왜 오나라는 부서만을 이용하여 정당성을 확보하였던 것일까요?      

삼국지 초반 손견이 거병할 때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와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는 모습에서 보이듯이 오나라는 임협 집단의 성격이 강했습니다. 일종의 조직 같은 분위기였습니다. 하지만 차츰 양주의 명문가인 주유와 서주 출신의 명사 장소가 합류하면서 그 성격이 순화되었습니다. 초기에 오나라의 4대 호족의 하나인 육손의 종조부인 육강이 손책에 의하여 살해되었지만 육손이 손권과 타협하며 상호간에 화해가 시작되었다는 것입니다.       


위나라의 병권을 조 씨와 하후씨 가문이 장악하였고 촉한의 병권은 관우와 장비가 장악했다면 손오에서는 중앙군보다 지방호족들의 사병 집단인 부곡병의 기세가 등등했습니다. 손견, 손책, 손권 중앙 정부의 힘이 가장 강했지만 정권의 명분은 상대적으로 약했습니다. 손견은 과거 원술의 용맹한 부하 장수의 한 명이었다가 옥새를 차지하면서 욕심을 갖게 되었고 손책도 원술 휘하의 소년 장수에 불과하였습니다. 삼국지를 저술한 진수는 손견이 “가난하고 비천한 지위에서 떨쳐 일어났다.(孤微發迹)”고 기록하였습니다. 게다가 조위의 조조가 고향의 패국 초현에서 조 씨와 하후씨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은 것과는 달리 손권 정권은 오나라의 대표적인 4대 세력인 고 육 주 장 씨들로부터 견제를 받는 입장이었습니다. 지방 호족들인 유교 지식인들의  참여가 나타나지 않자 손권은 점술가들의 지지에 의존하였고 삼국지 오서의 오범, 유돈, 조달전에는 손권이 이들 점술가들에게 깊이 빠진 정황과 관련된 애증의 관계가 잘 기록되어 있습니다. 

     

 손권과 유학자들의 관계를 살펴보면 당대 일류 학자이며 손책에 의하여 공조의 벼슬에 올랐던 우번은 저서인 ‘주역주’를 당대 최고의 학자인 공융에게 보낼 정도로 오나라의 대표적인 유학자였습니다. 하지만 우번은 학자적 자존심으로 여러 차례 손권의 뜻을 거스르며 간쟁을 하여 손권이 기뻐할 수 없었다고 오서 우번전에 기록되었습니다. 결국 우번은 천성에 따라 타협을 거부하였고 처벌을 받아 당양군으로 좌천되었습니다. 또 오서 육적전에는 손권이 정사를 통솔하게 되면서 육적을 초빙하여 주조연으로 삼았으나 그가 직선적인 태도로 꺼림을 받게 되어 지방으로 좌천되어 태수가 되었다고 기록되었습니다.      


 장온전에는 손권이 장온이 사신으로 촉에 가서 촉의 정치를 칭찬한 것에 내심 불만을 품었고 장온의 명성이 너무 성대하여 손권이 이를 염려하였고 손권은 장온이 너무나 불편하였습니다. 신하의 명성이 군주를 능가한 것입니다. 장온은 승상을 지낸 고옹에게는 물론이고 중신 장소가 ’ 늙은이가 마음을 의탁하였다 ‘고 말할 정도의 인물이었지만 손권은 상서 글염을 숙청하면서 추천자인 장온도 같이 죽였습니다. 장온의 두 동생 장지와 장백도 재능이 뛰어났지만 손권에 의하여 폐출당하였습니다.      


동오의 손권의 위세는 명사들을 압도하기보다 오나라의 명사들에게 압도당하고 있었습니다. 손권이 말년에 추진한 오나라 황실의 우상화 작업은 초반에 지지부진하였으나 진수의 삼국지에는 없었던 일부 기록들인 손견의 출생 태몽과 손책과 손권의 태몽들이 오나라 마지막 황제인 손량시절에 정리한 오서에 기록되었고 훗날 진나라가 북방의 유목민족에 밀려 양자강 이남으로 도주하여 강남에 한족 정권인 동진이 세워지고 이어서 한족 정권인 송, 제, 양. 진이 건국되었습니다. 강북은 5개의 이민족들이 세운 16국이 난립하며 천하는 남북조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강남의 한족 정권들은 오랜 기간 변방이었던 강남을 개발한 손권의 오나라 정권을 긍정적으로 평가하였고 5세기의 배송지의 주석에는 오나라 건국 주역인 손견, 손책, 손권의 태몽 설화들도 신비화되어 추가되는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습니다.       

작가의 이전글 <제24화> 제갈량 위(魏)친척 제갈탄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