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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 백마 아닌 목마를 타고 떠난 – 버지니아 울프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250423)

by 금삿갓

이 글을 쓰려니까 필자 금삿갓도 아련한 옛 생각이 스멀스멀 기어 올라온다. 한 때 문학을 해 보겠다고 낙동강 건너 덩그렇게 서있는 영호루(映湖樓) 근처에서 열리는 백일장에 줄곧 참가하기도 했다. 친구들이랑 의기투합해서 소위 <청바위>라는 동인지를 발간하여 여고생들에게 돌리기도 했다. 자취방에 모여서 가리방(がり版 : 등사기)을 긁으며, 막걸리의 취기에 개똥철학도 읊어 보곤 했다. 때로는 음악다방에 죽치고 앉아서 타들어가는 담배꽁초에 젊음을 사르기도 했다. 다 지난 세월이다. 하지만 그 시절 뮤직 박스에 폼 잡고 앉은 DJ가 음악 사이로 읊조려주는 박인환의 <목마와 숙녀>는 왜 내 가슴을 그리도 무너지게 했을까?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와

목마를 타고 떠난 숙녀의 옷자락을 이야기한다.

목마는 주인을 버리고 거저 방울소리만 울리며

가을 속으로 떠났다. 술병에서 별이 떨어진다.

……

모든 것이 떠나든 죽든

거저 가슴에 남은 희미한 의식을 붙잡고,

우리는 버지니아 울프의 서러운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

……

목마는 하늘에 있고, 방울 소리는 귓전에 철렁거리는데

가을바람 소리는

내 쓰러진 술병 속에 목메어 우는데……

금삿갓이 센티멘틀인지 니힐리즘인지 모를 아리송한 경계에 있던 20대 초반의 비애와 우수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말장난의 명수 에드워드 올비(Edward Albee)의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를 굳이 들먹이지 말고, 본론으로 들어가자. 그건 이것과 전혀 상관이 없는 거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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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1년 3월 28일 오전, 런던의 남쪽 서식스 주의 시골 마을인 로드멜(Rodmell)을 끼고 흐르는 우즈(Ouse) 강가에서는 무슨 일이 벌어졌을까? 금삿갓이 시간 여행을 해서 1941년 4월 14일 자 <Time>지 제15호 34쪽을 보았다. 표지는 나치 완장을 찬 거만한 표정의 아돌프 히틀러(A. Hitler)가 갈색 제복을 입고 의자에 앉아 있는 모습이다. 밑에는 아주 작은 글씨로 “봄이 왔다(Spring is here.)”라고 표기되었고, 바로 밑에 괄호로 “(World War)”라고 이탤릭체로 인쇄되어 있다. 아마 전쟁의 참혹함을 너무 강조하느라 봄이 왔다고 했을까? 차치(且置)하고, 우리의 주인공 문제를 보자. 중년의 고운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 1882~1941. 본명은 Adeline Virginia Stephen)의 흑백 사진이 실렸다. 제목은 “세상을 발칵 뒤집다(The worla clamored) : 자살로(Kill yourself)”라고 아주 센세이션 하게 뽑았다. 소제목은 “한 예술가의 실종”이라고 드라이하다. “지난달 어느 날 아침, 영국 소설가 버지니아 울프는 평소처럼 책상에 앉았다. 하지만 새 소설을 수정하는 대신 언니에게 ”세상과의 작별“이라는 쪽지를 썼다. 런던의 정치 일간지 <폴리티컬 쿼털리(Political Quarterly)> 편집자인 남편 레너드 울프(Leonard Woolf)에게도 쪽지를 썼다. 그런 다음 그녀는 지팡이를 들고 굽이치는 서식스 다운스를 지나서 우즈 강까지 그녀가 가장 좋아하는 산책을 했다. 버지니아 울프가 무엇을 했는지, 강가에서 그녀의 의식의 흐름 속에서 무엇이 일어났는지 아무도 몰랐다. 하지만 (쪽지를 본) 남편이 들판을 가로질러 그녀의 발자국을 따라가다 공황 상태에 빠져 달려왔을 때, 그녀의 지팡이만 강둑에 놓여 있었다. 수색대가 우즈 강을 수색했지만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다(당시 강은 조수 간만의 차가 컸다). 레너드 울프는 기자들에게 ‘울프가 사망한 것으로 추정됩니다.’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가 자신에게 보낸 마지막 쪽지에 무엇이 있었는지 말하지 않았다. 그녀의 가족은 모두 버지니아 울프가 자살했다고 생각했다. 그녀의 자살이 전쟁으로 인한 것이라는 데는 동의하지 않았다. 울프 가족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대부분을 로드멜 마을 근처의 외딴 오두막, 몽크스 하우스(Monk’s House)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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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곳은 비행기가 굉음을 내며 상공을 쉴 새 없이 오가며 소이탄을 투하하는 등 쉴 새 없이 분주했다. 버지니아는 응급 처치를 도왔습니다. 런던에 있는 그녀의 집이 폭탄으로 파괴되어 던컨 그랜트(Duncun Grand)와 언니 바네사 벨(Vanessa Bell : 미술 평론가 클라이브 벨의 아내)이 그린 귀중한 벽화가 파괴되었을 때, 그녀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아름다운 것은 곧 파괴될 것이다.’ 가족들은 전쟁보다 그녀의 문학적 걱정이 더 불안했다고 생각했다. 3주 전, 버지니아 울프는 로저 프라이(Roger Fry) 전기 집필을 하던 중 단편 소설 <막간(Between The Acts)>을 완성했다. 남편 울프는 새 책에 열광했다. 호가스(Hogarth) 출판사에서 그의 동업자인 존 레만(John Lehmann)은 그 책을 ‘그녀의 감성이 더욱 적나라하고 섬세하게 드러나는 놀라운 시적 힘을 지닌 작품’이라고 평했다. 하지만 버지니아는 책의 결말이 좋지 않았고, 작품 전체가 자기의 엄격한 기준에 미치지 못한다고 느꼈다. 그녀는 항상 병적으로 자기비판적이었고, 거의 모든 책에 대해 고민했으며, 때로는 완전히 신경쇠약에 시달리기도 했다. 하지만 그녀는 전문적인 작가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녀의 아버지는 <국민 인명사전(Dictionary of National Biography)>의 편집자였던 레슬리 스티븐 경(Sir Leslie Stephen)이었다. 그녀는 새커리 가문(Thackery)과 다윈(Darwins) 가문, 메이틀랜즈(Maitlands) 가문, 시몬즈(Symondses) 가문과 같은 학계 가문의 친척이었습니다.………”

그녀의 죽음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지나가는 바람과 구름, 하늘의 해와 흘러가는 강물이 같이 했고, 스치는 풀잎들은 초록 손을 흔들며 작별을 고했을 것이다. 예부터 동양에서의 작별은 남포(南浦)에서다. 아마 울프가 걸어 들어간 우즈강의 그곳도 슬픈 이별의 남포 나루처럼 생각된다. 거기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이 바로 뉴헤븐(Newheaven) 항구이다. 떠나는 숙녀의 옷자락을 잡을 사람도 없는데, 그녀는 혼자서 무거운 돌덩이를 주워 코트 주머니에 가득 채웠다. 꽃잎은 떨어져야 열매를 얻을 수 있고, 강물은 있던 곳을 떠나야 바다에 이른다고 했던가. 그녀는 살던 몽크 하우스를 떠나서 강물을 타고 뉴헤븐 즉 새로운 천국으로 갔다. 3주가 지난 4월 18일에 강가에서 놀던 아이들이 시체를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했다. 영국사회에 일찍이 논란과 화제를 불러일으킨 여류 소설가이자 비평가이며, 철학자인 버지니아 울프의 삶은 이렇게 마감 됐다. 그녀가 남편에게 남긴 유서의 내용을 보며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더듬어 본다. “사랑하는 사람아, 다시 미쳐가는 게 확실해. 그 끔찍한 시기를 다시 겪을 수 없을 것 같아. 이번에는 회복할 수 없을 것 같아.……나는 최선이라고 생각하는 일을 하고 있어. 그대는 내게 최고의 행복을 줬어. 그댄 모든 면에서 누구보다 나았어.……더 이상 그대의 삶을 망치고 싶지 않아. 우리보다 더 행복했던 사람은 두 명도 없을 것 같아요.”

Richmond_Riverside,_statue_of_Virginia_Woolf_(3).jpg <동상>

금삿갓의 대학시절에는 얼렁뚱땅 대충대충 학교 생활을 보내고, 어렵지 않게 취업도 할 수 있어서 전공도 아닌 영미 문학을 치열하게 접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래서 박인환의 예의 시가 없었다면 아마 버지니아 울프에 대해서 관심을 가지지도 않았을 거다. 우리가 알아주지 않아도 그녀는 당시부터 지금까지 엄청난 영향력을 미치고 있었다. 20세기 가장 영향력 있는 모너니스트 작가인 그녀의 대표작 <등대로>·<댈러웨이 부인>은 영문학사에서 현대소설의 효시로 인정받았고, 2015년 영국의 BBC가 외국 평론가들을 대상으로 가장 뛰어난 영문학 작품을 설문 조사한 결과 2위~3위에 랭크되었다. 그녀의 저서들은 하버드 대학생이 가장 많이 읽은 책 Top10에 늘 속하고, 뉴욕타임스 선정 인류의 필독서로 소개되었다. 평생 저술한 50여 편의 작품에는 당시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여성이 겪는 비참한 신분 차별을 타파하고자 노력한 작가 혼이 담겨있다. 이런 그녀가 1882년 1월 25일 런던의 사우스 켄싱턴에서 레슬리 스티븐(Leslie Stephen) 경과 줄리아 프린셉 스티븐(Julia Prinsep Jackson)의 4명(바네사·토비·버지니아·에이드리언) 중 3번째 딸로, 전체로는 8명 중 7번째로 태어났다. 처음에 아델린 버지니아 스티븐이라는 이름을 가졌지만, 아델린 이모가 일찍 사망하자 그 이름을 사용하지 않았다. 아버지는 작가·역사가·수필가·전기 작가·산악가이며 케임브리지 대학의 교수였고, 어머니는 프랑스 귀족의 딸로 유명한 자선가였다. 두 사람은 각각 전 배우자와 사이에 모친은 3명(조지·스텔라·제럴드), 부친은 1명(로라)의 자녀가 있는 상태에서 재혼한 것이다. 이러한 가족 관계가 울프의 성장기에 극심한 트라우마로 작용한다. 버지니아가 여섯 살 때부터 10여 년 이상 의붓오빠들이 그녀에게 온갖 못된 짓을 했던 거다. 그녀의 신체구조를 세밀히 관찰하고, 만지고 그랬단다. 그 시절부터 그녀는 몸에 대한 수치감과 혐오감을 갖게 되었다. 이것이 훗날 남성 혐오증과 성(性)에 관련된 것은 무조건 배격하는 마음도 갖게 하고, 레즈비언이 되기도 하며 여성 운동에 더 전향적으로 만든 요인이었다. 정신적 트라우마는 마침내 자살로 귀결되었을지도 모른다.

Screenshot-70.jpg <영화의 한 장면>

버지니아는 일찍부터 글쓰기에 재능을 보였다. 5살 때부터 편지를 쓰기 시작했고, 책에 대한 열정은 아버지와의 유대감을 형성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10살 때부터 그녀는 스티븐 가족의 삶과 사건을 기록한 그림이 있는 가족 신문인 <Hyde Park Gate News>를 창간했다. 버지니아는 13세인 1895년까지 가족신문을 운영했다. 그녀는 이 신문에서 종종 언니 바네사와 동생 에드리안을 놀렸다. 1897년에 버지니아는 첫 일기를 쓰기 시작했고, 그 후 12년 동안 일기를 썼다. 울프가 태어난 해인 1882년 봄, 부친은 콘월(Cornwall)의 세인트 아이브스에 있는 큰 흰색 집을 빌렸다. 그 후 13년 동안 가족은 매년 여름 3개월을 그곳에서 보냈다. 고드리비(Godrevy) 등대가 내려다보이는 포스민스터(Porthminster) 만의 전망이 좋았다. 여기서 보낸 행복한 여름은 나중에 울프의 소설 <제이콥의 방>, <등대로>, <파도>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의 가족은 여러 문학 및 예술계 인사들과 교류했다. 헨리 제임스(Henry James), 조지 메러디스(George Meredith), 제임스 러셀 로웰(James Russell Lowell) 같은 문학계 인사들이 자주 방문했다. 어머니는 1895년에 49세로 사망하고 이곳에는 더 이상 오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은 그녀에게 첫 번째의 심리적 붕괴를 느끼게 했으며, 그 후 몇 달 동안 그녀는 긴장하고 초조해했다. 그 후 2년 동안 거의 글을 쓰지 않았단다. 엄마 대신 의붓언니 스텔라가 어머니 역할을 하다가 2년 후에 결혼하자마자 28살로 사망한다.

Screenshot-71.jpg <영화의 한 장면>

버지니아의 부모는 당시의 영국 귀족들이 흔히 딸들에게 정규 공립 교육을 시키지 않고 홈스쿨링을 하였다. 대신 집안 가득히 있는 아버지의 방대한 서재에서 지식을 흡수했고, 아버지 손님들인 당대 일류 지식인들과의 대화에서 지적인 자극을 흠뻑 받았다. 여자가 대학에 가는 것은 금지되어 있어서 왕립학교 ‘킹스 칼리지 런던’(King's College, London)에서 여성학과 역사를 공부하고, 개인교수를 통해 라틴어와 그리스어를 공부하였다. 그녀가 유명해진 훗날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강연 요청을 해 왔을 때 그녀는 단호하게 거절하며 여성의 입학을 금지했었던 명문사학에 대한 적개심을 표하기도 했다. 버지니아는 케임브리지에 다닐 수 없었지만, 오빠 토비가 겪은 경험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그는 학교의 지식 동아리에 자기 누나와 여동생 버지니아를 소개하여 참여시키고, 무도회에도 동참시킨다. 의붓오빠들에게 성적 학대를 당하면서 극도로 대인기피증이 있던 버지니아에게 이런 기회가 그녀의 교류 범위의 지평을 넓혀준 것이다.

Screenshot-72-1.jpg <영화의 한 장면>

1904년 2월, 아버지 레슬리 스티븐이 사망하면서 버지니아는 4월부터 9월까지 또다시 심한 정신적 불안정을 겪었다. 이 기간 동안 그녀는 심각한 심리적 위기를 느꼈고, 이는 적어도 한 번 이상의 자살 시도로 이어졌다. 울프는 후에 1897년에서 1904년까지의 기간을 “불행한 7년”이라고 묘사했다. 아버지가 돌아가신 후, 바네사와 에이드리언 스티븐은 사우스 켄싱턴에 있는 집을 팔고 더 저렴한 지역인 블룸즈버리(Bloomsbury)로 이사했다. 의붓형제는 들어오지 않아서 그들로부터 자유롭게 되었다. 1905년 3월부터 토비는 그의 지적인 친구들과 함께 자기 집에서 모임을 가졌다. “목요일 저녁”이라고 불리는 그들의 사교 모임은 트리니티 칼리지의 분위기를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 모임은 블룸즈버리 그룹(Bloomsbury Group)으로 알려지고 바네사와 버지니아도 적극 참여했으며, 작가와 예술가들의 지적 핵심을 형성했다. 멤버로는 경제학자 케인스(John Maynard Keynes), 화가 던컨 그랜트(Duncan Grant), <전망 좋은 방>의 작가 EM 포스터(E. M. Forster), 화가 로저 프라이(Roger Fry), 작가 데이비드 가넷(David Garnett) 등 쟁쟁한 인사들이 포함되었다. 이 기간 동안 버지니아는 몰리(Morley) 대학에서 자원봉사로 야간 수업을 가르치기 시작했고, 이후 2년 동안 간헐적으로 수업을 이어갔다. 그녀의 이러한 경험은 나중에 소설 <댈러웨이 부인>의 계급과 교육이라는 주제에 영향을 미쳤다. 그녀는 또한 교회 신문 <가디언>과 <내셔널 리뷰>에 게재된 서평을 통해 돈을 벌었다. 1905년에는 토론의 그 결과물을 <타임스>지에 기고하는 등 왕성한 활동을 전개하기 시작했다.

Screenshot-74.jpg <영화의 한 장면>

언니 바네사는 미술 토론에 전념하는 “금요일 클럽”이라는 또 다른 행사를 그들의 일정에 추가했다. 이 모임은 화가 헨리 램(Henry Lamb), 그웬 다윈(Gwen Darwin), 캐서린 레어드 콕스(Katherine Laird Cox)를 포함한 몇몇 새로운 회원들을 그들의 동아리에 끌어들였다. 이 새로운 회원들은 케임브리지 출신의 약간 더 젊은 지식인 집단과 연결해 주었다. 그녀의 남편이 될 문인 레너드 울프(Leonard Woolf)도 있었고, 언니의 남편이 될 미술평론가 클라이브 벨(Clive Bell)도 포함되어 있었다. 1906년 가을, 형제자매는 Violet Dickinson과 함께 그리스와 터키로 여행을 갔다. 여행 중 Violet과 오빠 Thoby는 장티푸스에 걸렸고, 이로 인해 그해 11월 20일 Thoby가 사망했다. Thoby가 사망한 지 이틀 후, 언니 Vanessa는 평론가 Clive Bell의 이전 결혼 제안을 수락하고 결혼한다. 언니가 결혼해서 나가자 버지니아는 남동생과 함께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가 살던 집으로 이사한다. 5년을 살다가 더 큰집 아샴하우스(Asham House)로 옮긴다. 그곳에서도 그녀는 ‘목요일 클럽’을 계속 유지했고, 성에 대한 담론 등 진보적인 토론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그녀는 집필에서만 성적 욕망을 표출시켰다. 이 시기에 첫 소설 <출항(The Voyage Out)>을 출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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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의 첫사랑이며 영원한 동반자였던 레너드 울프(Leonard Woolf)는 오빠의 친구로 1899년에 처음 만났다. 그때를 그는 “흰 드레스와 큰 모자를 쓰고 손에 파라솔을 든 그들의 아름다움은 말 그대로 사람의 숨을 멎게 했다.”라고 회상했다. 1904년 레너드는 영국을 떠나 식민지 Ceylon(스리랑카)에서 공무원이 되었지만, Virginia의 아름다움에 매료되어 1911년 1년간 휴가를 냈다. 귀국하여 ‘목요사교 모임’에 참석하며 매번 그녀를 만났고, 그해 12월에 아예 그녀의 집으로 세입자 신세를 지게 된다. 레너드는 1912년 1월 11일 버지니아에게 청혼했다. 처음에는 그녀가 꺼려했지만 그는 계속 구애했다. 레너드는 실론으로 돌아가지 않기로 결정하고 사임했다. 열 번 찍어 안 넘어가는 나무 없다고 드디어 5월 29일 버지니아는 레너드에게 사랑을 고백했다. 두 사람은 8월 10일 세인트 판크라스 시청에서 결혼했다. 그들은 프랑스 남부, 스페인, 이탈리아에서 신혼여행을 보냈다. 돌아온 후 그들은 클리포드 인으로 이사했고, 런던과 아샴을 오가며 시간을 나누기 시작했다. 섹스를 거부하던 버지니아는 아이를 갖고 싶어 했지만, 레너드는 그녀가 어머니가 될 만큼 정신적으로 강하지 않다고 믿었다. 아이를 가지면 정신 건강이 악화될까 봐 거부했다.

Virginia_Woolf_2-1-scaled.jpg <마지막까지 살던 몽크스 하우스>

실제로 그녀는 결혼 뒤에도 섹스를 하지 않고 살았을까? 신혼여행 중에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도 “사람들은 왜 그렇게 섹스에 대해 야단법석일까?”라고 되물을 정도였다. 28년 간 두 사람은 섹스를 하지 않고도 성숙하고 행복한 생활을 보냈다. 그녀의 비밀스러운 고백에 따르면 “제가 열세 살 때 감당할 수 없는 불행이 저를 덮쳤어요.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마저 병에 걸려 눕고 말았죠. 더욱 힘들었던 것은 의붓오빠마저도 저에게 못된 짓을 했던 겁니다. 무방비 상태에서 그런 일을 수시로 당했던 저는 거의 미칠 지경이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버지니아는 사춘기 시절부터 정신과 치료를 받으러 다녔고. 사람들 앞에 서는 걸 극도로 무서워했다. 그녀가 평생 껴안고 살아야만 했던 정신질환도 이때 받은 충격 때문인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몇 번이나 자살을 시도했으나 그때마다 실패했던 그녀는 현실의 불행에서 도피하기 위해 책 더미에 파묻히고 글쓰기에 몸을 내놓았다. “당신이 청혼했을 때 저는 두 가지를 요구했었지요. 보통사람들이 하는 부부생활을 하지 않겠다는 것과 작가의 길을 가려는 나를 위해 공무원 생활을 포기해 달라는 것이었어요. 이 세상에 이런 황당한 요구를 하는 여자와 결혼하려고 성적욕망과 사회적 지위를 팽개치는 사람은 레너드, 당신밖에 없을 거예요. 당신을 사랑합니다.” 그녀의 사랑고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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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인 고통으로 환청이 들리고, 엉망진창인 삶에 회의를 느끼고 있던 그녀를 정신적으로 구해준 계기는 레너드와의 결혼이었다. 레너드는 그녀를 위해 기꺼이 실론 식민지 공무원직을 걷어차고, 그녀만을 위한 Hogarth Press 출판사를 차려 든든한 후원자가 돼 주었다. 버지니아는 그곳에 집필실을 두고 같이 작업을 했다. 정신병을 가진 아내를 위해 안정적인 생활습관을 만들고, 창작을 격려해 줬다. 결혼한 다음 버지니아는 작가로, 여권운동가로, 문예비평가로 활발히 활동한다. 친구의 권유를 받아 노동자학교에서 강의하는 한편 사회주의 집단인 페이비언 협회에 가입하여 정치활동도 한다. 1919년에 살던 아샴하우스를 비워달라는 주인의 요구로 그들은 런던 집 이외의 작업 장소로 Rodmell에 있는 Monk's House를 700파운드에 경매로 구매했다. 참나무 들보로 된 방이 있는 널판자 집인데, 15세기 또는 16세기에 지어진 것으로 전해진다. Monk's House에는 1 에이커의 정원이 있었고, Ouse강 건너 South Downs 언덕이 보였다. Virginia가 강물로 들어간 후까지 Monk's House를 유지했다. 제2차 세계대전으로 런던의 집이 폭격을 받은 후 그곳은 그녀의 영구 거주지가 되었고, 그녀는 1941년 초 마지막 소설 <막간(Between the Acts)>을 완성한 곳이기도 했다. 그 후 3월 28일 그녀는 인근 우즈 강에서 자살을 감행했다.

<아버지와 함께>

1922년 12월 14일 버지니아는 생애 두 번째 사랑하는 사람을 만났다. 상대는 남자가 아닌 여성이다. Hawthornden 상상력 문학상을 수상한 시인·소설가·저널리스트이자 정원 디자이너인 비타 색빌-웨스트(Vita Sackville-West)이다. 그녀는 정치가이며 작가·방송인·정원디자이너인 해럴드 니컬슨의 아내였다. 두 사람이 사귀던 시기는 둘 모두에게 유익한 시기였다. 버지니아는 세 편의 소설, <등대로>·<올랜도>·<파도>를 썼고, <베넷 씨와 브라운 부인>과 <젊은 시인에게 보내는 편지>를 포함한 여러 에세이도 썼다. 두 여성은 1941년 울프가 사망할 때까지 친구로 지냈다. 버지니아는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그녀와의 교류가 대표작 <올랜도>의 영감을 주었다. 색빌-웨스트 부부는 모두 양성애자였고, 결혼 후에도 각각 동성의 애인을 두고 오랫동안 교제했다. 색빌-웨스트는 Violet Keppel이라는 여성작가와 죽고 못 사는 관계였다. 색빌이 주로 남성의 역할을 했는데, 케펠이 다른 여자를 만나면 미친 듯이 화를 내고, 질투를 했다고 한다. 둘이 걸핏하면 프랑스, 모나코 등으로 도피행각을 해서 양가의 부모들이나 양가의 남편들이 공동으로 추적하기도 했다. 케펠이 결국 남편과의 성생활만을 하겠다고 서약하자 물러나서 친구로 지냈는데, 이때 버지니아를 만났다. 저녁 파티에서 만났는데, 버지니아는 색빌과 케펠의 관계를 알고 있었지만 서로 취향이 통해서 깊게 사귀게 된 것이다. 10년 이상을 애인으로 지내면서 상호 작용으로 최고의 작품을 저술한 시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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색빌-웨스트는 버지니아의 글을 매우 존경했고, 그녀를 더 뛰어난 작가로 여겼다. 그녀는 한 편지에서 버지니아에게 이렇게 말했다. “나의 문맹 한 글과 당신의 학구적인 글을 비교해 보니 부끄럽습니다.” 버지니아는 색빌-웨스트의 빠른 글쓰기 능력을 부러워하며 “비타의 산문은 너무 유창합니다.”라고 표현했다. 두 사람이 가까워지면서 버지니아는 어린 시절 이복오빠에게 성적학대를 당했다고 털어놓았다. 그녀가 트라우마에서 치유되기 시작하고, 처음으로 만족스러운 성적 관계를 가질 수 있게 된 것은 주로 색빌-웨스트의 덕분이었다. 그녀는 색빌-웨스트와 함께 프랑스를 여행하는 동안 거울을 사면서 인생에서 처음으로 거울을 볼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다. 색빌-웨스트의 지지는 그녀에게 더 큰 자신감을 주었고, 병약하고 반쯤 은둔하는 사람이라는 자기 이미지를 벗어던지는 데 도움이 되었다. 색빌-웨스트는 그녀에게 자신의 신경 질환이 오진되었으며, 자신만의 다양한 지적 프로젝트에 집중해야 하며 휴식을 취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고 설득했다. 현대 비평가들은 버지니아를 더 나은 작가로 간주하지만 1920년대 비평가들은 Sackville-West를 더 뛰어난 작가로 보았고, 그녀의 책이 버지니아의 책 보다 훨씬 많이 팔렸다. 색빌-웨스트는 여행을 좋아해서 프랑스와 스페인을 자주 방문했다. 그녀의 이러한 여행이 버지니아에게 감정적으로 지치게 하는 일이었고, 색빌-웨스트를 몹시 그리워했다. 그래서 멀리 있는 누군가에 대한 그리움이라는 주제로 유명한 버지니아의 소설 <등대로>는 색빌-웨스트의 잦은 부재에서 부분적으로 영감을 받았다. 수 세기에 걸쳐 성별을 바꾸는 주인공의 이야기로 유명한 소설인 <올랜도>는 색빌-웨스트에게서 영감을 받았다. Sackville-West의 성적 욕구가 강해서 그녀는 마음에 드는 사람은 누구든 사귀게 되자 버지니아도 심한 질투를 느끼고 그녀를 비난하기도 했다. 1935년에 이르러서야 그들의 관계가 멀어지기 시작했는데, 버지니아는 그 상황을 다음과 같이 1935년 3월 11일 자 일기에 적었다. “비타와의 우정은 끝났다. 다툼이나 쾅하는 소리로 끝난 게 아니라, 잘 익은 과일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방 밖에서 ‘버지니아?’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는 여전히 매혹적이었다. 그리고 그 순간,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Virginia-Woolf-Internal.jpg <초상화>

Sackville-West 이외에 버지니아의 다른 주목할 만한 동성연애 상대는 여러 사람이었다. 영국의 실내 장식가이자 사교계의 명사인 Sibyl Colefax, 영국의 귀족이자 사교계의 귀부인으로 예술계와 지성계를 적극적으로 후원하여 T.S 엘리엇과 길버트 스팬서 등과 친했던 Lady Ottoline Morrell, 영국의 단편 소설가요 사교계의 명사였던 Mary Hutchinson과도 깊은 관계가 있었다. 그녀가 삼촌의 아내인 Madge Symonds와 사랑에 빠졌다고 Sackville-West의 일기에 묘사되어 있다. 그녀는 또한 Violet Dickinson과 사랑에 빠졌지만 두 사람이 성관계를 맺었는지에 대해서는 확인되지 않았다. 어릴 때의 성적 트라우마로 남성과의 성관계를 극도로 꺼리는 정신적인 문제로 버지니아는 처음에는 남편인 레너드의 청혼을 매몰차게 거절했다. 심지어 그에게 육체적으로 끌리지 않는다고 말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그의 성실하고 끈질긴 구애로 나중에는 그를 사랑한다고 선언하고 결국 섹스 없는 결혼에 동의했다. 그녀가 남편에게 보낸 편지가 증거이다. “가끔 당신과 결혼하면 모든 걸 다 가질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런데 우리 사이에 성적인 면이 있는 걸까요? 며칠 전에 잔인하게 말했듯이, 당신에게서는 아무런 육체적 매력도 느껴지지 않아요.” 1912년 5월 1일 버지니아가 레너드에게 보낸 편지의 일부이다. 하지만 남편 레너드는 그녀의 평생 사랑이 되었다. 비록 성관계는 했는지 불확실했지만, 두 사람은 서로를 깊이 사랑했고, 든든한 결혼 생활과 출판사 운영을 통해 그녀의 여러 작품을 탄생시켰다. 결혼 생활 동안 버지니아는 여러 여성들과 불륜을 저지르거나 끌리는 감정을 느꼈지만, 레너드와 버지니아는 서로에 대한 사랑과 존경을 잃지 않았다.

<누가 버지니아 울프를 두려워하랴?>

버지니아 울프는 마지막 소설인 <막간(Between the Acts)>(1941)의 원고를 완성한 후, 이전에 겪었던 것과 비슷한 우울증에 빠졌다.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독일의 대공습 당시 런던에 있던 집이 파괴되어 보관하던 서적과 각종 자료들을 잿더미로 만들었다. 살고 있던 곳에서도 심심하면 공습경보가 울렸다. 그 시기에 펴낸 고인이 된 친구 로저 프라이의 전기가 받은 차가운 반응 등 다양한 요인이 그녀의 상태를 악화시켜 결국 일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더구나 그녀가 극구 반대했으나 남편 레너드가 향토방위대에 입대하자 버지니아는 절망했다. 그녀는 평화주의를 고수했고, 남편이 “홈가드의 우스꽝스러운 제복”을 입었다고 맹비난했다. 2차 세계대전이 시작된 후, 그녀의 일기는 죽음에 집착했다는 것을 보여주며, 그녀의 기분이 어두워질수록 그 사실이 더욱 분명해졌다. 1941년 3월 28일, 그녀는 평소 생각했던 바를 실천에 옮긴 것이다. 그녀의 남편은 화장한 그녀의 유해를 서식스 로드멜에 있는 그들의 집인 몽크 스 하우스 정원의 느릅나무 아래에 묻었다.

81+iFBhN0vL.jpg <댈로웨이 부인 표지>

버지니아 울프는 20세기 가장 중요한 소설가 중 한 명으로 여겨진다. 모더니스트인 그녀는 마르셀 프루스트, 도로시 리처드슨, 제임스 조이스와 같은 동시대 작가들과 함께 의식의 흐름을 서사 기법으로 사용한 선구자 중 한 명이었다. 여성운동사에서는 페미니즘의 원류로 추앙받는 존재로 부각 됐다. 대표적인 소설은 <출항(1915)>·<제이콥의 방(1922)>·<달로웨이 부인(1925)>·<등대로(1927)>·<올랜도: 전기(1928)>·<파도(1931)>·<세월(1937)>·<비트윈 더 액츠(1941)> 등이고 에세이나 평론 기고문 등은 수백 편에 달한다. 그녀의 글은 후세의 작가들에게 깊은 영향을 미쳐서 무수히 새롭게 재탄생했다. 또한 그녀 자신의 다른 작가의 모델이 되어서 표출되기도 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전 세계적으로 연구되고 있으며, 영국 버지니아 울프 협회, 일본 버지니아 울프 협회와 같이 그녀에게 헌신하는 조직들이 있다. 모교인 킹스 칼리지에 버지니아 울프 빌딩을 개관했고, 켄트 대학교는 또한 그녀의 이름을 딴 단과대학 인 울프 칼리지를 2008년에 건립했다. 그녀의 흉상은 서식스주 로드멜에 있는 그녀의 집과 그녀가 1924년부터 1939년까지 살았던 런던의 타비스톡 광장에 세워졌다. 또한 조각가 로리 디젠그레멜이 제작한 동상이 템스강 가에 2022년 11월에 제막되었다. 그녀를 테마로 한 소설, 영화, 오페라, 연극 등이 각처에서 기획 제작되었고, 앞으로도 계속될 것이다. 끝으로 한국버지니아울프학회를 만든 서울대 박희진 명예교수는 "너무 글을 잘 쓰다 보니 페미니스트의 상징처럼 여겨졌지만 무엇보다 울프는 뼛속까지 완벽한 작가였어요. 울프를 ‘페미니즘 작가’ 혹은 ‘모더니즘 작가’로만 이해하는 건 울프의 절반도 이해하지 못하는 거예요."라고 평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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