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3) 당(唐) 4대 여류시인의 사랑 – 이야(李冶)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50414)

by 금삿갓

당나라 여류시인 이야(李冶, ?~784)는 설도(薛濤), 어현기(魚玄機), 유채춘(劉采春)과 함께 ‘당나라 4대 여류 시인’으로 불린다. 원래 이름 또는 자(字)는 계란(季蘭)이고, <태평광기>에는 수란(秀蘭)으로 기록되어 있다. 절강성 오정(烏程 : 지금의 오흥吳興) 사람이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는 그녀가 삼협(三峽) 출신이라고 되어 있다. 당나라는 기라성(綺羅星) 같은 시인이 많이 배출되었던 시대였다. 그 당시에도 남자를 중시하고 여자를 경시하는 풍조가 강했다. 이 시대에 이백(李伯), 두보(杜甫), 백거이(白居易) 등 남성 시인들이 지나치게 뛰어나 당시의 여성 시인들을 가렸다. 그러나 사실 당시 재능 있는 여성 시인들도 많았고, 풍성하게 아름다운 시구를 창작하여 높은 성과를 이루기도 했다. 또한 중국에는 신동(神童)도 적지 않았다. 예를 들어, 초당사걸(初唐四傑) 중 한 명인 낙빈왕(駱賓王)은 7세에 이미 세상에 널리 알려져 있고, 여성과 어린이 모두에게도 알려진 시 《영아(詠鵝)》를 썼다. 이 시는 중국의 초등학교 교과서에 올라 아이들의 첫 번째 계몽시가 되었다. 북송의 전설적인 신동인 방중영(房仲永)은 5세에 시를 지었다. 하지만 이 재녀(才女)의 시보다는 모두가 유아적(幼兒的)인 표현에 지나지 않는다. 중국 4대 여류 시인 중 재능으로 말하자면, 이 여자는 단연 1위에 속한다 할 수 있다. 그녀는 당대에 여중시호(女中詩豪)로 칭송받았고, 미모도 아름다웠다. 그녀는 6세에 시를 쓸 수 있었고, 11세에 도고(道姑) 즉 도교의 여자 승려 노릇을 했으며, 18세에는 파격적으로 시승(詩僧)을 사랑했지만, 결과는 매우 비참했다. 54세에 역적으로 몰려 처형되었다. 이 여자의 아름답지만 슬픈 사랑의 이야기를 해보자.

남송의 저명한 학자 계유공(計有功)이 편찬한 《당시기사(唐詩紀事)》에 따르면, 이야는 6세 때 하루는 아버지와 함께 정원의 장미꽃을 감상했다. 그 농염한 꽃을 마주하며 소녀는 잠시 생각에 잠겼고,

“經時未架却(경시미가각) / 시간이 지나도 받침대가 없어서,

心緖乱縱横(심서난종횡) / 마음 실마리(꽃과 가지)가 종횡으로 어지럽네.

已看雲鬢散(이간운빈산) / 구름 같은 귀밑머리 이미 흐트러진 걸 보니,

更念木枯榮(갱념목고영) / 그의 성쇠를 다시 생각게 하네.”

라고 감회를 읊었다. 이것이 훗날 전해진 그녀의 최초 시작(詩作)인 <영장미(永蔷薇)>다. 그때 이를 들은 아버지가 크게 놀라서 막내딸이 다른 사람의 시를 암송하는 줄 알았다. 나중에야 그 시가 정말로 딸의 창작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는 딸의 재능에 기뻐하면서도 매우 놀랐다. 그는 시 속의 용어 “가각(架却 : 받침대)”이 “가각(嫁却 : 시집가버리다)과 발음이 비슷하여 어린 나이에 벌써 이런 일을 생각했나 하고 걱정했다. 시의 전체 뜻은 한참 지났는데 장미에게 넝쿨이 타고 올라갈 받침을 안 만들어 줘서 가지와 줄기가 엉클어지고, 벌써 꽃잎이 시들고 있으니 장미의 영고성쇠를 생각한다는 뜻인데, 이 시를 사람에 특히 여자에 비유한다면 나이가 지났는데 시집을 못 가고 있으니 심사가 혼란스럽고, 귀밑머리까지 어지러운 모습을 보니 일생의 부질없음을 느낀다는 뜻이다. 6살짜리 여아(女兒)가 이렇게 중의적(重意的)인 시를 짓다니 정말 놀랍다. 그러니 부친의 입장에서 그녀가 예의에 얽매이지 않고, 부도(婦道)를 지키지 않는 감정을 드러낸 것으로 오해하여 매우 걱정되었다. 그래서 그는 고민 끝에 딸이 앞으로 부덕(婦德)을 지키지 않을 것을 예방하기 위해, 11살 때 과감히 저장성 후저우(湖州)의 도교 사원인 옥진관(玉眞觀)으로 보냈다. 딸을 도교의 승려인 도고(道姑)가 되게 하여 심신을 수양하고 좋은 사람이 되도록 한 것이다.

정절(貞節)을 강요하려고 했다면 절에 보내서 여승이 되게 하지, 왜 절이 아닌 도교의 도관으로 보냈을까? 중국 역사를 보면, 6세기 초의 북제(北齊) 시기에, 북제 한 나라에만 사찰이 4만여 개에 이른다. 승려는 200만 명이었다고 한다. 심지어 양(梁)나라의 무제(武帝)는 황위를 버리고 출가하여 승려가 되기까지 한 것을 보면 당시 불교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당나라 건국과 더불어 이씨 황족은 왕조 정통성을 보호하기 위하여 불교를 억제한다. 도교의 종주(宗主)인 노자(老子)의 성이 이씨니까, 그들의 조상으로 여겨 도교를 국교로 숭상한다. 당고조(唐高祖) 이연(李淵), 당태종(唐太宗) 이세민(李世民)과 당고종(唐高宗) 이치(李治)는 극력 도교를 지원하고 도관을 짓고, 노자를 태상노군(太上老君 : 노자)으로 추존(追尊)한다. 동시에 경제적으로 도관에 전답을 내리고, 병역을 면제해 주는 우대조치를 취한다. 심지어 <노자>, <장자>, <남화경(南華經)>을 과거시험의 과목 중 하나로 넣었다. 정부의 적극적 지원 정책 이외에도, 도교는 다른 종교의 여성관과 다르다는 점도 당나라 때 부녀자들이 도고(道姑)가 되는 것을 좋아한 이유이기도 하다.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6장에는 이런 말이 있다. “곡신불사(谷神不死) 시위현빈(是謂玄牝) / 골짜기의 신은 죽지 않는다. 그래서 현빈(현묘한 암컷)이라 한다. 현빈지문(玄牝之門) 시위천지근(是謂天地根) / 현묘한 암컷의 문은 천지의 뿌리이다. 면면약존(綿綿約存), 용지불근(用之不勤) / 면면히 이어져서 항상 존재하니 아무리 써도 수고롭지 않다.” 이 부분에서 형이상학(形而上學)이 아닌 ‘허리하학’으로 농담을 하면 화가 쿠르베의 작품 <세상의 기원>을 생각나게 한다. 즉 만물의 근원은 모성(母性)이고, 도교에서는 여성도 득도하여 신선이 될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예가 서왕모(西王母)다. 그래서 당나라 때의 4대 여류시인(女詩人) 중 유채춘(劉采春)만 빼고 셋은 모두 도고(道姑)였다. 당나라에서 최고의 권력 그룹인 공주 중에서 고양(高陽)·태평(太平)·화양(華陽)·안강(安康) 공주를 포함한 15명이 도고(道姑)로 지낸 적이 있고, 이름도 도교 법명이다. 천하의 절색 양귀비(楊貴妃)도 한 때 도관에서 태진이란 법명을 가잔 여도사였다. <대당육전(大唐六典)>의 기록에 따르면 당시 천하의 도관(道觀)은 모두 1,687개소인데, 1,137개소는 남도사(道士)이고, 550개소는 여도사(女道士)들이 수양했다고 한다. 그래서 당시에 여자가 결혼하지 않고 자유롭게 살 수 있는 방법은 기녀가 되거나 도교의 여도사가 되는 수밖에 없었다. 여도사는 기녀와 달리 존경받는 신분이었다.

아버지의 긴급조치에 따라 도고 즉 여도사가 된 이야(李冶)가 아버지의 바람대로 조신하게 잘 있었을까? 그랬다면 이 글을 쓸 필요가 없을 것이다. 잠깐 한 가지를 덧붙이자면 이야(李冶)가 어릴 적에 집에서 같이 자란 사내아이가 있었다. 용개사(龍蓋寺)의 지적선사(智積禪師)가 서호(西湖)의 물가에서 울고 있는 아이를 데려와서 절에서 키우다가 이야의 집에 의탁했다. 이야의 부친은 그에게 ‘이계자(李季資)’라고 다시 이름 지어주고 딸과 함께 6년 동안 키운 것이다. 딸을 도관에 보내면서 이 아이 즉 육우도 다시 용개사로 돌려보냈다. 육우라는 이름은 <주역(周易)>으로 점을 쳐서 ‘홍점어육(鴻漸於陸) 기우가용위의(其羽可用爲儀). 길(吉)’이라는 <점(漸)>괘를 얻었다. 그래서 이름을 육우, 자(字)를 홍점(鴻漸)으로 불렀다. 도관에 들어온 그녀는 타고난 자질이 총명하고, 천성이 자유로워서 도관의 도규(道規)를 지키지 않았다. 더욱이 여자가 지켜야 할 삼종사덕(三從四德-從父·從夫·終子와 德·容·言·工)이나 여계(女戒) 같은 관습에는 신경을 쓰지 않았다. 그녀는 부지런히 공부하고, 자기 마음대로 행동했다. 그러나 시와 글을 잘 써서 더욱 매혹적이고 낭만적이며, 재능과 풍류를 자랑했다. <당재자전(唐才子傳)>에 따르면, 그녀는 아름다운 외모, 차분한 성격, 서화와 그림에 능했고, 거문고 연주를 잘했으며, 특히 리듬감 있는 글씨에 재주가 있었다고 한다. 당나라 전성기에 성풍조가 개방되어 있었고, 그녀는 일찍이 무측천(武則天), 양귀비, 태평공주, 옥진(玉眞) 공주, 상관완얼(上官婉儿) 등 도관 출신의 힘 있고 유명한 여성들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도 이를 동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를 들어, 도관 출신 중 가장 유명한 경우는 태평공주이다. 그녀는 8살 때, 이미 사망한 외조모 영국부인(榮國夫人) 양씨(楊氏)의 명복을 빈다는 명목으로 출가하여 도고가 되었다. 그 이후 그녀의 공주이름인 태평은 기실 그녀의 도호(道號)이다. 출가했다고는 하지만 그녀는 계속하여 궁중에 머물렀다. 토번(吐蕃)의 사신이 와서 직접 태평공주의 이름을 직접 찍어서 청혼했을 때까지도 궁중에 있었다. 당 고종 이치(李治)와 무측천은 사랑하는 딸을 먼 오랑캐 나라로 보내고 싶지 않았다. 그렇다고 직접 토번의 요구를 거절하기도 힘들었다. 그리하여 도관인 태평관(太平觀)을 지어 그녀를 보내고, 정식으로 출가시킨다. 그리고 공주는 이미 출가했다는 것을 이유로 들어 정략결혼을 회피한다. 그리고 3년 후 태평공주는 환속한다. 당 예종의 여덟 번째 딸 금선(金仙) 공주와 아홉 번째 딸 옥진(玉眞) 공주는 모두 “할머니 무측천의 복을 빈다.”라는 명목으로 출가했다. 거기서 두 공주는 종종 유명 인사들을 모아 술을 마시며 즐기곤 했고, 많은 남자들이 두 공주의 석류 치마 아래에 엎어졌다. 그래서 그녀도 자신의 특별한 신분에 신경 쓰지 않고, 심지어 도고의 신분을 숨기기도 했다. 쓸쓸한 도관은 그녀의 향기로운 시절을 가둘 수 있지만, 그녀의 비범한 아름다움과 열정을 가둘 수는 없었다. 봄의 정취가 넘치고 시간이 흐르는 가운데, 그녀는 속으로 탄식하며, 거문고를 들고 누각에 올라 한 곡 또 한 곡 연주하기도 했다. 그 후, 그녀는 비밀리에 생각했던 일을 실천에 옮기기 시작했고, 당시 몇몇 유명한 시인과 관료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천하의 명사들과 널리 교류했다.

이야는 18세 때 30살의 유명한 시승(詩僧) 교연(皎然)과 사랑에 빠졌다. 교연은 대시인(大詩人) 사령운(謝靈運)의 10대 손이다. 그는 용모가 뛰어나고 학식이 풍부하여 시문에 능통했으나, 25세에 삭발하여 승려가 되었다. 문학·불학(佛學)·다학(茶學) 등 여러 방면에서 조예가 깊고, 안진경(顏眞卿)·영철(靈澈)·육우(陸羽) 등과 화답한 시는 현재 470수가 남아 있다. 영은사(靈隱寺)에서 수계를 받아 출가했다. 후에 그는 사방을 돌아다니며 명산대천을 두루 방문했고, 시를 읊조려서 당시 사람들은 이를 불문의 큰 그릇으로 칭송했다. 나중에 교연은 이야가 있던 도관 근처의 묘희사(妙喜寺)에 머물렀다. 그녀는 풍채가 멋진 교연을 보았을 때, 한 소녀의 마음으로 두근두근 거려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시문을 연마한다는 이유로 공개적으로 교연에게 다가갔다. 교연은 전혀 생각 없이 상대방이 오직 학문만을 위해 왔다고 생각했다. 18세의 여도사와 30대의 스님은 공개된 자리에서 차와 시를 즐겼다. 이야는 서로 다른 종교와 시를 매개로 교연과 인연을 이어갔다. 속세를 떠난 스님 교연에게 그녀는 뇌쇄적인 연애시를 써서 보냈다. 교연은 재색을 겸비한 이야의 열정을 정중하게 시로 거부하였으나, 황진이(黃眞伊)가 지족선사(知足禪師)에게 달려드듯이 그녀는 온전히 물러서지 않았다. 그래서 교연을 사모하며 이야가 쓴 첫 시가 <상사원(相思怨)>이라고 한다.

人道海水深(인도해수심) / 사람들은 바다가 깊다지만

不抵相思半(불저상사반) / 그리움의 반도 안 되지.

海水尚有涯(해수상유애) / 바다는 오히려 끝이 있지만

相思渺無畔(상사묘무반) / 그리움은 아득히 끝이 없다오.

携琴上高樓(휴금상고루) / 거문고 안고 누각에 오르니

樓虛月華滿(루허월화만) / 빈 누각에 달빛만 가득하네.

弹著相思曲(탄저상사곡) / 상사곡을 타노라니

弦腸一時断(현장일시단) / 현과 간장이 같이 끊어지네.

이 시는 홍난파가 곡을 붙여 가곡으로도 유명한 이은상(李殷相)의 시 <그리움>의 원형이기도 하다. 이렇게 구애를 해도 교연은 마음을 열어 파계(破戒)를 하지 않았다. 교연은 이미 수련하여 성정이 물을 멈춘 듯하며, 잔잔한 물결이 일지 않는 경지다. 그래서 그녀에게 《답이계란(答李季蘭)》이라는 시를 써서 잠잠한 자기 마음을 표현하였다.

天女來相試(천녀래상시) / 하늘의 여자가 와서 시험 삼아

將花欲染衣(장화욕염의) / 꽃잎으로 옷을 물들이려 하네.

禪心竟不起(선심경불기) / 선심이 마침내 일어서지 않으니

還捧旧花歸(환봉구화귀) / 도리어 헌 꽃을 들고 돌아오도다.

하늘의 선녀 같은 여자가 다가와서 사귀자고 하니까 정신이 아득했을 것이다. 그런데 불가의 수행자로서 파계하는 것이니 옷을 오염시키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멋진 여인이지만 넌지시 거절한 것이다. 그래서 이야와 남녀를 초월해 막역한 친구로 지내며 교연은 차에 대한 연구를 매진하고 있던 육우(陸羽)를 새 친구 삼아 차를 찾아 떠나는 여행을 함께 다니며 시 쓰기에 열중했다. 그러니까 이야도 마음을 고쳐먹고 <팔지(八至)>라는 이런 시를 쓰게 된다.

至近至遠東西(지근지원동서) / 가장 가깝고 먼 곳은 동서이고

至深至淺清溪(지심지천청계) / 가장 깊고도 얕은 것은 맑은 시내라네.

至高至明日月(지고지면일월) / 가장 높고 밝은 것은 해와 달이고

至親至疏夫妻(지친지소부처) / 가장 친하고 가장 소원한 게 부부라네.

이 시는 매우 철학적 의미가 있다. 첫 글자인 ‘지(至)’ 자가 시에서 여덟 번 반복돼 <팔지(八至)>라는 제목이 붙었는데, 문인시 중에서도 독특하다. 시의 처음 세 문장은 형식이고, 그 존재는 마지막 문장을 돋보이게 하기 위한 것이다. 청나라 역사학자 장학성(章学誠)은 이야를 당나라가 아닌 중국 최고의 여류시인으로 칭송했다. 그는 이야가 쓴 <팔지(八至)>를 변증법적 사유가 담겨 있는 당대 최고의 시로 극찬했다.

교연과의 관계가 정말 달갑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그냥 시붕(詩朋)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그래서 어느 봄날 오후, 그녀는 관주(觀主)와 다른 도우(道友)들이 낮잠을 자는 틈을 타 몰래 도관에서 멀지 않은 섬계(剡溪) 시냇가로 가서 배를 타고 유람을 하였다. 이때 그녀는 한 청년을 만났다. 그는 포의(布衣 : 무명옷 즉 아직 벼슬을 못하고 있는 사람)에 망혜(芒鞋 : 짚신)를 신었지만, 정신이 맑아 평범한 시골 마을 남자들과는 달랐다. 청년이 배를 태워 달라고 요구하자, 그녀는 매우 관대하게 그를 태웠다. 대화 중에 그는 이곳에 숨어 있는 명사 주방(朱放)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두 사람은 만나자마자 오랜 친구처럼 매우 친근하게 이야기를 나누었고, 함께 시문에 대해 이야기하며, 유쾌한 오후를 보냈다. 헤어질 때, 주방(朱放)은 다음 시 <별이계란(别李季蘭)>를 써서 그녀에게 주었다.

古岸新花開一枝(고안신화개일지) / 옛 언덕에 새로운 꽃 한 가지 피었고

岸傍花下有分离(안방화하유분리) / 언덕 옆 꽃 아래에서 이별을 하지만

莫将羅袖拂花落(막장라수불화락) / 꽃 떨어지니 옷소매를 털지 마라,

便是行人肠断时(변시행인장단시) / 다름이 아니라 행인의 애간장 끊어질 때다.

이 시는 그리움과 기대를 담고 있으며, 재능 있는 이야의 봄 마음을 감동시킨다. 늦게 만난 그들은 헤어지기 아쉬워하지만, 헤어질 수밖에 없다. 그래서 두 사람은 다음 만남을 약속하고 나서야 아쉬운 마음으로 헤어졌다. 섬계(剡溪)에서 산과 물을 즐기고, 술을 마시며 시를 짓기도 한다. 때때로 주방은 관광객 신분으로 옥진관을 찾아가 은밀히 이계란(이야)를 방문하고, 이계란의 구름 잠긴 집에서 차를 마시며 담소를 나누며, 거문고를 타기도 했다. 그들은 오랜 시간 동안 아름다운 여행을 했다.

만남의 아름다움은 항상 짧았고, 세상에 헤어지지 않는 커플은 없었다. 나중에 주방은 장시(江西)로 불려 가 관리가 되었고, 두 사람은 눈물을 흘리며 작별을 고해야 했다. 비록 각지에 있지만, 두 사람은 자주 편지를 주고받으며 서로에 대한 그리움을 털어놓는다. 이계란이 주방에게 보낸 시 한 편에는 다음과 같이 그녀의 마음이 적혀 있다.

離人無語月無聲(리인무어월무성) / 떠난 사람은 말이 없고 달도 소리 없어

明月有光人有情(명월유광인유정) / 밝은 달은 빛이 있지만 사람에겐 정이 있다네.

别後相思人似月(별후상사인사월) / 이별 후 그리워하는 사람은 달처럼

雲間水上到層城(운간수상도층성) / 구름 사이로 물 위로 높은 성에도 이르네.

이야는 주방이 떠난 후, 남편이 먼 길을 떠난 아내처럼 기다리고 있었고, 그를 위해 많은 한이 맺힌 시를 썼다. 사랑하는 사람이 돌아와 그녀의 쓸쓸한 마음을 달래주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멀리 있는 주방은 관료의 일로 바빠서 섬계에 와서 옛 애인을 볼 시간이 없었다. 주방이 돌아오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을 때, 새로운 사랑 육우가 그녀의 삶에 뛰어들었다.

육우에 대해 말하자면, 그는 당나라에서는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그는 당시 사람들에게 “차선(茶仙)” 또는 “차성(茶聖)”이라고 불렸다. 육우는 한때 이야의 집에서 양육되었고, 후에 절에서 기거하면서 차를 기르고, 차를 만들고, 시음하는 데 많은 노력을 기울여 《다경(茶經)》 세 권을 썼다. 육우는 원래 서호(西湖)에 버려진 아기였는데, 속성이 육씨인 승려가 주워와 용개사에서 키웠다. 그래서 승려의 성을 따라 육씨를 붙였는데, 이는 그가 마치 깃털처럼 바람에 떠다니며 그 근원을 알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육우는 다도에서 뛰어난 점이 있으며, 문학 경전에서도 매우 우수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용개사에서 경서를 많이 읽었고, 경사자집 등 다양한 서적을 수집하여 박학다재한 뛰어난 인물이 되었다. 어느 날, 그는 옥진관의 여관(女冠)인 이계란이 뛰어난 학문을 가지고 있으며, 아름답고 정이 많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래서 늦은 가을 오후에 특별히 옥진관을 찾아 이계란을 방문했다. 아직 마음속에 헤어진 주방을 놓지 못한 이계란은 애인의 소식이 없어 실망하고 있었다. 이때 문 밖에서 손님이 찾아오는 소리를 들었다. 그녀는 청아한 외모와 아름다운 표정을 짓고 있는 육우를 보자 마음이 움직였다. 육우 또한 이계란의 얼굴이 익은 모습이지만 어릴 때 같이 자라서 영원히 잊지 못할 이야인 줄을 몰랐다. 두 사람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매우 친근하게 대화를 나누고, 눈을 녹여 차를 끓여 마셨다. 처음에는 시로 만나고, 점차 두 사람의 처지가 비슷해지면서 서로 이해하고 마음이 통하는 가장 친한 친구가 되었다. 육우는 결국 이계란이 이야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그녀를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이후 자주 그녀를 방문했고, 두 사람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결국 서로의 마음을 털어놓고 마음이 통하는 커플로 심화되었다. 어느 날, 이계란은 중병에 걸려 연자호(燕子湖)로 요양하러 갔다. 육우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녀의 병상으로 가서 정성껏 매일 약을 달여 주고 밥을 지어주며 세심하게 간호했다.

<차신 육우>

이계란은 이에 대해 매우 감사하며, 병이 나은 후 특별히 《호상와병희육홍점지(湖上臥病喜陸鴻漸至) / (호수 가에 누워 육우를 기쁘게 하다》라는 시를 지어 답례했다.

昔去繁霜月(석거번상월) / 옛날에는 서릿발이 날리고

今來苦霧時(금래고무시) / 지금 와서 괴로운 안개가 끼었네.

相逢仍卧病(상봉잉와병) / 만나도 병석에 누워

欲語淚先垂(욕어루선수) / 말을 하려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

强勸陶家酒(강권도가부) / 질그릇의 술잔을 강권하고

還吟謝客詩(환음사객시) / 손을 마다하는 시를 도로 읊기도 했지.

偶然成一醉(우연성일취) / 우연히 한번 취하여

此外更何之(차외갱하지) / 이 밖에 다시 무엇 때문일까?

비록 이계란과 육우는 연정이 있지만, 이계란의 특별한 신분 때문에 그들은 남녀가 결혼하여 하루 종일 서로 의지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계란은 서른 살 이후로 성격이 점점 더 개방적이고, 친구를 사귀는 일도 많아졌다. 하지만 육우에게 배운 이야의 차 실력도 일취월장해 그녀가 만든 뇌차(擂茶)는 지금도 호주 지방의 명차로 남아있다. 뇌차는 찻잎을 주재료로 깨, 땅콩, 녹두, 잣, 밤, 호두, 산초, 소금 등을 함께 빻은 후 끓인 찻물로 걸쭉하게 타서 마시는 형태의 차다. 이야는 육우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종종 오정(烏程)의 개원사(開元寺)에서 먼 곳과 가까운 곳의 시우회와 함께 모여 문주(文酒) 모임을 열고, 즉석에서 시를 지어 담소를 나누며 전혀 거리낌이 없었고, 이는 한때 미담으로 전해졌다. 점차적으로 이계란의 시명(詩名)은 점점 더 널리 퍼졌고, 활동 범위는 섬계(剡溪)에 국한되지 않고 광릉(廣陵)을 섭렵했다. 광릉은 지금의 양저우(揚州)로 당시 문인들이 모인 번화한 곳이었고, 이계란은 그곳에서 두각을 나타냈다.

당시 ‘오언장성(五言長城)’이라는 대시인이었던 유장경(劉長卿)도 이계란과 매우 친분이 있었다. 어느 날, 많은 문인과 선비들이 이계란과 오정(烏程)의 개원사에서 서로 시문을 이야기하고, 차를 마시며 웃고 지냈다. 하간(河間 ; 하북성 헌현)의 유장경이 산기(疝氣 : 탈장인데, 장이 처져 신낭(腎囊)이 부풀어 오르는 것)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던 이계란은 농담 삼아 상련(上聯)을 띄워 “산기(疝氣)가 나날이 좋아진다.(山氣日夕佳)”라고 했다. 이계란(李季蘭)은 도연명(陶淵明)의 시를 인용한 것으로, 산기(山氣)는 산기(疝气)와 발음이 비슷해 유장경(劉長慶)의 병을 비유한 것이다. 이를 들은 유장경도 도연명의 시로 “새들이 흔쾌히 의지하고 있다.(衆鳥欣有托)”라고 맞받았다. 많은 ‘중(衆)’ 음과 무거운 ‘중(重)’ 음이 같은데, 탈장에 걸리면 신낭이 팽창하고 무거워지기 때문이다. ‘조(鳥)’는 욕을 할 때 주로 쓰는 단어다. 탈장이 있는 사람은 수술할 수 없기 때문에 보통 천 주머니로 신낭을 받쳐서 고통을 덜어준다. 류창칭은 이 대련을 마치고 좌중을 웃으며 모두 두 사람의 교묘함에 대해 논의했다. 이계란과 유장경은 대중 앞에서 남성의 성기를 빗대어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황당무계한 이야기를 할 정도로 개방적이고 대담하다고 할 수 있다.

후에, 글을 좋아하고 재능을 사랑하던 당나라 현종(玄宗)은 이야의 시명(詩名)을 듣고, 그녀의 시들도 읽으며 흥미를 느껴서 그녀에게 서울 궁궐로 오라라고 조서를 내렸다. 이때 이계란 즉 이야는 이미 불혹의 나이를 넘겼고, 예전의 꽃 같던 미모는 대부분 쇠퇴했다. 황제의 명령을 받고 그녀는 이러한 드문 영예에 놀랐을 뿐만 아니라, 초췌한 모습으로 황제를 알현하는 것이 한편으로 슬펐다. 그리고 그녀가 사랑하던 많은 남성들을 두고 장안으로 가는 것이 아쉬웠다. 양귀비와 열애 중이던 현종도 이야를 황궁으로 초대했지만 이야가 장안에 도착할 무렵 안사의 난이 터져 쓰촨(四川)으로 도피하고 없었다. 현종이 돌아올 때까지 장안에 있기로 작심한 이야는 2년 만에 황궁으로 돌아온 현종을 알현했다. 이야는 한 달 반이나 황궁에 머물며 죽은 양귀비 대신 시와 차(茶)로 현종을 위로했다. 황궁을 나온 이야는 육우가 기다리는 호주로 돌아가지 않고 장안에서 계속 살았다. 장안에서 풍류를 즐기던 이야는 덕종(德宗)의 부름을 받들어 황궁에 다시 들어가 시인으로서 후한 대우를 받으며 살게 됐다. 곧이어 주차(朱泚)의 난이 일어나자 덕종은 황궁을 버리고 도망갔다. 갈 곳 없이 황궁에 남아있던 이야는 주차의 눈에 띄어 살아남기 위해 주차의 반란을 옹호하는 시를 썼다. 말하자면 부역(附逆)의 시를 쓴 것이다. 그래서 주차의 난이 평정되고 덕종이 황궁에 돌아와서 반역의 죄를 물어 이야를 향년 54세에 박살형(撲殺刑)에 처해 죽였다. 이계란의 생애에 대해서는 찬반이 분분하다. 하지만 이계란은 뛰어난 재녀로서 손색이 없다. 시인 유장경(劉長慶)은 그를 ‘여중시호(女中詩豪)’라고 불렀고, 당나라 고중무(高仲武)는 <중흥간기집(中興間氣集)>에서 이야(李冶)에 대해 “시의 형세가 웅장하고 시적인 정취가 넘치며, 드물게 그 윤리가 있다.”라고 평했다. 이계란의 시 중에는 경구와 재치가 많으며, 당나라의 많은 뛰어난 시인 중에서 그 광채를 감출 수 없다. 한편 육우는 제2의 고향 호주에서 차에 대한 전문서적을 본격적으로 쓰기 시작했다. 당대 차에 대한 백과사전이라고 부르는 <차경(茶經)>의 초고를 765년경 작성했다. 10년에 걸쳐 증보판을 만들고 4년을 더 다듬어 3권 10편으로 구성된 차의 바이블, 차경을 완성했다. 사랑하는 사람의 비참한 최후 소식을 들은 육우는 차의 위대한 스승으로 당나라 최고의 명사가 됐지만 호주를 떠나지 않았다. 육우는 유명세와 무관하게 세상과 등지고 초야에 묻혀 살았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시인 유장경-유우석>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2) 이런 사랑을 받고 싶나요 – 엘리자베스 바렛