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64) 천재들의 누이요 연인이었던 뮤즈 – 루 살로메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50415)

by 금삿갓

“내 사랑, 루 살로메에게.

나의 폭발하는 과대망상증과 상처받은 허영심 때문에 당황할 필요 없소. 설사 내가 당신에게 버림받은 치욕스러운 감정을 이기지 못해 어느 날 갑자기 자살하더라도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소. 당신과의 사랑을 꿈꿨던 나의 공상이 당신 삶과 무슨 상관이 있겠소! 그저 당신이 선물한 고독에 빠져 완전히 정신이 돌아버린 반미치광이가 되었다는 사실만 기억해 두시오. 당신에게 버려졌다는 절망을 이기지 못해 엄청나게 많은 아편을 빨아댄 뒤에야 사태를 이처럼 분별할 수 있게 되었소. 아편으로 제정신을 잃었고, 덕분에 사리 분별이 생겨났소. 당신은 조금도 궁금하지 않겠지만, 지난 몇 주 동안 정말 아팠소. -1882년 12월 24일, 니체로부터.

<삼인 동거중인 영화의 한 장면>

신이 죽었다는 니체가 이렇게 광적인 편지를 보낸 여성 살로메. ‘살로메(Salome)’란 히브리어로 ‘평화’를 뜻하는 ‘샬롬(Salom)’에서 유래된 여성 이름이자 아랍 등지에서 인사말로 주로 쓰인다. 역사서나 성경에 등장하는 살로메도 많다. 예수의 십자가 처형과 부활한 후의 무덤을 발견한 요한과 야곱의 어머니 살로메도 있고, 헤롯 왕조의 왕녀로서 1~3세 3명의 살로메 중 자기의 춤 값으로 세례자 요한의 목을 요구한 살로메 3세가 가장 강렬한 살로메였다. 그녀의 이야기가 오스카 와일드의 희곡이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의 오페라 주인공으로 등장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거의 이 정도의 강렬한 삶을 살면서 천재적인 남성들에게 치명적인 고통과 고독과 심지어 죽음에 이르게 한 여성이 오늘의 주인공 루 살로메(Lou Salome)이다. 그녀는 작가이자 정신분석학자로서 스스로 당대의 유명인이었고, 니체·릴케·프로이트·톨스토이 등 19세기말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유럽의 문화·정신 지형을 바꾼 남자들과 특별한 관계를 맺었던 여인으로 더 유명했다. 그녀는 많은 남자들을 만나고 사랑했지만 그들을 직접적으로 위험에 빠뜨리는 여자는 아니었다. 다만 남자들이 그녀의 마음을 얻지 못해 고통스러워했을 뿐이다. 남자의 사랑을 얻는 것은 루에게 부차적인 일이었고, 그녀에게는 자신의 세계를 지키는 게 더 중요했다. 타인의 마음속으로 완전히 들어갈 수 있는 재능을 가진 당당하고 소신 있는 멋진 여성이었다. 오히려 남자들에게 영감과 자유를 주는 여자였다. 릴케에게 프랑스식 ‘르네(René)라는 이름을 독일식 ‘라이너(Rainer)’라는 이름을 쓰게 권했고, 니체와 학문에 대해 이야기했고, 프로이트의 제자가 되어 프로이트의 작업을 도왔다. 사실 그녀는 프로이트를 만나기도 전인 1911년에 이미 여성 성(性) 심리학에 관한 글을 썼으며, 여성의 성에 관해서 정신분석을 연구한 최초의 여성 중 한 명이다. 오늘은 그녀의 사생활을 조심스럽게 들여다보자.

<니체와 폴>

그녀는 1861년 2월 12일 상트 페테르부르크에서 제정(帝政) 러시아 군대의 고위 장교인 구스타프 살로메와 북독일-덴마크계 상인의 딸인 루이스 윌름 사이에서 막내로 태어났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 덕에 제정 러시아가 망할 때까지 황제로부터 군인연금을 받아서 남자의 도움 없이도 학문과 생계를 꾸려 갈 수 있었다. 이러한 기반이 결혼을 하지 않고 또는 섹스를 하지 않는 플라토닉 동거 생활을 유지할 수 있게 했을 것이다. 그녀의 저작 《자유로운 여자 이야기》에 따르면 첫사랑은 루터교 교회의 목사였던 하인리히 길로트(Heinrich Gillot)이다. 그로부터 철학·형이상학·논리학·종교사를 배웠다. 후에 부인과 이혼한 43세의 길로트가 18세의 그녀와 결혼할 것을 원했지만 그녀는 육체적 사랑을 거부해서 청혼을 거부한다. 그녀는 당시 여성을 받아주는 몇 안 되는 대학 중 하나였던 취리히 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유럽이든 동양이든 ‘2등 인류’인 여성의 삶은 비참했다. 여성들은 부모나 남편에게 경제생활을 의존했고, 심지어 영국에서는 아내를 내다 파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여성은 자주권이 없는 노예나 다름없는 신분이었다. 심지어 마녀사냥도 잔존했다. 러시아와 유럽의 대학들은 여성에게 문호를 개방하지 않아서 공부의 길도 막혀있었다. 프랑스 귀족의 딸이었던 조르주 상드도 대학은커녕 집에서 남동생들의 가정교사에게 배웠고, 버지니아 울프도 귀족 가문의 딸이었지만 대학에 못 가고 왕립학교에서 공부할 정도였다. 그나마 스위스의 대학 중 일부가 여성의 진학을 허용했다. 살로메는 유족연금을 손에 쥐고 스위스의 취리히 대학에 입학할 수 있었다. 그녀는 대학에서 철학·신학·예술사 등을 두루 공부며 천재성을 인정받았고, 교수들의 총애를 받는 학생이 되었다. 그러나 폐병이 도지면서 건강 문제가 심각해지자, 그녀의 어머니는 딸을 데리고 따뜻한 이탈리아 로마로 갔다.

<호수에 뛰어드는 살로메>

살로메는 여기에서 유럽의 지성인들 사이에 명성이 높았던 페미니즘의 대모인 말비다 폰 마이젠부르크(Malwida von Meysenburg)와 만나게 된다. 그녀 덕분에 독일 출신 작가 겸 철학자·의사인 폴 레(Paul Ree)를 만나게 된다. 폴 레도 그녀를 만나자마자 사랑하게 되어 청혼을 했으나 거절당했다. 그녀는 두 사람이 사귀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으니 한 사람 더 끼워서 셋이서 사귀자고 했다. 그래서 폴 레는 바젤대학교 철학과 주임교수였던 자신의 선배 프리드리히 니체(1844~1900)를 참여시켰다. 폴이 왜 니체를 점찍은 이유가 있었다. 그의 주변에 니체만큼 여자에게 인기 없던 남자도 드물다. 용모나 성격도 괴팍했고, 언행 역시 괴짜라서 여자들에게 진상(?)으로 소문나 있었다. 그러니 3명이 동거를 해도 당연히 니체를 제치고 자기가 살로메를 차지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니체가 살로메를 보자마자 뿅 하고 빠져 들어서 38세의 늙은 니체가 도리어 폴 레를 제치고 21세의 여대생인 그녀에게 뜨거운 애정 고백을 다음과 같이 하게 되었다. “도대체 우리는 어느 별에서 함께 여기로 떨어진 걸까요?” 완전 드라마 한 편 찍는 대사다. 자기를 이해할 수 있는 유일한 여성을 만났다고 확신한 니체는 경건하게 루에게 청혼까지 하였다. 그러나 그녀는 거절하였다. 그녀를 열렬히 사랑하는 두 남자에게 그녀는 일종의 지적 삼위일체를 만들자고 제안했는데, 이는 철학적 공론을 위한 동거 생활이었다. 1882년 5월 그 약속을 확인하기 위하여 함께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 사진에서 니체와 레는 마차에 타고 있었고, 살로메는 고삐를 잡고 있었다. 동거는 오래가지 않았다. 니체가 자기의 별장으로 살로메를 초청하여 열심히 공을 들이자, 이를 안 폴은 눈에 쌍심지를 켜고 둘 사이를 이간질시켰다. 그러자 상심한 니체가 떠난다. 그리고 폴도 살로메를 꼬드겨 동거에 들어간다. 질투심에 불탄 니체는 라이프니치를 떠나 이탈리아로 갔다. 떠난다고 마음까지 정리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제정신이 아닌 마음으로 모두(冒頭)에 언급한 황당하고 광적인 편지를 그녀에게 보내지만 대답은 싸늘했다. 니체는 그녀를 떠난 후 애증의 분노심에 불타서 그 마음을 투영한 작품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10일 만에 저술했다. 그는 이 책에서 살로메에 대한 감정을 이렇게 표현했다. “여자는 아직 우정을 맺을 줄을 모른다. 여자는 아직 고양이이거나 새이다. 잘 봐줘봤자 암소랄까”, “여자를 보려 하는가? 회초리를 잊지 말아라.” 그 후 니체는 충격을 이기지 못해 정신병이 발병했고, 10년 동안을 광기 속에서 허우적대며 살게 된다. 니체는 살로메의 이른바 최초 희생자로 기록된다. 일단 승자가 된 폴 레도 역시 피해자가 되고 말았다. 니체를 꺾은 뒤 몇 년간 살로메와 같이 살았지만 살로메가 성관계를 극도로 싫어해 찝쩍대지도 못했다. 그래서 동료들로부터 “살로메의 충실한 하인”이라는 험담을 듣게 된다. 살로메는 니체의 집착 어린 사랑을 외면했지만, 탁월한 비평가로서 1894년에 쓴 <작품에 나타난 니체>에서 그에 대해 예지적인 평론을 다음과 같이 했다.

“우리는 미래에 니체가 새로운 철학적 종교의 예언자로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될 것이며, 수많은 영웅들을 추종자로 두게 될 것이다”

살로메의 평론대로 후에 니체는 헤겔과 쇼펜하우어를 뒤흔드는 초현실주의 철학자로 등극하였으니, 우리는 평론가로서 살로메의 역량을 짐작할 수 있다.

<영화 포스터>

니체가 떠난 후, 루 살로메와 폴 레는 일시적으로 베를린에서 동거하며 사회학자, 문학가 등 다양한 지식인들과 교류했고, 그녀는 작가이자 지성인으로서 입지를 넓혀갔다. 폴 레는 이후에도 그녀에 대한 감정을 품고 있어서, 1887년 무렵 또 청혼했지만 다시 거절당했다. 이 무렵 그녀는 오스트리아의 동양어학자 프리드리히 카를 안드레아스(F.K. Andreas)와 교류하고 있었다. 1889년 그와 결혼하게 되고, 42년간 법적인 부부로 살았다. 살로메가 전격적으로 결혼을 통보하자, 결혼을 극도로 꺼리던 그녀가 어떻게 그리 유명한 학자도 아닌 그와 결혼을 승낙했을까? 다름 아니라 살로메를 짝사랑했던 안드레아스는 자기 가슴을 칼로 찌르는 자살 소동을 벌이면서 구혼을 했고, 공포에 질린 그녀는 엉겁결에 청혼을 수락했다. 그러나 결혼을 승낙함에 있어서 확실한 전제조건이 있었다. 부부지만 절대 성생활을 서로 요구하지 않으며, 각자 자유로운 연애와 생활을 존중하고 참견하지 않는 것이다. 남자로서는 굴욕적인 결혼 조건이지만 안드레아스는 이를 흔쾌히 받아 들리고, 결혼생활 내내 이를 잘 지켰다. 한 번은 모르는 척 조건을 어기려고 시도하다가 살로메에게 실제로 살해당할 뻔했다. 그런 후로는 평생 약속대로 살지 않을 수 없었으니 자업자득이었던 셈이다. 그는 가정부와 관계를 가져서 사생아 둘을 낳았는데, 살로메가 이들을 자기 자식으로 입양하였다고 한다. 그녀 역시 이러한 결혼 조건을 적극적으로 즐기며 평생 동안 자신에게 고백한 남자들을 두 가지로 구분해서 동시에 만났다. 첫 번째 부류는 그녀 스스로 육체적인 매력을 느껴서 성관계를 하는 남자들이고, 두 번째 부류는 자신의 지적 욕구를 채워줄 수 있고 사상적인 관심사가 일치하는 지식인들이었다. 그녀는 지적인 교류만 하는 남자들과는 성관계를 철저히 거부했다고 하니 자신만의 원칙과 소신이 확실한 여자였음이 분명하다. 그런 여자였으니 그 후로도 니체의 그림자는 길게 이어졌다. 니체는 살로메에게 상처를 입은 후 폐인처럼 살면서도 필생의 역작(力作)들을 저술했다. 그녀는 니체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후 그에 대한 평론집 <작품으로 본 니체>를 저술하였고, 이 책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니체 연구자들에게 가장 중요한 연구자료의 하나로 쓰이고 있다. 폴 레는 니체가 1900년에 죽은 지 1년 만에 살로메와 사랑의 추억이 깃든 스위스 칠레리나 산 위에 올라 투신자살을 하였다. 한 사람은 미쳐서 죽고 한 사람은 자살하였으니 사랑의 대가(代價)가 엄청나게 크다.

<살로메 모습>

드디어 36세의 살로메가 22세의 젊은 시인 릴케를 뮌헨에서 만나게 된다. 그녀는 친구인 소설가 프리다 폰 뷜로우(Frieda Von Bulow)의 소개로 릴케를 만난 것이다. 두 사람은 처음으로 성적인 사랑에 빠지게 되었다. 살로메가 남자를 만나는 두 가지 원칙을 처음으로 어기고 정신적·육체적 사랑을 나눈 것이다. 그녀의 성적 상대는 대부분 연하남이었다. 살로메는 남편 안드레아스가 있었고, 릴케는 애인 프리드리히 피넬리스(신경정신과 의사)가 있었다. 릴케는 16세 무렵 연상의 가정교사와 사랑에 빠진 이래 평생 여러 여인들과 염문을 뿌렸고, 그 여인들의 배려 속에 작품 활동을 할 수 있었다. 살로메는 뮌헨에서 장기 체류 중이었고, 릴케는 고향 프라하에서 막 이사 온 상태였다. 그들은 뮌헨의 남쪽에 있는 볼프라트하우젠(Wolfratshausen)의 산속 마을에서 함께 뜨거운 며칠을 같이 보냈다. 릴케는 14살 연상의 여자에게 오이디푸스(Oedipus) 증세를 느꼈는지 단숨에 확 빠져버렸다. 그가 보낸 편지의 일단을 보자.

“나는 그대를 통해 이 세상을 보기를 갈망합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세상에서 보이는 것은 오직 그대뿐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여! 나는 그대에게 기도를 바치고 싶다는 생각 없이 그대를 본 적이 없습니다.”

그야말로 구구절절 온몸과 마음을 던진 사나이의 절규처럼 들린다. 그들은 다시 남편 안드레아스가 근무하는 베를린으로 돌아와서 니체와 사귀던 시절처럼 3인의 동거에 들어간다. 릴케는 그들과 집안에서 같이 동거한 것이 아니라, 살로메 부부의 집 마당에 오두막을 짓고 그곳에서 1898년부터 3년간 기거했다고 한다. 그 기간 동안 살로메는 릴케에게 러시아어를 가르친다. 그리고서 1899년에는 그녀 부부와 함께 릴케가 러시아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에서 살로메는 톨스토이를 릴케에게 소개한다. 그녀 또한 톨스토이와도 특별한 관계를 맺는다. 릴케의 시문학은 톨스토이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이후 조각가 로댕의 비서 일을 하며 예술의 세계에 깊이 천착(穿鑿)하게 되었다. 릴케는 살로메와 둘이서만 동행했던 1900년의 두 번째의 러시아 여행에서 톨스토이의 걸작 <부활>의 삽화를 그린 화가 레오니드 파스테르나크와 그의 아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와 만나게 된다. 어린 소년 파스테르나크는 릴케의 문학을 경청하면서 깊은 감명을 받았다. 그는 후에 불후의 명작 <닥터 지바고>를 집필해서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둘은 러시아를 여행하고 돌아와 그녀는 서로 떨어져 지내자고 통보하고 헤어진다. 릴케는 그녀의 마음이 굳건한 것을 느끼고, 조각가인 베스토프와 결혼한다. 릴케와 베스토프의 딸이 1901년 태어나지만 릴케는 아내와 아이를 내버려 둔 채 로댕에 관한 연구 논문을 쓰기 위

해 파리로 갔다. 그리고 파리에서 살로메에게 다시 만날 수 없겠느냐는 편지를 계속 보내지만 그녀는 편지를 통해서만 우정을 주고받는다면 잠시 동안은 괜찮다고 말한다. 릴케는 계속 그녀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 눈을 감기세요.

난 당신을 볼 수 있어요.

내 귀를 막으세요.

난 그대 음성을 들을 수 있어요.

발이 없어도 당신에게 갈 수 있고, 입이 없어도 당신을 부를 수 있답니다.

팔이 꺾이면 난 당신을 내 마음으로 사로잡을 겁니다.

심장이 멎는다면 나의 머리가 울리겠지요.

만약 당신이 내 머리마저 불태운다면 난 그대를 내 피 속에 실어 나르렵니다.“

정말 혼신을 바친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어쨌든 살로메는 어머니이자 누이이자 연인으로서 릴케의 천재성을 만개하도록 했다. 릴케는 살로메와 헤어진 다음 <두이노 비가>, <헌시집>등 생애 최고의 걸작을 발표했다. 릴케는 결코 그녀를 잊지 못해 그녀보다 11년 먼저 맞은 임종의 순간에서도 이렇게 호소했단다. “나의 그 무엇이 마음에 들지 않았는지 루 살로메에게 물어주십시오.”

<영화 이미지>

릴케와 헤어진 후 살로메는 1902년 의사였던 프리드리히 피넬스(Friedrich Pineles)와 연인 관계가 되었으며, 임신하기도 하였으나 낙태하였다. 살로메는 평생 아이를 낳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1912년 바이마르에서 열린 제3차 정신분석학회에서 당시 그녀의 연인이었던 스웨덴 출신 정신분석학자 폴 비에레(Paul Bjerre)로부터 정신분석학계의 대가 지그문트 프로이트를 소개받았다. 이 시기에 프로이트와 카를 융이 결별을 하는데, 이것이 루 살로메 때문이라는 설이 있다. 살로메의 나이 51세로 5살 연상인 프로이트도 그녀를 사랑했고, 기꺼이 문하생으로 받아들여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그와 함께 연구와 진료에도 몰두했다. 힘들지만 행복한 시기였다. 프로이트는 그녀를 너무 엄격한 섹스 문제를 제외하면 완벽한 여인이라고 높이 평가했다. 그가 평생 존경의 선물로 반지를 준 사람이 5명이고, 그중 여성이 3명이다. 첫 째 여성은 그로부터 불감증 치료를 받은 후에 그의 후원자가 된 나폴레옹의 후손이면서 덴마크 공주인 마리아 보나파르트, 둘째가 정신적 사랑의 대상인 살로메, 셋째가 프로이트의 전기를 쓴 어네스트 존의 부인이다. 그녀는 프로이트와 일하며 신경정신과 전문의로서 인정받았지만, 그 나이에도 여전히 남자들을 몸살 나게 했다. 프로이트의 제자였던 16살 연하인 빅토르 타우스크(Viktor Tausk) 박사와도 연인 사이가 된다. 그들의 관계를 프로이트가 눈치를 차리자 그녀는 타우스크의 열렬한 구애를 차갑게 거절하고 프로이트를 택한다. 상심에 빠진 타우스크는 스스로 거세(去勢) 한 후 자살했다. 엽기적이고 충격적인 죽음이었다. 그러나 수많은 남자 중에 프로이트는 그녀에게 연인 이상으로 특별한 존재였다. 그만이 치정(癡情)의 도가니에 빠지지 않고 그녀와 끝까지 우정을 유지했기 때문이다. 살로메는 죽기 직전에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감사>라는 저서를 집필하여 그에게 헌사(獻詞)하여 고마움을 표했다. 프로이트의 연구는 대부분 섹스에 관한 정신분석이었으나 실제 그는 매우 가정적이었고, 병이 잦은 그의 부인 한 명과 섹스를 했다고 알려져 있다. 그런데 2006년 12월에 뉴욕 타임스가 프로이트와 그의 처제가 스위스의 한 호텔에 몰래 숙박한 증거를 공개하면서 의문을 제기한 기사를 실었다. 실제 그는 부인이 병으로 같이 여행을 다니지 못하자 처제를 데리고 그리스나 이탈리아로 탐사 여행을 많이 했다.

<프로이트와 함께>
<삼위일체>

위에서 언급하지 않았지만 그녀는 독일 사회민주당 창시자 게오르크 레데부르크(Georg Ledebourg)와도 연인 사이였고, 희곡 작가 게르하르트 하우푸트만, 극작가 프랑크 베데킨트, 오스트리아 시인 후고 폰 호프만스탈, 오스트리아 소설가 아르투어 슈니츨러, 정신분석학자 알프레트 아들러 등 수많은 지성인들이 귀신에 홀린 듯 그녀에게 매료되었다. 그녀에게 치명적인 사랑을 구걸한 남자는 대부분은 파멸의 길을 걸었다. 자살하거나 혹은 절망의 고통 속에서 죽음에 이르기도 했다. 그녀와 헤어진 뒤에도 평생 독신으로 비통하게 살거나 다른 여자와의 결혼식 직전에 자살한 경우도 있었을 정도다. 반면에 루 살로메는 여러 남성들과의 사랑을 나누며 그들을 정신적으로 고양시켜서 문학적 또는 철학적으로 대성하게 만들었다. 그녀의 이러한 생활의 이면에는 연금의 힘이 크게 작용했다. 자유로운 생활을 유지하며 연애와 결혼, 사교생활, 문필활동에서 누구의 신세를 지지 않았다. 그러나 제1차 세계대전을 겪으며 제정 러시아가 무너졌고 차르의 연금은 끊겼다. 먹고사는 문제가 목전에 다가왔다. 대학교수였던 남편 안드레아스도 1891년에 실직을 하여 백수가 되었다. 난생처음 생계 문제에 직면한 그녀는 닥치는 대로 일해야만 했다. 프로이트 밑에서 정신과 전문의로 하루에 열 명이 넘는 환자를 상담해야만 했고, 수입을 위한 문필작업에도 뛰어들었다. <소년에게 보낸 세 통의 편지>, <집>, <하얀 길 위의 릴케>, <프로이트에 대한 나의 감사> 등 일생의 역작으로 꼽히는 작품들이 이 연금 상실의 시기에 집필되었다. 살로메의 일대기는 독일 출신 코르둘라 카블지츠 포스트(Cordula Kablitz-Post) 감독이 제작한 다큐멘터리 영화 <루 살로메(원제 : In Love with Lou - A Philosopher's Life, Lou Andreas-Salomé, 2016)>이다.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서양에서 가장 중요한 철학자 중에 한 명과 가장 유명한 시인 중에 한 명과 가장 영향력 있는 정신분석학자가 한 여인의 삶 속에서 끈끈하게 연결되는 것은 기상천외한 것이다. 이 영화가 우리나라에 개봉이 되었지만 다큐 영화가 그렇듯이 작품성과 별개로 흥행에는 실패했다. 관객이 겨우 몇 백명 정도 들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움을 넘어서 당혹감을 느끼게 한다. 그녀는 70세부터 노쇠로 인해 앓기 시작한 당뇨병으로 몸이 허약해져 병원에서 요양하기 시작한다. 살로메는 1937년 1월 5일 당뇨, 요통, 유방암 등으로 사망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63) 당(唐) 4대 여류시인의 사랑 – 이야(李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