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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 최초의 여성 한류 스타 - 비운의 최승희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50420)

by 금삿갓


맨발의 이사도라에 대한 이야기를 전편에서 했는데, 이 사람에 대한 이야기를 빼놓을 수가 없어서 연이어 춤꾼 이야기를 해보자.(https://brunch.co.kr/@0306a641d711434/1189) 참조. 던컨 보다 약 한 세대 늦게 ‘고요한 아침의 나라’ 조선에서 세계의 주목을 받았던 무용가가 나왔다는 사실이 엄청 기적과 같다고 금삿갓은 생각한다. 조선시대 허균(許筠)의 누나인 여류시인 허난설헌(許蘭雪軒, 1563-1589)의 시는 지금 와서 연구자들에 의해 중국시의 표절이 많다고들 하지만 당시에는 잘 둔 동생 덕에 그녀의 시들이 중국에서 히트를 쳤던 것은 사실이다. 그녀의 시 모든 게 표절이 아닐진대, 당시 여류시인의 한류 돌풍을 그리 폄훼(貶毁)할 사항은 아니라고 본다. 허난설헌의 시가 최초의 한류였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중국이나 일본 정도의 범주에 머물렀기 때문에 법 세계적인 진정한 한류에는 조금 못 미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325년 후에 전 세계적으로 각광(脚光)을 받았던 우리의 무용가 최승희(崔承喜, 1911-1969)는 명실상부한 한류를 일으켰다. 일제 강점기에 태어나서 불꽃처럼 살다 홀연히 북으로 가서 소리도 없이 스러진 조선의 빛난 별 최승희에 대해서 알아보자.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가 극찬한 불상춤의 분장 모습>

최승희는 1911년 11월 24일 강원도 홍천군 남면 제곡리에서 부친 최준현(崔濬鉉)과 모친 밀양 박씨인 박성녀(또는 박용경)의 4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아버지에게 첩이 한 사람 있었으니 전주 이씨인 이재원이었다. 아버지 최준현(崔濬鉉)은 해주 최씨로 1894년(고종 31) 식년시 진사시에 3등 836위로 급제하였으나, 이것이 마지막 과거로 시험이 폐지되어 관직에 진출할 기회를 잃고 말았다. 윗대에 고위 관직을 배출해서 마을에서는 ‘해주 최참봉’으로 통했다고 한다. 큰오빠인 승일(承一), 작은오빠인 승오, 언니인 영희가 있었데, 최승일은 강점기에 시인·소설가·영화인·방송인 등으로 활동하다가 최승희와 함께 월북했다. 최승희가 일곱 살 때에 서울 종로구로 이사를 왔다. 부친을 마을에서 한학(漢學)을 가르치며 살았는데, 자식들 교육만은 신식 서양 교육을 시켰다. 최승희는 숙명여학교 보통과와 숙명여고를 우수한 성적으로 졸업했다. 소학교 시절에는 내내 전교 1등을 해 두 차례 월반(越班)했다. 동기보다 2년 먼저 졸업했다. 이것이 도리어 그녀의 진로에서 발목을 잡기도 했다. 최승희 집안은 숙명여학교 시절 기울어 빚에 몰리다 이 집을 팔고 체부동 언덕배기 초가집으로 옮겼다. 그 주변은 요즘 외국 관광객이나 맛집을 탐방하는 사람들의 필수 코스가 된 삼계탕집 ‘토속촌’ 근처이다. 당시 집안에서 돈을 버는 사람은 최승희 보다 10살 많은 큰오빠 최승일가 일본 유학을 다녀온 후에 경성방송국에 다니면서 아나운서 겸 극작가로 봉급을 받았고, 《개벽》에 작품을 발표하며 가계를 책임졌다. 그러니 자연히 살림이 어려웠고, 겨우 가족이 입에 풀칠을 할 정도였다. 공부를 잘했던 최승희는 장학금으로 학업을 마칠 수 있었다.

<초창기 부채춤 : 닭 털을 뽑아서 부채를 만들었다고 한다>

숙명여고의 교사들은 최승희가 음악에 재능이 있다고 판단하여 최승희에게 도쿄의 음악학교에 진학하라고 권했다. 그러나 학교를 2년 일찍 졸업한 탓에 당시 연령이 미달된다는 이유로 입학 허가가 떨어지지 않았다. 그러자 최승희는 교사로 취직하여 집안에 보탬이 되기 위해 경성사범학교의 입학시험을 봤다. 약 9:1 가량 되는 경쟁률의 입학시험에서 7등으로 합격하였지만, 여기서도 역시 입학 연령에 미달된다는 이유로 합격이 취소되었다. 이 소식을 듣고 최승희는 하루 종일 울었다고 할 정도로 크게 낙심했다. 공부 잘해서 월반한 것이 도리어 독이 된 것이다. 전남 강진 출신의 서정시인 영랑(永郎) 김윤식(金允植)은 최승희 보다 8살 많은데,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결혼하였으나 1년 만에 상처하고 돌아온 싱글로 있었다. 그는 먼저 경성방송국의 아나운서 마재경과 사랑을 나누었으나 일본 유학을 가는 바람에 헤어졌다. 그리고 귀국하여 1923년부터 자주 서울과 강진을 오가며 작가 최승일(崔承一)과 친하게 지냈다. 이때 그의 여동생인 최승희를 알게 되어 1925년까지 불같은 연애를 했다고 한다. 둘 사이에는 마침내 혼담까지 오갔다고 하는데, 양가의 반대 등으로 결국 이별하였다. 영랑 집안에서는 “경성(京城) 신여성은 우리 가문에 필요 없다”라고 했고, 최승희 집안에서는 영랑의 ‘지방색’을 거론했다는 것이다. 실의에 빠진 영랑은 자살을 시도했으나 다행히 다른 사람이 목격해 목숨을 건졌다. 전라남도 강진군청 바로 옆에 ‘영랑 생가’가 있다. 이 집 장독대 뒤편에 동백나무가 몇 그루 있는데 그중 한 그루가 최승희와의 사랑을 이루지 못한 영랑이 자살하려고 목을 매달았다는 그 나무란다. 믿거나 말거나이다. 자살까지 기도할 만큼 마음에 크게 상처를 입었으니 이런 심정을 담은 시가 없을 수 없다. 위대한 시인들은 실연의 아픔을 극복하면서 위대한 작품이 나왔으니까. 김영랑의 그 유명한 시 <모란이 피기까지는>이다. 최승희의 오빠 최승일은 김영랑과 헤어진 아나운서 마재경의 동생 마현경과 결혼했다. 그녀는 필자 금삿갓의 평생직장이었던 KBS 전신 방송국의 최초 공채출신 여자 아나운서였다. 아무튼 최승희는 오빠와 남편 안막의 사회주의 신봉에 따라 월북을 했고, 그녀의 첫사랑 김영랑은 6·25 전쟁 중에 괴뢰군이 쏜 유탄을 맞고 쓸어져서 지금도 망우리 묘역에 누워있다. 이 무슨 비련의 사연일까? 그는 창씨개명과 신사참배를 모두 거부해 해방 후 ‘친일’이라는 오욕(汚辱)에서 초연했다. 반면에 최승희는 친일과 월북이라는 굴레에 씌워져 오늘 이 글을 쓰는 금삿갓까지 누구로부터 욕을 먹을지 알 수 없는 처지이다.

<1934년 무용공연 팜플렛>

원하던 진학도 못 하고, 어린 나이에 조숙하게 사랑의 열풍에 휩싸였던 최승희의 삶에 서광이 비친 것은 1926년 3월 20일의 오후였다. 그녀가 열여섯 살 때 서울에 온 일본 무용가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공연을 큰오빠 최승일과 함께 관람한 뒤에 감동을 받은 것이다. 당시의 감동을 그녀는 이렇게 회고했다. “무용의 매력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던 내가 빛나는 예술세계를 발견한 순간이었다. 마치 물 흐르듯 그려지는 아름다운 육체의 선, 그 율동 속에 꿈결같이 울리는 음악 소리, 그러나 단순히 그러한 것에 매혹되었다기보다는 무용 밑바닥에 흐르는 강력한 메시지가 내 가슴 깊은 곳에 숨어 있던 혼을 불러일으켰다. 발레 예술로 내 모든 것을 표현해보고 싶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혔다.” 이것이 촉매가 되어 결국 큰오빠 최승일의 권유로 일본의 대 무용가인 이시이 바쿠(石井漠)의 문하에 들어가 무용을 시작했다. 당시 최승희는 동양인과 동떨어진 170cm 가까운 늘씬한 키에 볼륨감 있는 몸과 이국적인 미모를 지녔다. 최승희는 눈이 크고 유난히 밝고 예리하며 눈매가 당찼다. 코는 우뚝하고 입술은 정열을 머금은 듯 매력적이었다. 이때 조선에선 집이 가난해서 돈 때문에 최승희가 300엔에 팔려 일본으로 기생이 되러 갔다는 뜬소문이 났다. 숙명여학교 동창회에서는 이러한 뜬소문에 분개하여, 학교의 이름을 더럽힌 최승희의 졸업장을 박탈하고 최승희를 동창회에서 제명시켜야 한다는 여론이 나오기까지 했다고 한다. 하지만 부산에서 관부(關釜) 연락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일본 동경으로 간 그녀는 예술적인 감각과 세계적 무용가로서 토대를 쌓았다고 한다. 일본 도쿄 근처 무사시사카이(武藏境)라는 한적한 시골마을 이시이 바쿠의 무용연구소에서 그녀는 일취월장했다. 그녀는 우리나라의 전통무용을 재창작하여 세계무대에 선보인 천재 무용수로 그녀가 없었더라면 우리나라의 전통무용의 명맥이 사라졌을 수도 있었을 것이라고 한다. 부채춤·장고춤·보살춤·칼춤 등등이 그녀가 재창조한 것이다. 최승희는 현대적이며 각선미가 들어 나는 양장이나 한복을 특별히 제작하여 입었다고 한다. 그녀의 멋에 지금도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은 그녀의 뛰어난 패션 감각에 기인한다.

<최승희 공연 관련 기사 스크랩>

최승희에 대한 평가는 한 달 뒤인 7월 30일 《야마토 신문》에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그녀의 성취가 얼마나 빠른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도일(渡日)한 지 섣달도 안 된 기간에 이룬 성과이다. “이시이 바쿠가 오늘과 내일 히비야에서 무용발표회를 연다. 그의 연구원들 가운데 조선에서 태어난 아름다운 소녀 무용가가 있다. 둥근 눈, 뽀얗고 요염한 얼굴, 흰 장미 같은 모습, 영특한 두뇌, 그리고 날카로운 예술적 감각까지 지녀 스승인 이시이가 매우 아끼는 제자다. 그녀의 실력은 다른 연구생들을 단번에 앞질러 이시이의 인정을 받게 되었다.” 최승희의 눈부신 성장과는 반대로 스승인 이시이 바쿠의 노화는 반비례하고 있었다. 이런 사정을 눈치챈 그녀는 마음속으로 귀국을 결심한다. 일본에서 입지를 다져가던 최승희는 제발 무용단에 남아 달라는 스승의 간절한 부탁을 거절한다. 병든 스승을 배신하였다는 세간 사람들의 비난까지 받으면서 1929년 8월 25일 최승희는 귀국했다. 그리고 호기롭게 서울에 <최승희 무용 연구소>를 개설했다. 그런데 당시 조선에서는 무용에 대한 인식은 아직 별로였던 모양이다. 1931년 그녀는 오빠의 친구 평론가인 안필승(安弼承)과 결혼했다. 설상가상으로 남편이 일본 제국 경찰에 의해 구속되고, 또한 임신과 출산 후 후유증으로 급성 늑막염까지 앓으면서 죽을 고비를 겨우 넘겼다. 경제적으로 심한 어려움을 겪자 결국 일본에서 활동하기 위해 남편을 대동하고 스승 이시이 바쿠의 곁으로 다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당시 이시이 바쿠가 최승희의 남편 안필승에게 이름을 개명하라고 했다. 창씨개명(創氏改名)이 아니라, 최승희가 워낙 뛰어난 무용가니까 남편이 그녀의 매니저 겸 후원자, 보호자가 되어야 한다고 하면서 자기 이름을 소개해 주었다. 그래서 안필승은 이름은 안막(安漠)으로 개명했다. 일본에서 활동하던 최승희는 일본 이름이 사이 쇼키(さい・しょうき ; 斎尚き)였다. 물론 조선 이외의 해외 공연에서는 일본 이름인 사이 쇼키로 활동했다. 이후 일본에서 활동할 기반을 쌓은 후 다시 이시이 바쿠에게서 독립하였고, 1932년 일본에서 첫 단독 공연을 가진 이후 안막의 수완으로 인해 '최승희 후원회'가 만들어져서 독립운동가 여운형(呂運亨), 작가 마해송(馬海松), 노벨상 수상작가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등 지금 봐도 거물급 인사들이 후원을 하였다.

<장고춤>

소설가 미시마 유키오(三島由紀夫)의 최승희에 대한 평가를 보자. “그녀의 리사이틀이 제국극장에서 있었을 때에 최승희의 브로마이드를 사가지고 와서 보니까 반나체의 불상 춤 사진이 있었다. 나는 최승희의 몸이 무엇인가 환상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나 하고 생각했다. 그 불상 춤의 환상은 그 얼굴이 불상과 비슷해서 어디엔가 불상적인 것이 나타난 것이다. 그래서 더 요염한 맛을 낸 것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그가 <나의 사춘기> 중에서 기록해 놓은 것이다. 당시 가와바타 야스나리는 여류 신진 무용가 중 일본 제일이 누구냐는 질문을 받았다. 이에 그는 서양 무용에서는 최승희라고 단호하게 대답하고, 첫째, 훌륭한 체구와 둘째, 그녀의 춤의 크기와 힘이다. 또한 그녀 한 사람에게 분명한 민족의 냄새가 짙다. 구미인(歐美人)에게 일본을 잘 이해시키는 데는 그녀의 예술이 최고라 생각한다고 했다. 그녀의 공연에 관한 미국의 보도이다. 1938년 11월 7일 NYT의 보도 제목은 “Sai Shoki is seen in Korean Dances – Young oriental artist offers her second program here.”이다. 춤만 한국 스타일이고, 이름은 일본식이다. 요즘 국회에서 김구(金九) 선생의 국적이 어디냐고 싸우는 모습을 보고 실소를 금치 못하는 현상과 비슷하다. 나라를 잃은 서러움이 별 수 있겠나? 어쨌든 NYT의 그녀에 대한 평가는 아주 좋았다. “쇼키양은 젊고 아름다우며, 품위 있는 풍모와 뛰어난 의상 감각을 소유했다. 유쾌한 코미디 감각을 갖추었고 다양성이 있으며 뛰어난 가면의 도움으로 거만한 전사, 나이 든 몽상가, 방랑자 등의 캐리커쳐로 자유자재로 변신하여 공연 저녁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청중은 많았고, 손뼉 치기 바빴고, 꽃과 앙코르도 있었다.” 굉장한 극찬인 것이다.

그녀가 얼마나 대단했었는지 좀 더 살펴보겠다. 1936년 20대 어린 나이에 이미 일본에서 그녀의 자서전인 <나의 자서전(私の自叙伝)>이 간행되었다. 그녀의 춤 인생을 그린 극영화 <반도의 무희(半島のダンサー)>가 1936년에 일본 문화청 초대장관을 지낸 곤 히데미(今日出海) 감독, 최승희 주연으로 제작 상영되었다. 유아사 카츠에(湯淺克衡) 원작의 <반도의 무희)를 영화한 극영화로서 장장 4년 동안 장기 상영되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세웠다. 일본에서 화장품이나 과자 등 광고 모델, 일본 사진 잡지 <그라비아>의 표지를 석권하기도 했다. 요즘 아이돌 이상의 한류를 형성한 것이다. 서른이 되기 전 유럽의 저명 국제무용 콩쿠르에 심사위원으로 초대받는다. 미국 브로드웨이 길드극장, 카네기홀을 시작으로 미국 주요 도시를 순회 공연하며, 동양의 신비를 뚜렷이 각인시켰다. 세계 초일류 무용수인 마사 그레이엄(Martha Graham)과 뉴욕에서 합동공연을 했고, 그가 “최승희는 동양적인 신비와 환상의 미학으로 경이로움을 준다.”라고 표현했다. 일본 무용수가 평생 한번 서 보는 게 소원이라는 도쿄의 제국극장에서는 17일 연속 공연이라는 초유의 대기록을 세우기도 했다. 이런 인기는 세계 각국에 널리 알려져 1937년부터 3년여에 걸쳐 미국과 유럽, 중남미를 순회공연하면서, 현지 언론으로부터 “동양의 진주”, “조선 전통 무용을 잠에서 깨워 세계에 떨친 주인공”, “일본의 색, 중국의 몸짓과 한국의 선이 함께 흐르고 있다.” 등등 극찬을 받으며 우리나라 무용의 아름다움을 세계에 과시했다.

이런 세계 순회공연에서 헤밍웨이, 장 콕토, 게리 쿠퍼, 찰리 채플린, 파블로 피카소, 로버트 테일러, 로만 롤랑 등 당대의 저명인사들이 그녀를 보러 몰렸다. 특히 로버트 테일러는 할리우드의 영화 제작자들에게 최승희를 소개해주며 할리우드 영화 출연을 알선하기도 했다. 곧바로 태평양전쟁이 일어나서 영화 출연은 무산되었다. 당시 프랑스에 유학 중이던 장래의 중국 총리 저우언라이(周恩來)도 그녀를 봤다고 한다. 1939년 8월 중순, 헝가리 일간지 페스티 나플로는 최승희가 10월에 부다페스트에서 공연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그러나 발표 2주 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고, 이 그녀는 일본 여객선 가시마 마루호를 타고 유럽에서 철수했다. 태평양 전쟁 중에 그녀는 여러 번 일본군 앞에서 공연을 했고, 그로 인해 친일파로 몰리게 되었다. 그녀는 음악에도 재능이 많았다. 춤을 추던 도중에 가야금을 연주하던 연주자가 어쩌다가 실수를 하면 추던 춤을 멈추고 연주자에게 어떤 부분에서 틀렸다고 바로 지적을 할 정도였다고 한다. 음반도 여러 장 발매했는데, <향수의 무희>는 최승희의 자작곡이며, <이태리의 정원>은 <A Garden In Italy>의 번안곡이었다. 하지만 나라 잃은 국민이 이렇게 해외에서 국위선양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에 대한 국내 여론은 그리 호의적이지 않았다. 그녀가 창씨 개명하고, 일제 강점기 일본군 위문 등 친일행위를 했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최승희는 남편 안막이 독립운동과 연루되어 일본 경찰에 의해 많은 고초를 겪었고, 옌안(延安) 독립 동맹에도 가담했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녀의 생각과는 상반되게 광복 후에는 자신에 대한 여론이 더욱 악화되자 당황했다. 이를 견디지 못한 최승희는 미군정 사령관 존 리드 하지를 만나 “나를 선처해 달라, 지원을 해달라.”라고 호소도 했다. 그러나 모두 회의적인 반응을 보였다. 그녀의 남편이나 오빠들이 월북을 하였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월북했던 남편 안막이 몰래 남한에 내려왔다. 그는 최승희에게 “북으로 가면 여왕 대접을 받는다.”며 월북을 종용했다. 결국 최승희는 월북을 감행한다. 한 동안은 북한무용의 중흥에 큰 역할을 했다고 알려진다. 일설에 최승희는 월북 전 무당을 찾아가 남과 북, 어디서 사는 것이 좋은지 점을 봤다고 한다. 무당은 “당신은 말년에는 비참하다. 특히 북쪽은 길하지 않다.”라고 했단다. 믿거나 말거나 소식통이다. 아무튼 그녀는 남편을 따라 결국 북으로 간 것이다. 자신에겐 시숙(媤叔)인 안막의 형 안보승(安輔承)은 성악가로 활동하고 있었다. 그는 최승희의 월북을 끝까지 말렸고, 안막이 최승희에게 계속 월북을 종용하자 “너는 가도 되지만 제수씨는 서울에서 살아야 한다.”며 동생을 혼내기까지 했다고 한다. 훗날 그가 최승희의 월북을 회고하면서 <최승희 이름 석 자>라는 시를 남겼는데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오대륙을 누비시고 환국하신 제수님

북쪽에는 안 가겠다, 무당집도 찾으셨지.

아~ 기어코 넘으신지 반세기가 되옵는데,

무지한 손아귀에 지고야 마시다니!

1946년 여름, 최승희와 그녀의 제자이자 조수이며 손아래 동서인 김백봉은 어선을 타고 북한으로 떠났다. 둘 다 위장하기 위해 농민복을 입고 있었다. 배는 10일 동안 바다에서 흔들렸고, 돛대는 부서졌으며, 더 심각한 것은 식량이 바닥났다. 우여곡절 끝에 마침내 배는 북한 진남포 해안에 도착했다. 나중에 한국으로 돌아온 김백봉은 북한에 대한 첫인상을 남한보다 훨씬 더 현대적이었다고 말했다. 지방 자치 단체 건물의 테이블 위에 여러 대의 전화기가 있는 것을 보고 매우 놀랐다고 했다. 그들은 김일성의 주선으로 평양에 최승희 국가 무용 연구소를 설립했다. 평양냉면으로 유명한 대동강변의 지금 ‘옥류관’이 바로 그곳이다. 이 자리는 일제 때 요정(料亭) ‘동일관’ 터였는데 김일성 지시로 개조했다. 북한에서 최승희의 제자는 딸인 안성희, 손아래 동서 김백봉, 장추화가 수제자였다. 최승희는 제자들에게 엄청 엄격했고, 실수를 용납하지 않았단다. 최승희는 이후 최고인민회의의 대의원, ‘인민배우’가 됐다. 김백봉은 최승희의 남편인 안막의 동생 안제승(安濟承)과 결혼하여 동서가 된 것이다. 김백봉은 평양에서 최승희로부터 독립하여 1947년에 평양국립극장에서 개인 무용발표회를 하자, 최승희가 눈물을 흘리며 칭찬했다고 한다. 1949년 최승희와 김백봉, 그리고 제자들이 부다페스트 세계청년학생축전에서 최승희의 딸 안성희와 협업으로 공연하고 큰 갈채를 받았다. 1951년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동베를린에서 열였는데, 여기서도 “조선의 어머니”라는 제목으로 관객을 매료시켰단다. 그리고 소련과 동구권(폴란드·체코슬로바키아·헝가리·루마니아 등) 순회공연을 가졌고, 러시아 볼쇼이발레도 접했다. 이 순회공연에서 그들은 국가 귀빈급의 환영과 의전을 받았다고 한다. 최고급 호텔의 투숙과 공연은 모두 오페라 극장에서 개최되었고, 헝가리는 당 대표 마탸시 라코시가 직접 그들을 맞이했다. 그들은 특별 공연되는 <호두까기 인형>, <카르멘>, <돈 카를로스>를 관람했다.

이동은 특별열차를 이용했다. 체펠 자전거 공장에서 자전거 두 대를, 섬유 공장에서 비단 손수건을, 지방 도시 죄르에서 꽃병과 도자기 제품을 선물 받았다. 지역 청소년 단체에서는 다양한 악기와 의료 장비를, 문화교류원에서는 더 많은 악기, 모피 코트, 라이터를 선물했다. 최승희는 코트 한 벌, 드레스 두 벌, 구두 한 켤레, 나일론 스타킹을 직접 받았다. 김일성의 특별한 요청이 있었는지는 모른다. 최승희는 1951년에는 저우언라이(周恩來)의 지시로 중국 베이징 중앙 희극학원에 최승희 무용연구소를 열기도 했다. 최승희의 지도는 중국 전통 무용과 경극(京劇)의 현대화에도 큰 도움이 됐다. 이 시절 최승희는 중국의 유명 경극배우 메이란팡(梅蘭芳)과 친분을 다졌다. 한국전쟁 중에도 그녀는 해외 공연을 계속해서 눈총을 받기도 했다. 그런데 딸 안성희와 김백봉 등은 인민군 위문 공연을 위해 남한으로 내려와서 목포까지 가서 공연을 했단다.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으로 북으로 귀환하는 길이 끊기자 태백산맥을 밤에 넘어서 돌아가느라 거의 죽을 고비를 넘겼단다. 그래서 일설에 최승희의 딸 안성희가 죽었다는 오보가 돌기도 했다. 그러던 그사이 남편 안막을 향해 북한 정권의 숙청 먹구름이 몰려들기 시작한 것을 부부는 눈치채지 못했다. 모제스 초마 주한 헝가리 대사가 기록한 최승희와 남편의 최후 행적이다. “1950년대 후반, 북한에는 모든 형태의 수정주의에 반대하는 운동이 시작되었다. 그 결과 최승희와 그녀의 남편인 좌익 지식인 안막은 문화계에서 영향력을 잃었다. 안막은 1959년 체포되어 곧 처형되었다. 1960년대 평양에서 근무했던 전 헝가리 외교관 이슈트반 가라즈스키씨는 당시 외교관들이 최승희 숙청에 대한 소문을 들었다고 제게 말했다.

소문에 따르면, 김일성이 직접 참석한 무용 공연이 끝난 후, 북한 지도자는 최승희를 분장실에서 맞이하려 했지만, 이 상징적인 무용수는 그 인사에 무례하게 반응했단다. 결국 최승희는 자취를 감췄고, 사망 경위는 알려지지 않았다. 하지만 수십 년 후, 그녀의 무덤은 평양 애국열사릉에 안치되었다.” 당의 태도가 변하는 초기에 최승희는 김일성을 직접 찾아가 항의하는 등 대찬 행동을 보였으나, 오히려 말로(末路)를 앞당길 뿐이었다. 더구나 최승희는 <조선민족무용기본>이라는 책을 내면서 머리말에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을 언급하지 않는 실수를 저질렀다. 화가 난 김일성은 최승희를 비판하기 시작한다. 최승희에 대해 무조건 호의적이던 김일성의 생각이 바뀐 것이었다. 주석의 변심은 당의 모든 사람들은 귀신같이 알고 대처한다. “무용 대가라고 자처하는 한 예술인은 당과 인민을 위해서 일을 더 잘하라고 당에서 지도와 방조를 주었으나, 그는 돈을 많이 받고 칭찬을 듣고 상을 많이 타면 좋아하고, 그렇지 않으면 불평을 부리고 시비하고, 자기 작품에 대한 논평을 신문에 내지 않으면 불평을 했다. 자기가 없으면 조선의 무용 예술이 발전할 수 없는 것처럼 교만하게 행동하고 있다.” 완전 정면 비판이자 퇴출 선고이다. 결국 어버이 수령 김일성의 태도가 바뀌면서 최승희의 몰락은 급전직하이다. 1967년까지는 ‘문예총 중앙위원’ ‘조소(朝蘇) 친선협회 중앙위원’ ‘무용가 동맹 중앙위원회 위원장’ 같은 직함을 유지하긴 했지만 실권 없는 명예직에 불과했다. 그 후 최승희에게는 반당, 반혁명분자라는 낙인이 찍혔다. 위기에 몰린 최승희를 주목한 중국의 실권자인 저우언라이 중국 총리가 구하려 했으나 무위(無爲)에 그치고 말았다. 일설에는 최승희가 평양의 중국대사관에 피신하려 했으나 중국대사관이 이를 거절했다고 한다.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 북한 당국이 그녀를 대동강의 작은 섬에 유폐시켰다는 주장도 흘러나오고 있다. 이 이야기를 한 이는 연변 예술학교 교장을 지낸 조선족 무용가 조득현이다.

북한 조선중앙 TV는 최승희가 문인 한설야, 시인 박세영 등과 함께 애국열사릉으로 이장됐다는 내용을 보도했다. TV 화면에 잡힌 최승희의 묘비를 통해 최승희가 1969년 8월 8일 작고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TV가 보도한 최승희 묘비에는 최승희의 사진, '무용가동맹중앙위원회위원장' '인민배우' 등의 직함과 함께 '1911년 11월 24일 생, 1969년 8월 8일 서거'라고 쓰여 있다. 월남한 황장엽은 이에 대해 “1969년 8월 8일은 최승희가 숙청된 날이고, 실제 사망 날짜가 아니다”라고 했다. 어떤 탈북자는 1979년 한 정치범 수용소에서 비참한 몰골의 최승희와 그녀의 딸 안성희를 목격한 적이 있다고 증언하기도 했다. 최승희의 제자인 김해춘은 최승희가 1969년 지방으로 추방된 후 1975년 양강도 풍산군에서 간암으로 투병 중 사망하였다고 증언했지만 이 역시 확인된 사실은 아니다. 북한에 납치됐던 고 신상옥 감독은 자신의 납북・탈북 수기에 최승희가 딸 안성희와 함께 중국으로 망명을 하려다 붙잡혀서 총살당했다고 적었지만 이 역시 확실하지 않은 소문일 뿐이다. 최승희가 간첩죄를 뒤집어썼을 확률은 상당히 높은 편이다. 남편 안막이 간첩 누명을 쓰고 비참하게 몰락했기에 그 가족에게도 비슷한 죄를 적용했을 가능성이 크다. 이와 관련, 중국으로 망명한 전 인민군 군의관 이복순은 “최승희는 국제 스파이였음이 탄로 나서 숙청되었다.”라고 증언한 적이 있다. 일본과의 연루설도 있다. 일본은 1950년대부터 최승희 도일(渡日) 초청 공연을 추진했고, 최승희 역시 일본에 가고 싶어 했으나 번번이 무산됐다.

일본 사회당 대표단이 방북했을 때 최승희가 이들을 북한 당국 허가 없이 만나 자기 무용단을 일본으로 초청해 달라는 부탁을 했다. 북한은 이 면담을 문제 삼아 최승희에게 일본 사회당과 연계해 간첩활동을 했다는 누명을 씌웠다고도 한다. 안막의 남동생 안제승은 안막과 최승희의 숙청을 미리 예언한 적이 있다. 6·25 때 안제승은 형 안막에게 “우리의 출신 성분은 농민이나 노동자가 아니기 때문에 여기에 계속 있다간 언젠가 숙청당할지 모르니 이번 기회에 남한으로 내려가는 게 어떻겠냐?”며 형을 설득했다. 이에 안막은 화를 내며 동생의 말을 무시했다고 한다. 월북할 때는 형 안보승의 말을 거역하고, 월남 하자은 동생 안제승의 말을 듣지 않은 그의 말로가 처량하다. 동생 안제승은 최승희의 수제자이자 아내인 김백봉을 데리고 1·4 후퇴 시기에 월남했다. 안제승과 김백봉은 처음에는 남한 정부의 감시를 받았다. 최승희만큼 무용에 뛰어났던 김백봉은 1953년 낙원동에 무용연구소를 열었다. 1954년에 첫 작품 발표회를 했는데, 한국 무용사상 큰 분수령이 되는 공연이었다는 평가였다. <부채춤>과 <화관무>는 김백봉의 대표작이 되었다. 원래 독무였으나 군무로 변화를 주어서 88 서울 올림픽 식전 행사에 2,000명이 군무를 추자 전 세계인이 감동하는 쾌거를 올렸다. 그녀는 경희대 무용과 교수, 서울시립 무용단 감독 등 65년간 무용현장을 지키면서 북에서는 손윗 동서 최승희, 남에서는 손아래 동서 김백봉 두 사람이 한국 무용계의 양대 산맥이 되었다. 말하자면 한국의 무용은 안씨 집안의 두 며느리 손에 있었다.

대표적인 한국무용으로 손꼽히는 부채춤과 화관무가 바로 김백봉의 창작이다. 아무튼 최승희의 숙청 후에 잊혀있던 그녀를 되살린 것은 김정일의 처 고영희였을 것으로 짐작한다. 김일성은 늦게나마 최승희를 숙청한 것이 후회됐는지 1980년대 “그래도 최승희의 무용이 최고였지”라고 말했다고 한다. 이 한마디로 최승희는 복권(復權)의 기회를 잡게 됐는데, 1994년 김일성은 자신의 회고록 <세기와 더불어>에서 최승희와 최승희의 춤을 호평했다. 2003년이다. 북한 국영 중앙통신의 보도를 전하는 일본 《마이니치 신문》은 북한 중앙통신이 “조국의 광복과 부강과 번영을 위한 성스러운 위업에 온몸을 바친 22명 열사의 유해를 애국열사릉에 새롭게 안치했다. 그중 마지막에 최승희의 이름이 있었다.”라고 보도했다는 내용을 전했다. 마이니치는 최승희가 명예를 회복한 것은 김정일의 처 고영희의 조언이 있었을 수도 있다고 보도했다. 고용희는 일본에서 태어나 청춘기에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의 만수대 가무단에서 무용수로 인기를 얻었는데, 최승희의 제자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영희의 아들인 김정은도 최승희에 대해 우호적인 감정을 품었을 수 있다. 2003년 2월 9일,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시신이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심지어 2011년에는 최승희 탄생 100주년을 맞이하여 기념행사까지 성대하게 열며, 그녀의 작품 <사도성의 이야기>를 리메이크하여 공연하였다고 한다.

최승희는 국권을 잃고 민족 전체가 신음하던 일제 강점기의 암흑기에 민족의 꽃이자 자랑이었다.'동방의 꽃'으로 불리면서 한국 근대무용의 틀을 만든 주인공이다. 암울했던 시기에 미국과 유럽 중남미 등 전 세계를 무대로 활동하며 한국인의 자존심을 세워주었던 20세기 우리 문화계의 큰 별이다. 하지만 전성기의 화려한 명성과는 달리 남쪽에서는 친일 예술가, 월북 예술가란 이유로, 북쪽에서는 반 혁명분자로 숙청당해 어느 쪽에서도 말하기를 꺼리는 존재로 기억 속에서 사라져 갔다. 때문에 300편이 넘는 작품을 만들어냈으나 현재까지 전해지는 건 100여 가지의 작품명과 흑백사진, 무용대본 등이 몇 점 있을 뿐이다. 시대가 낳은 불꽃같은 영혼이었으나 이념과 체제의 소용돌이 속에서 그 빛을 잃은 비련의 주인공이다. 되돌아보면, 최승희의 북한에서의 활동은 대부분 북한 정권의 비호아래 이루어진 것이지만, 그전의 세계순회공연은 스승인 이시이 바꾸로부터 유럽공연의 선행을 권유받았으나 미국 프로모터와의 구두약속과 최승희 본인의 의지대로 강행된 것이다. 뉴욕, 샌프란시스코, 로스앤젤레스 등에서 시연회를 통해 호평으로 이어졌으나 스폰서 문제와 배일(排日) 문제 등으로 1차 도미 공연은 엄밀히 말해 흥행이 실패에 가까웠다.

이는 대규모의 극장 공연 형태와 독무 공연이 흔치 않은 미국 문화의 현상이 일조했다고 볼 수 있다. 그래도 그 시기에 조선 여자 무용수가 이룬 성과로는 매우 큰 것이었다. 이어진 파리공연의 흥행 성공은 작품성과 예술성을 동시에 평가받음으로써, 이후 2차 도미공연은 물론 중남미 공연의 흥행성공으로 연결되었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상 한 사람의 무용가가 이와 같이 세계적인 언론의 주목을 받으며 절찬과 공명으로 일관되게 극찬의 평가를 받은 경우는 흔치 않은 현상이다. 세계인이 추앙하는 이사도라 던컨도 이 정도는 아니라고 국뽕에 취한 금삿갓은 강력히 주장한다. 더욱이 전란의 혼란기에 무용이라는 예술분야에서의 현상으로는 한층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할 수 있다. 이러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최승희가 미국⋅유럽⋅중남미 등지의 세계 순회공연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귀국할 수 있었던 요인을 강원대 무용과 한경자 교수는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첫째, 최승희 춤의 수준 높은 예술적 가치에 대한 평가이다. - 미지의 동방세계에서 온 매혹적인 무용가의 동양 춤사위를 서양의 무대에서 새로운 몸짓으로 표출

둘째, 최승희의 끊임없는 창작 욕구에 의한 지속적인 신작발표 – 미국(재즈나 다이내믹한 볼거리), 유럽(예술적 가치와 진지함, 수준 높은 예술가들과의 교감), 중남미(라틴민족의 문화적 전통과 관객층의 높은 수준 파악)

셋째, 남편인 안막의 기획력과 함께 최상급 매니지먼트사와의 계약 – 현지 극장계약과 마케팅, 쇼케이스, 초청관객 등의 체계적 공연 시스템 도입.(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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