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우가 우금의 칠군을 수장시키고 지휘관인 우금을 항복시키고 방덕을 참수시키며 승승장구하는 모습을 바라보는 손권의 기분은 씁쓸하였습니다. 관우가 북상하기 9년 전인 적벽대전으로 손권과 유비가 처음 대면하던 시절에 비하면 상황은 너무도 달라졌습니다. 당시 조조에 대항하여 적벽대전을 앞두고 고민하던 시절의 손권의 입장은 너무나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손권이 아버지 손견과 형 손책의 유업을 물려받아 강동의 실질적인 지배자였지만 명분과 실질은 너무나 차이가 나고 있었습니다. 아직 손권의 기반이 확실하게 다져졌다고 보기는 어려운 상태였습니다. 당시 손권을 주군으로 섬기는 수하들 중에서도 손권이 한나라 조정으로부터 공식적으로 수여받은 토로장군, 영회계태수와 동급인 자들이 여럿 있었습니다. 또 직속 수하들은 손권을 ‘장군’으로 호칭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손권에게서 받은 벼슬은 기껏해야 중랑장, 교위였고 밖에서는 현령이나 현장이었던 한계가 있었습니다. 손권이 아무리 자신의 부하들에게 높은 벼슬을 주고 싶어도 자신과 같거나 더 높은 벼슬을 줄 수는 없었던 시절이었습니다. 적벽대전에서 주유가 조조와 대치할 때에도 관직으로는 겨우 교위의 신분에 지나지 않았으며, 조조를 격퇴하고 승리하였을 때에도 벼슬이 무관직으로는 손권의 장군직보다 한 단계 낮은 편장군이었고 문관직으로는 손권과 동급인 영남군태수였습니다.
손권은 군사력의 대부분을 강동 지역 호족들의 사병에 의지하고 있었으므로 호족들의 동의를 얻지 않고서는 병사들을 대규모로 동원하기는 불가능하였습니다. 고위 장수들은 대부분 아버지와 형 손책을 따르던 장수들이었으므로 나이도 훨씬 더 많고 경력도 더 화려하였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손권이 조조와 대항하기 위해서는 유비라는 존재가 절실하게 필요하였습니다. 근거지가 없는 유비가 가지는 상징적인 가치가 실력은 있지만 아직 권위가 존재하지 않았던 손권에게는 필요하였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적벽대전 이후의 9년 동안 손권은 기존의 인물들에 추가하여 새로운 인사들을 더 많이 영입하였고, 오군과 회계군의 미개척지를 정비하면서 새로이 조세 수입을 확보하여 많은 부를 축적하였습니다. 관할 지역에서 도적과 반란 집단들을 토벌하면서 지역을 안정시켜 가며 병력도 확보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유비는 근거지가 미약하였습니다. 형주의 유표 밑에 있다가 남하하면서 큰 피해를 입었고 병사는 번구와 하구에 주둔하는 2만 명의 병사가 전부였습니다. 그중에서 1만의 병사는 사실 유표의 장남인 유기의 군사였습니다. 다스리는 지역이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수하의 관리와 병사들을 유지하는데 필요한 비용은 약탈에만 의존하지는 않았더라도 법령에 의한 과세에 의거하기보다는 임의적인 징세에 의존하였을 것이므로 모든 것이 임시적인 조처였을 것으로 보입니다.
적벽대전에서 오나라 수군이 결정적인 활약을 한 것은 틀림없는 일이지만 육전에서는 기병이 많은 유비가 주도했던 것으로 보입니다. 삼국지 위서 무제기에서 배송지 주석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조조는 함선이 유비에게 불태워지자 군대를 이끌고 화용도를 따라 걸어서 귀환하였다. 진창을 만나니 길이 통하지 않았으며, 날씨 또한 큰바람이 불었다. 지친 병사들에게 모두 풀을 지고 진창을 메우게 하고서야 말이 지나갈 수 있었다. 지친 병사들이 말에게 밟혀 진창에 빠져 죽는 자가 매우 많았다. 군대가 빠져나온 후 조조가 크게 기뻐하자 부하 장수들이 그 까닭을 물으니 조조가 대답하였다.
”유비는 나와 같은 무리이나 다만 계책을 쓰는 것이 조금 늦은 편이오. 만약 더 일찍 조치하였다면 우리 무리 중 살아남은 자가 없었을 것이오. “유비가 얼마 후 불을 놓았으나 조조에게 미치지 못하였다.
적벽대전 이후 유비는 주유가 미처 확보하지 못한 형남 4군을 취하여 수하의 관리들과 병사들을 유지하기 위한 조세 수입원을 확보한 것입니다. 적벽대전으로 승리한 손권이 형주 전체의 관할권을 주장하는 것은 무리라고 보입니다. 형주의 합법적인 관할권은 후한 말기에 손견이 형주자사 왕예와 남양태수 장자를 죽이자 조정에서 유표를 새로이 형주자사로 임명하게 됩니다. 유표는 형주의 토호였던 괴월, 채모와 연합하여 형주의 지배를 공고하게 다졌습니다. 유표가 죽자 유종이 승계하였으나 조조에게 항복하였습니다. 조조가 형주를 인수하였으나 모든 속군에 관리와 병사를 보내 실질적으로 지배하지는 못하였습니다. 조조가 장악한 지역은 인구가 많은 남양군과 남군이었고 장강 북쪽의 일부만을 장악하였을 뿐이었습니다. 조조가 적벽대전에서 패배하자 유비는 유표의 장남인 유기를 형주목으로 추대하였고 이는 명분에 합치되었으므로 형주의 관민에게 당연하게 받아들여졌습니다. 유기가 죽자 유비와 유기의 부하들은 유비를 형주목으로 추대하였으며 이는 명분에 있어서 무리가 없는 조치였습니다.
209년 유비가 형주목이 되어 공안에 주둔하자 유표의 부하였던 관리나 병사들이 유비를 찾아와 의탁하였습니다. 그들은 유종이 조조에게 항복하자 조조 밑에 있었으나 주유가 조인을 몰아냈지만 과거 유비의 선정을 기억하고 유비에게로 도망쳐 온 것입니다. 유비의 병력이 늘어나자 공안의 군영은 비좁게 되자 손권은 불안해졌습니다. 유표가 유비를 변방의 객장으로 이용하였듯이 손권도 유비를 활용할 생각이었으나 생각보다 유비의 세력이 강성해진 것입니다. 4개 군을 점유하였고 수만 명의 대군과 역전의 용장들을 거느리게 되었습니다. 손권은 자신의 누이동생인 손부인을 유비와 혼인시켜 인척관계를 만들고 유비가 요청한 형주의 남군을 유비에게 내어주었습니다. 주유는 반대하였지만 유비가 형주 지역을 빌려주면 서천을 정복한 후에 돌려주겠다는 조건으로 빌려주었습니다. 오직 노숙만이 찬성하였습니다. 어차피 유비를 제어하기 어려운 마당에 적대하기보다는 은혜를 베풀어 주고 함께 조조에게 대항하자는 것이었습니다. 주유는 오와 촉이 함께 익주를 공격하자고 하였으나 유비가 거절하자 단독으로 출병하려고 준비하다 210년 36세의 나이에 갑자기 요절하였습니다. 주유는 죽기 전에 노숙을 추천하였고 생전에 주유의 임무는 노숙과 정보가 나누어 맡았습니다.
”지금 이미 조조와는 적이 되었고 유비는 공안에 있으면서 경계를 맞대고 있고 형주 백성들은 아직 의지하지 않고 있으니 마땅히 좋은 장수를 얻어 이 지역을 누르고 어루만져야 합니다. 노숙은 지략이 있어 족히 이 일을 맡을 만합니다. 이 주유를 대신하게 해 주십시오. “
제갈량의 융주대에서의 천하삼분지계가 있었다면 노숙은 손권에게 천하이분지계를 건의하였습니다. 노숙의 원대한 계획은 조조와 분쟁이 끊이지 않는 형주를 유비에게 넘겨 조조를 막게 하고 오나라는 장강의 하류에서 양주의 북부와 서주로 진군하는 것이었습니다. 조조 입장에서는 동남의 양주와 서주에서는 오나라와, 서남의 형주에서는 관우와, 서북의 옹주와 량주에서는 강족과, 서쪽의 관중 지역에서는 유비와, 동북의 유주와 병주에서는 오환과 선비족과 대치하는 상황에 처하도록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만약 대치 기간에 어느 한쪽이 무너지면 나머지 방면은 와해될 수 있는 국면이었습니다. 그렇게 되면 조조의 세력은 무너지고 동오의 손권에게 가장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는 것이었습니다. 세력을 불린 동오가 궁극적으로 유비의 세력을 물리치고 천하를 통일할 가능성이 높다고 본 것이었습니다. 노숙의 전략은 제갈량의 전략에 못지않은 커다란 그림이었습니다.
노숙은 이러한 미래를 내다보면서 남군, 영릉, 무릉은 유비가 관할하고, 장사, 강하, 계양은 손권이 차지하는 것으로 조약을 맺었습니다. 유비와 제갈량은 이것으로 형주의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보았으나 손권은 이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더구나 217년 노숙이 죽고 난 후 손권은 늘 유비에게 형주의 3군을 빌려주었다고 생각하며 끊임없이 반환을 요구하였으나 관우가 형주를 다스리는 동안에는 관우는 빈틈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손권은 관우의 딸을 자기 큰아들의 배필로 삼고자 하였으나 유비와 손부인이 맺은 결혼동맹의 아름답지 않은 결말을 잘 알고 있는 관우는 이를 당연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유비와 손권은 상수를 경계로 형주를 동서로 나누기로 하면서 영릉군은 유비가 계양군은 손권이 차지하기로 합의하였습니다. 하지만 문제는 상수가 영릉군의 천릉현의 동부 지역으로 흘러갔는데 그 동쪽도 고대로부터 영릉군에 속하였던 것입니다. 관우는 고대로부터 상수의 오른쪽에 속하는 영릉군도 자신의 영토로 생각하고 있었으나, 손권은 상수를 강조하여 상수가 흐르는 영릉군 천릉현의 동쪽은 자신의 영토로 각자 편한 대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손권은 상수와 소수의 합류 지점에 관문을 설치하고 군대를 주둔시켜 상관이라고 불렀으므로 관우는 이를 눈엣가시로 여기며 갈등의 씨앗은 점점 자라나게 되었습니다.
관우는 상관을 자신의 관할지역이라고 생각했으므로 부하인 미방에게 상관에 있는 오나라의 양식 창고를 탈취하도록 명령하였습니다. 관우는 위나라의 우금의 칠군의 많은 병력을 포로로 잡게 되었고 이들을 먹일 식량이 부족하였습니다. 과거 조조가 원소를 격파한 후 항복한 원소군의 포로를 모두 학살한 적이 있었습니다. 관우는 자신의 의기만을 믿는 성격이었고 젊은 시절 유비와 의병을 일으켰을 때의 의협심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관우에게 오나라 상관의 곡식을 가져오면 외교적으로 커다란 문제가 발생한다고 간언 하는 자가 있었을지도 모르지만 관우의 성격으로는 위나라의 패잔병도 한나라의 백성이고 상관의 곡식도 손권이 거둔 조세이지만 크게 보면 한나라의 곡식이니 한나라의 곡식으로 한나라의 백성을 먹인다는 자신의 명분이 틀리다고 생각하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손권은 노숙이 살았을 때에는 형주를 유비에게 맡기고 양주를 통하여 서주로 진출하려는 구상에 관심이 많았지만 노숙을 대신하여 여몽이 군권을 잡자 상황이 달라졌습니다. 여몽은 한미한 가문 출신으로 젊은 시절 학문과 거리가 멀었습니다. 손권의 충고를 듣고 글을 읽게 되면서 학문과 지모가 일취월장하여 동오의 장수 중 으뜸이 되었던 인물이었습니다. 하지만 여몽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빈천한 여건에서 출세한 여몽은 당시 건강이 악화된 시점에서 아직 힘이 있을 때 커다란 공적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매우 강렬하였습니다. 남다른 공적을 세우길 원하였던 여몽은 오와 촉은 동맹이라는 노숙의 방침을 완전히 바꾸고 자신의 살아있는 동안에 유비를 익주에 한정 키고 형주를 차지할 전략에 몰두하였습니다.
”관우의 군신들은 속임수를 자랑하며 있는 곳마다 반복이 무상하니 마음 깊이 의지할 수 없는 형편입니다. 지금 관우가 쉽게 동진하지 못하는 이유는 손권의 밝으심과 저 여몽이 아직 존재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지금 우리가 강성할 때 저들을 도모해 쓰러뜨리지 않는다면 다시 힘을 쓰고자 하여도 언제 가능하겠습니까? “
조조가 손권에게 강남을 책봉해 줄 터이니 형주를 습격하라는 제안은 손권의 목마른 부분을 채워주는 부분이었습니다. 손권이 실질적으로 양주와 교주를 지배하고는 있었지만 그 지배는 한나라 헌제로부터 인정받은 것이 아니었고 스스로 서주목을 자칭하고 있었지만 공인된 벼슬이 아닌 약점이 있었습니다. 천자를 끼고 있는 조조로부터 천자의 이름으로 정통성 있는 강동의 주인으로 인정받게 된다면 자신에게 겉으로는 복종하지만 속으로는 무시하는 강동의 호족들도 손권에게 복종할 것이고, 그에 따라 절대적인 권력을 행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했을 것입니다. 조선시대 역대 군왕들이 명나라 황제의 인정을 그렇게 간절하게 원하였던 것은 그것이 유학자들인 사대부들의 충성심에 필수적인 요소라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지금도 대한민국의 대통령이 당선되면 미국 방문에 그렇게 많은 노력을 기울이며 양보를 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인 틀이 존재하는 것을 누구도 부인할 수 없습니다.
손권의 입장에서는 조조와 싸우고 있는 관우의 배후를 기습하여 형주를 차지하면 매우 좋은 일이고 최악의 경우 철군하면 그만인 일이었습니다. 조조가 존재하는 한 관우가 장강을 따라 오나라로 쳐들어오는 일은 없다고 판단하였습니다. 손권은 형주 공략작전을 육구에 주둔하고 있는 여몽과 숙의를 거듭하였습니다. 하지만 실제로 여몽의 건강이 매우 좋지 않았습니다. 그 당시 여몽은 결핵에 걸려 수명이 얼마 남지 않은 상황이었습니다. 손권은 여몽의 추천으로 육손을 임명하고 그에게 형주 공략의 대임을 맡겼습니다. 육손은 손권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는 결과를 만들어 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