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19년 유비가 한중왕에 등극하는 시절이 유비와 촉의 입장에서는 잠시나마 가장 행복한 기간이 아니었나 생각됩니다. 제갈량이 유비를 처음 만나서 제시했던 전략은 천하를 삼분하고 익주와 형주에서 위나라를 향하여 북벌을 추진하는 것이었는데 유리한 상황이 조성된 것이었습니다. 218년 10월에는 형주 남양군의 토착 호족이었던 후음이 동료인 위개와 관우에 동조하는 반란을 일으켰고 219년 1월에는 익주 북방의 정군산 싸움에서 황충은 하후연을 전사시켰습니다. 하지만 북벌이 가능하기 위하여는 촉 오의 동맹 강화가 필수 요건인데 노숙이 217년에 사망한 이후에는 손권과 유비 동맹의 장기적인 전략적 가치를 인정하는 오나라의 전략가는 사라졌고 여몽처럼 형주의 이익에 관심을 기울이는 전술가들이 득세하는 오나라의 상황 변화와 촉의 관우 자신도 전략적 사고에 따라 대국적인 관점으로 상황을 파악하기보다는 자신의 절대무공만을 확신하는 천하무적의 신화에 매달리는 무장이라는 한계가 서로 맞물리는 상황이었습니다.
조조가 유비와 싸우던 한중 정벌에 소요되는 물자를 조달하는 과정에서 가중되는 요역으로 백성들은 고통을 받았습니다. 남양군은 형주의 속군이었지만 면적도 크고 후한 환제 시절의 인구조사에는 250만에 달할 정도로 웬만한 주보다 인구가 많은 지역이었습니다. 이곳에서 위나라의 중심부에서 멀지 않은 거리였고 인근의 신야는 과거 유비가 유표의 객장으로 오랫동안 주둔한 지역이었으므로 관우는 낯설지 않았던 곳이었습니다. 당시 후음은 남양군의 토박이로 백성들의 신망이 높았으므로 남양태수 동리곤이 후음을 초빙하여 군리로 삼고 자신의 사병을 나누어 남양군의 중심인 완성을 수비하게 맡겼는데 후음은 한중 정벌로 백성들의 불만이 높아지자 자신의 사병과 백성들을 이끌고 관우에 동조하는 반란을 일으켜서 남양태수를 포로로 잡고 관우에게 연락병을 보낸 것은 조조보다 관우를 신뢰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남양군 공조 종자경이 달려와 후음을 설득하였습니다.
“그대가 민심에 따라 큰일을 거사하니 가깝고 먼 곳에서 기대하지 않는 자가 없소이다. 그러나 태수를 잡은 것은 반역이고 유익한 일이 없으니 어찌 내보내지 않는 것이오? 나도 힘을 합치겠소. 조조의 군대가 올 때쯤이면 관우의 병사들도 역시 도착할 것이오.” 후음은 종자경의 말을 믿고 즉시 태수를 석방하였으나 종자경은 성을 도망쳐 나와 태수와 함께 백성들을 수습하여 후음을 포위하였습니다. 남양에 반란이 일어났다는 소식을 들은 조조는 한중의 유비를 향해 진군하다 일단 장안에 머물면서 조인에게 반란을 진압할 것을 명했습니다. 조인은 219년 정월 군대를 거느리고 완성에 도착하였고 후음을 공격하여 참하였으며 반란에 동조한 자들을 모조리 도륙하였습니다. 조인은 완성의 반란을 진압한 다음 다시 번성에 돌아와 주둔하였습니다. 조조는 위나라의 수도에서 위풍의 반란이 일어났으므로 한중을 포기하고 철군하였습니다.
유비는 조조군을 상대로 하후연을 참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점차 부담이 가중되었습니다. 전황은 유비군에 불리하여갔고 유비는 관우에게 위나라의 배후를 위협하게 하는 한편 손권에게도 사자를 보내 위나라를 도발할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하지만 손권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손권은 217년 도위 서상을 조조에게 보내 조조와 우호관계를 회복하였습니다. 217년 유비와의 관계에서 항상 양보하며 우호관계를 주장하던 노숙이 죽으면서 유비에게 항상 손해만 보았다는 주장이 힘을 얻게 되었습니다. 여몽이 노숙의 빈자리를 대신하면서 여몽은 관우가 언젠가는 동오를 겸병하려는 야심을 갖고 있다고 판단하였고 관우가 장강의 상류를 차지하고 있는 현실이 오나라에 불리하다고 판단하여 이를 힘으로 차지할 준비가 필요하다고 보았습니다.
손권은 노숙의 자리였던 한창태수와 하준, 유양, 한창, 주릉 등 4개 현의 식읍을 그대로 물려받은 여몽에게 조조가 다스리는 서주를 기습하는 작전에 대하여 의견을 물었습니다. 여몽이 답장했습니다.
“조조에게 서주를 지키는 병사들이 부족하다는 말이 있으므로 서주를 정벌한다면 이길 수 있습니다. 그러나 서주는 지세가 육지로 통하므로 조조가 10일이면 반드시 달려와 싸움을 벌일 것입니다. 비록 7~8만의 병사로 지키게 하여도 지켜낼 수 있을지 염려되는 곳입니다. 차라리 관우를 취하여 장강 전체를 점거하고 형세를 보아 익주로 뻗어나가는 것만 못합니다.” 손권은 장기적인 전략을 중시하는 노숙과는 전혀 다른 대촉 강경론자인 여몽의 계획을 찬성하면서도 겉으로는 우호관계를 유지하며 관우에게 갑절로 두텁게 호의를 보였습니다.
관우는 손권을 신뢰하지는 않았지만 별다른 음모를 꾸민다고는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한중에서 유비가 조조를 물리쳤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관우는 때가 왔다고 생각하였습니다. 관우는 형주의 전병력을 동원하여 양양과 번성을 향하여 진군하였습니다. 관우의 형주군은 3만을 넘지 않는 병력이었지만 오랜 기간 준비된 정예병들이었고 사기도 매우 높았습니다. 조조가 임명한 형주자사 호수와 양양태수 부방은 과도한 징발과 인력동원으로 민심을 잃었고 관우 군이 북상하자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나 관우에게 호응하였습니다. 관우는 양양성을 포위하면서 동시에 한수 너머의 번성을 공략하였습니다. 번성은 조조가 두텁게 신뢰하는 조인이 있었고 방덕 등이 주둔하고 있었습니다.
조인은 대군을 거느리고 관우에 대항하였고 선봉장은 방덕이었습니다. 과거 조조의 군중에서 관우와 함께 복무했던 오랜 장수일수록 관우가 원소의 에이스인 안량을 단숨에 무찌르던 위광을 기억하고 이름만 들어도 오금이 저려하였습니다. 하지만 방덕은 관우에게 전혀 기죽지 않고 선봉장에 자원하였습니다. 관우는 당시 나이가 환갑을 바라보는 57세였지만 방덕의 도발하는 태도를 참지 못하였습니다. 방덕의 나이는 49세였고 서량 출신으로 마상에서 몸을 돌려 활을 쏘는 파르티아식 기사법에도 능숙하였습니다. 방덕의 화살이 관우의 이마를 맞추며 기세를 올리자 관우 군의 병사들도 방덕에게 두려움을 느끼기 시작하였지만 전체적인 전황은 조인군에게 점점 불리해졌습니다.
관우는 오랫동안 형주에 주둔했었으므로 형주 상황에 익숙하였습니다. 한수는 주기적으로 홍수가 일어나는 곳으로 유명한 지역이었습니다. 관우는 사전에 군대를 고지대로 이동시켰습니다. 관우 군은 수륙으로 병진하는 작전을 취했으므로 군중에 수군과 함선이 많았습니다. 관우는 은밀하게 강의 범람에 대비했으나 우금은 대군을 한곳에 집중시키느라 평지에 진을 펼쳐놓고 줄기차게 내리는 빗속에서도 날이 개기만을 바라며 진지를 고수하였습니다. 굵은 비는 10여 일을 쉬지 않고 내렸고 어느 날 밤 갑자기 한수의 뚝이 터지면서 집채만 한 물살이 우금의 진영을 덮쳤습니다. 우금의 병사들은 미처 도망칠 시간도 없었습니다. 번성 주변의 평지가 5~6장이나 물에 잠겼고 수많은 병사들이 물속에 수몰되어 사라졌습니다.
관우는 큰 배를 타고 나타났습니다. 손을 들어 사격을 중지시키고 우금에게 항복을 요구했습니다. 우금은 차라리 반가운 마음이었습니다. 기왕이면 안면이 있는 관우에게 직접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40년 가깝게 평생을 쌓아온 자신의 무공이 이렇게 허무하게 쓰러지는구나 하는 아쉬움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방덕은 물을 피하여 강둑 위에서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큰소리로 병사들을 격려하며 용맹하게 활을 쏘아댔습니다. 부하장수 동형과 동초가 항복하려 하자 방덕은 붙잡아 참수하였습니다. 시간이 흐르자 휘하의 장교와 병사들이 모두 항복하였고 방덕과 휘하의 장수 한 명 분대장 두 사람만이 끝까지 저항하였습니다. 이들은 작은 배를 잡아타고 조인이 머무는 번성으로 도주하려고 시도하였습니다. 하지만 방덕이 탄 배는 급류를 만나 뒤집히고 관우의 병사들에게 붙잡혀 끌려왔습니다. 우금은 항복하였지만 방덕은 항복을 거부하고 저항하다 참수당하였습니다.
우금의 칠군이 몰살당하고 우금마저 항복하자 양양성의 형주자사 호수와 남양태수 부방은 성물을 열고 항복하였습니다. 조인은 번성에서 단지 수천의 병사만을 거느리고 농성 중이었습니다. 조인이 어둠을 틈타 배로 도주하려고 하자 여남태수 만총이 만류하였습니다.
“산속의 물은 신속하게 빠집니다. 침수가 오래가지 않을 것입니다. 관우가 북상하지 못하는 이유는 우리 군대가 그의 후방에 있는 것을 두려워하기 때문입니다. 만약 지금 우리가 달아난다면 이 지역은 더 이상 위나라의 소유가 아니게 됩니다. 장군께서는 마땅히 버티셔야 합니다.” 만총의 예측대로 물을 빠져 위기는 넘겼지만 관우가 우금의 칠군을 몰살시켰다는 위엄과 명성은 천하를 진동시켰습니다.
관우가 번성에서 위세를 떨치자 위나라 각지에서 반란이 일어났습니다. 반란군들의 세력이 어느새 여남과 영천까지 미치자 조조는 허도가 불안하게 여겨졌습니다. 혹시 반군 세력에 의하여 허도의 천자를 탈취당하게 될까 걱정되었습니다. 조조는 천자를 허도에서 하북으로 옮기는 문제에 대하여 심각하게 고민하였습니다. 이 문제를 논의에 부치자 사마의와 장제가 반대하였습니다. 사마의가 말했습니다.
“우금 등은 홍수에 패망한 것이지 싸우다 패전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 천도를 하게 되면 적에게 약점을 보이게 되고 백성들은 불안해할 것입니다. 손권과 유비는 겉으로는 친하지만 속으로는 소원합니다. 관우가 뜻을 이루는 것은 손권이 원하는 바가 아닙니다. 손권을 회유하여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게 하는 것이 가능합니다. 그러면 번성의 포위는 저절로 풀릴 것입니다.”
조조는 사마의의 건의를 시행하였습니다. 손권은 여몽을 시켜 관우의 후방을 기습하였고 번성의 포위는 풀렸습니다. 관우는 도주하다 손권에게 잡혔고 항복을 거부하고 처형당하였습니다. 촉의 유비는 대노하였고 모두의 예상과는 달리 직접 오나라를 향하여 쳐들어갔다가 대패하면서 백제성에서 최후를 맞이하였습니다. 이러한 반전의 출발은 냉정하게 상황을 바라본 사마의의 계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양번 전투를 통하여 만 명의 병사보다 관우 한 명의 장수가 귀한 이유를 발견할 수 있고, 사마의의 대국적인 전략을 통하여 위를 힘들게 하였던 손유 동맹을 분열시키고 오나라와 촉이 서로 처절하게 싸우도록 만드는 책사 한 명의 중요성을 실감하게 되는 삼국지의 한 장면이라고 생각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