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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라지 Jun 18. 2024

무위(無位)의 진인(眞人)

보름 전에 사회복지 실습 160시간을 마치고 나자 부모님의 호출은 하루가 멀다 하고 계속되었다. 정확하게 내가 무엇을 하느라 주중에는 오지 못하고 주말에만 부모님을 찾아뵐 수 있었던 건지 내막을 상세하게 설명드리지 않았지만, 부모님은 또 내가 무슨 일인가에 붙잡혀 자주 오지 못할까 봐 그것이 걱정되었던지 "또 무슨 일 하러 매일 출근할 거냐?"라고 아버지는 넌지시 내게 물으셨다.


대학을 졸업한 이후로 부모님은 막내딸인 나에 관하여 알고 있는 것이 많지가 않았다. 서울에서 사업을 하는 아들이나 명문대 약대를 졸업한 큰언니의 타이틀 정도는 되어야 부모님은 남들 앞에서 그나마 자식 이야기를 입에 올리곤 하였기 때문에, 나는 그런 부모님 앞에서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하여 구구절절 한 번도 말씀드려 본 적이 없는 것 같다. 임용고시에 합격하여 어디에서 정규직 영어 선생 노릇이라도 못할 바에는 번듯한 집안의 남자에게 시집이라도 갔어야는데, 내게는 어느 것 하나 부모님의 자존심을 세워드릴 만한 변변한 구석이 없었다.


결혼 생활을 하다가 프리랜서로 기자 일을 하고 글을 쓰는 일을 할 때도, 조금 늦은 나이에 대학원에서 철학을 공부하고 고등학생들에게 철학을 가르쳤어도, 그리고 언니들 때문만은 아니어도 어떠한 계기로든 지금 내가 사회복지사 자격증을 준비하고 있어도 나는 여전히 부모님에게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관하여 시시콜콜 설명하지 않는다. 이러한 나의 습관은 어쩌면, 조현병을 앓고 있는 두 딸을 삼십 년 동안 거두며 단 한순간도 마음 편한 적이 없던 부모님의 고통을 십분 이해하고도 남았기 때문에 비롯되었을 수도 있다.


지난주에 병원에 있는 언니들의 면회를 다녀오고 나서 며칠 뒤 나는 큰 감기에 걸렸다. 처음엔 목이 조금 잠기고 열이 나는 듯하여 약국에서 판매하는 종합감기약을 두 알씩 챙겨 먹으며 이러다 낫겠지 하고 방치했던 것이 잘못이었다. 감기 사태는 점점 불거져 급기야 나는 이틀을 꼼짝없이 침대에 누워서 지내야만 했다. 실습 등으로 인하여 두어 달 동안 누적되었던 피로가 하나도 해소되지 못했던 시점에, 하필이면 언니들을 면회하고 돌아오면서 마음에 묻어두었던 커다란 슬픔 덩어리 하나가 감기 바이러스 폭탄을 맞으며 몸 밖으로 터져버린 것이었다.  


그렇게 꼬박 이틀을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어제는 추어탕이라도 한 그릇 먹어야겠다는 생각에 남편을 대동하고  동네 추어탕 집엘 갔다. 추어탕의 뜨끈한 국물과 돌솥밥의 구수한 숭늉을 들이키며 수척해진 얼굴에 맺힌 땀방울을 냅킨으로 연신 닦아내고 있을 때, 식당 출입문으로 키가 크고 화장이 요란한 미녀가 한 명 들어오는 것이 눈에 띄었다. 미녀는 우리 부부가 앉은자리의 대각선으로 자리를 잡고 앉았는데 미녀를 따라 들어온 비쩍 마르고 나이 든 남자의 의자가 내 옆에서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걸 보니, 미녀가 우리 집 아저씨와 마주 보는 자리에 착석해 있는 것 같았다.


식사를 얼추 마치고 있던 남편의 눈동자가 문득문득 사선으로 움직이며 미녀 쪽을 흘깃거렸다. 그쪽 테이블에 앉은 남녀가 외모로 보나 연령대로 보나 조금 어울리지 않는 커플이라서 우리 집 아저씨가 저러나 보다 싶었다. 식당을 나와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남편의 흘깃거리는 습관에 관한 논쟁이 시작되었다. 처음엔 예쁜 줄 알고 봤던 건데 다시 보니 화장빨이더라며 남편은 중언부언으로 입장 표명을 하였다. 그리고 급기야는 "어떻게 쳐다봐야 하는 거냐?"라고 내게 물었다.


외간 여자를 쳐다보고 싶을 때 사선으로 흘깃거리지 않으면 어떻게 쳐다봐야 하는 거냐고 묻는 남편의 질문에 나는 그냥 할 말이 없었다. 식당에서 식후에 바로 먹고 나온 감기약이 효과가 있는 건지 정신이 텁텁하고 무거워서 논리적으로 적당한 대답을 찾고자 하는 노력도 하지 않았다. 그의 질문이 잘못된 것인지, 병원에서 처방받은 6알의 감기약 때문인 건지, 그도 아니면 내가 해답을 알지 못해서인 건지 나는 조용히 입을 다물고 남편과 다른 방향으로 길을 걸었다. 집에 돌아가는 길은 오직 하나뿐이 아니므로.


우리가 살고 있는 아파트 너머로 펼쳐진 하늘에 무지갯빛 석양이 층층이 물들어갔다. 한 집에 사는 아저씨가 외간 여자를 사선으로 흘겨보든 몰래 훔쳐보든 나와 무슨 상관이랴 싶은 하늘이었다. 감기나 어서 나아서, 내일은 막내딸을 기다리고 계실 부모님 댁에 건강하게 찾아뵐 수 있으면 싶은 생각뿐이었다. 본래 내 마음 이외에는 그 어떠한 것에도 의지하거나 집착하지 않고 자유로운 사람을 '무위진인(無位眞人)'이라고 한다는데, 어리숙한 남편 하나쯤이야 이젠 내 마음에 걸리적거릴 것도 없어야 한다. 곁눈질로 여자를 힐긋거리든 무엇을 하든, 아직 한 집에 살고 있으면 그저 가족 아니더냐.. 서로 다른 길로 갔던 남편은 나보다 먼저 집에 돌아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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