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생동안 자유롭게 사랑하고 상대를 정했던 안젤라 이사도라 던컨(Angela Isadora Duncan, 1877~1927)에 대한 일화를 검증한다. “나는 내 자식의 아버지를 선택할 권리가 있다.”라고 선언한 그녀는 어느 날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에게 이렇게 편지를 썼단다. “내 아이의 아버지가 되어 주시겠습니까? 내 아름다움과 당신의 총명함이 합쳐지면 세상을 놀라게 할 겁니다.” 하지만 쇼는 이렇게 답했단다. “맞는 말이고 고마운 제안이지만 사양하겠습니다. 그 아이가 내 아름다움과 당신의 총명함을 물려받을 수 있으니까요.” 이 일화가 사실일까? 인용문 진위를 전문으로 조사하는 인터넷 사이트인 <Quote Investigator®>에 따르면 이 일화는 사실이 아니다. 이러한 구조(構造)의 대화 중 가장 초기 증거는 1923년 보스턴 글로브지(紙)에 실린 글인데, 1921년 노벨 문학상을 수상한 프랑스 소설가 아나톨 프랑스와 이사도라 던컨의 대화로 기록되어 있고, 이사도라가 아닌 “Isadore”로 철자가 되어 있다. 이 기사가 날 때의 아나톨의 나이가 79세로 죽기 1년 전이고, 이사도라의 나이도 46세라서 아이를 가지기에는 늦은 때라서 허구이다. 그 후 1925년 뉴욕의 한 회의에서 건축가 오스월드 헤링이 버나드 쇼와 이사도라 간의 대화라고 주장하여 다시 국제적으로 전파되었다. 그래서 독일 정기간행물인 젝시셰스 폴크스블라트(Sächsisches Volksblatt)의 편집자는 막스 하이에크라는 작가와 관련된 논란 때문에 조지 버나드 쇼에게 이 일화에 대해 직접 질문했다. 막스 하이에크가 이런 일화를 자기의 소설에 넣었는데, 이탈리아 정기간행물 젝시코리에레 델라 세라(Milan Corriere della Sera)가 그것을 표절했다고 주장한 것 때문이다. 그러자 1926년 3월 3일 쇼는 던컨과의 그런 어떤 일화도 없었다고 부인하는 편지를 보냈단다. 그리고 절반만 맞는데, 그 상대가 이름을 잊은 한 외국 여배우였다고 밝혔다. 그 후 1931년, 저널리스트이자 소설가이며 극작가인 시웰 스토크스가 쓴 <사자의 포효를 들어라(Hear the Lions Roar)>가 출판되었다. 이 책에 스토크스가 쇼에게 일화를 질문했고, 쇼는 자신이 영리한 대답을 했지만 던컨에게 답한 것은 아니라고 주장했다는 것을 실었다. 쇼와 던컨의 나이 차이가 21살이고, 쇼가 1925년에 노벨문학상을 받았으니까 이 때 던컨의 나이가 48세라서 아이를 갖는 게 무리이다. 이런 구조의 일화는 아인슈타인과 합창단 소녀, 극작가 아서 밀러와 배우 메릴린 먼로 등의 관계로 나오기도 한다.
<그리스 신전에서 임신한 몸으로>
불을 향해 날아드는 부나비처럼 모든 것에 몸과 마음을 던져 화끈하게 살다 간 현대 무용의 어머니인 그녀의 삶을 따라가 보자. 그녀는 샌프란시스코에서 은행가이자 광산 엔지니어, 예술 감정가였던 조셉 찰스 던컨(1819~1898)과 메리 이사도라 그레이(1849~1922)의 네 자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이사도라가 태어난 직후, 은행가이던 아버지 조셉이 공금을 유용하다 파산하게 된다. 그는 부인보다 30세나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젊은 아내를 팽개치고 다른 여자와 바람을 피웠다. 부인 그레이는 아일랜드계로 부친이 상원의원도 한 좋은 집안의 딸이었는데, 남편이 자신의 보석을 전당포에 맡기고, 집안의 은제품을 녹여 바람난 여자와 돈을 탕진한 것까지 알게 된 것이다. 그레이는 남편과 이혼했고, 싱글 맘으로 살아가며 네 아이를 오클랜드로 이주시켜서 양육했다. 이사도라 던컨이 갓난아기였을 때, 집에 큰 불이 났다. 소방관이 불타는 방으로 달려가 그녀를 열린 창문 밖으로 내던져 다른 소방관의 품으로 받아서 목숨을 건진 일화도 있다. 화재와 부모의 이혼 등 이렇게 이사도라의 삶은 초반부터 극적인 드라마로 시작되었다. 그레이는 재봉사 일과 피아노 레슨을 하며 가족을 부양했고, 이사도라와 언니 엘리자베스는 어릴 때부터 춤에 천부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둘은 엄마를 돕기 위해 학교 교육을 잠시 받다가 그만두고 공공도서관에서 독학을 했다. 그들은 도리어 지역 아이들에게 유료로 춤을 가르쳤다. 필자 금삿갓도 어릴 때 집안이 어려워 동급생 친구들을 가르치며 고학을 한 적이 있는데, 어린 나이에 대단한 결정이다. 그 시절 이사도라에게 가장 큰 영향을 미친 것이 월트 휘트먼(Walt Whitman)의 시 <나 자신의 노래(Song of Myself)>였다. 이사도라는 자신을 휘트먼의 정신적인 딸이라고 즐겨 말했단다. 하긴 휘트먼도 가난한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서 초등학교 밖에 못 나온 처지였지만 위대한 시인이 된 것이다. 그녀의 그의 시 “나는 나를 찬양하고, 나 자신을 노래하노라. 내가 믿는 바를 그대 또한 믿게 되리라.”라는 구절을 제일 좋아했으리라.
<영화의 한 장면>
던컨 가족은 늘 가난하여 생계를 위해 끝없이 돈벌이를 해야만 했어도 언제나 긍정적 생각으로 시와 음악을 중시했다는 것이다. 이사도라는 훗날 자신의 진정한 교육은 어머니 발치 아래 양탄자에 누워 있는 동안 이뤄졌고 했다. 실제로 그녀는 학교를 그만두고 남는 시간에 인적이 없는 숲 속이나 해변으로 뛰어가 반나체로 춤을 추었다. 그럴 때면 바다와 나무가 그녀와 함께 춤을 추고 있음을 가슴 깊이 느낄 수 있었다고 한다. 이런 행동은 오클랜드 기득권층에 계속해서 충격을 안겨주었다. 그들은 괴짜였고, 마을 곳곳에 빚을 지고 있었으며, 더 나쁜 것은 맨발로 다니고 공공장소에서 기이한 의상을 입고 춤을 추는 것이었다. 그들은 이러한 비난에 조금도 개의치 않았다. 먹을 것은 부족했을지 몰라도, 그들의 집은 항상 음악과 시로 가득했다. 이사도라는 자서전에서 “우리가 발레에 반기를 들고 저항했던 것은 아일랜드 혈통 덕분이었을 겁니다.”라고 썼다. 그녀는 때때로 플라톤, 다윈, 니체, 월트 휘트먼의 글과 철학에서 영감을 얻었다. 그녀의 춤은 그녀 자신의 노래였다. 발레에서 탈피한 그녀의 춤은 영혼으로 향하는 관문, 자유롭고 소박하며, 자연과 교감하는 완전 “다른 춤”을 추구했다. 그녀는 폭풍과 비, 그리고 태양 속으로 달려 나가 그것들의 일부가 되었다고 믿었다. “바람? 나는 바람이다. 바다와 달? 나는 바다와 달이다.”이렇게 주장했다. 이는 발레와는 최대한 다른, 고대 그리스의 이상에 따른 그녀만의 전통이었다. 발레가 인간의 몸을 기묘하게 뒤틀리게 하는 것이라며 결사반대했고, 자신 또한 곡예사가 아니라고 선언했다. 그녀는 꽉 끼는 슈즈를 벗어버린 맨발과 코르셋을 벗어버린 맨 몸으로, 내면을 표현하려는 자유로운 움직임을 무용으로써 승화시킨다. 이 몸짓이 훗날 현대무용의 시초가 된다. 그녀는 당시의 지식인들에게 많은 영감을 주어 그들의 숭배대상이 되기도 했지만, 때로는 편협한 비평가들의 공격대상이 되기도 했다. 이는 그녀의 착상과 행동이 시대를 너무 앞선 것이었고, 사회의 인습을 완전히 무시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오늘날 이사도라는 춤의 위대한 개혁자로서 확고한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이사도라의 춤은 전통을 파괴하고 새로움을 추구하는 것으로 오클랜드는 그녀의 꿈을 실현시키기에는 너무 시골이고, 초라한 환경이었다. 그래서 18세의 이사도라는 시카고로 향했지만, 그곳에서도 너무나 가난해 아일랜드 레이스를 팔아 식량을 구해야 했다. 마침내 보드빌에서 일자리를 구해 “페피 도라”라는 예명으로 활약했다. 1896년, 이사도라는 당시 가장 영향력 있는 극작가이자 극장 경영자 중 한 명이었던 오거스틴 데일리의 눈에 띄었다. 그는 그녀를 뉴욕으로 데려왔다. 2년 동안 그의 로드 컴퍼니에서 주로 요정 역을 맡았던 이사도라는 마리 봉팡티(Marie Bonfanti)에게 발레를 배우기도 했지만 발레에 금방 싫증을 느끼고 그만둔다. 당시에 이사도라의 무용은 공연장보다는 부유하고 영향력 있는 상류사회 사람들의 집에서 사교적인 모임의 공연이 주를 이루었다. 이들 사회를 속칭(俗稱) <400대>라고 부르고, 미국의 도금시대(Gilded Age)에 뉴욕 사교계를 대표하는 집단을 말한다. 미국 남북 전쟁 이후 수십 년 동안 뉴욕시의 인구는 거의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고, 미국 중서부에서 온 이민자와 부유한 도래민들이 구 뉴욕 기득권의 지배에 도전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McAllister의 도움을 받아 캐롤라인 셰머혼 애스터(Caroline Schermerhorn Astor), 즉 애스터 부인(Mrs. Astor)이 주축이 되어 모임을 형성했다. 그들은 적절한 행동과 예절을 체계화하고 도래민들 사이에서 누구를 받아들일지를 결정했다. 그들은 부와 명예, 전통을 옹호하고자 하였다. 이런 공연을 위해 뉴욕에 온 이사도라가 묵던 윈저 호텔에 공연을 하루 앞둔 어느 날 화재가 발생했다. 이때 공연에 입고 나갈 의상이 몽땅 타 버린 거다. 새로 의상을 준비할 시간도 없고, 공연을 취소할 수도 없는 상황이다. 그녀는 할 수 없이 임시로 옮긴 방의 창문 커튼을 떼어내서 몸에 두르고 무대에 섰다. 맨발에다가 걸친 듯 아닌 듯 한 천 조각에, 흐느적거리며 격정적인 몸놀림의 이사도라. 관중들은 일부는 경악하고, 일부는 열광하며 뜨거운 환호성을 보냈다. 정식 발레가 아니라 음악이나 시에 맞추어 즉흥적 춤을 추는 무희는 관객들에게 일시적인 흥미밖에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그래서 뉴욕은 그의 춤을 수용할 태세가 아니라고 생각하고 유럽행을 결심한 것이 스물한 살 때였다.
<이사도라블스의 모습>
거의 빈털터리나 다름없이 가축운송선을 타고 런던에 도착한다. 가난한 그녀의 가족들은 처음에 적응하지 못하고, 공원에서 우연히 달밤에 춤을 추다가 정상급 여배우 캠벨의 눈에 띄었다. 당시 조지 버나드 쇼의 뮤즈였던 패트릭 캠벨이 그녀의 영향력 있는 후원자가 되었다. 그리고 런던 사교계에 소개되었다. 그녀는 런던에서 다시 한번 더 개인 공연을 펼쳤는데, 당시 엘리트들 중에는 왕족도 포함되어 있었다. 맑고 거침없는 이 미국 여성은 고루한 빅토리아 시대 사람들을 사로잡았다. 이후로는 갈채의 나날이었다. 나무의 요정과도 같이 머리를 풀어헤치고 사지를 드러내는 얇은 의상을 걸친 채 맨발로 자유롭게 걷고 달리고 뛰고 구르는 것만으로 내면의 정서를 표현하는 이 아름다운 무용수는 런던을 사로잡았다. 이사도라의 공연에 항상 흐느껴 울던 패트릭 캠벨이 “맨발의 댄서”에게 파리를 경험하게 해 주었다. 이사도라는 대영박물관에 보관된 그리스 꽃병과 옅은 부조를 통하여 영감을 얻었는데, 1900년에 파리에 가서 대리석 조각을 통하여 더 많은 영감을 받았다. 그녀는 파리의 “스커트 댄서”였던 로이 풀러(Loie Fuller의 영향을 받았다. 당시 그녀는 “빛의 요정”이자 “아르누보의 여왕”으로 묘사되었으며, 실크 천을 휘날리며 춤을 추었다. 덩컨의 스타일은 타임스지에서 “변화하는 조각품”으로 묘사하였다. 그곳에서 루브르 박물관과 1900년 만국박람회에서 영감을 받아 예술후원자인 마르그리트 드 생 마르소(Marguerite de Saint-Marceaux)와 싱어 재봉틀 가문의 상속녀이자 드뷔시와 라벨의 후원자인 에드몽 드 폴리냑 공주(Princesse Edmond de Polignac)의 살롱에서 춤을 출 수 있었다. 파리, 베를린 등 가는 곳마다 폭발적인 인기를 얻었다. 뮌헨에서는 학생들이 공연이 끝나고 돌아가는 그녀의 마차에서 말을 떼어버리고 자신들이 마차를 끌기까지 했다. 한 번은 독일 뮌헨에 있는 <예술가의 집>이라는 시설에서 공연 계획을 할 때에 댄스는 예술의 전당에 걸맞지 않다는 이유로 독일의 화가·판화가·조각가·건축가인 프랑스 본 슈트크(Franz von Stuck)가 맹렬히 반대했다. 납득할 수 없었던 던컨은 그의 집을 방문하여 댄스의 예술성에 대해서 4시간에 걸친 열렬한 토론 끝에 공연을 인정받는 일도 있었다.
로댕은 “그녀는 세상이 알고 있는 가장 위대한 여성이라고 생각한다.”라고 선언했고, 다른 조각가도 무대 위의 그녀를 보고 “그녀가 등장했을 때, 우리 모두는 신이 현존하는 듯 한 느낌을 받았다.”라고 말했다. 로댕과 각별한 관계였던 이사도라 던컨은 여러 차례 로댕의 작업실에서 춤을 췄고, 뮈동(Meudon) 근처의 Velizy 숲 속에서 레지옹 도뇌르 3등 훈장을 수여받은 로댕을 축하하기 위한 파티가 열렸다. 이 자리에는 이사도라 던컨도 참석하여 손님을 위한 무용을 보여주었다. 이사도라는 마치 길 위에서 자신의 연기를 펼친 듯했다. 1899년부터 1907년까지 그녀는 대도시에서부터 러시아와 동유럽의 악명 높은 변방까지 센세이션을 일으켰다. 미국에서 온 이 여성 무용가는 미국 대통령 우드로 윌슨보다 더 유명해졌다. 관객들은 그녀를 인간 정신의 보편적 표현, 즉 황홀경과 비극이 공존하는 삶으로 여겼다. 속살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시쓰루 차림으로, 때로는 갈기갈기 찢긴 옷으로, 때로는 길이가 다른 천을 몸에 걸치고 춤을 춘 그녀. 그녀는 일단 무대에 섰다 하면 작두에 올라탄 무녀처럼 영혼과 육체가 분리된 듯한 광기 어린 춤을 추었다. 그 몰입의 강도가 얼마나 높았던지 막이 내릴 즈음에는 정신을 잃고 혼절할 때가 많았다고 한다. 1911년, 프랑스 패션 디자이너 폴 뽜레(Paul Poiret)는 라 셀 생클루에 있는 파빌리온 뒤 부타르(Pavillon du Butard)라는 저택에서 호화로운 파티를 열었다. 이 저택은 원래 베르사유 궁전의 별장이었다. 거기서 푸아레가 디자인한 그리스식 이브닝 가운을 입은 이사도라 던컨은 300명의 손님과 함께 테이블 위에서 춤을 추었고, 900병의 샴페인이 동이 틀 때까지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녀는 투어와 계약 공연과 같은 대중 공연의 상업적 측면을 싫어했다. 그녀는 그것들이 그녀의 진정한 사명, 즉 아름다움의 창조와 젊은이의 교육에서 그녀를 방해한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그녀는 자신의 사명을 달성하기 위해 어린 소녀들에게 그녀의 춤 철학을 가르치는 학교를 열었다. 첫 번째 학교는 1904년 독일 베를린서쪽의 그루네발트(Grunewald)에 설립하였다. 이 학교는 3년 동안 존재했고 소위 말하는 “이사도라 키즈(Isadorables : Anna, Maria-Theresa, Irma, Liesel, Gretel, Erika)”의 발상지가 되었다. 그때의 일화 중 하나다. 이사도라 던컨은 제자들에게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을 꼽아 보라고 했다. “춤! 춤이요.” 제자들이 일제히 외쳤다. 그러자 그녀는 “아니, 인생에서 가장 위대한 것은 사랑입니다!”라고 대답했단다. 어쨌든 그녀가 아폴로의 이상과 디오니소스의 욕망 사이에서 갈등하며, 본능적으로 관능의 몸부림이 표출되었으리라 금삿갓은 짐작한다. 아폴로는 순수하고 조화로운 모든 것을 상징하는 반면, 디오니소스는 광기·영감·열정·파괴 그리고 욕망에 대한 고의적인 굴복을 상징한다. 그녀는 열렬한 자유연애 옹호자가 되어 귀족의 저택, 권투 링, 심지어 기차에서 승객과 짐꾼을 포함한 다양한 남성들을 끌어들였다. 그녀의 삶은 섹스, 음식, 와인, 모든 제약으로부터의 자유, 그리고 삶을 마음껏 누리는 것에 대한 감각과 욕망으로 정의될 수 있었다.
<그리스 신전 모습 >
20대 중반에는 춤을 추기 전에 모엣(Moet) 샴페인을 마셨고, 중년에는 포므리(Pommery)로 옮겨갔는데, 그녀의 분장실에는 포므리 와인 상자들이 쌓여 있었다. 그녀의 취향은 아마도 뱃속에서 형성되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임신 중에 아이스 샴페인과 냉동 굴만 먹으면서 견뎠다고 한다. 신이 내린 무당처럼 젊은 육체를 감각의 흐름에 내 맡겼던 그녀는 남자와의 관계에 있어서도 결코 머뭇거림 없는 격정적인 성욕의 화신이었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 감독의 <감각의 제국(L’Empire des Sens)>을 능가하는 성애(性愛) 신(Scene)을 연출하며, 결코 한 남자에게 만족할 수 없다고 외쳤던 활화산 같이 뜨거운 여자였다. 중년을 넘기면서부터는 그녀가 1,000명 이상의 남자 앞에서 옷을 벗어던지고 잠자리를 가졌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성의 충동이 일어나면 상대를 가리지 않고 덤벼드는 그녀의 첫 상대는 사실 어렸을 때였다. 오클랜드 그녀의 강습소에 학생으로 왔던 약제사 버논(Burnon)이다. 그 아이는 눈부실 정도의 미남이었고, 소녀 이사도라는 사랑에 빠진다. “무도회에서 그의 팔에 안겨 춤출 때 허공에 떠있는 기분이었다.”라고 일기장에 고백할 때는 그녀가 11살이었다. 2년이나 계속된 이 정열은 그가 어느 날 ‘어떤 여자’와 결혼함으로써 끝이 났다. 누구나 첫사랑은 나비처럼 날아가 버리는 것이다. 1902년에는 헝가리 부다페스트에서 자신의 공연 초대를 받았는데, 그곳에서 그녀의 유명한 앙코르는 요한 슈트라우스의 왈츠곡인 <푸른 다뉴브>였다. 부다페스트의 공연 때에 모든 관객의 열광적인 반응 속에 있던 한 젊은 헝가리 청년. 그는 타는 듯 한 시선, 키가 크고 균형 잡힌 몸, 자주 빛의 빛나는 고수머리였는데, 첫 눈길에 야릇하고도 미친 듯한 끌림으로 사랑의 불꽃을 피웠다고 한다. 그가 바로 헝가리 출신 미남 배우 오스카 베레기(Oscar Beregi Sr.)였다. 그는 1916년부터 1953년까지 유럽과 미국 영화 27편에 출연했다. <로미오와 줄리엣>에서 로미오 역을 맡았던 그와 공연기간 내내 밤낮 가리지 않고 틈만 나면 도나우 강변이나 숲 속에서 몸을 불태웠단다. 하지만 그녀의 춤과 사랑보다는 배우로서의 자신 돌보기를 우선시하는 그의 내심을 수용할 수 없었기에 그와 치른 불꽃같은 사랑의 달콤한 축제도 멀어져야만 했다.
아련히 멀어져 가는 사랑, 애절한 그리움사이로 다가온 또 한 남자가 있었다. 그는 탁월한 무대예술가 고든 크레이그(Gordon Craig)였다. 유부남이었던 그와는 어떻게 만났을까? 베를린에서 공연할 때 무대 맨 앞줄에 앉아서 그녀를 열렬히 쳐다보던 남자다. 그는 위대한 여배우 엘렌 테리(Ellen Terry)의 아들이었다. 그녀는 “첫날밤 그는 희고 부드럽고 빛나는 몸의 현란함으로 나를 눈부시게 했다. 나는 그의 속에서 나의 살, 나의 피를 만났다”라고 토로했다. 남자와의 첫날밤을 이렇게 시적으로 묘사하는 여자라면 어떤 남자가 머뭇거리겠는가? 그는 이사도라를 정신적으로 상승시켜 준 인물이었고, 그들 사랑의 결실로 1906년에 태어난 딸아이가 디어드리(Deirdre)였다. 그녀는 딸을 네덜란드에서 비밀리에 출산했고, 산통의 끔찍함을 경험하고 여성 운동에 더 적극적이었다. 딸의 이름은 아일랜드 신화에 나오는 “슬픈 디어드리”라는 단어를 떠올리게 한다. 크레이그와 얼마나 기절초풍할 정도로 즐겼는지, 그녀는 연습을 빼먹는 것은 보통이고, 공연 당일 행방을 감추기도 했단다. 그녀의 매니저가 정신줄을 놓고 그녀를 찾으면 어김없이 크레이그와의 어느 호텔방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며 정사에 몰두하고 있었단다. 이런 열정적인 사랑도 식게 마련이다. 2년 후, 그들은 파경에 이르고, 이사도라는 디어드리를 데리고 독일을 떠나 파리로 왔다. 하지만 그 어떤 사랑도 춤을 떠나게 할 수 없었다.
<자유분방한 무용>
그녀는 파리로 이주하여 1909년 1월과 2월 두 달 동안 게이테 리리크(Gaité-Lyrique) 극장에서 화려한 공연을 펼쳤다. 어느 날 공연이 끝난 후, 백만장자 파리스 싱어(Paris Singer)가 이사도라의 분장실에 나타났다. “도와드리러 왔습니다. 제가 뭘 해드릴까요?”라고 그녀에게 말했다. 그는 싱어재봉틀회사의 창업자의 아들이고 부유했기에 이사도라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무궁무진했다. 이사도라는 그전에 파리에 처음 왔을 때 벌써 싱어의 누나인 에드몽 드 폴리냑 공주의 살롱에서 공연을 한 경험이 있었다. 싱어의 아버지 아이작 싱어는 재산도 많았지만 여자 후리는데도 선수여서 미국과 영국, 프랑스에서 낳은 아이가 총 24명이 되면 파리스 싱어가 23번째였다. 자서전에서 이사도라는 그를 로엔그린(Lohengrin) 즉 성배(聖杯)의 기사로 불렀다. 당시 던컨은 엄청난 수입을 올렸지만 늘 재정적으로 어려움이 많았다. 그녀 자신의 씀씀이도 무척 헤펐지만 그녀가 세운 무용학교들의 운영비가 막대했기 때문이다. 이럴 때 구세주가 나타난 것이다. 그와 만나던 어느 날, 싱어의 결혼 생활이 파탄에 이르자 두 사람은 열렬한 사랑을 시작했다. 1909년 9월, 베네치아에 있는 동안 그녀는 임신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일강을 순항한 후, 그들은 1910년 5월 1일 패트릭 오거스터스(Patrick Augustus)의 탄생을 위해 프랑스로 돌아왔다. 그해 여름은 데번에서 보냈는데, 올드웨이에는 거대한 무도회장을 지었다. 싱어는 화려한 재능에도 불구하고 이사도라의 비전을 공유하지 못해 잦은 갈등을 빚었다. 많은 부유층이 그런 것처럼, 그는 자기 마음대로 하는 데 익숙했다. 충동적이고 변덕스러운 연인 춤꾼이 제멋대로 행동할 때마다 욱하고 삐지는 일도 많았다. 하지만 결혼을 하지 않은 채 그들의 로맨스는 계속되었다. 1912년 싱어는 이사도라에게 센 강이 내려다보이는 곳에 부동산을 사주었는데, 바로 이곳이 이사도라의 인생에서 가장 큰 비극이 벌어졌던 바로 그 장소이다. 1913년 4월 19일, 싱어와 던컨은 가족들과 점심 식사를 같이했다. 던컨은 공연장으로 가고, 싱어도 회사로 간 후, 운전기사가 두 아이와 가정교사를 태우고 집으로 데려다주던 중 오르막길에서 시동이 꺼져 기사가 차에서 내렸다. 차는 갑자기 굴러서 부르동 대로를 건너 풀이 무성한 강둑을 넘어 센 강으로 곤두박질쳤다. 구경꾼들의 필사적인 시도에도 불구하고, 세 명의 탑승자, 디어드리(6세), 패트릭(3세), 그리고 유모가 물에 빠져 죽었다. 이사도라의 슬픔은 말로 표현할 수 없었다.
<죽음의 질주 전 모습 : 영화>
그녀는 슬픔을 극복하기 위해 이탈리아의 비아레조(Viareggio)로 갔다. 이곳은 토스카나의 해변 휴양 도시이다. 그녀는 거기서 이탈리아의 위대한 배우 엘레오노라 두세(Eleonora Duse)와 함께 지냈다. 두 사람이 같이 있는 동안 동성연애관계를 가졌을 것이라는 추측이 대부분이다. 1914년 8월, 이사도라는 조각가이자 해군 장교였던 로마노 로마넬리(Romano Romanelli)와의 사이에서 셋째 아이를 낳았다. 그녀는 아들을 낳았지만, 아들은 생후 몇 달 만에 세상을 떠났다. 이로 인해 그녀는 체중 증가, 알코올 중독, 그리고 우울증에 시달렸다. 그녀는 뉴욕으로 가서 학교와 극장을 짓었지만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가족과도 불화가 생겼고, 방황하던 그녀는 재산이 줄어들면서 음주량이 늘어나고 허리둘레도 늘어났다는 사실을 알아차리지도, 신경 쓰지도 않았다. 그녀는 몇 차례 레즈비언 관계를 가졌는데, 특히 가르보(Garbo)와 디트리히(Dietrich의 연인이었던 작가 메르세데스 데 코스타(Mercedes de Costa)와의 관계가 유명했다. 그들은 서로에게 수많은 연애편지를 썼다. 그중 한 편지에 이사도라는 이렇게 썼다. “메르세데스, 그 작고 강한 손으로 나를 이끌어 줘. 그러면 나도 따라갈게. 산꼭대기까지. 세상 끝까지. 네가 원하는 곳 어디든.” 메르세데스뿐만 아니라 이사도라는 공산주의에 심취해 있었다. 1919년, 그녀는 “이사도라블스(Isadorables)”를 결성했던 여섯 아이를 입양했다. 그들은 모두 그녀의 성(姓)인 던컨을 따랐다. 제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자 이사도라는 새로 개교한 학교를 프랑스 귀부인들에게 기증하여 군 병원으로 사용하도록 했다. 그녀가 유럽과 남미를 여행하고 무일푼으로 돌아오자, 싱어는 그녀를 다시 구제했다. 뉴욕에서 부에노스아이레스로 가는 배 위에서는 스페인 화가, 화부(火夫) 그리고 두 명의 권투 선수와 잠자리를 가졌다고 한다. 사회주의 정신이 강했던 그녀는 노동자들에게 그녀와 즐거운 시간을 보낼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단다. 그가 던컨에게 선물한 매디슨 스퀘어 가든을 공개적으로 거부하면서 두 사람의 마지막 다툼으로 이어졌고, 1917년 3월에 최종적으로 헤어졌다. 이사도라와의 관계가 끝난 싱어는 1918년 아내와도 이혼하고 올드웨이 군 병원의 수석 간호사였던 조앤 발시와 결혼했다. 그는 세금 문제로 아버지가 버렸던 미국 시민권을 다시 취득하고 플로리다 주변에서 부동산 개발을 시작했다. 팜비치 앞바다에는 지금도 파리 싱어 섬이 있다.
<헝가리 미남 배우 오스카 베레기> <이사도라 던컨>
1917년 3월 8일 러시아 혁명이 일어난 주에 그녀는 싱어와 헤어졌고, 혁명 당일 밤 그녀는 “끔찍할 정도로 격렬한 기쁨에 춤을 추었다.”라고 기록했다. 혁명 정신에 늘 동조했던 그녀는 런던에서 그녀의 춤을 본 러시아 외교관의 제안으로 모스크바로 이주했다. 그녀는 소련으로부터 자금 지원을 약속받고 모스크바에 또 다른 무용 학교를 설립했다. 그러나 소련 정부는 결국 약속을 어겼다. 이 시기에 그녀는 세르게이 예세닌(Sergei Yesenin)이라는 러시아 혁명 계관시인을 만났다. 그녀가 그를 만났을 때의 묘사이다. “천사!” 예세닌의 금빛 머리칼 속으로 손을 집어넣으며 이사도라가 한 말이다. “악마!” 깊고 긴 키스가 끝난 뒤 그녀가 덧붙인 말이다. 그는 그녀보다 열여덟 살이나 어렸지만, 비혼주의자였던 던컨이 1922년 5월 결혼했다. 그녀는 유럽 여행을 위한 세관 신고 때문에 예세닌과 혼인신고를 하게 되었는데, 혼인신고 당시 40대 중반이었던 나이를 38세로 속였다. 세르게이는 그녀가 순회공연을 하는 동안 그녀와 함께 유럽과 미국을 여행했지만, 여러 나라를 옮겨 다니면서 빠르게 멀어졌다. 돈이 필요했던 이사도라는 철없는 남편을 데리고 미국 순회공연을 떠났다. 그녀는 춤을 추고 남편은 러시아어로 시를 낭송하게 했는데, 러시아어는 미국인들이 거의 알지 못하는 언어였다. 항상 술에 취해 평소 폭력적이었던 예세닌은 호텔 방을 엉망으로 부수기도 했다. 이에 굴하지 않고 이사도라는 보스턴에서 한쪽 가슴을 드러내고 나머지 몸은 공산주의자처럼 붉은 옷을 입었는데, 이는 보스턴을 뒤흔든 커다란 스캔들이 되었다. 당시 빨간색은 볼셰비키 혁명의 상징으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그녀는 조지 발란신(George Balanchine)으로부터 끔찍한 평을 받았다. “술에 취해 뚱뚱한 여자가 몇 시간 동안 돼지처럼 구르는 모습은 정말 믿을 수 없었습니다.” 공연 도중에 나체에 가깝게 흘러내린 의상 때문에 그녀는 공산주의자, 매춘부, 천박한 댄서 등으로 미국 언론에 묘사되었다. 그녀의 명성이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전에는 그렇지 않았다. 제1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이사도라는 자신이 가장 좋아한 빨간 숄을 몸에 두르고 “라 마르세이즈”를 추어 미국의 참전을 호소했던 유명한 일화가 있었다. 어쨌든 신혼의 둘은 빠르게 헤어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술 주정뱅이였으며, 다른 여성들과 불륜 관계로 이어지기도 했다. 그는 주벽이 심하고 공개적으로 그녀를 무시하고 멸시했으며, 때리거나 저속한 욕설을 퍼붓기도 했다. 그녀의 비정상적인 관대함과 헌신적인 사랑에도 불구하고 점점 도가 지나치고 있었다. 이사도라가 예세닌을 통해 본 것은 자동차 사고로 세상을 떠난 금발의 아들 패트릭이었을 것이다. 이사도라의 예세닌에 대한 사랑은 어머니와도 같은 한없는 이해와 염려, 헌신의 모습을 띤다. 그는 신경쇠약, 알코올 중독, 간질에 시달렸고 광적으로 돈, 반지, 시계, 술, 신발, 모자, 실크 셔츠, 손수건, 스카프에 탐닉했다. 이사도라가 각 도시의 박물관이나 콘서트에 데려갈 때마다 예세닌은 모든 양복점 앞에 멈춰 서서 맘에 드는 물건은 무엇이든지 바로 사버리곤 했다. 1923년 5월에 결혼 생활이 파탄 나고, 그는 러시아로 돌아와 정신병원에 입원했다. 몇 년 후 그는 손목을 긋고 자신의 피를 사용하여 ‘잘 있거라. 벗이여’란 마지막 시를 남기고 난방 파이프에 목을 매달아 자살했다.
<이사도라 영화>
1925년 초, 이사도라는 파리로 이주하여 싱어로부터 익명의 재정 지원을 받으며 회고록 <나의 인생(My Life)> 집필을 시작했다. 이사도라는 니스 근처에 살면서 좌우명을 “한계 없이(Sans Limites)”로 바꾸었으나 이미 공허한 수시일 뿐이었다. 말년에 그녀는 파리와 리비에라를 떠돌며 공공장소에서 술에 취하고, 젊은 남성들을 스토킹 하는 것으로 악명 높은 기괴한 인물이었다. 옛 동료들의 지원금으로 연명하며 “더 이상 춤추지 않아. 몸무게만 옮길 뿐이야.” 또는 “남자들과 감자가 내 인생을 망쳤어.”와 같은 자조적인 농담을 늘어놓곤 했다. 대부분의 친구들이 그녀를 버리고 떠났고, 가장 충실한 여자 친구이자 위대한 미국 영화감독 프레스턴 스터지스(Preston Sturges)의 어머니인 메리 데스티(Mary Desti)만 남았다. 메리가 이사도라에게 자신의 전설을 망치고 있다며 술을 줄이고, 특히 남자들을 끊으라고 말했다. 1927년 9월 14일, 프랑스 니스에서 던컨은 프랑스-이탈리아계 정비사인 브누아 팔케토(Benoît Falchetto)가 소유한 아밀카(Amilcar) CGSS 자동차를 탔다. 그녀는 러시아 태생의 예술가 로만 차 토프(Roman Chatov)가 만든 긴 실크 스카프를 두르고 있었는데, 이는 친구 메리 데스티(Mary Desti)가 선물한 것이었다. 던컨을 배웅한 데스티는 추운 날씨 때문에 야외 차량에서 망토를 입으라고 했지만, 던컨은 스카프만 걸쳤다. 그들이 자동차를 출발할 때, 그녀는 데스티와 몇몇 동료들에게 “잘 있어. 친구들. 우리는 영광으로 간다!(Adieu, mes amis. Je vais à la gloire!)고 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미국 소설가 글렌웨이 웨스콧에 따르면, 데스티는 나중에 던컨의 실제 이별 인사가 ”우리는 사랑하러 간다.(Je vais à l'amour)“였다고 그에게 말했단다. 데스티는 이것이 던컨과 팔케토가 밀회를 위해 호텔로 가는 것을 암시하는 것이어서 당혹스러웠다. 그녀의 목에 두른 실크 스카프가 열린 차바퀴와 뒷차축 주변의 휠 웰에 걸려 그녀는 열린 차에서 끌려 나와 목이 부러졌다. 데스티는 던컨을 병원으로 데려갔지만 이미 죽어서 사망 선고를 받았다. 수천 명이 참석한 장례식 후, 그녀의 유해는 파리의 페르 라셰즈(Père Lachaise) 묘지에 안치되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