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 누구를 위한 죽음의 굿판인가

금동수의 세상 읽기(211224)

by 금삿갓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이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고 외치면서 법전(法典)과 함께 스스로의 몸을 불사른 이후 노동운동이나 민주화운동에서 자살(自殺) 사례가 그리 흔하지는 않았다. 그러다가 1980년대 후반에 들어와서 분신자살(焚身自殺)이 잇달았다. 1986년 4월 28일 김세진(서울대)과 이재호(서울대)가 분신(焚身) 투신(投身)을 하였고, 5월 20일에는 이동수(서울대)가 분신 투신, 다음날 박혜정(서울대)이 한강 투신, 11월 5일에 진성일(부산산업대)이 분신을 하였다. 1988년에는 5월 15일에 조성만(서울대)이 할복(割腹) 투신한 후 세 명이 더 분신하였다. 그 후 1991년 4월 24일 시위 진압대인 백골단(白骨團)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강경대(명지대) 학생이 이틀 뒤 사망한 사건으로 운동권의 자살 투쟁이 또 이어졌다. 박승희(전남대, 91.4.29 분신), 김영균(안동대, 91.5.1 분신), 천세용(경원대, 91.5.3 분신) 등이 며칠 간격으로 극단적 선택을 했다.


그러자 한 때 반독재 운동권이었던 시인 김지하가 1991년 5월 5일자 조선일보에 <젊은 벗들, 역사에서 무엇을 배우는가?>라는 칼럼을 기고(寄稿)했다. 그는 칼럼에서 ‘죽음의 굿판을 당장 걷어치워라. 환상을 갖고 누굴 선동하려하나’ 라고 운동권의 생명 경시(輕視)와 자살 조장(助長) 풍조(風潮)를 질타(叱咤)했다. 이 칼럼으로 대학생들의 자살 투쟁에 대한 사회적 경종(警鐘)이 울리고, 서강대 박홍 총장의 자살을 부추기는 ‘어둠의 세력’ 관련 발언이 반향(反響)을 크게 일으켰다. 하지만 그 후에도 김기설(전민련 사회부장, 91.5.8 분신 투신), 윤용하(직장민주화연합, 91.5.12), 김철수(전남 보성고, 1991.5.18.), 손석용(대구대, 1991.8.18. 분신) 등이 자살하였고, 1993년에 분신 2명, 1995년에 분신 1명, 1996년에 분신 3명, 투신 1명, 1997년에 분신 1명 등으로 이어졌다. 1997년 이후 학생운동의 중심인 한총련 조직이 쇠퇴하면서 대학생의 자살 투쟁 방식도 사그라졌다.


민주화운동의 처절한 방식으로 선택되었던 자살 사례가 잠잠해지자,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이래 일반인이 납득(納得)할 수 없는 기이한 자살 현상이 자주 발생되고 있다. 사회적 파장이 되는 큰 사건의 관련자들이 자살을 하거나 뚜렷한 원인을 알 수 없는 의문사가 빈번했다. 최근에 대선의 제일 큰 이슈가 된 대장동 사건의 연루자(連累者)가 연속해서 자살을 한 것이다. 성남도시개발공사 유한기 전 본부장이 12월 10일에, 12월 21일에는 김문기 개발1처장이 숨진 채 발견되었다. 두 사람 모두 대장동 사건의 관련으로 피의자 또는 참고인 선상(線上)에 올라 있었다. 대장동 개발사업 특혜에 대한 연결 고리의 의혹을 받고 있는 인사들의 잇따른 사망으로 특검(特檢)의 도입을 여부를 떠나 실체적 진실을 규명하기 곤란한 상황에 빠지고 말았다. 이뿐이 아니다. 2017년 5월부터 국민적 관심을 모았던 사건들의 당사자나 관련자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 사례는 너무나 많다. 유명 정치인을 대표적으로 보면, 수뢰 혐의로 수사 선상에 있던 노회찬 의원, 성추행(性醜行) 혐의로 고소를 당한 박원순 서울시장이 현직(現職)에서 목숨을 끊었다. 사건 당사자가 사망하여 사건은 미궁(迷宮)으로 빠지고 공소권(公訴權)은 소멸된 것이다. 피해자가 엄연히 있는데도 검경(檢警)은 처벌 여부를 떠나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밝히지 못하고 수사(搜査)를 종결하고 말았다. 울산시장 선거 개입 사건과 관련한 청와대 민정비서관실 백모 행정관의 자살, 조국 가족 펀드 운용 관련 참고인 A씨 의문사, 옵티머스 자산 운용 관계사와 OA기기 대여로 고발당한 이낙연 전 더불어민주당 대표의 측근 이모씨 의문사, 모금 관련 회계부정 의혹으로 수사 중이던 윤미향 의원의 정의기억연대 마포쉼터 소장 손모씨의 의문사, 손혜원 전 의원의 부동산 투기 의혹을 폭로한 남동생 손모씨의 자살 등 십 수 건에 달한다. 현 정부의 적폐청산(積幣淸算) 수사로 인한 자살자도 국정원 댓글 수사 관련 혐의로 수사 중이던 변모 검사와 정모 변호사, 세월호 유가족 사찰(査察) 의혹의 이재수 기무사령관, 예하 기관 인사 채용 비리 의혹을 받던 조진래 전 의원 등이다.


WHO는 1968년에 자살을 “스스로의 의지로 자기 생명을 해쳐서 죽음에 이르는 자멸(自滅) 행위”로 정의했다. 따라서 타인을 구하기 위해 행동하다가 죽음에 이르는 경우인 희생(犧牲)과는 구분된다. 영국의 작가 알프레드 알바레즈(Alfred Alvarez)는 『자살의 연구(The Savage God ; A Study of Suicide)』에서 자살을 “치명적으로 실패한 간절히 도와달라는 외침”이라 정의했다. 자살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며, 마지막으로 세상을 향해 어떤 도움을 요청하는 처절(悽絶)한 몸부림의 표현이다. 프랑스의 사회학자 에밀 뒤르켐(Émile Durkheim)은 저서 『자살론』에서 그 원인과 유형을 4가지로 나누었다. 사회적 결속력(結束力)이 약화되어 적응하지 못하는 경우 나타나는 이기적(Egoistic)자살, 사회적 의무감이 강하게 발휘되어 실행되는 이타적(Altruistic)자살, 사회 환경의 차이나 도덕적 통제의 결여(缺如)로 나타나는 혼돈적(Anomie)자살, 사회적 억압(抑壓)에 따른 절망속의 숙명적(Fatal)자살로 구분했다. 현대 사회에서 자살률이 증가하는 것이 사회적 문제이고 대부분 이기적 자살과 아노미적 자살이 대다수를 차지한다. 이에 대한 적절한 관리가 중요하다.


자살을 사회에 던지는 도움 요청의 몸부림이라고 봤을 때, 그 심리적 기저(基底)는 대체로 4가지의 환상(幻想)이 기여한다고 본다. 첫째가 복수(復讐) 환상이다. 스스로의 죽음으로 자기가 죽음에 이르게 된 원인(정당 부당을 막론하고)의 제공자에게 미안한 감정이나 자존심을 상하게 할 환상이다. 두 번째는 징벌(懲罰) 환상이다. 자기 자신을 자책(自責)하면서 살 가치가 없으니 죽음을 택한다는 환상이다. 세 번째는 재결합(再結合) 환상이다. 주로 노인들에게 많이 나타나며, 배우자와 사후(死後)에 재결합을 하고자 하는 환상이다. 네 번째는 재시동(再始動) 환상이다. 컴퓨터가 잘 작동되지 않을 경우 리셋(Reset) 버튼을 누르듯이 자기 생을 마감하는 환상이다. 자살은 ‘베르테르 효과’로 전염성이 강하고, 한사람의 자살은 주변의 식구나 친밀한 사람들에게 심리적으로 막대한 악영향을 주게 된다. 따라서 자살 방지에 대한 개인적, 사회적, 국가적 안전망(安全網)이 매우 중요하다.


셰익스피어(W. Shakespeare)는 “죽음이 우리에게 오기 전에 우리가 먼저 그 비밀스런 곳으로 달려 들어가면 죄가 될까?”라고 말했다지만, 엄밀히 말해서 자살이란 살인(殺人)이다. 다만 죄인을 처벌할 수 없는 살인이다. 하지만 역사적으로 보면 자살을 처벌한 사례가 많다. 서양은 역사적으로 자살자에 대한 사후(死後) 처벌이 강했다. 그리스 아테네에서는 자살자의 손을 잘라 시신과 떨어져 매장하고, 테베에서는 시신을 묘지에 묻지 못하도록 하였다. 로마는 기독교의 성(聖)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의 영향을 받아서 자살을 십계명의 6번째 계율(戒律)을 위반한 죄악으로 보아 축성(祝聖)한 땅에 묻히지 못하게 했다. 프랑스는 자살자의 재산을 왕이 몰수(沒收)하고 시신을 교수대(絞首臺)에 매달았다가 매장하였다. 가족에게는 치욕을 주며, 귀족이 자살하면 평민으로 강등(降等)되기도 하였다. 이러한 제도는 1789년 프랑스혁명이 일어난 후에 없어졌다. 영국은 자살자의 시신을 십자가에 목매달아 거리에 전시(展示)하거나 거리에 끌고 다니다가 심장에 못을 박아 거리 끝에 묻었다. 재산은 국가가 몰수하고 가족까지 추방(追放)하였다. 이러한 관행이 1870년까지 유지되었다.


동양에서 역사상 자살자에 대한 처벌의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그 대신 자살한 사람이 자살에 이르게 된 원인을 끝까지 파악하여 주요 원인 제공자에게 처벌을 가하는 법률은 아주 강력했다. 조선 태조 때 명나라의 형법전(刑法典)인 대명률(大明律)을 알기 쉽게 풀이하여 편찬한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332조에 위핍인치사조(威逼人致死條)가 있다. 이 조항은 말 그대로 사람을 위협하거나 핍박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죄의 형량을 규정하고 있다. 대명률직해(大明律直解) 제332조 위핍인치사(威逼人致死)에 다음과 같이 규정되어 있다. “무릇 일로 인하여 사람을 위핍(威逼) 하여 치사(致死)하게 하는 자는 장(杖) 1백 대에 처한다. 만약 관리(官吏)와 공사인(公使人) 등이 공무(公務)로 인한 것도 아닌데 평민(平民)을 위핍(威逼)하여 치사하게 하는 자는 죄가 같으며, 아울러 매장은(埋葬銀) 10냥(兩)을 추징(追徵)한다. 만약 친존장(親尊長)을 위핍 치사한 자는 교형(絞刑)에 처하고, 공신은 감1등 한다. 부녀자의 간음(姦淫)이나 도적질로 인하여 사람을 위핍(威逼)하여 치사하게 하는 자는 참형(斬刑)에 처한다.(凡因事威逼人致死者 杖一百, 若官吏公使人等 非因公務 而威逼平民致死者 罪同, 並追埋葬銀一十兩. 若威逼期親尊長致死者 絞, 大功以下 遞減一等. 若因姦盜而威逼人致死者 斬.)


이 규정에 따라 자살에 이르게 된 원인을 파악하여 위협(威脅)하거나 핍박(逼迫)한 사람을 강하게 처벌하였다. 위핍자(威逼者)에게는 곤장(棍杖) 100대에 장례비 은10냥을 추징하는 신체형과 재산형을 동시에 처했다. 직계존속을 위핍한 자는 교형(絞刑) 즉 목을 매어 사형하고, 부녀자 간음이나 도적질로 인한 경우에는 참형(斬刑) 즉 목을 베었다. 이 죄목은 범죄의 원인을 결과와 연계(連繫)하여 저지른 죄만큼 그에 상응하는 벌을 받게 하는 인과응보적(因果應報的) 형벌 관념을 보여주는 법률 사례이다. 대명률(大明律)의 규정 취지는 자살을 서양처럼 개인 문제로 치부(置簿)하거나 죄로 보지 않고, 가해자(加害者)나 원인제공자가 존재하는 간접적인 타살(他殺)의 결과로 인식했다고 보인다. 실제로 조선시대에 많은 자살 사건에서 원인제공자에게 이 죄목을 적용하였다. 정조(正祖) 때 홍인호, 홍의호 형제가 편찬한 판례집인 『심리록(審理錄)』에는 1775년부터 1799년 까지 24년간 판결한 1,850건의 심리기록(審理記錄)이 실여있다. 이중에서 1,112건의 살인사건 중에 38건의 위핍자살 사건이 실려 있다. 자살자는 남성 7명, 여성 31명으로 여성의 사례가 81.6%의 압도적 비율을 보여준다. 한국역사연구회가 올해 8월에 펴낸 학술지 <역사와 현실>에 실린 오승관씨의 연구에 따르면, 1885년부터 1906년까지 21년간 위핍자살로 목숨을 잃은 사람이 88명이었다. 이 연구는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에 있는 검시문안(檢屍文案) 자료를 분석했는데, 사망자 88명 중 여성이 54%, 남성이 46%였다. 세월이 흘러 비율이 낮아졌지만, 여전히 여성의 경우 강간(强奸), 간통(姦通), 추문(醜聞) 등 치정(癡情)에 얽힌 위핍(威逼)이나 요즘말로 가짜뉴스인 헛소문 등으로 자살에 이르는 경우가 많았다. 여성이 상대적으로 수치심(羞恥心), 가족이나 이웃의 조롱(嘲弄), 비난을 견디지 못하여 삶을 스스로 마감한 경우가 많았을 것이다.


조선시대 자살 원인은 누명(陋名)·협박(脅迫)·무고(誣告) 등 분쟁, 성(性,) 가정생활, 경제 문제, 관아(官衙)와의 대립 등이 주였다. 원인이야 무엇이든 당시에는 위핍자살 사건이 발생하면 먼저 시신(屍身)을 원인제공자로 추정되는 인물의 집 앞에 가져다 놓는 게 관행이었다. 이러한 행위는 유가족(遺家族) 입장에서 직·간접적으로 피고를 지목하는 행위이고, 위핍자살자를 대신해 복수하는 인과응보(因果應報)의 의미를 지녔다고 볼 수 있다. 위핍자살의 원인제공자에 대한 규명과 처벌은 피해자의 사망으로 실체적 진실을 밝혀내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다. 그래도 과학수사가 발달하지 않았던 조선시대에 길게는 2~3년 걸려서 죄 지은 자를 밝혀 처벌하는 경우도 있다.


정조(正祖)가 위핍자살 사건의 판결을 내린 사례를 보면 매우 엄했다. 1787년 경기도 여주의 천민(賤民) 김씨의 딸 판련(判連)이 자살했다. 이 사건은 같은 마을의 강취문(姜就文)이 판련(判連)을 짝사랑하여 그녀와의 결혼을 성사시킬 목적으로 그녀와 자신이 이미 몸을 섞은 사이라는 거짓 추문(醜聞)을 주위에 퍼뜨렸다. 이런 성적 모함을 들은 판련(判連)이 독극물(毒劇物)을 마시고 자살한 것이다. 당시 강취문(姜就文)이 추문의 날조(捏造) 유포(流布) 사실을 끝까지 자백하지 않았다. 그러자 정조는 그를 죽은 판련(判連)을 기리는 정려각(旌閭閣)에 끌고 가서 엄히 꾸짖은 후, 그 고을의 노비안(奴婢案)에 넣어서 사역(使役)할 것을 명했다. 거짓 소문을 퍼뜨린 잘못에 대한 죄 값은 평생 노비로 살아야하는 매우 무거운 형벌이었다. 현대 사회에서는 당치 않은 법률이고 판결이지만 당시의 국민 법감정(法感情)에는 부합하는 면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근래에 잇따라 발생하는 수사 대상자나 참고인들의 자살이나 의문사(疑問死)는 사건의 실마리나 국민적 관심사를 미궁(迷宮)에 빠뜨리고 각종 유언비언(流言蜚語) 생성의 진원지(震源地)가 된다. 국가 공권력은 당사자의 사망으로 모든 것을 덮지 말고, 사망의 원인이나 사망에 이르게 된 과정을 좀 더 객관적으로 규명(糾明)하는 노력을 해야 할 것이다. 당연히 사망자의 명예나 엉뚱한 피해자를 만들지 않도록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다. (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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