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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1) 조선 사나이들의 영원한 연인 - 황진이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50326)

by 금삿갓

조선 중기 이후의 남성들이 가장 만나고 싶어 하는 역사 여성인물 중 최고가 바로 황진이(黃眞伊) 일 것이다. 그녀만큼 술자리에서나 노래, 드라마, 영화 등에서 많이 등장하는 여성도 드물다. 그런데 막상 황진이에 대하여 아는 대로 말하라고 하면 실상은 특별히 아는 것도 별로 없어한다. 겨우 몇몇 인사들과의 일화 정도가 고작이다. 우리 모두가 그녀를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막상 아는 게 별로 없이 베일에 가려진 여인, 황진이에 대하여 알아보자. 황진이는 언제 태어났는지, 언제 죽었는지, 가족이 누구며, 교육은 어떻게 받았고, 어떻게 기생이 됐는지 등 정확한 기록이 존재하지 않는 신비의 여인이다. 이매창(李梅窓)과 함께 쌍벽을 이루며 조선 최고의 기생이자 여류시인인 황진이는 박연폭포,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과 함께 “송도삼절(松都三絶)”로 불렸다. 그녀는 시인·기녀·작가·서예가·음악가·무희 등 만능 엔터테이너였다. 이 정도로 유명한 사람에 대한 생애의 기록이 이렇게 허술한 것은 아마 조선이 유교 사상으로 똘똘 뭉쳐서 이런 화류계의 여인에 대한 기록을 천시해서 그런 건지도 모르겠다. 그녀는 또한 성리학의 학문적 지식이 해박하였으며 시화에 능하여 많은 선비들과 이런저런 인연과 관계를 맺으면서 전국을 유람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많은 시와 그림을 작품으로 남기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등으로 인해 대부분 실전되었고, 남은 작품들도 그가 음란함의 대명사로 몰리면서 저평가되고 제대로 보존되지도 않아 대부분 멸실되었을 거라 생각되어 대단히 아쉽다.

허균(許筠)이 지은 <성소부부고(惺所覆瓿藁)>의 내용 중 조선 역대 사대부들의 행적과 사적 가운데 전고(典故)에 도움이 될 만한 것과, 기문(奇聞)·이견(異見) 등의 사실을 194칙에 걸쳐 정리한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서 그녀를 맹인의 딸이라고 했다. 황진이의 신분이 미천한 기녀이니까 그리 중요하게 여기 지도 않았고, 그저 입방아 감으로 흘러 다니는 가담항설류(街談巷說類)를 적은 것들이 대부분이다. 황진이에 대한 기록은 이덕동의 <죽창야사(竹窓野史)>, 이덕형(李德泂)의 <송도기이(松都奇異)>,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 서유영(徐有英)의 <금계필담(錦溪筆談)>, 김택영(金澤榮)의 <송도인물지(松都人物誌)>, 임방(任埅)의 <수촌만록(水村漫錄)>등으로 많이 있다. 이덕형의 기록에는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가 사람을 움직였다.” 거나 중국의 사신조차도 “너의 나라에 천하의 절색이 있구나.” 또는 “그녀가 방안에 있으면 방 안에서 향기가 나서 며칠간 없어지지 않았다.”라고 기록했다. 그의 기록을 전부 믿을 수는 없지만 자세히 한번 따라가 보자.

진이(眞伊, 황진이)는 송도의 이름난 창기이다. 그 어머니 현금(玄琴)이 꽤 자색이 아름다웠다. 그녀 나이 18세에 병부교(兵部橋) 밑에서 빨래를 하는데, 다리 위에 형용(形容)이 단아(端雅)하고 의관이 화려한 사람 하나가, 현금(玄琴)을 눈여겨보면서 혹은 웃기도 하고, 혹은 가리키기도 하므로 현금도 마음이 움직였다. 그러다가 그 사람은 갑자기 보이지 않았다. 날이 이미 저녁때가 되어 빨래하던 여자들이 모두 흩어지니, 그 사람이 갑자기 다리 위로 와서 기둥을 의지하고 길게 노래하는 것이었다. 노래가 끝나자 그는 물을 달라고 하므로, 현금이 표주박에 물을 가득 떠서 주었다. 그 사람은 반쯤 마시더니, 웃고 돌려주면서 말하기를, “너도 한 번 마셔 보아라.”라고 했다. 현금이 마시고 보니 술이었다. 현금은 놀라고 이상히 여겨 그와 함께 좋아해서 드디어 황진이(眞伊)를 낳았다. 진이는 용모와 재주가 한때에 뛰어나고 노래도 절창(絶唱)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선녀(仙女)라고 불렀다. 이것이 황진이의 탄생 설화인 것이다.

이덕형의 다음 이야기는 이렇다. 개성 유수(留守) 송공(宋公)이 처음 부임했을 적에 마침 절일(節日)을 당했다. 당료들이 부아(府衙)에 조그만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진랑(眞娘)이 와서 뵈었다. 그녀는 태도가 얌전하고 행동이 단아하였다. 송공은 풍류인(風流人)으로서 풍류장에서 늙은 사람이다. 한 번 그녀를 보자 범상치 않은 여자임을 알고 좌우를 돌아다보면서 말하기를,“이름을 헛되이 얻는 것이 아니로군!”하고, 기꺼이 관대(款待)하였다. 송공의 첩도 역시 관서(關西)의 명물(名物)이었다. 문틈으로 그녀를 엿보다가 말하기를, “과연 절색이로군! 나의 일이 낭패로다.”하고, 드디어 문을 박차고 크게 외치면서 머리를 풀고 버선발을 벗은 채 뛰쳐나온 것이 여러 번이었다. 자기 지위를 빼앗길까 봐 최고로 질투 패악질을 한 것이다. 여러 종들이 붙들고 말렸으나 만류할 수가 없었으므로 송공은 놀라 일어나고, 자리에 있던 손들도 모두 물러갔다. 그 후에 송공이 그 어머니를 위하여 수연을 베풀었다. 이때 서울에 있는 예쁜 기생과 노래하는 여자를 모두 불러 모았으며, 이웃 고을의 수재(守宰)와 고관들이 모두 자리에 앉았다. 붉게 분칠 한 여인이 자리에 가득하고, 비단옷 입은 사람들이 한 무리를 이루었다. 이때 진랑(眞娘)은 얼굴에 화장도 하지 않고 담담한 차림으로 자리에 나오는데, 천연한 태도가 국색(國色)으로서 광채(光彩)가 사람을 움직였다. 밤이 다하도록 계속되는 잔치 자리에서 모든 손들은 칭찬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그러나 송공은 조금도 그녀를 쳐다보지 않았으니, 이것은 발(簾) 안에서 첩이 엿보고 전날과 같은 변이 있을까 염려했기 때문이었다. 술이 취하자 비로소 시비(侍婢)로 하여금 파라(叵羅)에 술을 가득 부어서 진랑(眞娘)에게 마시기를 권하고, 가까이 앉아서 혼자 노래를 부르게 했다. 진랑(眞娘)은 매무새를 가다듬어 노래를 부르는데, 맑고 고운 노랫소리가 간들간들 끊어지지 않고, 위로 하늘에 사무쳤으며, 고음 저음이 다 맑고 고와서 보통 곡조와는 전혀 달랐다. 이에 송공은 무릎을 치면서 칭찬하기를, “천재로구나.” 했다.

악공(樂工) 엄수(嚴守)는 나이가 70세인데 가야금이 온 나라에서 명수요, 또 음률도 잘 터득했다. 처음 황진이를 보더니 탄식하기를, “선녀로구나!” 했다. 노랫소리를 듣더니 자기도 모르게 놀라 일어나며 말하기를, “이것은 동부(洞府)의 여운(餘韻)이로다. 세상에 어찌 이런 곡조가 있으랴?”했다. 이때 명나라 조사(詔使)가 본부(本府 : 개성부)에 들어오자, 원근에 있는 사녀(士女)들이 구경하는 자가 모두 모여들어 길 옆에 숲처럼 서 있었다. 이때 한 두목이 황진이를 바라보다가 말에 채찍을 급히 하여 달려와서 한참 동안 보다가 갔는데, 그는 관(館)에 이르러 통사(通事 : 통역관)에게 이르기를, “너의 나라에 천하절색(絶色)이 있구나.”했다. 황진이가 비록 창류(娼流)로 있기는 했지만, 성품이 고결하여 번화하고 화려한 것을 일삼지 않았다. 그리하여 비록 관부(官府)의 주석(酒席)이라도 다만 빗질과 세수만 하고 나갈 뿐, 옷도 바꾸어 입지 않았다. 또 방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아서, 시정(市井)의 천예(賤隸)는 비록 천금을 준다 해도 돌아다보지 않았으며, 선비들과 함께 놀기를 즐기고, 자못 문자를 해득하여 당시(唐詩) 보기를 좋아했다. 일찍이 화담 선생(花潭先生)을 사모하여 매양 그 문하에 나가 뵈니, 선생도 역시 거절하지 않고 함께 담소했으니, 어찌 절대(絶代)의 명기가 아니랴. 내가 갑진년(1604년)에 본부(本府)의 어사(御史)로 갔을 적에는 병화(兵火)를 막 겪은 뒤라서 관청집이 텅 비어 있었으므로, 나는 사관을 남문(南門) 안에 사는 서리(書吏) 진복(陳福)의 집에 정했는데, 진복의 아비도 또한 늙은 아전이었다. 황진이와는 가까운 일가가 되고 그때 나이가 80여 세였는데, 정신이 강건하여 매양 황진이의 일을 어제 일처럼 역력히 말했다. 나는 묻기를, “황진이가 이술(異術)을 가져서 그러했던가?” 하니, 늙은이는 말하기를, “이술이란 건 알 수 없지만 방 안에서 때로 이상한 향기가 나서 며칠씩 없어지지 않았습니다.”했다. 나는 공사가 끝나지 않아서 여러 날 여기에서 머물렀으므로, 늙은이에게 익히 그 전말(顚末)을 들었다. 때문에 이같이 기록하여 기이한 이야기를 더 넓히는 바이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김택영도 “황진이는 중종 때 사람으로 황진사의 서녀이다. 그의 어머니 진현금이 병부 다리 아래에서 물을 먹다가 감응하여 황진이를 잉태했다. 황진이를 낳자 방안에 기이한 향기가 사흘 동안 풍겼다.”라고 송도인물지에서 기록하였다. 아무튼 허균은 맹인의 딸로, 이덕형은 비밀스러운 이인(異人)의 딸로, 김택영은 황진사의 서녀로 서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누구 말이 맞는지는 모른다. 그냥 설(說) 일뿐이다.

황진이의 인생에서 첫 사고는 15세 때 일어난다. 이웃의 총각 하나가 스토커가 되어 늘 담장을 기웃거린다. 하루는 용기를 내서 말을 걸려고 황진이에게 다가갔다가 심장을 얼게 하는 그 고고한 아름다움과 서늘한 눈매에 입이 딱 붙고 만다. 돌아와서는 가슴앓이를 하면서 드러눕는다. 그 부모가 찾아와 살려주는 셈 치고 한 번만 위로해 주라고 했지만 진이는 듣지 않는다. 얼마 후 그는 정말 상사병으로 죽고 만다. 이 소식을 듣고 황진이는 큰 충격을 받는다. 대체 내 얼굴, 내 육신이 뭐라고 젊은 사람이 저렇게 유명을 달리한단 말인가? 아름다움이 사람을 죽인다면, 아름다움은 죄악이 아니던가? 황진이로서도 심한 고민이 되는 충격이었다, 그런데 이게 다가 아니었다. 장사를 치르는 날, 그 남자의 상여가 지나가다가 황진이의 집 앞에 딱 멈춰 섰다. 아무리 해도 상여가 움직이지 않자, 그 집 사람이 와서 황진이의 옷가지를 얹어줘야 갈 것 같다고 말하자, 황진이는 저고리를 하나 꺼내 준다. 관이 그제야 움직인다. 상여꾼들이 죽은 총각의 원혼을 달래느라 연극을 한 것일까? 어쨌든 이런 현상으로 인해 황진이는 자기의 삶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화하였을지도 모른다. 어려서 황진이는 천재라는 소리를 들으면서 각종 공부를 했음에 틀림없다. 어머니가 맹인인지 첩인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막판에는 기생집에서 딸을 키웠으리라. 그래서 그녀도 기생이 된 것으로 진작된다. 기생의 딸이지만 선비들이 읽는 경전과 역사서를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에게 배우고, 당시(唐詩)를 공부하며 시재(詩才)를 키웠다. 그녀는 골이 텅 빈 미녀로 취객들을 향해 웃고 춤추는 존재로 노리갯감이 되고 싶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래서 예쁜 여자만을 탐하는 그런 남성에게는방 멋지게 먹이고, 풍류를 알고, 문학과 음악을 승화시킨 해어화(解語花)가 되고 싶었을 것이다.

이제 황진이의 선택적 사랑놀음에 대하여 이야기해 보자. 금삿갓이 ‘선택적’이라고 한 것은 특별한 의미가 있다. 황진이는 추근 대는 아무나 하고 사랑을 나누지 않고 자기의 판단에 따라 상대를 선택했기 때문이다. 이런 사례들로 봤을 때 황진이의 ‘선남안(選男眼)’은 MLB 야구에서 전설의 타자 베이브 루쓰나 KBO 야구에서 이승엽의 ‘선구안(選球眼)’을 훨씬 뛰어넘는 수준이다. 허균의 <성옹지소록(惺翁識小錄)>에 근거하여 설(說)을 풀면 대충 이러하다. “지족(知足) 노선사(老禪師)가 삼십 년 동안 면벽(面壁)했지만 내게 짓밟힌바 되었다. 오직 화담 선생만은 접근하기를 여러 해에 걸쳤지만 종시(終是) 어지럽지 않았으니 이는 참으로 성인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말이 후세 작가들의 상상력을 자극하여, 지족선사를 유혹하는 ‘황진이 야동(野動)’을 상상하게 된 것이다. 황진이의 이 말이 고매한 두 사람을 비교하는 형식으로 되어있는 바람에, 지족선사는 아주 형편없이 파계한 인간이 되었고, 서경덕은 고매한 성인이 된 것이다. 그 상황을 야동으로 엮어보자. 당시 생불(生佛)이라고 불리며 천마산 지족암(知足庵)에서 정진하던 지족선사를 찾아간다. 지족선사는 그야말로 암자에서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수도만 해온 스님이었다. 그녀가 강한 상대를 택한 것이다. 정치든 사업이든 가장 강한 상대를 골라 싸우면 지더라도 부끄러울 게 없고, 끈질기게 붙어서 이기면 일약 스타덤에 오른다. 역시 선남안의 일인자답다. 암자를 찾은 그녀가 “뜻하는 바가 있어 불제자가 될까 하여 찾아왔습니다.”라고 운을 띄운다. 자기는 청상과부인데 여생의 보람도 없어서 스님의 명성을 듣고 제자가 되겠다고 슬픈 표정으로 애원하였다. 깊은 산속에서 속세와 절연하고 살아온 스님은 난데없는 미녀의 출연에 황당 아니 당황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자신의 눈을 의심하였다. 아차 하여 자신의 수양 부족을 탓하며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을 되뇌며, 대꾸도 하지 않고, 열심히 불도만 닦았다. 돌아갈 줄 알았던 황진이가 도리어 법당으로 들어와서 스님 옆에 살포시 앉아서 향긋한 여체의 향기를 방안에 온통 가득 채운다. 밤은 깊어가고, 오가는 사람도 없고 상좌중도 잠든 지 오래인지 사위(四圍)가 고요하다. 하늘거리며 비치는 옷을 걸친 황진이의 삼천배하는 모습이 촛불을 너울거리게 만들 뿐이다. 지족선사는 염불을 외우면 그 모습을 애써 외면한 채 자신과 결사적인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황진이도 절을 하느라 온몸이 땀에 젖고, 이마에도 송골송골 땀방울이 맺혀서 흐른다. 그러자 너무 더운지 속적삼과 속치마 하나만 남기고 저고리와 겉치마를 벗고 계속 절을 올린다. 밤이 깊어 멀리 송도에서 울리는 인경(人定) 소리가 희미하다. 황진이의 향기와 이슬 맺힌 도화 같은 얼굴, 속적삼과 속치마 안으로 비치는 비단결 같은 살결이 한 번도 여자를 접해 본 적이 없는 지족선사이지만 조물주의 섭리로 음양의 관계는 자동으로 알게 해주는 모양이다. 선사도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었다. 요염한 교태 앞에 그만 그는 무릎을 꿇고 말았다. 30년의 면벽 수행도 하루아침에 공염불(空念佛)이 된 것이다. 시쳇말로 도로아미타불이 되고 말았다. 이로서 황진이는 목적을 달성하였고, 조선의 최고위급 남성 중 한 명은 나락으로 그의 스승 화담은 하늘 높이 올리게 된 것이다. 이런 상황도 조선의 억불숭유(抑佛崇儒) 정책의 한 단면일지도 모른다. 최인호의 소설에도 이런 상황의 묘사가 아주 리얼하다. 소설가 김탁환은 그의 작품에서 지족선사의 품격을 그런대로 유지해 주는 글을 썼다.

그럼 황진이가 인격을 하늘로 올려 준 화담 서경덕과의 야동을 엮어 보자. 화담(花潭)은 그의 호이지만, 그가 사는 곳을 나타낸다. 그의 문집에 실린 시 <산거(山居)>를 보면 그 집의 정경이 상상된다. 아주 아담하고 청초한 별서(別墅)처럼 보인다.

花潭一草廬(화담일초려) / 화담의 초가집 하나

瀟灑類僊居(소쇄류선거) / 맑고 깨끗하여 신선들이 사네.

山簇開軒面(산족개헌면) / 집 앞으로 산이 모여 열리고

泉絃咽枕虛(천현열침허) / 빈 베개머리에 샘이 현을 울리네.

洞幽風淡蕩(동유풍담탕) / 그윽한 골짜기에 바람이 호탕하게 맑고

境僻樹扶疎(경벽수부소) / 후미진 곳 나무는 성기게 어우러졌네.

中有逍遙子(중유소요자) / 그 가운데 느긋하게 거니는 사람 있어

淸朝好讀書(청조호독서) / 맑은 아침 책 읽기를 즐긴다네.

<청나라 주이존(朱彛尊)이 지은 <명시종(明詩綜)>에는 簇→色, 面→近, 絃咽→聲到, 朝→晨, 好→閒으로 되어 있고, 조선의 한치윤(韓致奫)이 지은 해동역사(海東繹史)에는 僊→仙, 簇→色, 面→近, 絃咽→聲到, 淡→澹, 淸→晨, 好→聞으로 되어 있다.>

옛사람들의 기록을 좀 더 리얼하고 픽션을 섞어서 재구성해야 야동의 제 맛이 나기 때문에 얼기설기 엮어본다. 사실이 아니니까 나무라지는 마시길. 황진이는 웬만한 남자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으니 큰 그림을 그리기로 작정한다. 그래서 어느 날 비가 부슬부슬 오는데, 얇은 치마저고리에 속적삼과 고쟁이도 없이 촉촉이 비를 맞으며 걸음을 재촉했다. 비에 젖은 얇은 망사 같은 옷이 온몸에 달라붙어 고혹적이고 육감적인 몸매를 적나라하게 그대로 드러내고 있었다. 터질 듯한 풍만한 가슴과 물오른 요염한 엉덩이는 누가 볼 새라 연신 리드미컬하게 춤을 추니 요즘 걸 그룹의 춤은 비교도 안 된다. 그녀가 향한 곳은 다름 아닌 화담(花潭)이다. 화담이 성거산(聖居山)에 있다는 설(說)이 있는데, 미수(眉叟) 허목(許穆)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오관산(五冠山) 아래에 영통사(靈通寺)가 있고, 그 절의 골짜기 어귀에 화담이 있는데, 그 담(潭) 위에 선비 서경덕의 산정(山亭)이 있었으며, 화담의 사당이 있고 그 위에 그의 무덤이 있다.”라고 했다. 아무려나 비를 맞은 선녀가 호젓한 계곡의 초당으로 서경덕을 찾아갔으니 일이 벌어질 것은 자명하다. 조용히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아리따운 반나의 여인을 보자 얼굴빛 하나 변하지 않은 채, “웬 비를 이리도 맞고 오셨소? 비를 피해 어서 들어오시오!”라며 맞는다. 손님을 대하는 격이 벌써 다르다. 서경덕이 그녀를 스스럼없이 반겨 주었고, 그러면서 비에 젖은 옷을 벗어 옷과 몸을 말려야 한다며, 수건을 챙겨주며 돌아앉아서 책 읽기를 계속한다. 황진이는 아름다운 나신의 슬쩍 보여주며 선비를 유혹하려 했지만 꿈쩍도 하지 않는다. 은근히 부아가 돋은 그녀는 오한이 오니 이부자리가 없느냐고 물었다. 아무 대꾸 없이 서경덕은 이부자리를 깔라 주고는 또 서안(書案)에 앉는다. 여인은 알몸으로 이부자리에 누우면서 요염한 자세로 교태를 부리면서 다음 장면을 은근히 상상하면서 기다린다.

한식경이 지나도 미동도 하지 않고 글만 읽는 서경덕. 어느덧 날은 저물어 가고 비도 조금씩 잦아들었다. 이러다가는 모든 게 수포로 돌아가겠다고 생각한 그녀는 좀 더 과감한 작전에 돌입한다. 이불을 걷어차고 잠꼬대를 하는 듯이 허연 허벅지를 들어 서경덕의 책상다리 위로 슬쩍 걸쳤다. 다리를 걸쳐 놓고 보니 그녀의 굽은 무릎 부위에 묵직한 무엇이 불끈 솟아 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녀는 속으로 “옳거니, 고자인 줄 알았는데 사내구실을 하는구나!”라고 생각하며 잠시 후면 마음을 고쳐먹고 달려들겠구나 했다. 그런데 그는 여인의 다리를 들어서 다시 제자리에 놓으면서 이불까지 다시 덮어주는 게 아닌가. 아직 밤이 깊지 않아서 그런가 보니 기다려 보자 생각했다. 정말 밤이 이슥 하자 서경덕도 기지개를 켜더니 겉옷을 훌훌 벗어서 횟대에 걸치더니 그녀의 옆자리로 들어와서 누웠다. 이제 무언가 거사가 이루어질 것으로 가슴이 조마조마 기다렸는데, 웬걸 그는 벌써 코를 드르렁거린다. 이 무슨 시추에이션? 그녀는 일부러 잠결인척 다리도 떠 걸어 보고, 손을 사내의 가랑이 사이로 슬쩍 넣어 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양물이 우람하게 솟아 있는데도 그는 여전히 코만 곤다. 그렇다고 그녀가 양물을 주물럭거리기는 자존심이 상하고 해서 손을 빼고 기다리다가 동녘이 이미 부옇게 밝아 오는 것이다. 날이 샜다. 잠시 후에 부스럭거리던 서경덕은 옷을 입고 나가버린다. 어쩔 수 없이 꼬박 밤을 지새운 그녀는 새벽에야 곤히 떨어졌다. 인기척에 눈을 뜨니 그가 벌써 조반을 지어 들고 들어 온 것이다. 그를 쳐다볼 면목이 없어서 숟가락을 드는 둥 마는 둥 하고 옷을 챙겨 입고 화담을 빠져나왔다. 세상에서 최고의 진면목을 본 것이다.

그리고 며칠 후, 황진이는 맛있는 음식을 장만하여 다시 화담을 찾았다. 글을 읽고 있던 서경덕은 무슨 일 있었더냐는 얼굴로 그녀를 덤덤하게 맞았다. 들어선 황진이는 서경덕에게 큰절을 올리며 제자로 삼아달라고 애원을 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사제 겸 플라토닉 연인으로 발전했다. 서경덕의 황진이를 그리워한 마음의 일단은 그가 남긴 다음의 시조로 엿볼 수 있겠다.

마음이 어린 후이니 하는 일이 다 어리다.

만중운산(萬重雲山)에 어느 님 오리마는

지는 잎 부는 바람에 행여 긘가 하노라.

불어오는 가을 바람결에 떨어지는 낙엽소리를 듣고 혹시 그녀가 왔나 하는 마음에 방문을 열어 보고픈 그의 마음이 잘 드러나고 있다. 황진이 비록 스승으로 서경덕을 모시고는 있지만 끔찍이도 그를 흠모했다. 그녀는 스승이 남긴 시조에 이렇게 화답했다.

내 언제 무신(無信) 하여 님을 언제 속였관데

월침삼경(月沈三更)에 올 뜻이 전혀 없네.

추풍(秋風)에 지는 잎 소리야 낸들 어이 하리오.

서로 애틋한 그리움을 잘도 표현한 시조이다. 두 사람은 기본적으로 나이 차이가 있었으니 사제지간이 맞고, 사귀었다면 요즘의 원조교제로 치부된다.

일설(一說)에 황진이가 자기를 찾아오는 사내들에게 퀴즈를 내고 맞히면 수청을 들겠다고 했는데, 아무도 못 맞혔는데 서경덕이 맞추고 훌쩍 떠났다는 설(說)도 있다. 그래서 그녀가 그를 찾아서 조선을 유람했다는데 신빙성은 없어 보인다. 차라리 화담이 죽은 후에 그를 그리워하여 화담이 들렸던 곳을 되짚어갔을지는 모른다. 서경덕은 그의 제자 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과 함께 유람한 적은 있었다고 한다. 참고로 황진이가 낸 퀴즈는 한문의 파자(破字) 놀이에 해당한다. 선비들 특히 김삿갓 등이 자주 이용했던 것이다. “點一二口 牛頭不出”이 무슨 뜻인지 알면 수청을 들어준다는 것이다. 사구문(四句文)으로 백날 해석해 봐야 정답이 나올 수 없는 글이다. 글자를 풀어서 분해한 것이니까 이를 다시 조립해서 끼어 맞추면 되는 놀이다. 원리만 알면 금방 해결될 문제이다. 점(點)은 마침표 점이다. 점과 일(一), 이(二), 구(口), 네 가지를 조립하면 말씀 언(言) 자가 된다. 우두(牛頭)는 소(牛)의 머리인데, 불출(不出)이니까 나오지 않은 것이다. 소 우(牛) 자의 머리가 나오지 않았으니, 낮 오(午)가 된다. 그러면 언오(言午)가 되는데, 별 뜻이 없는 글자이다. 따라서 정답이 아니다. 이를 다시 조립하면 허락할 허(許)가 정답이다.

다음은 명창 이사종(李士宗)과의 송도 3년 한양 3년의 계약 결혼에 대해 살펴보자. 유몽인(柳夢寅)의 <어우야담(於于野談)>에 나온다. 이 스토리를 소설가 김병총이 잘 엮었다. 선전관(宣傳官)에 이사종(李士宗)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한양 제일의 명창이었다. 선전관이란 허우대 좋고 무예를 잘하며 헌칠한 사내로서 소리까지 국창(國唱)이라니 여자를 후리는 데는 최고의 제비요 선수였을 것이다. 그는 역시 선수답게 황진이에게 직접 들이대지 않고 호기심을 자극하는 공법(攻法) 쓴다. 그래서 황진이가 지나갈 길목을 노려 송도(松都)의 천수원 냇가로 말을 몰아 달렸다. 느긋하게 안장을 내리고, 관을 벗어 계류되어 있는 배 위에 걸쳐놓고는 누워서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다. 계획대로 나들이를 나갔던 황진이가 몸종을 데리고 들길을 걸어가는데, 심금을 울리는 노랫소리가 들려오는 것이다. 같은 가객(歌客)의 입장에서 백아(伯牙)와 종자기(鍾子期)의 지음(知音)을 만나는 생각이 팍 꽂히는 것이다. 이 소리의 수준으로 보아 분명 한양의 명창인 이사종이라 생각하고, 몸종을 보내 사실 확인을 하여 모시도록 했다. ‘과연 당대 제일의 명창이다! 저런 남자와 한 번 살아봤으면!’하고 생각한 것이다. 몸종이 와서 자초지종을 아뢰니, 이시종은 속으로 불감청(不敢請) 이언정 고소원(固所願)이다. 이사종은 부스스 일어나 짐을 챙겨 그녀를 따라 황진이의 기생집인 명월관(明月館)으로 갔다. 이사종을 맞은 그녀는 다짜고짜 계약결혼을 청했다. 요즘도 흔치 않은 파격적인 제안이다. 송도 자기 집에서 3년, 한양의 이사종의 집에서 3년을 살다가 깨끗이 헤어지자는 것이다. “맞소. 그대는 역시 황진이 답구려! 그리 합시다.” 이사종도 쿨하게 약조한다. 그는 한양에 본처가 있는 몸인데 얼굴색하나 변하지 않고 허락한 것이다. 천하의 소리꾼이다. 여자에게 쿨하고 화끈한 가황 나훈아 정도랄까. 재미있었던 사정은 6년 동안의 동거생활 중 생활비는 3년간 서로 상대를 위해 자기가 부담했다는 사실이다. 먼저 송도에 살 때는 손잡고 송도 주변의 명승지를 다니며 소리하고 시를 읊고 꿈같은 세월로 후딱 보냈다. 익재(益齋) 이제현(李齊賢)의 송도팔경 즉 자동심승(紫洞深僧), 청교송객(靑郊送客), 북산연우(北山煙雨), 서강풍설(西江風雪), 백악청운(白嶽靑雲), 황교만조(黃郊晩照), 장단석벽(長湍石壁), 박연폭포(朴淵瀑布)를 두루 섭렵한 것이다.

다음 3년은 한양이다. 한양은 송도와는 다른 분위기이다. 정실부인이 엄연히 있고, 사대부인 이사종의 지체도 있으니 마음을 다잡아야 한다. 정실부인이 어떻게 나올지 소실인 입장에서 마음 쓰인다. 이런 마음을 알았는지 이사종은 남산골 기슭에 두 사람이 살 보금자리를 마련했다. 뭍 사내의 소실 자리 청을 거절한 천하의 황진이가 미관말직인 선전관 이사종의 소실이 되어 남산골에서 신접살림을 한다는 소문은 한양을 떠나 전국으로 퍼지게 된 것이다. 특히 아낙들의 입방아가 제일 시끄러웠다. 하지만 천하의 황진이가 여기에 쫄 사람은 아니다. 그런 것에 눈 하나 까딱할 황진이가 아니다. 그녀는 한양에 오자 고려의 수도 송도와는 또 다른 조선의 수도로서 풍기는 현란함에 흠뻑 취했다. 시간이 있을 때마다 육조거리를 살폈다. 그때마다 그녀는 삼봉(三峯) 정도전(鄭道傳)의 《진신도팔경시(進新都八景詩)》를 떠올리며 한양 구경을 섭렵했다. 그녀는 개인적으로 그중에서 제2 수인 <도성궁원(都城宮苑)>과 제6 수인 <서강조박(西江漕泊)>이 마음에 들었다. 송도에서 진이와 한양에서의 진이는 공주와 무수리만큼이나 차이가 있는 생활이었다. 한양생활에서 첩살이는 몸과 마음이 따로따로 놀았다. 낮에는 부엌일에서 정실의 아이 보육 역할에 밤엔 이사종과 뜨겁게 속궁합을 맞춰가며 하루하루가 흘러갔다. 육신은 고달프지만 밤이면 돌아오는 달콤한 잠자리의 행복에 낮의 고단함이 묻혔다. “후회하지 않소?” 이사종은 뜨겁게 살을 섞고 나면 꼭 묻는다. “왜 서방님은 후회하세요?” 황진이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들은 다시 이합(二合)에 들어간다. 일합(一合)으로 육체의 급한 허기를 채우고 이합은 좀 더 길고 느긋하게 밀고 당기며, 사랑의 진수를 음미하려는 것이다. 그녀는 이때마다 어릴 때 기방교육 필수 과목으로 배운 잠자리 기술을 십분 활용했다. “참으로 서방님은 잘생기셨어요! 어쩌면 이렇게 그 일도 잘하시나요, 제 눈엔 천하의 남정네 중 가장 헌헌장부예요.” 사내의 기를 살려주는 멘트를 아낌없이 날리며 그녀의 손이 이사종의 늘어진 그 뿌리를 움켜쥐었다. 이합까지 즐긴 뿌리는 오뉴월 엿가락처럼 쳐져있다. 진이의 손이 닿자 그 물건도 주인을 아는 듯 슬그머니 다시 고개를 들었다. 진이는 두 팔과 두 다리를 벌리어 이사종의 등을 끌어안았다. 이사종이 입을 커다랗게 벌려 백합처럼 흰 진이의 탱탱한 젖가슴을 잘 익은 복숭아를 물이 흐르게 물듯이 물었다. 진이의 몸도 해일처럼 일어나며 출렁이기 시작하였다. 이사종은 정실의 눈치를 보아 일주일에 한 번씩 진이의 방을 찾았다. 조강지처 정씨의 허가받은 합방이다. 몇 시간은 양해 반 몰래 반이고, 밤새기 허가를 받아야 했다. 하지만 계약결혼 3년이 슬금슬금 다가오자 이사종은 조강지처의 눈치는 아랑곳 않고 진이 방에 들어오면 동창이 밝아올 때까지 송도 명월관에서 알몸뚱이로 사랑을 할 때를 연상케 하는 방사(房事)를 즐겼다.

3년 사이에 조강지처와 소실 황진이는 미운 정 고운 정이 들어 언니동생이 되었다. 황진이의 눈물겨운 시집살이 덕분이다. 떠날 날이 다가오자 진이는 주위를 정리하기 시작하였다. 잠자리도 매일 밤 양해를 받았으나 되도록 피했다. 마음은 보이지 않으나 몸은 행동이 보여 떠날 때일수록 아름답게 정리하고 싶어서다. 이사종은 매일 밤 운우지락을 하려 했으나 진이는 매정하게 거절하였다. 한양의 마지막 밤에 최후의 몸을 활짝 열어 주려고 마음을 다 잡았다. 송도로 돌아갈 날이 돌아왔다. 황진이는 오랜만에 거문고 꺼내 타면서 <진신도팔경>의 제8수 <북교목마(北校木馬)>를 노래하자, 이사종이 받아서 <송도팔경>의 제2수 <청교송객(靑郊送客)>을 절창으로 불렀다. 노래를 마친 이사종은 그녀를 덥석 안았다. 그녀도 기다렸다는 듯이 거문고를 팽개치듯 옆으로 제쳐놓고 그의 품에 안겼다. 이 밤이 밝으면 그녀는 그의 여자가 아니다. 사내는 성급히 달려들었다. 여자도 그런 사내가 싫지 않았다. 오늘 밤은 영원히 밝지 않기를 그들은 마음속으로 기원하면서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며 한 몸이 되었다. 그가 그녀의 두 다리를 벌리며 밀고 들어왔다. 뜨거운 신음소리를 내는 그녀의 두 눈엔 알 수 없는 눈물이 쉼 없이 흘러나왔다. 거대한 파도에 배가 흔들리듯 그는 그녀의 몸에서 신명 나게 방아를 찧는다. 뜨거운 살이 교합되자 그가 몸을 틀어 그녀의 다리 사이로 얼굴을 묻으려 한다. “아니 됩니다. 더러운 몸입니다...” 그녀는 앙탈을 부리며 몸을 돌려 등을 보였다. “아니요. 내가 당신을 깨끗이 씻어 주리다. 당신은 원래 옥황상제께서 이승으로 잠시 휴가를 보낸 선녀(仙女) 요.” 이사종은 돌아누운 그녀를 다시 돌려서 정성껏 다시 한번 더 홍콩으로 보내주었다. 헤어지기가 못내 아쉬운 황진이가 지은 시조인데, 우리나라 시조 3천여 수 중에서 최상급으로 칭해지고 있다. 한시는 정조(正祖) 대에 시서화(詩書畵) 삼절로 꼽혔던 자하(紫霞) 신위(申緯)가 황진이의 시조를 한시로 번안한 것이다.

截取冬之夜半强(절취동지야반강) / 동짓달 밤 반을 억지로 베어내어

春風被裏屈幡藏(춘풍피리굴반장) / 춘풍 이불속에 서리서리 넣었다가

有燈無月郞來夕(유등무월랑래석) / 달 없는 밤 등불 켜고 낭군님 오시는 밤에

曲曲鋪舒寸寸長(곡곡포서촌촌장) / 굽이굽이 펴서 마디마디 길게 깔리라.

원 시조는 워낙 유명하여 여기서는 생략한다. 다른 설(說)에는 이 시조가 소세양과 헤어지는 것이 안타까워서 지었다는 이야기도 있으나 필자 금삿갓은 과문한 탓인지 확실한 물증을 볼 수 없었다.

다음 남자는 유학자요 문신인 양곡(陽谷) 소세양(蘇世讓)이다. 그는 당시 잘 나가는 모범생으로 청요직(淸要職)을 승승장구하는 중년의 문신이었는데, 황진이 보다는 나이가 훨씬 많았다. 화담 서경덕과 비슷한 연배이다. 그는 평소 여색에 빠져서 인생을 허비하는 것은 올곧은 선비의 자세가 아니라고 말하고 다녔다. 마침 황해도 관찰사를 마치고, 송도를 들렸는데 명월(황진이)이라는 천하의 기녀가 있다는 소문을 들어 알고 있었다. 마침 송도부윤이 친구들을 불러 감사에게 연회를 베푸는 자리가 마련되었다. 이때 한잔 얼큰해진 소세양이 큰소리를 쳤다. “명월이란 기생이 아무리 미색이 뛰어나다 해도 나는 딱 한 달만 함께 하고 헤어질 것이라네. 헤어진 뒤 털끝만큼이라도 미련을 두지 않을 것이네. 만약 한 달이 지나고 하루라도 더 머문다면 자네들은 나를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좋네!” 이 자리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깜짝 놀랐다. 우승지에 관찰사까지 한 양반이 폭탄발언을 한 것이다. 다음날 송도부윤이 황진이에게 그런 사실을 넌지시 전했다. 소세양의 내공도 보통이 아니었다. 과거에 그녀가 파자(破字) 퀴즈로 사내를 시험했다니까, 이번에는 자기가 그녀를 시험해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필휘지 하여 편지 한 통을 써서 그녀에게 보냈다. 받은 황진이가 펴 보니 석류 류(榴) 한 자가 멋진 해서로 쓰여 있다. 머리를 한 대 맞은 황진이다. 이것은 파자가 아니라 훈(訓)으로 엮은 퀴즈였던 것이다. 곰곰이 생각한 그녀의 머리에 답이 떠오른 것이다. 榴는 훈 즉 뜻이 석유나무류이다. 이를 훈을 다시 한자로 고치면 클 석(碩), 선비 유(儒), 어찌 나(那), 없을 무(無), 머무를 류(留)인데 이를 해석하면 ‘큰 선비가 어찌 머물 수 없을까?’이다. 답을 맞힌 그녀는 곧장 답장을 썼다. 고기 잡을 어(漁) 딱 한자로 보냈다. 소세양도 받아보니 장군멍군이다. 당대 석학인 그도 머리를 한참 굴려서야 답을 알았다. 답은 허락한 것이라서 웃음이 씨익 나왔다. 고기자불어로서 무슨 뜻인고 하니, 높을 고(高), 기생 기(妓), 스스로 자(自), 아니 불(不), 말씀 어(語)이다. 해설하면 고상한 기녀는 스스로 말하지 않으니, 그대가 알아서 하란 의미이다. 그래서 소세양은 황진이에게 한마디 약조를 한다. “오늘 밤 명월이 가득한 명월관에서 명월이를 품었다가 다음 명월이 가득할 때 명월이를 놓아주겠노라.” 그래서 둘은 제주도 한 달 살아보기가 아니라 명월관 한 달 계약 결혼을 하여 명월(明月 : 황진이의 얼굴)이 양곡(陽谷 : 금삿갓은 소세양의 양물이 있는 계곡으로 표현했음)을 훤히 비추게 된 것이다.

살아보면 알겠지만 한 달은 눈 깜짝할 사이에 지나간다. 둘은 학문적(詩)으로나 인격적(道)으로나 육체적(酒色)으로나 풍류적(樂)으로 너무나 잘 맞았지만 계약은 계약이었다. 좌중(座中)에 공표까지 한 소세양으로서는 약속을 파기하고 더 머물고 싶은 생각도 굴뚝같았다. 그때 황진이가 소세양의 심금을 울리는 시 한수를 읊는다. 다음은 황진이가 지은 절창인 <봉별소판서세양(奉別蘇判書世讓)>이다. 이 시제를 황진이가 직접 지은 건지 후세에서 기록으로 남기면서 붙인 것인지는 아리송하지만, 지극한 예우를 한 것으로 보인다. 보기 드물게 받들 봉(奉) 자를 쓴 것이다. 사대부끼리 송별시를 주고받을 때 상대의 관직을 쓰는 것은 일반적이다.

月下梧桐盡(월하오동진) / 달빛 아래 오동잎 다 지고

霜中野菊黃(상중야국황) / 서리 맞은 들국화 노랗구나.

樓高天一尺(누고천일척) / 누각은 높아 하늘과는 한 자고

人醉酒千觴(인취주천상) / 그대는 여러 잔 술에 취했네.

流水和琴冷(유수화금랭) / 유수는 거문고에 차게 화답하고

梅花入笛香(매화입적향) / 매화는 피리에 배어 향기로워라

明朝相別後(명조상별후) / 내일 아침 서로 이별 후에

情與碧波長(정여벽파장) / 정은 푸른 물결처럼 길어지네.

팔월 한가위 보름달에 만나 약조해서 오동잎 지고 국화 향기 그윽한 중양절 보름이 온 것이다. 이별이 서러워서 누대에 높이 올라 이별연을 베푸니, 달은 한 팔 길이 위에 떠있고, 아쉬운 님은 몇 잔술에 취했구나. 이별의 한을 읊은 시에 곡조를 부쳐 명월이 거문고를 타니 흐르는 물조차도 차갑게 화답하고, 소세양의 합주로 부는 피리에는 국화 향기가 배어난다. 내일 아침이면 떠날 갈 님이고, 보고 싶은 정은 예성강의 푸른 물결처럼 길고도 길게 이어질 것이다. 누가 이런 애달픈 절창을 듣고 뿌리치고 떠날 수가 있겠는가. 시 한 수에 소세양은 그만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으면서 “나는 남자도 아니다.”라고 외쳤다나 뭐라나. 그리고 그녀와 보름을 더 머물다가 떠난 것이다. 황진이가 일생을 통해 남성으로서 사랑했던 이가 바로 소세양이라고 한다. 그녀가 소세양을 떠나보낸 뒤 남긴 시조(時調이다.

어저 내 일이야 그릴 줄을 모르던가

이시랴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하노라

아무튼 계약 결혼으로는 세계의 주목을 받은 사르트르와 보바르의 결혼인데, 1929년에 결행한 것에 비해 이미 우리 조선에서는 16세기에 계약동거를 했으니, 유교의 나라 동방예의지국에서 거의 파천황(破天荒) 감이다.

다음 타자는 그 유명한 청산리(靑山裏) 벽계수(碧溪水) 시조의 주인공이다. 이름이 아주 절묘하여서 황진이가 시조로서 한 방을 제대로 먹일 수 있었다. 벽계수(碧溪守)는 계곡 물의 수(水)가 아니고 왕실 종친부의 봉작(奉爵) 이름이다. 끗발 순으로 따져서 대군(大君)-군(君서)-도정(都正)- 정(正)-부정(副正) 다음이 수(守)이다. 정 4품에 해당한다. 여기서 벽계수는 벽계가 아호이고 수는 관직이다. 본명은 이종숙(李終淑) 세종의 서자 영해군(寧海君)의 증손자이다. 황진이와 비슷한 연배로 거문고에 능하고 성격이 호방하여 풍류를 즐겼다. 벽계수는 스스로 절조(節操)가 굳다고 말하면서, 자신은 황진이에게 유혹을 당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그를 쫓아버릴 수 있다고 호언장담했다. 이 얘기를 전해 들은 황진이가 벽계수를 유인해 오도록 했다. 부탁을 받은 사람이 거지 차림으로 벽계수에게 가서, 구걸하면서 그의 말벗이 되었다. 거지가 사는 곳이 개성 송악(松嶽) 밑이라고 말하니, 벽계수는 걸인에게 송악의 가을 경치를 얘기하라 했다. 걸인은 유창한 언변으로 송악의 가을 경치를 얘기하니, 벽계수가 흥취를 못 이기어 걸인에게 길을 안내하라 제의했다. 벽계수를 유인해 일부러 저녁에 달이 뜬 다음 경치 좋은 곳으로 인도했다. 벽계수가 경치에 마음이 끌려 있는데, 마침 황진이가 나귀를 몰고 나타나 고삐를 잡은 채 노래를 불렀다. 그 노래가 바로 “청산리 벽계수(벽계수 이종숙)야 수이감을 자랑 마라. 일도창해하면 다시 오기 어려우니, 명월(황진이)이 만공산하니 쉬어간들 어떠리.” 노랫소리를 들은 벽계수는 달밤에 한 미인의 청아한 노래를 듣고, 그것에 취해 자신도 모르게 말에서 떨어졌단다. 황진이가 이를 보고 웃으며 “왜 나를 쫓아버리지 못하고 낙마를 하시오?”라고 비꼬니, 벽계수는 크게 부끄러워했다. 인터넷에는 벽계수에게 황진이 홀리는 방법을 가르쳐 준 사람이 손곡(蓀谷) 이달(李達)이라는 설(說)이 돌아다닌다. 주변 설명까지 친절하게 붙여서 이달은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제자이고 허엽이 화담의 제자라서 허엽이 황진이의 성격에 대해 잘 알 것이라는 추측까지 말이다. 사실이 아니라고 본다. 허엽은 잠시 화담에게 배웠고, 동인이라서 퇴계 이황 문하이면서, 회재(晦齋) 이언적(李彦迪)을 사숙했다. 다만 화담의 제자인 토정 이지함과는 막역한 사이였다. 도리어 허엽의 아들 허균(許筠)과 딸 허난설헌(許蘭雪軒)이 이달의 제자이다. 이달이 황진이 보다 30 여살 아래인데 어떻게 그들의 사랑놀이의 코치를 할 수 있겠는가.

이번에는 '묻지마 관광'에 대하여 알아보자. 남성들은 벼슬한답시고, 아니면 유람한답시고 팔도강산을 헤매고 다니면서 맛있는 것 먹고, 좋은 것 보고, 그쪽 지방의 기녀들과 즐기기도 하는데, 여자 일생은 뭐란 말인가? 인생에 회의와 염증을 살그머니 느낄 나이가 된 황진이가 팔도 유람을 하고 싶었다. 온몸을 던져서 돌아다닌 ‘한비야’도 아닌데 치마 입고 함부로 나돌아 다닐 수도 없고 고민이었다. 팔도를 유람할 동반자가 필요했다. 그래서 찌라시 광고지인 ‘가로수’에 '묻지마 관광' 안내원 모집을 하자, 한양에서 핸섬한 젊은 사내가 득달같이 달려왔다. 묻지마 관광이니까 신상을 꼬치꼬치 물을 수가 없어서 뽑힌 그 친구의 이름은 그냥 ‘이생(李生)’이라고 불렀다. 한양의 내로라하는 재상집 아들인데, 한양에서 잘 나가는 한량으로 거의 오렌지족이었나 보다. 둘이는 곧바로 죽이 맞아서 허름한 캐주얼 복으로 갈아입고 명월관을 나서서 곧장 금강산으로 주유하며 풍광 좋은 곳에서 시와 노래를 주고받으며 유람을 했다. 당시 중국인들도 원생고려국(願生高麗國) 일견금강산(一見金剛山)이라고 했다지 않은가. 황진이는 김삿갓처럼 죽장망혜(竹杖芒鞋)에 삼베치마저고리로, 이생도 포의초립(布衣草笠)에 양식을 짊어지고 길을 다닌 것이다. 청산을 유람하면서 지나간 옛사랑이 그리운지 떠나간 정든 님이 그리운지 아래와 같은 멋 드러진 시조도 한 수 남겼다.

청산은 내 뜻이요 녹수는 임의 정이

녹수 흘러간들 청산이야 가실 손가

녹수도 청산 못 잊어 울어 밤길 예놋다.

내외금강을 돌아 일만이천봉을 찍고, 장안사·유점사 칠성도 드리고 한 바퀴 휙 돌았더니 식량도 떨어졌다. 어쩔 수 없이 민가에서 걸식하며 유람했는데, 부잣집 도령인 이생은 지쳐서 중도에 하산해 버린다. 홀로 된 그녀는 이 절 저 절 다니면서 음식 동냥하며 끼니의 대가로 몸을 팔면서까지 강원도 태백산을 지나 경상도 지리산을 돌아 두루 보고, 전라도 나주 감영에 도착했다. 마침 감영에는 온갖 고을 원들이 모여 연회를 왁자지껄 열고 있었다. 황진이도 폐의파립(敝衣破笠) 차림으로 마치 이도령의 어사출도 형용으로 감영 잔치에 기웃거리며 술 한잔 밥 한 끼 때우려고 했다. 포졸들이 그녀의 행색을 보더니 걸인이나 광인으로 보아 자꾸 내쫓는다. 그래서 고운 목청으로 한 소리 불러 젖히니 목사가 그 소리 알아보고 한 상을 거하게 차려주었단다.

마지막으로 남은 남자가 있다. 첫사랑인지 애틋한 사랑인지 몰라도 황진이가 그와 이별하면서 남긴 시가 또한 애절하다.

三世金緣成燕尾(삼세금연성연미) / 영원한 굳은 인연 제비 꼬리처럼 되니

此中生死兩心知(차중생사량심지) / 이 중에서 살고 죽음을 두 마음만은 알리라.

楊州芳約吾無負(양주방약오무부) / 양주의 꽃다운 약속 내 어기지 않으려니

恐子還如杜牧之(공자환여두목지) / 그대가 도리어 두목지와 같을까 두렵네.

김경원(金慶元)이라는 사나이와 맺은 언약이 깨어지고 헤어지는 상황을 읊은 것이다. 참고로 제비 꼬리가 되는 것은 인연이 좋은 것이 아니라 갈라진 모양이라서 이별을 상징한다. 특히 두목지(杜牧之)는 당시 중국 최고의 미남에다 시를 잘 지어서 여성들의 우상이었다. 양주에서 생활할 때 두목지가 거리를 걸어가면 집집마다 창을 열고 여인들이 귤을 던졌다고 한다. 황진이에 대한 많은 기록 중에도 이 사나이에 대한 명확한 기록이 보이지 않으니 미스터리한 것이다. 하지만 소세양처럼 이렇게 이별의 시에 이름까지 붙일 정도면 무척 사랑했던 사이다. 소설가 정비석(鄭飛石)의 <명기열전>에는 부운거사(浮雲居士) 김경원으로 기술한 대목이 보인다. 황진이와 김경원이 이별하는 대목이다. 산속 객줏집에서 황진이는 피곤한지 저녁밥을 먹기가 무섭게 곯아떨어졌다. 그런데 한잠 늘어지게 자고 나서 깨어 보니, 옆에 누워 있어야 할 부운거사가 없지 않은가! 명월은 소스치게 놀라며 자리에서 일어나 등잔을 켜고 방안을 두루 살펴보았다. 그러나 부운거사의 모습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는다. 벽에 걸려 있던 두루마기와 갓이 없어진 것을 보면 종적을 감춰 버린 것이 분명하였다. 창문을 열어젖히고 밖을 내다보았다. 새벽달만이 매화나무 가지에 걸려 있을 뿐, 사람은 아무 데서도 보이지 않는다. 그녀는 원망과 노여움에 눈물이 솟구쳐 올랐다. 객줏집 주인이 인기척을 듣고 안방에서 나오더니 명월에게 편지 한 장을 내밀어 주며 말한다. 바깥양반께서는 지난밤 초저녁에 먼저 떠나시면서 이 편지를 전해 달라고 말씀하시더군요. 그녀는 말없이 편지를 받아 들고 방 안으로 들어와 읽어 보았다. ‘자네를 두고 먼저 떠나네. 만났으면 반드시 헤어지게 마련이니 과히 나무라지 말아 주게. 자네가 송도까지 편히 돌아갈 수 있도록 부담마(負擔馬)를 객줏집 주인한테 부탁해 두었으니, 말을 타고 돌아가도록 하게. 다시 만날 기회는 좀처럼 없을 테니 그런 줄 알고 기다리지 말아 주게. 부운거사 씀.’ 한마디로 냉혹한 이별 통보였던 것이다. 그래도 그동안에 정은 얼마나 많이 깊어졌던 것인가. 송도에 돌아와서도 자나 깨나 오로지 부운거사 생각뿐이었다.

相思相見只憑夢(상사상견지빙몽) / 그리워도 꿈에서만 볼 수 있으니

儂訪歡時歡訪儂(농방환시환방농) / 내 님 찾으니 나를 찾는구나.

願使遙遙他夜夢(원사요요타야몽) / 바라거니 먼먼 다른 꿈에서

一時同作路中逢(일시동작로중봉) / 한 시에 같이하여 도중에 만나요.

김경원이 어떤 인물인지는 조선사에서 비슷한 시기에 활동한 인물이 있는데, 황진이 보다는 연령이 아래다. 1534년생 김경원은 문과에 장원하였는데, 3대가 내리 장원한 최초의 집안이다. 좌의정까지 역임했는데, 1568년 즉 30대에 함경도 순안을 했고, 의주목사, 평안병사, 함경감사 등을 지낸 것으로 보아 연관성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제 정말로 마지막 남자다. 이 사람은 황진이와는 일면식도 없고, 그 명성만 듣고 짝사랑인지 흠모인지 불태웠던 모양이다. 백호(白湖) 임제(林悌)인데 당대의 문장가였다. 평소 칼과 거

문고를 가지고 다니며 산수유람을 즐기고 다닌 것으로 유명하다. 한 마디로 속된 인물과는 거리가 멀었다. 초년에는 학업에 매진하여 중용을 800번 읽었단다. 김득신(金得臣) 만큼은 아니지만 대단하다. 29세에 알성문과 을과 1위니까 총체적으로 4위인 셈이다. 서북도 병마평사와 관서도사를 역임했고, 홍문관 지제교를 지냈다. 당시 관서 도사로 부임하는 길에 황진이를 꼭 한번 만나보아야겠다고 작정하고 길에 올랐다. 송도에 도착하니 벌써 황진이는 저 세상으로 떠나고 난 후였다. 특출했던 기녀 황진이는 병에 걸려 죽게 되자, 쓸쓸한 산기슭에 묻히느니 사람들 왕래가 빈번한 대로변에 묻어 주기를 유언하여 송도(松都) 대로변에 묻혔다. 그러니 백호 임제는 지나가는 길인데 생전에는 못 보아도 사후라도 인사를 하는 게 좋을 것이라 생각했다. 황진이의 기(氣)와 예(藝)를 높이 평가했던 임제는 그녀가 살았을 때 고대했던 만남을 바랐지만 뜻을 이루지 못함을 아쉬워하며, 기예(氣藝)가 일찍 저버림을 탄식하였고, 황진이의 무덤 앞에 넋을 달래며 제문을 짓고 제를 지냈다. 그리고 아래의 시조를 남겼다.

청초 우거진 골에 자는가 누웠는가

홍안은 어디 가고 백골만 묻혔는가

잔 잡아 권할 이 없으니 그를 슬퍼하노라

나중에 이 사실이 조정에 알려져 대관들의 탄핵을 받고 자리에서 쫓겨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당당한 벼슬아치가 천한 기생의 무덤에 가서 제(祭)를 지내는, 한 마디로 있을 수 없는 일을 했다는 것이 그 이유다. 백호 임제가 황진이의 첫사랑일지도 모르는 김경원과 20 여살 이상 차이나는 처남 매부 사이이다. 즉 임제의 장인이 김만균(金萬鈞)으로 김경원의 부친이다. 그러니 사실 인연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닐지도 모른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천재적인 여인 황진이의 작품은 주로 연석(宴席)이나 풍류장(風流場)에서 지어졌고, 또한 기생의 작품이라는 제약 때문에 후세에 많이 전해지지 못하여 아쉽다. 더구나 황진이의 품행이 음란하고 사대부들을 골탕 먹이려는 사건이 많다 보니 본의 아니게 많은 지탄을 받았을 것이다. 사대부들에 대한 조롱과 풍자, 유혹 등의 행실이 문제시되어 언급이 금기, 기피되었을 것이다. 특정한 남성의 소실로 들어앉은 다른 기녀들은 그의 작품들을 많이 보관 유지가 되었지만. 용모도 출중하며 뛰어난 시 재주와 학식, 민감한 예술적 재능을 갖춘 그녀의 작품들이 오로지 구전으로 전해지고 분유실 된 것이 우리 고전 문학상 큰 손실로 여겨진다. 그의 시와 작품들 중 일부는 <청구영언>과 <해동가요>, <동국시선>, <가곡원류> <대동풍아(大東風雅)> 등의 문헌에 전하고 있다. 그에 대한 일화는 앞서서 언급한 기록물에 간간히 전해져 내려왔다. 그가 지은 작품으로는 한시로 앞에서 소개한 것 말고도 박연폭포(朴淵瀑布), 영초월(咏初月), 등만월대회고(登滿月臺懷古), 등이 전하고 있으며, 시조 작품으로는 청산리 벽계수야, 동짓달 기나긴 밤을, 내 언제 신의 없어, 산은 옛 산이로되, 어져 내일이여 등이 있다.


이제까지 황진이의 남자들 이야기를 해봤다. 그런데 그 남자들을 잠시라도 황진이에게 빼앗겼을 그 남자들(지족선사 제외)의 아내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우리네 조선 사대부 남자들은 이런 것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었을 것이다. 물론 현대의 남자들도 관심이 적고 오히려 부러워했을지도 모른다. 이 문제에 대하여 소설가 한무숙(韓戊淑)이 <이시종의 아내>를 써서 그나마 그 속을 끓인 아낙들의 마음을 대변해 주었다. 이시종의 아내는 시앗을 보면 부처도 돌아앉는 다는데, 무던히 참고 참았다. 남편의 배신도 그렇지만 시어머니의 시앗 황진이에 대한 칭찬은 더욱 역겨웠으리라. 그래서 구구절절 맺힌 한을 외할머니에게 옛 글체로 보낸 편지 형식을 띠고 있어서 더욱 조선시대의 현실감이 묻어난다. 한무숙의 소설 독후감 공모에서 대상에 당선한 이민의 ‘한 마님전 상서’를 통해 간략하게 몇 곳만 들어보자. 그 호탕하고 의연하며 범사에 초연하던 남편이 남산 밑 숲을 등진 곳에 황진이와 살림을 차려 꿈속같이 함께 산다고 했다. 만석선사, 화담선생, 어느 명문가의 선비, 벽계수 등이 그 요물에게 현혹되어 파멸되고 망신을 산, 예를 나열하며 누구든 손아귀에만 들면 농락을 하는 구미호라고 황진이를 절하시킨다. 하지만 시누이가 시앗을 보았을 땐 절곡 하던 시어머니조차도 천생연분이라며 ‘송도집’ 황진이를 끼고돌아 남편의 배반보다 더한 배신감을 그녀에게 안겨준다. “체체 하고 습습하고 상냥하고 온 그런 계집이 천하에 있겠느냐.”라고 시어머니의 칭찬이 늘어지는 것은 그녀가 시집와 이십 년 가깝도록 해서 이골이 난 남편의 뒷바라지, 시어른 모시는 것까지도 방탕기녀 출신 요물 송도집이 그녀 못지않게 잘했기 때문이었다. 더구나 제법 법도까지 챙겨 남편을 자주 본가로 보내 머물게 해 주니 살림 차리기 전보다 오히려 외박이 줄어들었다. 그런 모든 것이 그녀를 더 초라하고 보잘것없게 했다. 그렇게 사리 밝고 투기 없고 체체 한 시앗에 비해 뭐 하나 나을 것이 없다는 자격지심으로 그녀는 점점 시들어 간다. 거기에 보태 그녀를 아예 천길 나락에 꽂아 넣어 버리는 사건이 생긴다. 집에 돌아와 사랑에 누워있는 남편에게 주려고 잣죽쟁반을 들고 사랑채에 갔다가 절절한 정과 사나이 막중한 모든 것을 오직 한 사람을 위해 아낌없이 내어 던진 듯한 창을 가만하게 부르는 남편의 노랫소리를 문밖에서 듣게 된다. 그녀는 억겁 암흑지옥에 빠져드는 듯 처참해져 잣죽쟁반을 다시 들고 안채로 돌아와 쓰러지고 만다. 시앗 본 후 처음으로 깊은 잠에 빠졌다고 했다. 이 깊은 잠이란 그야말로 모든 걸 내려놓고 현실에 항복하겠다는 포기의 표현이 아니겠는가.(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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