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말과 글로 평화를 지키랴?

금동수의 세상 읽기(220112)

by 금삿갓

북한이 임인년(壬寅年) 벽두(劈頭)에 극초음속(極超音速) 미사일을 시험 발사해 1,000㎞ 표적에 명중했다고 조선중앙통신이 보도했다. 미사일은 발사 후 분리되어 극초음속 활공비행 전투부의 비행구간에서 초기 발사방위각으로부터 목표방위각으로 120㎞를 측면기동하여 설정된 표적을 오차(誤差) 없이 명중했다고 전했다. 대단한 기술력이다. 이번에 발사한 미사일은 마하5(1.7Km/s) 수준으로 이를 성공한 국가는 미국, 러시아, 중국뿐이었다. 평양에서 서울을 타격(打擊)하는데 2분도 안 걸린다. 핵탄두(核彈頭)는 이미 개발 완료하였고, 이를 실어 나르는 수단 중 ICBM(대륙간탄도미사일)과 SLBM(잠수함발사탄도미사일)에 이어 극초음속 미사일을 개발하였으니 양손에 모든 걸 다 쥐게 된 것이다. 이런 무서운 집단에 대응하여 전쟁 억지력(抑止力)을 키우진 않고 <종전선언>이나 <평화협정> 타령이나 하는 문재인 정부가 정말 한심스럽다. 인류 역사상 말과 글로 평화가 지켜진 사례가 있는가?

<장면 1> :

압록강 건너편 요동 땅, 수나라 침략군의 좌·우익위대장군(左·右翊衛大將軍) 우문술(宇文述)과 우중문(于仲文)의 본영(本營) 막사 안

을지문덕(乙支文德) : (거짓으로 꾸며) “고구려가 항복을 할 테니 전쟁을 멈춰주시오.”

우문술과 우중문 : (고구려 왕과 을지문덕은 무조건 생포하거나 죽이라는 양제(煬帝)의 명령을 받았는지라 을지문덕을 붙잡고 싶어서) “이 자를 옥에 가두어라.”

마침 막사 안에 수(隨)의 위무사(慰撫使)인 상서우승(尙書右丞) 유사룡(劉士龍)도 있었다.

유사룡 : “사신을 잡는 것은 대국(大國)의 웃음거리가 됩니다. 풀어줍시다.”

말 한마디에 적장(敵將)을 놓쳐버린 우중문 등이 뒤쫓았으나 을지문덕은 재빨리 압록강을 건너 돌아 와버렸다. 수나라 군대가 압록강을 건너서 진격하자 을지문덕이 거짓 패배로 이들을 청천강 (살수:薩水) 건너 평양성 30리 밖까지 유인했다.


굶주림과 피로에 지친 채 대치중인 수나라 군의 본영에 을지문덕의 시(詩)가 배달된다.

신통한 계책은 천문을 다 알았고(신책구천문 : 神策究天文)

기묘한 작전은 지리를 통달했네(묘산궁지리 : 妙算窮地理)

싸움에 이긴 공로 이미 드높으니(전승공기고 : 戰勝功旣高)

만족을 알고 그만두기 바라노라(지족원운지 : 知足願云止)


이에 우중문은 회답을 보내 을지문덕을 타이르려했다. 을지문덕은 다시 사신을 보냈다.

고구려 사신 : (거짓으로) “만약 군사를 거두어 돌린다면 마땅히 왕을 모시고 황제가 계신 곳에 가서 조알하겠습니다.”

우문술은 군졸들이 피폐(疲弊)해져 전투력도 없고, 평양성이 또한 험하고 견고해 쉽사리 함락시키기가 어려울 것이라 생각했다. 마침내 말이나마 항복을 받았으니 방형(方形)의 진(陣)으로 회군하였다. 바로이때 을지문덕이 군사를 일으켜 뒤쫓았다. 수나라 군사들이 청천강을 절반쯤 건널 때 적 후방 부대를 쳐서 우둔위장군(右屯衛將軍) 신세웅(辛世雄)을 죽였다. 그러자 여러 부대가 함께 무너져 내려 걷잡을 수 없었다. 장수와 군졸들이 뛰어 달아나 하루 낮 하룻밤 만에 압록강까지 4백 50리를 도망갔다. 그들이 처음에 요수(遼水)를 건너올 때는 9군으로서 30만 5천 명이었는데, 요동성에 돌아갔을 때는 오직 2천 7백 명뿐이었다.


<장면 2>

성종 12년(993), 평안도 봉산군(蓬山郡)에서 거란군(契丹軍)과 고려군의 대치중일 때,

동경유수(東京留守) 소손녕(蕭遜寧) : “우리 요나라가 이미 고구려의 옛 땅을 모두 차지하였는데, 이제 너희 나라가 국경지대를 침탈했기에 내가 와서 토벌한다.”

소손녕(蕭遜寧) : “우리 요나라가 천하를 통일하였는데도 아직 귀부(歸附)하지 아니하니 소탕하기로 결정하였다. 지체하지 말고 빨리 항복하라.”

중군사(中軍士) 서희(徐熙) : (저들의 저의를 알겠군...ㅎㅎ. 협상이 가능하다고 보고해야지)

성종이 감찰사헌(監察司憲) 이몽전(李蒙戩)을 거란 진영으로 보내 강화를 요청하였다.

이몽전 : “귀국이 아국을 침략한 이유가 무엇이요?”

소손녕 : “너희 나라가 백성을 구휼하지 않으므로 하늘을 대신해 벌을 내리는 것이다. 만약 강화를 구하려거든 군신 모두가 빨리 와서 항복하고 옛 영토를 내 놓아라.”

이몽전이 돌아와 보고하자, 조정은 항복론, 땅을 떼어주자는 할지론(割地論), 주전론(主戰論)이 분분(紛紛)하다.

서희 : “거란의 고구려 옛 영토 회복 주장을 들어 주기 시작하면 한양의 삼각산(三角山)까지가 고구려 땅이었는데 나라의 반을 떼어주는 꼴이 될 것입니다. 힘으로 한번 싸워보고 다시 의논해도 될 것입니다.”

소손녕은 이몽전이 돌아간 뒤에도 고려의 회답이 없자 마침내 안융진(安戎鎭 : 지금의 평남 안주시)을 공격하였다. 중랑장(中郞將) 대도수(大道秀)와 낭장(郞將) 유방(庾方)이 그들과 싸워서 이겼다. 그러자 소손녕은 감히 다시 진군하지 못하고 사람을 보내어 항복을 재촉하였다. 성종이 화통사(和通使) 합문사인(閤門舍人 : 정5품) 장영(張瑩)을 거란 진영에 보냈다.

소손녕 : “나를 우습 게 보냐? 대신(大臣)을 보내지 않으면 안 만나겠다.”

장영이 빈손으로 돌아오자 조정에서는

성종 : “누가 거란의 진영으로 가서 말로써 군사를 물리쳐 만세의 공을 세우겠는가?”

신하들 가운데 응하는 사람이 없었는데, 누군가 홀로 나섰다.

서희 : “신이 비록 불민(不敏)하지만 어찌 감히 분부에 답하지 않으오리까?”


서희가 국서(國書)를 받들고 소손녕의 군영에 가서 통역을 시켜 상견례를 하고자 했다.

소손녕 : “나는 큰 나라의 귀인이니 그대가 마땅히 뜰에서 큰 절을 해야 한다.”

서희 : “신하가 군왕께는 마루 아래서 큰 절을 올리지만 두 나라의 대신끼리 만나는데 어찌 그렇게 할 수 있겠는가?”

서희가 노하여 숙소로 돌아와 드러누운 채 일어나지 않았다. 소손녕은 마침내 고집은 꺾고 마루로 올라와 서로 인사를 나누도록 했다. 그제야 서희는 소손녕과 뜰에서 마주 보고 읍(揖)한 뒤 마루로 올라가 인사를 나누고는 동서로 마주 앉았다.

소손녕 : “너희는 신라 땅에서 일어났고, 고구려 땅은 우리 소유인데도 너희들이 차지했다. 그리고 우리와 국경을 접하고 있는데도 바다를 넘어 송나라를 섬기기 때문에 오늘의 출병이 있게 된 것이다. 만약 땅을 분할해 바치고 조빙(朝聘)을 잘 한다면 무사할 수 있을 것이다.”

서희 : “그렇지 않다. 우리가 바로 고구려의 후예(後裔)고, 그 때문에 국호를 고려라 하고 평양에 도읍한 것이다. 국경으로 말한다면, 요나라의 동경(東京)도 모조리 우리 땅이어야 하는데 어찌 우리가 침략해 차지했다고 하는가? 게다가 압록강(鴨綠江) 안팎도 우리 땅인데, 지금 여진(女眞)이 그 땅을 훔쳐 살면서 완악(頑惡)하고 교활하게 거짓말을 하면서 길을 막고 있으니 요나라로 가는 것은 바다를 건너는 것보다 더 어렵다. 조빙(朝聘)이 통하지 않는 것은 여진 때문이니, 만약 여진을 쫓아내고 우리의 옛 영토를 돌려주어 성과 보루(堡壘)를 쌓고 도로를 통하게 해준다면 어찌 감히 조빙을 하지 않겠는가? 장군이 만일 나의 말을 천자께 전달해 준다면 애절하게 여겨 받아들이실 것이다.”

그 말투가 강개(慷慨)하여 소손녕도 억지를 부리지 않고 자기 조정에 그대로 보고했다. 그러자 거란의 황제도, 고려가 이미 강화를 요청해왔으니 군사 행동을 중지하라고 지시했다.

서희가 거란 진영에서 7일을 머물고 돌아오려 하니 소손녕이 낙타 열 마리, 말 1백 필, 양 천 마리와 비단 5백 필을 선물로 주었다.


위의 두 장면이 국사(國史)에서 말과 글로 적군을 골려주고 평화를 얻은 사례로 배웠다. 정말 단순히 말과 글로만 가능했을까? 전혀 아니다. 두 장면 모두 쳐들어온 적군의 형세가 유리하지 않고, 우리 군의 방위 태세나 전쟁 의지가 강하여 섣불리 공격 할 상황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전쟁 억지력(抑止力)이다. 전쟁 억지력 없는 평화협정은 비바람 앞의 촛불이요 공염불(空念佛)이다.


평화협정이 평화를 지켜주지 못한다는 것을 실증적으로 조사한 최초의 보고서는 스위스 태생 프랑스 작가이며 잡지 기자였던 샤를 쉐르뷔리에(Charles Victor Cherbulliez)가 썼다. 그는 구스타브 발베르(Gustave Valbert)라는 필명(筆名)으로 월간 문학·문화지인 르뷔 데 되 드몽(Revue des Deux Mondes) 122호(1894년)에 “전쟁과 항구적인 평화(La Guerre et la Paix Perpetuelle”라는 글을 발표했다. 그는 이 글에서 다음과 같이 보고했다. 인류 역사에서 BC 1,500년부터 AD 1,860년까지 3,360년간 8,000건의 평화협약이 체결되었고, 협약은 평균 2.4년 만에 전쟁으로 깨어졌다. 그는 작가이면서 평화를 위한 국제기구 설립을 위해 노력한 바 있다. 러시아 출신 프랑스 역사·사회학자인 자크 노비코프(Jacques Novicow)가 이 사실을 <전쟁과 주장된 이득(La guerre et ses pretendus bienfaits)>이라는 저서에 최초로 인용하였고, 독일 출신 미국 심리학자 에리히 프롬(Erich Fromm)도 그의 저서 <건전한 사회(The Sane Society)>에서 이를 인용했다. 프롬의 저서가 널리 퍼지면서 마치 이 사실을 프롬이 주장한 것으로 오인하는 경우가 많다.


러시아 잡지(雜誌) 모스크바 가젯(Moscow Gazette)은 1894년 판에서 “인류는 BC 1,496년부터 AD 1861년까지 3,357년 동안 227년만 평화를 누렸고, 3,130년간은 늘 전쟁 상태였다. 즉 13년간 전쟁이 있은 후 1년의 평화가 계속된 꼴이다.”라고 보도했다. 위키피디아(Wikipedia)에 의하면 쉐르뷔리에의 조사 이후인 1861년부터 2013년 까지 153년간 총 400개의 평화조약이 체결되어 매년 평균 2.6개의 협약이 체결되었다. 참고로 이 숫자는 미국정부와 인디언 부족간에 체결된 400여개의 조약은 포함되지 않았다. 참전용사의 심리치료사인 에드워드 틱(Edward Tick)이 쓴 <전쟁과 영혼(War & the Soul)>에는 인류 5,600년 역사 동안 14,600회의 전쟁이 있어 매년 2.6회의 전쟁이 일어났다고 했다. 역사적으로 무수히 평화(平和)·강화(講和)·종전(終戰)·휴전(休戰)·정전(停戰)을 위해 조약, 협약, 협정 등의 다양한 이름으로 체결되었지만 어느 것도 평화를 지켜주지는 못했다.


근래 휴전 또는 평화협정의 결과를 보자. 1973.1.23.에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2년 만인 1975.4.30.에 월남(越南)의 사이공이 함락(陷落)되어 공산화되었다. 예멘의 경우 1994.2월부터 내전이 발발되어 휴전협정과 내전 재발을 세 차례 거듭하면서 오늘날까지 평화가 깨져있다. 체첸전쟁은 1996.8.30.에 러시아와 휴전협정을 체결하였으나 3년후인 1999.8월에 체첸의 수도에 러시아의 대규모 공습으로 전쟁이 개시되었다. 남수단은 2013년 내전발발 후 2018.9.12.일 평화협정 체결까지 총 4번의 협정을 맺었지만 늘 전쟁 상태였고, 지금도 언제 깨질지 모르는 휴지조각에 지나지 않는다. 가장 최근인 2020.2.29. 카타르 도하에서 18년간의 전쟁에 종지부(終止符)를 찍는 미국과 아프가니스탄 탈레반 사이에 평화협정을 체결했다. 그 일환(一環)으로 미군을 2021.9.11. 이전까지 완전 철수하기로 했다. 그런데 미군이 최종 철수하기도 전인 8월15일에 탈레반이 아프가니스탄의 대부분을 접수하여 정부군이 항복을 선언하고 말았다. 한국국방연구원(KIDA)의 세계분쟁 데이터베이스에는 전 세계의 분쟁 사례가 130건이나 등록되어 있고, 이 시각 현재에도 싸움이 진행되는 곳이 수두룩하다. 평화협정이야 말로 팡글로시안 협약(Panglossian Pact) 그 자체이다. 팡글로스(Pangloss)는 볼테르의 풍자(諷刺)소설 <깡디드(Candide)>에 나오는 주인공 깡디드의 맹목적(盲目的) 낙관주의자인 가정교사 이름이다.


평화조약은 그 자체만으로도 체결에 엄청난 시간과 노력이 소요된다. 제1차 세계대전이후 31개 연합국과 독일 사이에 1919.6.28. 체결된 것이 베르사유 조약이다. 조약문이 440조로 방대(尨大)하다. 패전국 독일을 빼고 연합국끼리만 작성했는데도 8개월이 걸렸다. 제2차 세계대전은 1945.8.15. 일왕(日王) 히로히토(裕仁)의 항복 선언이후 1945.9.2. 항복문서에 조인(調印)하면서 끝났다. 하지만 종전협약인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은 1952.4.28. 체결하여 무려 6년 8개월이 걸렸다. 한국전쟁도 북한·중공·소련(蘇聯) 동맹과 17개국(한국, 16개 유엔국)의 전쟁이었기 때문에 평화협정에도 수년이 걸릴 수도 있다. 일반적으로 평화조약에는 종전선언, 영토와 영해(領海)의 범위, 전사자 및 포로(捕虜) 문제, 전쟁 배상금 문제, 향후 평화 유지 방안 등이 주요 의제(議題)이다. 협정의 당사자 문제도 있지만 남북한 국가체제의 기본법인 헌법의 문제도 크다. 한국과 북한은 헌법상 서로를 국가로 인정하지 않고, 영토도 한반도와 부속 도서(島嶼)를 전부 보유하는 것으로 규정하고 있다. 영해의 경우 북방한계선(NLL)의 인정 문제도 있다. 평화 유지를 위한 주한미군이나 유엔군사령부의 존치여부, 한미동맹의 성격 등 쉽지 않은 문제가 많다.

임기 말(末)이 다가오는 문재인 정부는 지난 임기동안 줄곧 남북 종전선언과 평화협정 체결에 골몰하다가 허송세월(虛送歲月)만 보내고 있다. 북한의 핵개발, 미사일·방사포 발사 등 간헐적인 도발행위에 대해서 강경(强硬) 조치는커녕 한마디 항의도 못하면서 말이다. 이번에 극초음속미사일까지 성공하였으니 전 국민이 호랑이 아가리에 먹힐 신세임에도 종전선언이란 말이 나오는가? 로마의 군인이며 군사학자인 플라비우스 베게티우스 레나투스(Flavius Vegetius Renatus)는 그의 저서 <군사학 논고(Epitoma rei millitaris)>에 “평화를 바란다면 전쟁에 대비하라(Si vis pacem para bellum)”고 했다. 공자도 논어 위령공편에서 “사람이 먼 앞날을 생각하지 않으면 반드시 우환이 닥친다(人無遠慮 必有近憂)”고 했다. 최고 지도자가 서애(西厓) 류성룡(柳成龍)의 <징비록(懲毖錄)> 조차도 읽지 않고 국가 안보를 논할 수 있단 말인가?(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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