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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크로크무슈 Mar 13. 2024

떠나(려)는 것이 취미




요 며칠 날씨가 흐리다. 입춘은 한참 전에 지났는데 여전히 찬 공기가 가시지 않는 것이, 도대체 봄은 언제 오려나. 알람소리에 눈을 떠 커튼은 걷는다. 창문 안팎으로 햇살이 없어 어두컴컴해 괜히 기분이 별로다. 핑계 삼아 엄마에게 연락했다. 기분이 꿀꿀하니 우리 집 강아지 사진을 좀 보내달라고. 강아지 사진을 보며 양치를 하다, 곁눈질로 슬쩍슬쩍 바라보는 창 밖은 여전히 회색 빛이다.(우리 집 전망이 앞집 뷰인 탓도 있다. 분명.) 비슷하게 어두운 색의 옷을 꺼내 입고 출근길에 오른다. 아 맞다, 우산.


부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순간이 있다. 


'Leave all Behind' 말고, 적당히 한숨 내려놓고서 내가 있어야 할 곳으로 돌아오는 그런 짧은 일탈, 여행.

개인적으로 이런 순간은 계절지수보다는 감정지수를 따라온다. 맞다. 일이 힘들거나 복잡해서, 생활이 힘들거나 복잡해서, 마음이 힘들거나 복잡해서. 나는 정면으로 받아치기보다는 늘 이렇게 회피하는 편이다. 여행이 근본적으로 힘듦과 복잡함을 해결해주진 않는다. 잠시 잊게 해줄 뿐이지. 누군가는 이런 물리적, 정서적 환기가 스스로를 위로하고 북돋아 주는 것이라고 하지만, 사실 나는 아니다.


현재를 회피하고 싶을 때 어딘가로 떠난다. 

돌아와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앞의 문제들을 해결한다.


더 이상 떠날 곳이 없어서, 여행까지 다녀온 이상 다른 변명거리가 없어서, 그제야 문제들을 정면으로 받아내기 시작하는 것뿐이다. 


부쩍 떠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드는 걸 보니, 다시 또 문제가 잔뜩 쌓여버렸고, 나는 더 이상 피할 곳이 없나 보다.


내 취미는 여행이다. 아니, 손 놓기인가.


-


막상 떠나오면 즐길 줄 안다. 

비싼 돈을 주고 왔으니까. 혼자서 궁상맞게 돌아다니고 싶지 않아서, 주변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되어서. 음식은 어떤 것이든 잘 먹는다. 딱히 알아보지 않고 발이 닿는 음식점에 간다. 와중에 현지인만 있다거나, 맛이 있으면 두배로 기쁘다. 관광 명소에도 가본다. 투어도 신청해 열심히 설명을 듣는다. 가능하다면 수영을 한다. 계획에 없더라도 수영복은 꼭 챙겨간다. 이럴 땐 남자라서 감사하다. 트렁크 팬티 같은 수영복 하나만 챙기면 되니까. 


그리고 탈 것을 꼭 타본다. 버스나 지하철, 가능하면 자전거도. 지금까지의 여행지에서 살아있길 잘했다는 감정을 느껴본 적이 몇 번 있다. 브루클린에서 자전거를 타고 센트럴파크까지 갔을 때, 자동차로 미국을 횡단했을 때, 도쿄에서 고카트를 운전했을 때, 필리핀 섬 어딘가에서 보트를 운전했을 때, 파리 시내에서 킥보드를 타고 돌아다닐 때였다. 여행지의 공기가 바람이 되어 뺨을 스쳐 지나가는 순간이 좋다. 


저녁에는 맛있는 음식과 술을 곁들인다. 대부분 맥주다. 

낯선 곳에서 오늘 하루의 생존을 축하하며. 


별일 없이 낯선 곳에서 살아남아 기쁘다. 내가 여행이 좋은 이유는 단순해질 있어서다. 


휴대전화가 터지지 않아서.

답장을 늦게 해도 변명할 수 있어서.

불편한 약속에 못 갈 수 있어서.

혼자 밥을 먹어도 서글프지 않아서.


맥주를 맛있게 먹을 수 있어서.


아, 내 취미는 여행지에서 맥주를 마시는 것이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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