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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강현자 Oct 03. 2023

맏이 32. 포위 9일 만에 원대복귀

1950. 11월

    


이렇게 하여 우리는 국군과 조우했다. 9일간의 포위망 통과는 이제 끝이 났다. 우리는 연대 본부로 후송되고 이어 6사단 공병대대로 복귀했다. 나의 3소대는 정원 30명이었으나 그날 확인하니 13명이었다. 용케도 잘 빠져나온 사병들이었다. 그다음 날부터 한 사람, 한 사람씩 복귀하여 한 달 후에는 20여 명이 되었다.

북창은 꽤 큰 마을이었다. 평안남도 맹산군 북창리라 했다. 군청소재지는 맹산인데 이곳에서 얼마 안 된다고. 이곳에서 6사단은 부대를 재정비하고 보급도 이때부터 좋아졌다. 복장도 장교다운 옷으로 바뀌었고 운동화 대신 가죽으로 만든 미군의 워커 구두까지 지급 받았다. 우리 3소대의 인원도 보충받았다. 아직 포위망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포로가 됐는지 그렇지 않으면 산 중에서 방황하고 있지나 않은지 그 어린 학도병들의 모습이 나의 가슴을 졸인다.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세가 급전한 상황에서 우리는 이곳에서도 얼마 있지 못하고 또 후퇴했다. 중공군의 진출은 점점 가속화되었다. 인민군의 재정비와 함께 파죽지세였다.

우리가 포위되었던 때 동해안으로 진출했던 국군도 퇴로를 차단당하여 그 유명한 함흥, 흥남의 교두보 작전이 있었다. 비극을 안은 철수 작전이었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금순아…’의.

북창을 후퇴한 우리는 일거 평양으로 향했다. 날씨도 꽤 추운 바람이 불기 시작하고 우리의 군복도 동복으로 바뀌었다. 우리의 임무도 항상 부대가 가는 방향의 선봉에서 주로 도로작업을 하는 것이었다.

평양에 도착하니 꽤 많은 사람이 남하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고 도심에 시내 전차의 궤도가 보였다. 대동강 물이 유유히 흐르고 있었다. 우리는 대동강 다리를 건너 사동(寺洞)이라는 곳에서 자리를 잡았다. 작은 광산촌이었다. 이곳에서 2일 동안의 자유시간이 있어 오랜만에 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하니 기분이 매우 상쾌했다. 그 집 주인도 만약 국군이 후퇴하면 우리도 따라 남하한다고 했다. 평양을 탈환 후 이승만 대통령이 이곳에 와 평양시민의 대환영을 받은 일이 있는데 중공군이 들어오게 돼 또 자주적 통일은 어렵게 되었다고 하면서 모두가 남한으로 가니 나도 간다고 한다.

전방의 중공군 진격은 파죽지세였고 이곳은 서부 전선에 해당되어 대부분 외국 군대가 담당하였다. 주로 미군이었는데 미군의 방어도 필사적으로 대항했으나 그 좋은 무기도 우리나라 산악지대에서는 십분 발휘하지 못했다. 산악지대에 익숙하고 재래식 전술에 능한 중공군에 패하여 번번이 후퇴를 거듭했다. 그러나 중공군도 우리의 제공권과 장거리포의 위력에 상당한 피해를 입은 것도 사실이다.

미군의 후퇴작전은 이곳 평양을 혼란케 했다. 우리는 평양을 떠났다. 보병부대는 남하하면서 큰 산, 큰 강에 방어진을 치면서 싸워 내려왔다. 우리는 그보다 더 멀리 남하하여 도로의 긴급 복구, 교량 가설 등을 위해 지원하는 것이기 때문에 비교적 시간을 여유 있게 활용할 수 있었다. 며칠이나 지났는지 날짜는 나에게 아무 의미도 없었으나 어느새 황주, 사리원을 거쳐 연천으로 왔다. 연천은 38선 바로 이북이다. 또다시 38선을 탈환 당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우리는 그곳에서 한탄교를 끊기 위해 다리에 폭파 준비를 했다. 동두천, 의정부, 서울로 이어지는 이 도로에는 많은 피난민이 내려오고 모두가 이북에서 우리와 같이 피난 온 월남 동포들이다. 결국 이 방어선도 중공군을 막지 못하고 이 다리를 폭파하고 말았다. 서울도 또다시 후퇴하는 운명이 되었고 그 한 많은 피난길이 다시 시작됐다. 이른바 1.4 후퇴인 것이다.     (다음 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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