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녀를 불문하고, 양(洋)의 동서(東西), 시대의 고금(古今)을 떠나 인간은 누구나 열열이 사랑하고, 사랑받고 싶을 것이다. 부모와 자식의 사랑이나, 남녀 간의 사랑이나, 인류애나 불타오르는 사랑은 언제나 옳고 좋은 것이다. 그러니까 사랑을 위해 나라를 버리고, 목숨도 버리며 불나방처럼 달려드는 것이다. 그런데 모든 사람에게 이런 사랑이 주어지는 것은 아닌 모양이다. 바라지만 쉽게 얻을 수 없는 것이기에 더욱 값진 것이다. 오늘은 시인으로서 명망이 높았지만 필자인 금삿갓에게는 그 보다 더 낭만적이고 애잔한 사랑 이야기가 더 가슴 깊게 스며드는 주인공에 대해 살펴보자. 금삿갓이 중요하게 본 대목은 바로 그들의 사랑이 펜팔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금삿갓 같은 세대들은 당시에 전화가 귀하던 시절이라서 주로 펜팔로 연애를 많이 하던 시대라서 펜팔의 낭망적인 사랑이 지금도 가슴 한 구석을 울리기 때문이다. 금삿갓도 지금 살고 있는 짝과 7년여의 펜팔을 통하여 결실을 본 것임을 밝혀둔다. 지금의 독자들은 <The Barretts of Wimpole Street>라는 연극, 영화의 제목에 대하여 잘 들어 보지 못했을 거다. 워낙 오래전에 초연된 연극이고, 개봉된 지 오래된 영화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당시에는 영국과 미국에서 매우 히트를 했던 작품이었다. 특이하게 모두가 같은 이름으로 제작되었다. 최초의 희곡은 화란(和蘭) 출신 영국 극작가 루돌프 베시어가 쓴 것이다. 1930년 8월에 매럴러번(Marylebone) 페스티벌에서 초연되어 웨스트엔드에서 528회 공연되었다. 당시 캐서린 코넬이 제작과 주연을 맡은 미국 작품으로 1931년에 브로드웨이에서 370회 공연했다. 그 후 수차례 영국과 미국에서 연극으로 부활했고, 영화는 1934년 시드니 프랭클린 감독에 노마 시어너 주연으로, 1957년에 같은 감독의 제니퍼 존스의 주연으로 개봉되었다. 1951년에 BBC TV, 1956년에 NBC TV, 1982년에 BBC에서 다시 극영화로 방송되었다. 뮤지컬은 1964년에 런던에서 공연되어 948회나 연속되었다. 장기간에 걸쳐 이 여인에 대한 스토리가 공연되고 상영된 것이다.
<바렛의 연애시절>
그럼 오늘의 그 주인공을 보자. 1846년 9월 12일에 런던의 <The Times> 문화면에 커다란 기사가 났다. “Poetess Barrett elope!!!!!” 무슨 소린가? “여류시인 바렛이 사랑의 도피행각을 하다.” 믿거나 말거나 금삿갓이 상상해 본 것이다. 당시 빅토리아 시대의 영국에서 가장 유명했던 여류시인 엘리자베스 바렛(Elizabeth Barrett)이 야반도주하여 사랑의 도피 여행은 떠났다는 것이다. 런던의 문화계와 사교계가 발칵 뒤집히고, 특히 바렛의 집안은 그야말로 폭탄을 크게 한 대 얻어맞은 것과도 같았다. 여류시인으로서 당시 영국의 계관시인(桂冠詩人) 최종 2명의 후보 물망에도 오르던 멀쩡하게 잘 나가는 유명 시인이 왜 밤중에 보따리를 싸서 줄행랑을 친 것일까? 여류시인이 최초로 계관시인이 된 것은 그로부터 160년이 흐른 후에 캐럴 앤 더피(Carol Ann Duffy)가 된 것을 감안할 때 그녀의 위상에 걸맞은 충격파였음에 틀림없다. 줄행랑의 이유는 바로 유행가 가사에 답이 있는데, 사랑 찾아, 행복을 찾아간 것이다. 그 사랑이 누구인가 하니 바로 본인 보다 6살 연하의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으로 당시는 아직 미완(未完)의 대기(大器)였다. 더구나 그 시기에 그는 시단(詩壇)에서 거의 인기를 잃었고, 극작가로서도 실패했다고 평가받던 사나이였다. 반면에 그녀는 잘 나가는 시인이고 집안도 재력가여서 런던의 중심부인 매럴러번(Marylebone)의 Wimpole Street에 있는 대저택에 살고 있었다. 그러니 주변의 입방아가 더욱 거세었을 것이다. 젊은 남자가 여자의 명성과 재산을 탐내서 정략적으로 꼬드긴 것이라는 둥 말이 많았고, 특히 바렛의 부친의 반대가 매우 심했다. 그래서 이 사건이 세계 문학사에서 가장 유명한 ‘사랑의 도피’ 또는 ‘야반도주’ 사건이 된 것이다.
<1957년도 컬러 영화>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차근차근 과거로 돌아가서 살펴보자. 바렛은 1806년 3월 6일에 아버지인 에드워드 몰튼 바렛과 어머니 메리 클라크 사이에서 열두 자녀 중 장녀로 태어났다. 그녀의 가문은 지난 150년 동안 자메이카에서 설탕, 상업, 제조업, 노예 무역업으로 엄청난 부를 축적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처음에 Ledbury의 Malvern Hills에 있는 거대한 시골 영지 Hope End에서 그녀를 양육시켰다. 그녀는 집에서 교육을 받았는데, 남동생들의 가정교사로부터 공부를 했다. 그녀는 존 밀턴과 셰익스피어는 물론 <일리아드> 등의 작품들을 열 살이 되기도 전에 읽었으며, 곧 고전문학과 형이상학에 지적으로 심취하게 되었다. 여섯 살인가 여덟 살 때 처음으로 시를 썼으며, 열네 살이던 1820년에 그녀의 아버지는 생일 선물로 그녀가 호머 스타일로 쓴 네 권으로 된 서사시집 ≪마라톤에서의 전투(The Battle of Marathon)≫를 50부 출간했다. 정식으로 출간된 그녀의 첫 번째 시집은 1826년 ≪마음에 관한 에세이와 기타 시들(An Essay on Mind, with other poems)≫인데, 이 시집의 출간으로 인해 그녀는 그리스 문학을 전공한 학자들과 서신 왕래를 하게 되었고, 그리스 문학을 공부하게 되었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의 모든 작품을 스크랩북에 조심스럽게 보관했는데, 이 스크랩북은 영국 작가 중 가장 큰 청소년 작품 컬렉션이라고 한다.
<흑백 영화>
어린 시절 바렛의 관심사는 다양했다. 그녀는 종교를 신앙과 철학적 사색의 문제로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녀의 가족은 영국 국교를 믿지 않고 종교적인 자유로 가정에서 설교와 소책자를 읽으면서 자랐기 때문에 그 당시 영국에서 가장 자유로운 의견을 가지게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녀는 10대 초반의 어린 나이에 벌써 메리 울스턴크래프트의 <여성 권리 옹호>를 열광적으로 읽었다고 한다. 그 내용은 여성이 사회적 위치에 맞는 교육을 받아서 자녀 교육을 하여 국가에 도움을 주고, 단순한 아내가 아닌 ‘남편의 동반자’가 되라고 주장한 것이다. 그녀는 바이런 경과 그리스 혁명에 매료되었고, 이를 그녀의 시집인 1820년 <Stanzas Excited by Reflections on the Present State of Greece>와 1821년 <Thoughts Awakened by Contemplating a Piece of the Palm which Grows on the Summit of the Acropolis at Athens>에 충분히 표출했다. 학문적으로나 문학적으로 엄청 조숙하고 뛰어났으나, 이때쯤 그녀의 행복한 사춘기는 심각한 타격을 입게 된다. 그녀는 뇌와 척추에 극심한 통증을 유발하고 때로는 걸을 수 없게 만드는 심각한 질병에 걸렸다. 그녀의 자매 두 명도 같은 증상을 보였지만 그들은 결국 회복되었다. 바렛은 약간의 치유는 되었지만 남은 인생을 반쯤 병약한 사람으로 살아야 했다. 이 질환의 정확한 원인은 확실히 진단된 적이 없었다. 그녀는 통증을 견디기 위해 아편에 의존하기 시작했고, 나중에 모르핀으로 옮겨가 평생 중독자가 되는 불행을 겪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약물에 대한 환상이 그녀의 성숙한 시에서 사용한 생생한 상상력에 기여했다고 믿는 부류도 있었다. 약물 의존성은 그녀의 전반적인 쇠약함에 기여했고, 20대에 별도의 호흡기 질환(아마도 결핵)이 발병한 후에는 그 상태가 더 악화되었을 것이다.
<빅토리아 시대의 복장>
그래도 그녀는 당시에 그려진 초상화와 가족 및 친구들의 묘사에 기록된 대로 매우 매력적인 젊은 여성이었다. 그녀는 키가 작고 섬세했으며, 크고 표정이 풍부한 갈색눈과 쉽게 보이는 눈부신 미소를 지었다. 그녀는 거의 검은색 머리카락을 긴 고리 모양으로 땋아 중앙으로 갈라서 하트 모양 얼굴을 가렸다. 그녀는 그 헤어스타일이 유행에서 벗어난 후에도 평생 그 헤어스타일을 유지했다고 한다. 그녀가 22살 때 그녀는 불행하게도 헌신적인 어머니를 잃었다. 이모가 이사를 와서 아이들을 돌보았는데, 그중에는 이제 성인이 된 바렛도 환자라서 해당되었다. 그녀의 어머니가 그녀의 문학 경력을 격려했던 이곳이 이모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가족은 정든 Hope End를 떠나 런던의 중심가인 Wimpole Street에 있는 침실 20개짜리 대저택 타운하우스에 정착하게 되었다.
도리어 바렛의 건강 상태로 인하여 여자들에게 기대되는 집안일과 부유한 젊은 여성에게 요구되는 때로는 힘든 사회적 의무에서 벗어나게 해 주었다. 그녀는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며 광범위한 독서와 공부, 방대한 서신, 그리고 무엇보다도 글쓰기에 전념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결코 은둔자는 아니었다. 그녀는 집을 나갈 수 있었고, 실제로 집을 나갔으며, 그녀의 문학적 명성이 높아지는 것을 찬양하는 많은 사람들을 포함한 방문객을 정기적으로 맞이했다. 그녀는 심각한 병을 앓을 때에도 재치 있고 매력적이었다고 한다. 사실, 런던에서 그녀는 사촌이자 절친한 친구인 존 케년의 소개로 윌리엄 워즈워스, 메리 러셀 미트포드, 사뮤엘 테일러 콜리지, 앨프레드 테니슨 로드, 토마스 칼라일 등 영국 문단의 폭넓은 계층을 만나 깊은 인상을 남길 수 있었다. 1830년대와 40년대 초에 바렛의 문학적 산출물은 놀라웠다. 그녀의 작품 대부분은 사회적 논평이 많았다. 당시의 다른 인기 있는 여성 시인들과 달리 그녀는 ‘예술을 위한 예술 시(Art for art’s sake poetry)’를 추구하지는 않았다. 그녀는 단순히 꾸미는 것만이 아니라 가르치고 고양시키고자 했다. 1830년대 초에 그녀는 열렬한 노예 폐지론자가 되었고, <The Runaway Slave at Pilgrim's Point>와 <A Curse for a Nation>과 같은 그녀의 인기 있는 시는 식민지에서 노예 제도를 폐지 한 1833년 노예해방법을 지지하는 여론을 움직이는 데 도움이 되었다고 한다.
하지만 이러한 활동은 그녀가 존경하는 아버지와의 관계에 큰 부담을 주었는데, 아버지의 수입은 노예 제도에 크게 의존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노예해방 후 그녀 가족의 재산은 극적으로 쇠퇴했다. 그녀의 아버지는 시골 영지를 팔아야 했다. 물론 그렇다고 가족은 결코 가난해지지 않았지만, 그들의 수입 상황은 줄었다. 그러자 바렛의 문학적 산출물에서 얻은 수입은 확실히 가족들의 환영을 받았다. 10년 후 그녀는 1842년에 출간된 <The Cry of the Children>에서 아동 노동에 주목했고, 샤프츠버리 경이 추진한 10시간 법안을 지지하는 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였다. 바렛은 원래 시(詩) 외에도 대중 잡지에 번역과 에세이를 기고하기도 했다. 1838년에 출간된 <The Seraphim and Other Poems>이 그녀의 첫 번째의 성숙한 시집이었다. 1844년에는 그녀의 운명을 송두리째 바꾸게 될 문제의 시집인 <Poems(시집)>이 뒤를 이었다. 이것으로 그녀는 영국에서 가장 인기 있고 널리 존경받는 시인 중 한 명이 되었다. <Poems(시집)>은 미국에서 <A Drama of Exile, and other Poems>라는 제목을 달고 출간되어 미국의 시인·소설가·평론가인 에드거 앨런 포와 에밀리 딕킨슨에게 큰 인기와 많은 영향을 미쳤는데, 그들의 삶은 어떤 면에서 그녀의 삶과 흡사했다. 에드거 앨런 포는 <갈가마귀와 다른 시들(The Raven and Other Poems)>을 바렛에게 헌정했다. 또 에밀리 엘리자베스 디킨슨은 바렛의 초상화를 침실에 걸어두고 그녀를 롤모델로 삼았다. 아무튼 그녀를 세상 누구보다 더 사랑하는 사람인 로버트 브라우닝이 그녀에게 운명적인 팬레터를 쓴 계기가 된 바로 그 시집이 1844년 판 <Poems>이다.
한편, 로버트 브라우닝(Robert Browning)은 그녀 보다 6년 뒤인 1812년 5월 7일 런던에서 잉글랜드은행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그리 부유하지도 가난하지도 않은 중간 정도의 삶을 유지할 정도다. 그런데 실제 그의 조상도 바렛의 조상처럼 비슷한 면이 있었다. 그의 아버지도 세인트 키츠에 토지와 노예를 소유한 카리브 식민지 가문의 후예였다. 그런데 농장에서의 젊은 시절의 경험으로 인해 노예 제도에 반감을 품게 되었다. 그래서 그는 노예 폐지론자가 되었고, 그로 인해 상속 재산을 잃었다고 한다. 로버트의 어머니는 독일 선주와 스코틀랜드 어머니의 딸로, 유산으로 가족에게 적당한 수입을 가져다주었고 독실한 반체제주의자였다. 브라우닝의 아버지는 책을 좋아하는 사람이어서 집에 1,000권이 넘는 도서실을 가졌다고 한다. 아들 브라우닝이 학교가 지루해서 반항하자 이 도서실이 그의 교육장이 되었다. 그는 거의 스펀지가 물을 빨아들이듯이 학문과 문학에 빠져들었다. 12세에 시집을 완성했지만 출판사를 찾을 수 없어 그것을 파괴했다고 한다. 그는 곧 그리스어, 라틴어, 프랑스어, 이탈리아어에 능통해졌다. 그는 낭만주의에 매료되었고, 그도 영국 국교를 믿지 않고 개신교를 신봉하였다. 비국교도적인 종교 때문에 그는 옥스퍼드나 케임브리지에 입학할 수 없었다. 하지만 16세에 런던대학교에 입학하여 그리스어를 공부했다. 그는 1년 후에 그만두고, 수입이 좋은 직업을 추구하라는 아버지의 모든 간청을 거부하고 문학에 헌신하겠다고 선언했다. 그렇지만 그의 관대한 아버지는 그 상황을 받아들였고, 심지어 그의 크게 실패한 출판물 중 일부를 후원하기도 했다.
1833년 그는 고모와 아버지의 후원으로 시인 셸리(Percy Shelley)를 찬양하고, 모방한 긴 시인 <Pauline, a fragment of a confession>을 비공개로 출판했다. 이 책은 몇 가지 긍정적인 리뷰를 받았지만 거의 팔리지 않았다. 익명 덕분에 그는 대중들로부터 오는 깊은 굴욕을 면할 수 있었다. 몇 년 후인 1850년 단테 가브리엘 로제티가 대영박물관에서 이 작품을 우연히 발견하고 당시 명성을 떨치던 피렌체에 있던 브라우닝에게 연결해 주었다. 그는 이를 후기 컬렉션에 포함시키기 위해 시를 크게 수정하기도 했다. 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를 잠시 방문한 후 1835년에 출판된 <Paracelsus(연금술사)>에서 좀 더 나은 성과를 거두었다. 이 시는 16세기 연금술사와 현자의 독백으로 구성되었으며, 사회에서 자신의 역할을 찾으려는 지식인에 대한 명상이었다. 난해한 주제는 일반 대중에게는 잘 팔리지 않았지만 Wordsworth, Charles Dickens, John Stuart Mill, Tennyson을 포함한 런던 문인들 사이에서는 감사하는 반응을 들었다. 그래서 최소한 문학 사회의 변두리에 들어갈 수 있었다.
<흑백 영화 시절>
희곡에 손을 댔으나 실패한 후, 브라우닝은 1838년에 처음으로 이탈리아로 가서 야심 차게 이탈리아의 음유시인(吟遊詩人) Sordello의 영감을 기대했다. 이는 단테가 신곡에서 언급한 만투안 음유시인의 상상을 전기로 소개한 영웅적 커플의 긴 형태의 시였다. 이 시집은 1840년에 출판되었는데, 두껍고 내용이 일반인에게 모호했다. 이로 인해 광범위한 조롱을 받았으며, 그는 부주의와 무명이라는 부끄러운 명성을 얻게 되었다. 심지어 시인 테니슨 경은 혹평을 하면서 “첫 번째와 마지막 줄만 이해할 수 있다.”라고 불평했다. 브라운닝의 시에 깊은 영향을 미친 그의 친구인 제인 웰시 칼라일은 이 시를 끝까지 읽으며 “소르델로가 책인지 도시인지 남자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라고 말했다. 각종 문예지에서도 조롱을 받았고, 브라우닝의 명성을 거의 떨어뜨릴 뻔한 비참한 실패였다.
<흑백 영화 시절>
실패의 아픔을 딛고, 1841년부터 44년까지 브라우닝은 8권의 소책자 시리즈를 겸손하게 출판하면서 천천히 명성을 회복했다. 오늘날 우리는 이를 챕북(Chap-book)이라고 부르는데, 다양한 저널과 그의 희곡 텍스트에 게재된 작품을 모은 것이다. 희곡은 누구에게도 인상을 주지 못했지만, 그가 극적 가사라고 부른 시는 감탄을 불러일으켰다. 우연인지 필연인지는 모르지만 바렛이 1844년에 자신의 시집 <Poems>를 발간하면서 그녀가 로버트 브라우닝을 칭찬했다고 한다. 그 사실을 알게 된 그는 1845년 1월 10일 다음과 같이 시작되는 서신을 그녀에게 보냈다. “나는 내 온 마음을 다해 당신의 시를 사랑합니다. 사랑하는 바렛 양이여… 그리고 나는 당신도 사랑합니다.(I love your verses with all my heart, dear Miss Barrett... and I love you too.)” 그는 그녀의 운문에 대한 통달과 그의 시에서 그를 언급한 것에 대해 칭찬했다. 브라우닝이 바렛에게 보낸 이 첫 번째 편지는 반으로 접은 종이가 아니라 8등분으로 접힌 종이에 쓰였다고 한다. 페이지는 접힌 부분에서 끊어졌고, 잉크는 시간이 지나면서 종이를 통해 스며들었다. 이 편지의 시작으로 문학사적인 연애편지 사랑이 태동되고, 결국은 사랑의 도피행각으로 까지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편지의 내용에 사랑이란 말들은 필요하지 않고, 브라우닝은 그녀의 시에서 받은 영감과 흥분의 강도를 열렬히 표현한 것이다. 그대의 시를 사랑하고, 책을 사랑하고 그리고 당신도 사랑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지인인 케년씨로부터 그녀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것을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게 그가 보내 편지를 받은 바렛이 바로 다음날인 1845년 1월 11일에 답장을 보낸 것이다. “친애하는 브라우닝 씨, 내 마음 가장 깊은 곳으로부터 진심으로 감사합니다. 당신의 편지가 나를 기쁘게 합니다....(중략)...나는 당신에게 이 따뜻한 편지와 그 편지와 함께 온 모든 즐거움뿐만 아니라 다른 방식, 특히 가장 큰 방식으로 빚을 졌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그리고 나는 이 신성한 시의 예술을 따르기 위해 사는 동안, 그것에 대한 나의 사랑과 헌신에 비례하여, 당신의 작품에 대한 독실한 찬양자이자 학생이 되어야 한다고 말하고 싶습니다. 이것은 내 마음속의 말씀이고, 나는 그것을 말합니다.....(I thank you, dear Mr Browning, from the bottom of my heart. You meant to give me pleasure by your letter...I will say that I am your debtor, not only for this cordial letter and for all the pleasure which came with it, but in other ways, and those the highest: and I will say that while I live to follow this divine art of poetry, in proportion to my love for it and my devotion to it, I must be a devout admirer and student of your works. This is in my heart to say to you, and I say it.......)”
<가늘고 섬세한 바렛의 편지는 왼쪽, 오른쪽은 힘차고 굵은 브라우닝의 편지>
양쪽의 첫 서신이 서로 왕래하면서 그들은 점점 더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면 정신적 교감을 넓혀갔다. 그러던 중에 브라우닝은 평소 알고 있던 바렛의 먼 사촌인 존 케년을 통하여 그녀를 만나고자 했다. 바렛은 자신이 병중에 있고, 거의 은둔 생활을 하다시피 하면서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있기 때문에 만남을 많이 주저하였다. 브라우닝의 끈질긴 공세로 바렛도 만남을 허락하게 되어, 1845년 5월 20에 바렛의 집에서 첫 만남이 이루어졌다. 남녀 관계란 모든 게 첫 번째의 통과 의례가 힘들지만, 일단 관문을 통과하면 자동으로 이루어진다. 이들은 1846년 9월 12일 세인트 매럴러번 사목구 성공회 성당에서 바렛의 아버지나 가족들 모르게 비밀 결혼을 할 때까지 91차례 만났단다. 바렛은 브라우닝과 연애하던 시절 자기의 감정을 마틴 부인에게 “시인이자 신비주의자인 로버트 브라우닝과 점점 더 깊은 서신을 주고받고 있으며, 우리는 가장 진실한 친구가 되고 있습니다.”라고 말했단다. 1년 4개월 동안 이렇게 자주 만났다면 그들의 사랑이 얼마나 불타고 있었는지는 불을 보듯 뻔한 것이다. 만나기만 한 것이 아니다. 잠시 만나지 못하는 짧은 공백 기간도 서로를 아쉬워하면서 둘은 편지를 주고받았다. 두 사람이 첫 편지를 통해 사귀기 시작한 20개월 동안 두 사람은 거의 600통 이상의 편지를 주고받았는데 현재까지 웰즐리 대학의 마가렛 클랩 도서관에 573통이 남아있다. 일반인들이 생각하기에 정말 많은 편지를 쓴 것이다. 그러나 역사적으로 가장 편지를 남발한 사나이가 있으니 바로 나폴레옹이다. 그는 일생동안 무려 75,000통의 편지를 썼다고 하는데, 믿거나 말거나 다. 하지만 사랑에는 늘 장애물과 고난이 있기 마련인데, 이들의 사랑에도 마찬가지였다.
<영화 포스터>
Barrett의 엄격한 아버지는 장래의 위대한 시인이 될 Browning을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처갓집 재산 사냥꾼 정도로 여겼기 때문에 두 사람의 결혼은 엄두도 못 내는 상황이었다. 더구나 아버지는 무슨 연유인지 자식들의 결혼을 금지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맏딸의 나이가 벌써 마흔인데 혼사를 막는 것이다. 그래서 1846년 9월 12일, 가족이 외출한 사이에 Barrett은 집에서 몰래 빠져나와 St. Marylebone Parish Church에서 Browning을 만나 결혼을 했다. 그녀는 일주일 동안 집으로 돌아와 결혼 사실을 비밀로 한 다음 Browning과 함께 이탈리아로 도망쳤다. 그리고는 그녀는 다시는 아버지를 보지 못했다. 언론이 브라우닝을 사기꾼, 유혹자, 재산 사냥꾼으로 묘사했을 때, 그녀의 사랑스럽고 한때 지지해 주었던 형제조차도 그녀를 배신했다. 그러나 그녀의 가족 대부분은 결국 그 결혼을 수락했지만, 그녀의 아버지는 그녀를 부인하고, 그녀의 편지를 열어보지 않았으며, 그녀를 만나기를 거부했다. Barrett은 그녀의 남편을 지지했고, 그가 그녀의 생명을 구했다고 그에게 감사했다. 그녀는 마틴 부인에게 이렇게 썼다. “저는 그가 가진 강인함과 정직함 같은 자질을 존경합니다. 저는 그가 불리한 상황에서도 용기를 내는 것을 사랑했습니다. 저는 그가 제가 느낄 수 있는 것보다 더 직접적으로 그것을 느꼈습니다. 그는 항상 제 마음을 가장 크게 지배했습니다. 저는 강한 남자를 존경하는 약한 여성 중 하나이기 때문입니다.”
<윔폴가의 바렛 가문, 영화 포스터>
브라우닝 부부는 15년 동안 이탈리아의 피렌체에서 행복하게 살았다. 당시 이탈리아는 망명한 이들에게 일종의 천국이었다. 기후는 따듯하고, 사람들은 친절했으며, 음식도 영국인 입맛에 즐거움과 모험이었고, 생활비는 낮았다. 그들이 데려온 간호사는 어머니의 재산과 작가로서의 수입에서 얻은 독립적인 수입으로 부유하진 않지만 편안하게 살 수 있었다. 더 좋은 점은, 햇살과 신선한 공기, 그리고 행복이 바렛의 건강을 개선했다는 것이다. 엘리자베스 배럿 브라우닝의 허약한 건강은 극적으로 호전되었고, 부부는 여러 차례의 유산을 겪은 후에 1849년에 아들을 낳았다. 문학을 생명으로 생각했던 그들이라서 아들의 이름을 펜(Pen)으로 지었다. 부부는 피렌체에 있는 동안 그곳에 사는 많은 영국인 해외 거주자들과 정기적으로 사교 활동을 하였다. 영국과 미국에서 온 저명한 손님들을 대접하였는데, 그중에는 윌리엄 메이크피스 새커리, 조각가 해리엇 호스머, 해리엇 비처 스토, 마가렛 풀러, 그리고 여성 프랑스 소설가 조르주 상드도 있었다. 두 사람 모두 이곳에서 생산적으로 글을 썼다. 바렛은 <포르투갈의 소네트(Sonnets from the Portuguese)>로 너무나 잘 알려진 사랑의 시를 완성했다. 이 소네트는 부부의 구애와 결혼을 연대기적으로 기록했던 것이고, 그녀는 부부의 사생활이 노출되는 것이 꺼려서 출판하기를 마다했다. 그러자 브라우닝이 포르투갈어로 번역하여 출판하면 객관화시킬 수 있다고 했다. 그래서 이 제목에는 이중 의미가 있었다. ‘포르투갈 사람이 보낸 소네트’나 ‘포르투갈 말에서 옮긴 소네트’로 번역할 수 있는 것이다. 소네트는 다소 특이한 포르투갈 스타일로 지어졌고, 브라우닝은 그녀의 검은 머리카락과 눈을 보고 그녀를 ‘나의 포르투갈인’이라고 부르는 애칭을 만들었다. 배럿은 런던 저널에 시를 기고했는데, 아마도 도망으로 유명해진 덕분에 더 대중적인 출판물에 관심이 컸을 것이다.
<에드먼드 레이턴 작 : The Elopment>
당시까지만 해도 소네트 작시(作詩)는 남자 시인들의 전유물이었다. <포르투갈 소네트>의 문학사적 가치는 소네트 형식으로 여성의 입장에서 사랑 초기의 ‘밀고 당김’을 다룬 데 있다. <포르투갈 소네트>는 불혹(不惑)의 나이에 갑자기, 또 뒤늦게 찾아온 사랑에 대한 여인의 심정, 감정 변화를 잘 그린다. 그녀는 사랑 고백에 감사하면서도, 자신이 6년 연상인 데다가 건강에 문제가 있어서 그에게 짐이 되지 않을까 늘 걱정했다. 그래서 소네트 6번에서는 “내게서 떠나가십시오. 하지만 나는 앞으로도 그대의 그림자 속에 서 있을 거라 느낍니다.”라고 했다. 바렛은 브라우닝과 사랑에 빠지자 점차 정열적으로 변한다. 그의 초기 작품인 ‘사랑(Love)’에 나오는 사랑은 논리적이고 일반적이며 추상적이다. 개인적인 뜨거운 사랑 체험은 없었다. 하지만 <포르투갈 소네트>에 나오는 사랑은 유행가 가사만큼이나 정열적이다. 첫 키스의 달콤함을 노래했다. 실은 입술이 아니라 손가락에 한 첫 키스였다. <포르투갈 소네트>에서 가장 유명한 시는 ‘소네트 43번’이다. 결혼식에서 단골로 낭독된다.
<내가 그대를 어떻게 사랑하느냐고요? 그 방법들을 헤아려 보겠습니다.
보이지 않는 존재와 완벽한 은혜의 끝을 어루더듬을 때,
내 영혼이 닿을 수 있는 깊이와 넓이와 높이까지 그대를 사랑합니다.
햇빛 속에서나 촛불 속에서나,
나 그대를 일상의 가장 조용한 욕구 수준에서도 사랑합니다.
사람들이 권리를 얻으려고 애쓰듯이, 나는 그대를 자유로이 사랑합니다.
그들이 칭찬 따위는 외면하듯이, 나는 그대를 순수하게 사랑합니다.
나의 오랜 슬픔을 이기는데 쓸모 있던 정열, 그리고 내 어릴 적 믿음으로 나 그대를 사랑합니다.
나는 그대를 내가 성자들의 믿음을 잃어버리면서 잃어버린 줄 알았던 사랑으로 사랑합니다.
내 삶 전체의 숨결과 미소와 눈물로 나는 그대를 사랑합니다!
그리고 만일 하느님이 선택하신다면,
나는 죽은 후에도 그대를 더 많이 사랑할 것입니다.>
<바렛의 초상화>
바렛은 더욱 활동적이었다. 그녀는 1851년에 <Casa Guidi Windows>를 출판했고, 1857년에는 많은 비평가들이 빅토리아 시대의 가장 위대한 장편시로 여겼던 서사시 소설 <Aurora Leigh>를 썼다. 그녀는 또한 영국의 사회적 변화에 주목했고, 노예 폐지론과 아동 노동에 주목했던 것처럼 《Two Poems: A Plea for the Ragged Schools of London》 과 《The Twins》 등의 시적 해설을 썼다. 한편 그녀는 이탈리아 정치에 열정적으로 관여하여 주세페 가리발디, 그의 붉은 셔츠단, 그리고 이탈리아에서 외국의 영향력을 몰아내고 통일된 왕국을 만들려는 그들의 야망에 동참했다. 그녀는 이 대의를 지지하는 <Poems before Congress>라는 짧은 시집을 썼다. 영국에서 이 시집은 Tory press 지에 큰 소동을 일으켰고, 그녀를 광신자로 비난했다. 1860년부터 바렛 건강이 악화되기 시작했다. 따뜻한 로마에서 겨울을 보낸 후 부부는 피렌체로 돌아왔다. 1861년 6월 21일, 그녀는 남편의 품에 안겨 “웃는 얼굴로, 행복하게, 소녀 같은 얼굴로” 죽었다. 그녀의 마지막 말은 “아름답다.”였다고 한다. 그녀는 살던 집에서 너무나 사랑받아서 그녀의 장례식을 위해 주변의 상점들이 모두 문을 닫았단다. 그녀는 유명한 개신교 영국 묘지에 묻혔고, 여러 유명인의 마지막 안식처가 되었다. 슬픔에 잠긴 브라우닝과 그의 아들은 런던으로 돌아갔지만, 그는 자주 이탈리아를 방문했다. 그는 1862년에 출판된 사후 컬렉션 인 <Last Poems>를 편집하고 감독했다. 그 후 몇 년 동안 브라우닝의 시인으로서의 명성은 1690년대의 로마 살인 사건의 재판을 바탕으로 한 12권짜리 긴 무운시 <The Ring and the Book>으로 엄청나게 치솟았다. 이후 작품으로는 <Balaustion's Adventure>, <Red Cotton Night-Cap Country>, <Parleyings with Certain People of Importance in Their Day>, <Asolando>가 있으며, 우연히도 1889년에 그의 사망 당일에 출판되었다. 아마도 그의 가장 사랑받는 개별 시는 <The Pied Piper of Hamlin>을 재해석한 것이었을 것이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