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년 가까이 다녔던 첫 회사를 그만두고 약 한 달 정도의 시간이 주어졌다. 이직은 직장인 유일의 방학이라고 했던가. 외근이며 출장에서 바쁘게 오고 갈 때마다 마주치는 여유 있는 사람들, '도대체 저 사람은 뭐 하는 사람이길래 이 시간에 놀지?'의 '뭐 하는 사람'이 되어보고 싶었다. 가보지 않았던 서울 곳곳을 돌아다녀 보고 싶었다. 여행을 떠나볼까도 생각했었다. 그렇다. 생각만.
나는 알고 있었던 것보다 더 책임이나 규칙, 제도 없이는 주르륵 늘어지는 사람이었다. 이상하게도 내 방 침대에만 유독 중력이 강한 것인지, 침대를 벗어나는 데에도 많은 동력이 필요했다. 그저 시간과 상관없이 눈이 떠지면 일어나고, 필름이 끊기면(?) 잠드는 백수 첫 주차를 보냈다.
사실 무서웠다. 새로운 곳에서 나의 쓸모를 다시금 증명할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이직 준비와 퇴사의 긴장감과 해방감, 쌓아 온 것에 대한 허무함, 새로운 환경에 대한 두려움 같은 것들이 나를 침대 밖으로 나가지 못하도록 붙잡고 있었다. 하루는 이직 선배이자 직장동료였던 Y의 호출로 겨우 몸을 일으켜 근처 카페로 나섰다. Y는 내 몰골을 보자마자 타박하기 시작했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루가 아까운데!"
"평소에 가보고 싶었던 곳 없어?"
없었다. 늦은 저녁 시간이라 안온한 내 방이 그리웠다. 딱히 머리를 굴리고 싶지 않아, 파리를 가보지 못했다고 대답했다. Y는 대학 시절 가족여행으로 다녀온 파리를 묘사했다. 맛있는 크루아상과 마카롱, 어디서든 보이는 에펠탑, 파리 그 자체가 주는 낭만과 감동에 대해서.
"파리는 왜 가보고 싶어?"
"양파수프를 먹어 보고 싶어."
그 자리에서 다음 날 저녁 출발편의 비행기를 발권하고, Y의 도움으로 숙소까지 결제했다.
의외로 가고 싶은 이유는 확실했다. 양파수프. 두 번째 대학생활을 돌이켜 가장 강렬한 기억이 나에겐 양파수프였다. 지금 생각해 보니 왜 그렇게까지 몰아붙였나 싶지만, 미국에서 돌아와 다시 시작한 대학생활은 나에게 커다란 죄책감이었다. 손가락질을 받기 전 마지막 유예기간이라 여겼다. 편입생이 된 2년간 나의 쓸모를 다시 증명해야 했다. 가능한 손 벌리지 않고, 빠르게 졸업하기 위해 분투했다. 학점은 초과해서 들었고, 6시를 꽉 채운 수업이 끝나면 알바를 하느라 뛰어나가야만 했다. 자정이 다 되어 집으로 돌아오면 그제야 라면이나 삼각김밥으로 저녁을 해결했었다. 그러다 누나가 짜장 컵라면 몇 박스를 택배로 보내준 적이 있었는데, 몇 달간은 그 짜장 컵라면으로 저녁을 해결했다. 돈을 아꼈다며 좋아했지만 위경련으로 응급실에서 쓴 돈이 더 많았다.
그때 살았던 자취방은 월세 15만 원의 허름한 곳이었다. 공사장을 몇 군데 지나 가로등이 없는 골목의 끝 집이었는데, 길목에는 깨진 유리조각이 많아 신발에 항상 유리조각이 박혔다. 자취방에는 LCD TV가 옵션으로 있었다. 14인치 정도의 작고 두껍고 무거운 TV였는데, 집주인이 옵션이니 절대 버리지 말라며 당부했었기에가구가 없어 바닥에 놓인 채 내가 집을 나갈 때까지 그 위치가 바뀌지 않았다. TV는 흐릿했지만 괜찮았다. 짜장 컵라면에 물을 부으며 TV를 켤 때면 항상 '원나잇 푸드트립'의 파리 편이 방영되었다. 어떻게 매번 같은 시간에 같은 편이 방영되었던 건지 모르겠지만, 그나마 곰팡이가 덜 누덕누덕한 벽을 찾아 기대어 컵라면이 익길 기다리며 쳐다보고 있노라면, 그만한 환기가 없었다.
설익은 면을 젓가락으로 휘휘 젓고 있으면 때맞춰 양파수프를 먹는 장면이 나오곤 했다. 파리 느낌이 충만한 베레모를 쓴, 잘 차려입은 출연자와 아기자기한 가게, 김이 모락모락 나는 양파수프와 빵. 호들갑과 감탄사가 오가는 배경에는 에펠탑이 슬쩍슬쩍 보였다. 그렇게 양파수프의 맛을 몇십 번 상상만 하다 그 집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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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침 10시라는 애매한 시간 덕분인지 가게에는 손님이 아무도 없었다. 피곤한 얼굴의 마른 종업원은 인사대신 어디든 편히 앉으라는 제스처를 보였고, 노점 자리에 앉았다. 왼편에는 가로수 사이에 살짝 가려진 에펠탑이 보인다. 고개를 빼 위를 쳐다보니 꼭대기가 올려다보이지 않을 정도로 웅장하니 가깝다.
음, 비현실적이군.
커피와 양파수프를 주문했다. 커피가 먼저 나왔다. 에스프레소였다. 난 분명 레귤러커피를 주문했는데, 집게손가락으로 잡을 수밖에 없는 잔이 나오자 당황했으나 원래부터 즐겨 마시던 사람인 척하기로 했다. 곧이어 적당한 크기로 잘린 바게트와 양파수프가 내 앞으로 나왔다.
기분 좋게 달큰한 향이 피어올랐다. 그릇은 생각보다 작았지만 양은 충분했다. 대충 사진을 찍고 숟가락을 집어 들었다. 곱게 녹아 올려진 치즈를 같이 떠올려 입에 넣었다. 짜고, 달고, 따뜻했다. 상상했던 맛은 아니었으며, 짜장 컵라면의 맛은 더더욱 아니었다. 혀가 아릴 정도로 그날의 기억들이 한 번에 몰려왔다. 나는 꽤 절박했고, 가여웠다. 날아드는 벌레와 잔뜩 핀 곰팡이를 요리조리 피해 앉아 컵라면이 익길 기다리던 나는, 그날 그렇게 완전히 보상받았다.
조금 더 앉아 있을까 고민하다 조용히 일어났다. 주책스럽게 감상에 더 빠질 것만 같았다. 갑작스럽게 온 만큼 파리 여행의 계획이 없었지만, 이만하면 됐다는 생각을 했다. 그제서야 새로운 회사와 나의 쓸모에 대한 두려움을 내려놓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