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0) 신라를 떡 주무른 화끈녀 - 미실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50324)

by 금삿갓

우리나라의 고대사는 기록이 부실하여 정확히 알기는 어렵다. 삼국을 통일한 신라의 역사도 고려의 학자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와 고려 승려 일연(一然)이 쓴 <삼국유사>가 전부인 관계로 그 시대상을 짐작할 수밖에 없다.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으로 남녀상열지사(男女相悅之詞)가 횡행했던 시기는 고려였다. 물론 이론적으로는 고려를 멸망시킨 조선정권의 의도적 악의적인 평가도 한몫했겠다. 반면 신라는 우리에게 별로 알려지지 않아서 그저 깨끗한 이미지의 고대국가로 인식이 된다. 하지만 그런 게 아니었나 보다. 한 예(例)로 김부식은 신라 내물왕 즉위와 관련한 대목에서 “신라 남자들이 이모·고모·사촌과 결혼하기는 했으나 친모(親母)를 범한 흉노에 비해서는 낫다”라고 궁색하게 두둔한다. 그런데 이런 인식에 찬물을 끼어 진 책이 홀연히 등장해서 우리 사학계를 발칵 뒤집어 놓았다. 그 책이 진실인지 거짓인지 가릴 방법도 없지만 커다란 논쟁을 만들고, 일반인들은 호기심을 가지고 신라의 내밀한 속살을 들여다보게 된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신라의 진골(眞骨)인 문장가 김대문(金大問)이 7세기말에 썼다는 <필사본(筆寫本) 화랑세기(花郎世記)>였다. 이 필사본은 한문소설가 겸 재야 사학자인 박창화(朴昌和)가 필사한 것으로 그의 사후(死後) 30여 년이 지난 때에 세상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MBC 드라마 선덕여왕에서 미실역의 고현정>

그 책의 내용은 역대 풍월주(風月主 : 화랑의 우두머리) 32명에 대한 전기의 본문, 그 화랑을 기리는 4구체(句體)의 찬(讚), 그리고 세계(世系)를 덧붙여 놓았다. 김부식이 <삼국사기>를 쓸 때 이 <화랑세기>를 참고했다는 기록이 있는 걸로 보아 이 책이 고려시대까지 존재한 것은 분명한데, 그 이후에는 실전되었다. 이 책은 내용상 성적(性的) 표현이 파격적이고, 화랑들의 시시콜콜한 일대기를 담고 있는데, 등장하는 신라왕족들의 성풍속이 매우 난잡하여 세간의 화제로 떠올랐다. 예를 들면 낭도(郎徒)가 임신한 자기 아내를 왕족이나 자기 상관과 동침시키는 등 현대인의 시각에서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가 나온다. 또 6세 풍월주 김세종의 기사를 보면 진흥왕과 미실이 서로 눈이 맞았을 때 서라벌의 다른 남녀들을 불러 모은 다음 예절과 염치는 팽개치고 단체로 교접을 하였다는 기록도 있다. 한 개인이 배우자를 여럿 두는 것은 당연하게 여겨졌다. 심지어 오로지 왕 한 사람만 섬겨야 하는 후궁조차 왕 이외의 다른 남자를 뒀다는 기록도 있다. 그것도 왕에게 전혀 숨기지 않고 오히려 자신이 다른 남자와의 사이에서 낳은 딸도 후궁으로 삼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한다. 그래서 부모와 자식, 형제, 부부 등의 계보 파악이 정말 얽히고설키어서 복잡하기 이를 데 없다. 그림으로 살펴보지 않으면 이해하기 힘든다.

<정말 감칠맛 나는 연기>

여기서는 다른 것은 차치(且置)하고 <화랑세기>의 가장 돋보이는 존재인 미실(美室)이라는 칠색조(七色鳥)의 현란한 여자에 대하여 알아보자. 이름부터 심상치 않은가. 미실(美室) 즉 아름다운 여인이다. 실(室)은 방이라는 뜻도 있지만, 옛부터 가족 호칭에 결혼한 여자를 호칭할 때는 남편의 성(姓)을 따서 ‘김실’, ‘이실’ 또는 ‘박실’이라고 불렀다. 미실이 등장하는 시절은 제24대 진흥왕(眞興王, 540~576) 때이다. 미실의 아버지는 장군이었던 미진부(未珍夫)이고, 어머니는 묘도(妙道)다. 아버지 미진부는 법흥왕(法興王)의 외손자로 제2대 풍월주(風月主)였으며, 진골 출신이었다. 어머니 묘도는 법흥왕의 후궁이며 옥진궁주(玉珍宮主)의 딸인데 남편이 영실(英失)이다. 외할머니 옥진은 월성(月城)에 궁궐을 가지고 있을 만큼 권세가 있었으며, 법흥왕에게 색공(色供)한 여인이다. 즉, 미실은 잘 나가는 진골 아버지와 왕실의 색공 전문가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는데, 이 집안이 대원신통(大元神統)이다. 필사본 《화랑세기》에서 미실의 외모를 묘사하기를, “용모가 절묘하여 풍만함은 옥진을 닮았고, 명랑함은 벽화를 닮았고, 아름다움은 오도를 닮았다(容貌絶妙豊厚似玉珍 亮明似碧花 美妙似吾道)”고 하였다. 그럼 옥진, 벽화, 오도는 누구일까? 이들의 상계(上系)를 살펴보자. 미실의 할아버지는 아시공(阿時公)이며, 아시공의 아버지는 선모(善牟)라고 부계를 밝히고 있다. 미진부는 아시공과 삼엽공주(三葉公主) 사이에서 태어났으며, 삼엽공주는 법흥왕과 그의 후궁 벽화부인(碧花夫人)의 딸이다. 벽화는 파로(波路)와 벽아부인(碧我夫人)의 딸이며, 벽아가 섬신공과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이 바로 위화랑(魏花郞)이다. 위화랑은 초대 풍월주이자 소지마립간의 마복자로, 4대 풍월주 이화랑의 아버지이며, 오도(吾道)와의 사이에서는 옥진(玉珍)과 금진(金珍) 등의 딸을 낳았다. 미실의 어머니 묘도부인(妙道夫人)은 법흥왕의 후궁이며, 묘도부인의 어머니는 같은 법흥왕의 후궁인 옥진궁주(玉珍宮主)로서 위화랑과 오도부인의 장녀이다. 옥진은 영실과의 사이에서 묘도(妙道), 사도(思道), 흥도(興道)의 세 딸과 아들 노리부를 두었다. 그중 사도(思道)는 진흥왕의 비(妃)이자 대원신통의 종(宗)으로서 진지왕의 어머니이며, 흥도는 기오공(起烏公)과의 사이에서 진지왕의 비이자 김용춘의 어머니인 지도부인을 낳았다. 또한 옥진궁주는 법흥왕과의 사이에서 비대전군(比臺殿君)을 낳았는데, 비대는 미진부공의 친동생인 실보낭주(實宝娘主)와 맺어져 제9대 풍월주 비보랑(秘宝郞)을 낳았다. 옥진의 어머니인 오도부인(吾道夫人)은 소지마립간의 정비인 선혜부인(善兮夫人)과 묘심랑(妙心郞)의 딸로서, 법흥왕의 비(妃) 보도부인(保道夫人, 소지마립간의 딸)과는 자매이고 흥도의 남편 기오공과는 남매지간이다. 대충 읽으면 누가 누구인지 감이 오지 않을 거다. 워낙 복잡해서리.

<미실의 계보>

미실의 탄생 설화를 보면 그녀가 왜 칠색조인지 알 수 있다. 미실의 외할머니 옥진은 법흥왕에게 색공하던 시절, 어느 날 일곱 색깔의 새가 가슴으로 날아 들어오는 꿈을 꾸었다. 그는 얼른 법흥왕에게 달려가 좋은 꿈을 꾸었으니 ‘사랑’을 하자고 애원한다. 그때 왕은 이렇게 말한다. “꿈에 색깔이 그렇게 여러 개의 예쁜 새라면 필시 남아가 아니라 여아일 것이다. 나보다 그대 남편인 영실공과 가서 동침하려무나. 혹시 두 사람 사이에서 아들을 낳으면 내가 낳은 것처럼 태자로 삼고, 딸을 낳으면 후궁으로 삼겠다.” 이렇게 결합해서 낳은 딸이 바로 묘도였다. 왕은 약속을 지켜 묘도를 자신의 후궁으로 삼는다. 그런데 어린 묘도는 몹시 아름다웠으나 몸이 날씬하고 엉덩이와 음문(陰門)이 작았다. 그런데 법흥왕은 거구인 데다 힘도 좋아 묘도가 밤일을 견디기 힘들어했다고 한다. 그래서 왕 또한 묘도의 방으로 거의 가지 않게 되었다. 왕이 찾지 않자, 묘도가 옥진궁에서 쓸쓸하게 거닐 때 장군인 미진부가 지나가는 것을 보게 되었다. 그러자 둘은 어느새 눈이 맞아 사랑하게 된다. 왕의 외손자와 왕의 후궁이 바람이 난 것이었다. 법흥왕은 이 사실을 까맣게 몰랐다. 세월이 흘러 왕이 승하(昇遐)한 뒤 두 사람은 왕비였던 지소태후로부터 결혼 허락을 받는다. 진흥왕이 즉위하던 해인 540년에 외할머니 옥진이 다시 또 칠색조의 꿈을 꾸게 된다. 오래전 꿈에 자신의 가슴으로 들어왔던 칠색조가 날아 나가서 딸 묘도의 가슴속으로 들어가는 꿈을 꾼다. 그녀는 부리나케 딸의 방으로 찾아가서 방문을 열어젖히자 두 사람이 벌써 열심히 사랑을 나누고 있었다. 이에 그녀는 방문을 살며시 닫으며 한 마디 했다. “너희는 참으로 귀한 딸을 낳을 것이다.”

<고현정 연기>

그렇게 낳은 딸이 바로 미실이었다. 미실이 얼마나 아름다웠는지 그를 한번 본 사내는 얼이 빠지고, 그녀와 하룻밤 자본 사나이는 목숨을 건다. 원래 외할머니 옥진과 어머니 묘도의 미색을 물려받았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3대를 거쳐 탄생한 칠색조처럼 가장 빼어난 여인이었음에 틀림없다. 게다가 외할머니 옥진궁주와 어머니 묘도는 그녀에게 가문의 비전 무기인 ‘색공 방중술’를 내밀하게 전수했다. 이 비장의 기술이 여러 사람을 잡는다. 겉으로는 우선 교태(嬌態) 내공을 쌓는다. 웃음과 눈짓과 손짓과 고갯짓과 몸짓 하나하나가 최고로 유혹적인 은밀한 신호다. 상대의 반응을 봐가면서 상상력을 자극하는 포즈와 동작, 그리고 노출의 도(度)를 조절한다. 모든 사내는 그녀의 사정거리에 포착되면 멀쩡하던 이성을 다 놓아버리게 되어 있다. 단순히 헤픈 성적 제스처만 보내면 천박해 보이니, 악기 연주에 시를 읊고, 춤과 노래도 능수능란(能手能爛)하다. 미실이 얼마나 예뻤고 매혹적이었는지에 관한 비교로는 그의 남동생인 미생랑(美生郞)의 사례를 보면 된다. 10대 풍월주였던 미생랑은 궁궐이나 서라벌 시내를 거닐다가 한번 눈길을 주면 넘어가지 않는 여인이 없었단다. 미남자로서 애교와 센스가 철철 넘쳤다고 한다. 요즘 아이돌 가수나 배우는 상대도 안 되었던 모양이다. 그가 임신시키고 낳게 된 아들만 100명이었다니 할 말이 없다. 화랑세기에는 미실을 일컬어 세 가지 아름다움의 정기(精氣)를 모았다고 했다. 빼어난 용모, 풍만한 몸, 명랑한 성격을 그녀의 겉으로 드러난 트레이드마크로 꼽았다. 하지만 그녀의 최상의 비밀무기는 바로 초특급 바이브레이션과 풍부하게 흐르는 윤활유, 뱀처럼 감겨드는 허리와 사지(四肢), 지옥을 넘나드는 천상의 신음 등 일단 합방하면 상대를 넉 다운시키는 방사기교에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미실은 왕에게 색공 즉 섹스서비스를 전업하는 신라 왕실만의 여인집단인 대원신통(大元神通) 계급출신 중에서도 그 솜씨가 으뜸 집안 출신이었던 거다.

이때 신라 왕실에서는 최고의 신랑감 하나가 떠오르고 있었는데, 진흥왕의 의붓동생인 세종전군(世宗殿君)이었다. 전군(殿君)이란 궁전이 주어지는 왕자라는 의미다. 진흥왕과 세종의 어머니는 지소태후(只召太后)다. 지소는 법흥왕의 딸로 왕의 동생이자 자신의 숙부인 입종 갈문왕(立宗 葛文王)과 결혼했다. 그녀는 이 근친결혼으로 진흥왕을 낳는다. 그 뒤 지소는 다시 진골 출신 신하(태종)와 눈을 맞추어 세종을 낳았다. 지소가 남편을 두고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져 아이까지 낳은 것이 별 문제로 보이지 않는다. 이 시대 신라 왕가에서는 유부남이 바람을 피우는 문제뿐 아니라 유부녀가 다른 남자를 취하는 것도 전혀 문제 삼지 않고 있다. 기록 상으로는 지소태후와 관계를 한 남자가 이화랑(二花郞), 태종(台宗) 이사부(異斯夫), 박영실(朴英失), 구진(仇珍) 등으로 나온다. 대단한 태후님이시다. 그녀는 어린 진흥왕의 섭정을 담당하며 흥륜사를 완공하고, 불국사를 중건했으며, 고구려를 침략하기도 했다. 어쨌든 지소태후는 자기의 둘째 아들 세종에게 좋은 짝을 골라주기 위해 금혼령을 내리고, 공경(公卿)의 아리따운 딸들을 궁궐로 모이게 했다. 그리고는 아들 세종에게 골라보라고 했다. 세종은 여러 여인 중에서 미실을 가장 마음에 들어 했다. 물어보나 마나 미실의 미모와 교태에 넘어가지 않을 남자가 있겠는가. 지소태후는 미실이 워낙 미색이 뛰어나고 박영실의 딸이라서 경계했지만 내색하지 않고 미실을 궁궐로 불러들여 혼인시켰다. 그러자 외할머니로부터 색공 수련을 단단히 받은 밤무대의 최고 고수이자 잠자리의 실력파인 미실의 몸을 알게 된 세종은 ‘미실 마니아’가 되어버린다. 하룻밤도 미실 없이는 잘 수 없을 지경이 된 것이다.

<게임 캐릭터 - 이사부>

그즈음 지소태후가 큰아들 진흥왕의 왕비 사도왕후(思道王后)를 갈아치우려는 계략을 꾸미는 것을 둘째 며느리 미실이 알게 되었다. 지소태후는 골품으로 보면 진골정통(眞骨正統)이고, 미실은 대원신통이었다. 진흥왕의 왕비인 사도왕후(思道王后)도 자기와 같은 대원신통이며 자신의 이모였다. 그러니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미실은 급히 사도왕후에게 달려가 이 사실을 알린다. “왕후마마. 태후께서 숙명궁주를 워낙 사랑하시어, 왕후를 폐하고 궁주로 하여금 계통을 이으려 하니 이를 어떻게 하면 좋을지요?” 사도왕후는 깜짝 놀라 남편 진흥왕에게 달려가 눈물로 호소한다. “폐하. 제가 무슨 잘못을 했다고 저를 왕후에서 폐하신다는 말씀입니까?” 왕이 말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좀 찬찬히 말해보구려.” 자초지종을 들은 왕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며 걱정하지 말라고 했다. 지소태후가 사도왕후를 헐뜯으며 내치려고 하자 진흥왕은 완강히 거부하여 태후의 마음을 돌리게 한다. 이렇게 일을 그르치게 된 데는 미실의 방해가 있었다는 것을 눈치챈 지소태후는 미실을 궁으로 들인 것을 후회한다. 그러고는 미실에게 가차 없이 출궁 명령을 내렸다. 태후는 미실을 내쫓자마자 법흥왕의 동생인 진종전군의 딸 융명을 세종의 정비(正妃)로 맞아들인다. 성골 혈통으로 짝을 맞춘 것이었다. 미실이 보따리를 쌀 때 세종전군은 멀찍이에서 쏟아지는 눈물을 훔쳐냈다. 세종에게는 이미 다른 여자는 아예 눈에 들어오지 않을 만큼 미실에게 빠져 있었다.

<진지왕>

결혼하여 남자의 맛을 안 미실로서는 궁에서 쫓겨난 신세로 집에서 쓸쓸한 나날을 보내게 된다. 이때가 그녀의 나이 20여 세쯤 되어 가장 꽃다우며 물이 오른 나이이다. 이런 시기에 독수공방 하며 허송세월을 보낼 그녀가 아니다. 바로 연하남인 16세의 화랑 사다함을 만난 것이다. 사다함은 훤칠한 청년으로 검술 실력도 출중하고 용기가 남달랐던 터여서 동료들의 존경을 받는 사내였다. 인품이 서글서글했던 사다함(斯多含)은 미실의 집 앞을 지나다 다음과 같은 쓸쓸한 노랫소리를 들었다. “세상의 부귀는 한때일 뿐이네. 떠들썩한 사랑도 한때일 뿐이네.” 애절한 노래를 듣자 사다함은 절망에 빠진 이 여인을 위로해주고 싶었다. 그래서 들어가서 만나보니 한눈에 두 사람은 사랑에 빠졌고, 마침내 부부가 되기로 언약했다. 그때 가야가 반란을 일으키자 신라군은 이사부(異斯夫)를 총대장으로 하여 출병한다. 사다함은 나이가 어리다는 이유로 출전이 허락되지 않았지만, 우국충절 정신이 뛰어난 그는 몰래 낭도 5,000명을 거느리고 싸움터로 출전한다. 요즘으로 치면 자원입대를 하여 대가야의 성을 함락시킨다. 이때 출병하는 사다함을 위해 미실은 애절한 이별의 노래 <풍랑가(風浪歌)> 혹은 <송출정가(送出征歌)>를 부른다.

“風只吹留如久爲都(풍지취류여구위도) / 바람아 불더라도

郎前希吹莫遣(낭전희취막견) / 임 앞에 불지 말고,

郎只打如久爲都(낭지타여구위도) / 물결아 치더라도

郎前打莫遣(낭전타막견) / 임 앞에 치지 마라.

早早歸良來良(조조귀량내량) / 빨리빨리 돌아오라,

更逢叱那抱遣見遣(경봉질나포견견견) / 다시 만나 안고 보고.

此好郞耶執音乎手乙(차호랑야집음호수을) 아흐! 임이여, 잡은 손을

忍麽等尸理良奴(인마등시리량노) / 차마 물리려뇨”

그러나 사다함이 전투를 끝내고 돌아왔을 때 미실은 이미 궁궐로 불려 들어가 다시 세종전군의 짝이 되어 재결합하고 있었다. 미실이 출궁 한 후에, 세종은 그녀를 잊지 못하고 그리워하여 앓아눕기까지 하였다. 상사병에 걸린 아들을 생각한 태후가 어쩔 수 없이 미실을 다시 불러들였던 것이다. 입궁 명을 받고 왔지만 정실부인 융명부인이 있으니 첩의 신분인 셈이다. 신라 때의 첩은 남편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 부인에게 속했다. 첩의 지위에 만족할 미실이 아니니까, 궁에는 명에 따라 들어왔지만 정실이 아니면 세종과의 합궁을 거부한다고 버텼다. 지소태후도 할 수 없이 융명부인을 출궁 시키고 정실 자리를 허락하게 된다. 전장에서 돌아온 뒤 이 소식을 듣고, 짝 잃은 사다함은 눈물을 흘리며 <청조가(靑鳥歌)>를 불렀다. “파랑새야, 파랑새야, 저 구름 위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나의 콩밭에 머물렀나? 파랑새야, 파랑새야, 나의 콩밭의 파랑새야. 어찌하여 다시 날아 구름 위로 가버리는가? 이미 왔으면 가지나 말지 또 갈 것을 왜 왔는가? 부질없이 눈물짓게 하고, 마음 상해 여위어 죽게 하는가?” 듣기에 애절한 노래가 가슴을 파고든다. 이후 사다함은 5대 풍월주를 지내다가, 한날한시에 죽자는 우정을 맺었던 친구 무관랑의 죽음을 애통해하던 나머지 1주일 만에 죽고 만다. 혼인을 약속한 미실을 잃은 상심에 친구까지 잃었으니 세상이 끝난 것 같았으리라. 상사병에 화병까지 겹친 탓이었으리라. 한때 정인(情人)이었던 사다함의 죽음 소식을 들은 미실은 천주사(天柱寺)에서 사다함의 명복을 빌었다. 그날 밤 꿈에 사다함이 나타나 “나는 너와 부부가 되기를 원했으니, 내가 너의 배를 빌어 아들을 낳아야겠다.”라고 말했단다. 과연 미실은 얼마 뒤 하종공(夏宗公)을 낳았다. 하종공은 사다함을 빼닮아 당시 사람들이 사다함의 아이가 아닌가 하는 의심을 했다고 한다.

<북한산 소재 진흥왕 순수비>

신라 왕실에는 우리의 상상을 초월하는 색공(色供)이라는 특별한 성적 서비스 시스템이 잘 발달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런 제도가 김부식 등 제도권 역사학자들의 역사 서술을 어렵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요즘 말로 하면 ‘성(性) 상납’에 해당하는 이 행위로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감옥에 가야 될 행위이다. 하지만 당시 신라 왕실에서는 지탄받는 행위가 아니라 공공연히 허용되는 일이었다. 왜 신라는 근친상간과 맞바람 같은 문란(紊亂)한 남녀관계를 묵인하거나 조장했을까? 바다 건너 일본의 왕실도 비슷한 처지였던 것이고, 고려 초기에도 근친결혼은 다반사였다. 절대 권력인 김씨 왕가의 모든 행위는 금기로 삼을 부끄러움이 있을 수 없다는 무치(無恥) 인식이 있었을 것이다. 누구든 이런 행위에 반기를 들거나 비평을 하지 못하는 분위기 말이다. 또한 왕실은 후사(後嗣)를 안전하게 잇기 위해서 인구 증산(增産)이 현실적 과제이고 목표였다. 그리고 권력과 핏줄을 다른 씨족들과 나누기보다 친족 끼리끼리 나누는 것이 훨씬 안전할 것이기 때문이다. 나아가서 왕과 그 일족은 세상의 모든 남녀와 사랑할 수 있다는 특권이 색공을 더욱 번창하게 했을 것이다. 그런 사회 분위기에서 조신하게 살 남녀가 몇 명이나 있겠는가. 미실은 6대 풍월주인 세종과 재혼하여 정부인이 되었지만 세상 남자들은 그녀를 한 남자의 부인으로 가만히 놔두질 않았다. 아니 천성적으로 온몸이 활활 타오르는 온천 같은 그녀가 도저히 한 남자에 만족하고 가만히 있질 않는다. 이젠 한물간 늙은 여배우이지만 한창 때는 마릴린 먼로, 카르디날레 등과 함께 섹스 심벌이었던 프랑스 여배우 브리지트 바르도가 본인 입으로 이런 유명한 섹스 예찬을 했다. “섹스를 안 뒤 단 하루라도 남자가 없으면 잠을 못 잔다.” 이 여자는 우리나라 개고기 육식에 대해 맞짱을 뜨기도 했지만 고래 잡는 포경도 반대한 이력이 있다. 이런 말은 어쩌면 미실이 먼저 했을지 모른다.

세월이 흘러 진흥왕의 아들 동륜(銅輪)은 태자로 책봉되어 차기의 살아있는 권력이 예약된 ‘예비권력’이었다. 얼굴도 잘 생기고 권력도 막강한 이 젊은 사내를 향한 서라벌 여인들의 구애 공작이 적지 않았을 것은 짐작하고도 남는다. 그런데 동륜태자도 또한 천하의 바람둥이로 서라벌과 나라 이곳저곳을 돌아다니면서 어색(漁色)과 엽색(獵色)을 즐겼다고 한다. 어색(漁色)과 엽색(獵色)은 뜻이 비슷한 말로 색을 지나치게 탐하는 것이다. 어색이 글자 그대로 어부가 바다에서 고기를 잡듯이 여자를 취하고, 엽색은 사냥꾼이 산에서 짐승을 잡듯이 여자를 취하는 것이다. 우리의 ‘강남제비’와 서양의 카사노바나 돈 환 비슷한 행동이다. 이렇게 되자 어머니인 사도왕후(思道王后)는 혼전에 아랫것들의 애라도 덜컥 낳아오면 혈통이 혼탁해질 것이 걱정되었는지 근친상간을 부추긴다. 그래서 미실에게 “태자 동륜과 교합해 아들을 낳으면 너를 차기 왕후로 삼을 것”이라고 은근히 말한다. 남편 세종이 엄연히 있는 유부녀인 미실에게 공식적으로 이모가 이종사촌과 간통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다. 족보로 보면 사도왕후는 미실의 이모니까, 동륜태자는 미실의 이종사촌 남동생이다. 또한 왕후가 이런 제안을 한 까닭은, 지소태후의 계략으로부터 자신을 구해준 미실에 대한 고마움의 표현이고, 자기의 파벌을 넓히려는 종치적 계산도 깔렸다고 보면 될 것이다. 더구나 시어머니인 지소태후가 자신의 권력 입지를 넓히려고 자신의 딸인 만호공주(萬呼公主)를 손자인 동륜과 짝지으려고 계획을 짜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 말을 들은 미실도 야심이 생기게 마련이다. 안 그래도 싱싱한 젊은 영계와 어울리고 싶었는데, 왕비로부터 공식 제의를 받으니 날개가 돋아난 것이다. 미실은 가전(家傳)의 비법인 색공 실력으로 동륜에게 접근해 아이를 임신하는 데 성공한다. 하지만 아직도 권력의 실세인 지소태후는 손자 동륜과 딸 만호를 결혼시킨다. 미실은 몸으로는 동륜을 사로잡았으나 왕실의 권력싸움에서 밀린 것이다.

동륜을 붙잡는 데 실패한 미실은 실망하지 않고 아예 더 큰 꿈을 꾼다. 이를 곁에서 부추긴 것은 대원신통의 오야붕인 외할머니 옥진이었다. “얘야. 내가 너를 특별 교습한 것은 왕비의 잉첩(媵妾)이 되게 하려는 것이었지, 어찌 곁가지인 세종전군에게 목매어 살라고 한 것이겠느냐?”라고 했다. 좀 더 큰 그림을 그리라는 것이다. 당시 신라는 잉첩은 왕에게 속한 첩이 아니라 왕후에게 속한 첩이다. 따라서 잉첩의 주인은 정실부인이었다. 그래서 이모인 사도왕후에게 진흥왕의 색공을 할 수 있도록 부탁을 하고 허락을 받는다. 말하자면 이모와 이질(姨姪)이 동시에 한 남자랑 관계하는 것이다. 미실은 왕을 만날 기회가 있을 때마다 특유의 교태와 은밀한 눈짓으로 신호를 보냈다. 그러자 사도왕후가 진흥왕에게 미실을 만나라고 말하기도 전에 왕이 먼저 이런 말을 한다. “듣기에 미실은 서라벌 최고의 미녀인데, 어찌 그대의 잉첩이 되지 않았는가?” 이 말은 미실을 왜 나에게 바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사도왕후는 곧바로 미실의 색공을 연결한다. 그러면서 사도는 미실에게 이렇게 단단히 요구한다. “우리는 전생·현생·후생에 걸친 한 몸이다. 그것을 약속할 수 있겠느냐?” 말하자면 미실과 운명공동체가 되자는 것인데, 마다할 이유가 없다. 미실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면서 태자 동륜의 색공으로 이미 임신한 상태로 그 아버지인 진흥왕에게 색공을 한 것이다. 한 번 사랑을 나누고 두 번 세 번이 되자 왕은 천하를 정복할 때보다 더 오묘하고 황홀한 미실이라는 영토를 발견한다. 고구려와 백제를 정벌하여 곳곳에 자기 이름의 순수비(巡狩碑)를 세우는 것보다 밤마다 미실의 오묘한 곳에 깃발을 꽂는 것이 더 신기하였다. 당나라 현종이 며느리인 양귀비를 빼앗은 것과 똑같은 상황이다.

<사다함 - 게임 캐릭터>

얼마 후 미실은 자기를 닮은 예쁜 딸을 낳는다. 진흥왕은 아이가 아들 동륜태자의 자식인 줄 모르고 자기의 딸이라고 철석같이 믿는다. 미실과 진흥왕 사이에 낳은 딸이 바로 애송공주(艾松公主)이다. 미실이 공주를 낳자 진흥왕은 화려한 공주례(公主禮)를 치렀다. 미실은 이후 최고의 권력이 되었고, 왕이 조정에 나가 정사를 볼 때 옆에서 문서를 읽고 옳고 조언을 하는 위치가 되었다. 미실은 왕후에 대등한 전주(殿主 : 자기 소유의 독립된 궁전 보유)가 되었다. 그러자 미실은 남편 세종을 6대 풍월주로 하여 공을 세우도록 하기 위해 그를 출병시키고, 자신은 그 사이에 남편의 보좌역이며 차기 풍월주인 설원랑(薛花郞)은 물론 자신의 남동생 미생랑과도 정을 통한다. 막장 드라마도 이런 드라마는 없을 거다. 진흥왕은 이러한 사실을 모른 채 미실을 총애하여 원화(源花) 제도를 29년 만에 부활시키고, 미실을 원화로 삼았다. 미실은 당시 풍월주였던 남편 세종의 권한을 이어받아 낭도를 거느렸으니 드러나지 않은 남성편력이 더 많았을 것이다. <화랑세기>는 이때를 가리켜 “천하의 권세가 옥진궁(玉珍宮 : 미실의 외할머니가 사는 곳)으로 돌아갔다”라고 적고 있다.

모든 것은 끝이 있고, 비밀은 드러나게 마련이다. 6년쯤 흐른 뒤 서라벌을 발칵 뒤집는 충격적 사건이 발생한다. 동륜태자는 아버지 진흥왕 몰래 아버지의 예쁜 후궁인 보명궁주(寶明宮主)와 은밀히 관계를 맺어왔다. 보명궁주는 지소태후와 구진(仇珍)이라는 침신(枕臣) 즉 남자 색공과의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었다. 진흥왕과는 의붓 남매이고, 동륜 태자에게는 고모인 것이다. 아버지 몰래 만나다 보니 궁주의 집 정문으로 드나들지 못하고 늘 담을 넘어 다녔다. 그때 마침 동륜태자가 궁궐 담장을 뛰어넘다 보명궁을 지키는 오견이라는 덩치가 큰 개에게 물려 죽고 만다. 태자가 죽어서 왕실이 그 진상을 조사하다 보니 그동안 동륜태자의 비행이 속속들이 드러나고 덩달아 미실과의 관계도 밝혀지고 말았다. 조사에 의하면, 동륜은 보명의 궁궐에 일곱 번 드나들었는데, 그전까지는 호위하는 무사들을 대동했다. 그러나 사고 당일 밤에는 급한 김에 혼자 달려갔다 변을 당했다. 사건을 조사해 보니 뜻밖에 미실의 행적이 드러난다. 동륜은 미실이 자기의 아이를 임신한 채 진흥왕에게 색공을 바치기 시작한 이후에도 그녀를 못 잊어 틈만 나면 잠자리를 요구했다. 미실도 차기 군주에게 보험을 드는 심정으로 그의 뜻에 응했을 것이다. 태자와 관계뿐 아니라 태자의 동생인 금륜(金輪, 나중에 진지왕이 되는 인물)과도 관계를 맺었다. 더구나 자신의 동생인 미생과도 동침한 것으로 드러났다.

<사다함과 무관랑의 교유>

미실은 어쩔 수 없이 궁 밖으로 쫓겨남은 물론, 원화(原花)의 자리에서도 물러나야 했다. 이에 세종이 다시 풍월주의 지위를 회복하였으나, 미실이 세종에게 같이 물러나기를 청하니 세종은 설원랑에게 풍월주의 자리를 넘겨주었다. 지소태호와 알력으로 출궁 당한 이후 또 한 번의 시련이었다. 그런데 색공의 육정(肉情)을 질기고도 강한가 보다. 돌연 진흥왕이 미실과 관련한 모든 사건을 포함해 동륜 문제를 불문에 부치라는 조칙을 내린다. 사도왕후가 진흥왕에게 자기 편인 미실을 용서하기를 청하였고, 미실 또한 눈물로 용서를 구하니 진흥왕이 이를 받아들이고 궁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두 여자의 사이는 3 생의 운명공동체를 맹세한 사이인 데다 미실의 색공 뒤에는 사도의 권유가 있었으니, 그는 자신의 일처럼 진흥왕에게 설명했을 것이다. 이후 미실이 옥종공(玉宗公)을 출산하자, 도리어 그를 마복자(磨腹子) 즉 양자 비슷한 것으로 삼았다.

<진흥왕 순수비>

미실이 출궁 당한 뒤의 생활이 이렇다. 그녀는 남편이었던 세종과 해궁(海宮)에서 살았다고 한다. 기록상 해궁의 위치는 없고 이름으로 보아 안압지 주변에 있었을 것으로 짐작한다. 남편 세종은 미실을 궁으로 보낸 뒤 낭도들과 함께 지방에서 머무르고 있었는데, 그녀가 돌아왔다는 소식을 듣고 서라벌로 온다. 이 무렵 그는 물러났던 풍월주를 다시 맡게 되는데, 이때 미실이 말한다. 자기도 이미 원화를 그만두었는데 당신이 어찌 다시 풍월주가 되려 하느냐고 따진다. 그래서 세종은 미실의 5촌인 설원랑(薛原郞)에게 풍월주를 물려주고 만다. 당시 미실은 동륜의 동생 금륜태자와 정을 통한 뒤 향후 왕위에 오르면 후궁으로 삼겠다는 다짐을 받았다. 또 동시에 설원랑과도 한창 불이 붙어 있었다. 그래서 풍월주를 그에게 넘기라고 한 것이다. 한편 진흥왕도 밤이면 미실이 보고 싶어 환장할 지경이었다. 다른 여자와의 잠자리 맛은 평점이 바닥이었는가 보다. 당장 부르고 싶었으나 함께 살고 있는 세종이 신경 쓰였다. 미실은 세종과 사이에 하종공(夏宗公)을 낳고, 진흥왕과 사이에 수종전군(壽宗殿君)을 낳았는데, 두 아들과 함께 해궁에 있었다. 진흥왕은 아들 수종이 보고 싶다는 핑계로 몇 차례 미실을 불렀으나, 그녀는 죄지은 몸이라며 입궁을 거절하면서 일부러 튕겼다. 그러자 왕이 직접 해궁으로 거동했다. 미실을 보자 진흥왕은 눈물을 줄줄 흘렸다. 그런 모습에 미실의 마음이 움직였다.

진흥왕의 입궁 지시에 미실은 “지금 남편 세종의 아이를 임신했으니 해산을 기다렸다 들어가겠습니다.”라 했다. 그러자 한 시가 급한 진흥왕은 다시 독촉했다. “그냥 들어오시오. 그 아이는 내가 마복자(摩腹子)로 삼을 것이오.” 그래서 미실은 다시 입궁했고, 궁궐에서 옥종을 낳았으며, 그 아이는 진흥왕의 마복자가 된 것이다. 마복자(磨腹子) 즉 ‘배를 문질러 낳은 아이’라는 뜻인데, 신라에만 있었던 성과 기족 풍속 중 하나다. 이미 아이를 임신한 여인이 지위 높은 다른 남자와 관계를 가진 뒤 아이를 낳을 경우, 그 지위 높은 남자의 자식으로 귀속시키는 전통이다. 미실이 재입궁한 뒤 진흥왕은 풍질(風疾)을 앓게 되고, 미실은 그를 대신해 실권을 쥐고 조정을 흔들었다. 드디어 화려한 칠색조 미실의 시대가 열린 것이다. 국정의 중심이 된 미실은 태자 금륜(진지왕)과 드러내놓고 정을 통하여 왕후가 될 준비를 착착 진행한다. 드디어 진흥왕이 승하하자, 사도왕후와 짜고 왕의 사망을 비밀에 부친다. 그러고는 태자 금륜을 얼른 자기 방으로 불러서 질펀한 섹스 판타지를 맛 보인 다음 협상카드를 던진다. “나의 맛이 죽이지? 나를 왕후 자리에 앉히고 계속 충성을 하면 왕위에 올려주고, 밤마다 내 배위에도 올려줄게” 야심이 있던 금륜은 이 음모를 덜컥 받아들인다. 님도 보고 뽕도 따고, 왕도 되고 섹스도 실컷 즐기자는 거다. 그런데 막상 왕에 오르니 궁궐에는 널린 게 영계들 아닌가? 모두가 자기 한 몸만을 바라보고 있는데, 아버지가 쓰던 노리개인 미실을 멀리하게 된 것이다. 막상 진지왕이 왕위에 오른 뒤 왕후의 자리는 미실이 아닌 지도부인(知道夫人)에게 돌아간다. 그러자 진흥왕비 사도왕후와 미실은 20세가 된 진지왕에게 친정(親政)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진지왕에게 등을 돌린 미실은 죽은 동륜의 아들 백정(伯淨, 후에 진평왕)과 정을 통하는 사이가 된다. 진지왕은 실권 없이 무기력감을 어색(漁色) 엽색(獵色)으로 풀었던 모양인데, 이름만 진지했지 전혀 진지한 왕이 되지 못한 듯하다. 진지왕은 4년 만에 정사가 어지러워졌고 황음무도하다는 소문이 서라벌에 퍼졌다. 이런 악소문은 미실의 계략일지도 모른다.

<진평왕>

미실을 왕후로 봉하겠다는 약속도 지키지 않자, 진지왕이 여색을 좋아하고 방탕하다는 여론을 들어 사도태후와 미실은 폐위를 논의한다. 그래서 태후의 오빠인 노리부(弩里夫)를 통해 진지왕을 폐위하고, 동륜의 아들 백정을 진평왕에 추대하였다. 당시 13세였던 진평왕에게 미실은 일찌감치 색사(色事)를 가르친다. 진지왕 폐위 당시, 화랑은 문노(文弩)를 따르는 호국선(護國仙)과 설원랑을 따르는 운상인(雲上人)으로 나뉘어 있었다. 문노 등이 진지왕 폐위를 반대할까 우려한 노리부공과 사도태후는 호국선과 운상인을 통합했다. 그리고 미실을 다시 원화로 세웠으며, 남편 세종을 상선(上仙), 문노(文弩)를 아선(亞仙)으로 삼았다. 이후 미실은 설원랑과 문노의 사이를 중재하여 풍월주의 지위를 문노가 잇게 했고, 문노는 본래 세종을 존경하였으므로 곧 미실에 충성을 바치게 된다. 진평왕 즉위 초반에는 사도태후가 섭정하였는데, 미실은 새주(璽主)가 되었고, 노리부는 상대등에 임명되었다. 이후, 진평왕은 보명과 미실을 각각 좌후(左后)와 우후(右后)에 봉하였다. 미실이 드디어 왕후가 된 것이다. 진평왕 7년인 585년, 자신의 동생인 미생이 10대 풍월주가 되자 미실은 자기 아들 하종(夏宗)으로 하여금 부제(副第)가 되게 하였다. 3년 뒤에는 하종이 미생의 뒤를 이어 11대 풍월주가 된다.

이로써 미실은 1대 진흥왕, 2대 동륜태자·진지왕, 3대 진평왕에 이르는 왕가 3대에게 색공하는 ‘천하의 여인’이 된 것이다. 그녀는 진평왕 재위 중 16년간 권력을 주무른다. 미실은 나이가 들자 왕실을 떠난 뒤 남편 세종, 애인 설원랑 등과 함께 영흥사(永興寺)로 들어가 중이 되었다. 미실은 수많은 남성들 중 오직 설원랑과의 관계를 가장 진실된 것으로 생각하였다 한다. 설원랑과의 사이에는 제16대 풍월주 보종공(寶宗公)을 낳았는데, 마지막 아이라 깊이 총애하였다고 한다. 설원랑도 미실을 따라 절에 왔는데, 미실이 병에 걸리자 “차라리 그 병을 나에게 주소서”라고 기도했단다. 하늘에 뜻이 통했는지 미실은 병이 낫고 설원랑이 병에 걸려 죽음을 맞았는데, 미실은 자신의 속옷을 무덤에 넣어주며 후생을 기약했다. 이 절에서 미실이 죽자, 설원랑과 낳은 그의 아들 보종은 미실이 쓴 책 700권을 베껴 집에 간직했으며, 미실의 초상을 걸어놓고 아침저녁으로 절을 하였다고 한다. 신라가 최고조로 흥성하던 시기에 왕실 안에서 ‘사랑과 전쟁’이 아니라 ‘사랑과 권력’을 틀어쥐었던 일곱 빛깔의 현란한 여인이 미실이다. 1,500여 년 전에 일세를 풍미했던 도도한 열정과 현란했던 야망의 삶을 지금 우리 시대의 잣대로 음란·방탕으로 치부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어떤 평가이든 독자에게 맡기고, 미실의 남성 편력을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요약 정리하면 이렇다. 공식 남편 세종 이외에 상대한 임금 3명(24대 진흥왕, 25대 진지왕, 26대 진평왕), 태자 1명(동륜태자), 화랑의 우두머리인 풍월주는 남편 포함 4명(5대 사다함, 6대 남편인 세종, 7대 설원랑, 10대 동생인 미생랑)이다. 모두가 면면을 보면 당시 신라 왕국을 휘두르던 권력자와 오피니언 리더였는데, 미실이 이들을 마음대로 요리하였으니, 신라를 떡 주무르듯이 한 것이 된다. 재야 사학자 박창화 씨가 필사했다는 <화랑세기>의 진위는 명확히 판명되지 않았지만, 그 내용이 있음으로 인하여 이제까지 공백 상태였던 신라 인물에 대한 기록이 소상히 재현된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다.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 발견된 32쪽짜리와 1995년 공개된 162쪽짜리 두 가지이다. 필사의 주인공이 바로 1930년대 일본 궁내성 도서과 촉탁을 지낸 박창화 씨다. 먼저 발견된 것은 앞부분이 쓸만하고, 늦게 공개된 것은 앞부분이 없는 반면 뒷부분이 끝까지 완전하게 보존된 것이어서 이 둘을 합하면 온전한 하나의 책이 된다. <화랑세기>의 번역자인 서강대 이종욱 교수(한국 고대사)는 진본이라고 주장하는 반면, 서울대 노태돈교수(국사학)는 위서로 정사(正史)로 수용할 수 없다고 일축하고 있다. 사학계는 진위여부를 둘러싸고 수십여 년째 치열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다. 필자 금삿갓이 다녔던 <KBS역사 스페셜>에서 성균관대 국어국문학자 김학성(金學成) 교수의 주장이 이채롭다. 이 필사본이 위작이라면 1920~30년대에 우리나라 모든 학자들 중에 향가를 해득하여 미실이 사다함을 위해 불렀다는 <송출정가>를 저작할 수 있을 정도의 향가 실력을 갖춘 사람은 없다고 한다. 가장 향가에 밝았던 양주동(梁柱東) 박사조차도 읽고 해득하기 급급했던 수준이었는데, 필사자(筆寫者) 박창화 씨가 이두(吏讀) 향찰(鄕札)로 작품을 쓰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견해를 밝혔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59) 여자이며 남자인 노비의 간통 - 사방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