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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 제(齊) 나라의 문란녀 - 선강, 문강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50918)

by 금삿갓

중국의 산동반도는 우리나라와 가까운 곳에 있어서 일찍부터 교류가 많았을 것이다. 인천의 차이나타운도 그쪽 출신들이 대부분이다. 역사적으로 산동지방은 대략 타이산(泰山)을 중심으로 동남쪽에는 제(齊)나라가, 서북쪽에는 노(魯)나라가 자리 잡고 있었다. 두 나라 국민들은 서로 융합도 되었지만 상반된 기질과 풍속의 생활습성을 보여 왔다. 제나라는 춘추전국시대 진(秦) 나라와 함께 자웅을 겨루던 2대 강국의 하나였다. 일찍이 상업적인 문화를 바탕으로 중상주의적인 경제를 꽃피웠다. 이에 비해 공자(孔子)의 고향으로 유교가 발원한 노나라는 줄곧 봉건과 종법질서를 중요시하는 완고한 농경문화가 핵심을 이뤘다. 맹자(孟子)와 순자(荀子)의 차이다. 노나라 출신인 맹자는 사람의 본성이 근본적으로 착하다는 ‘성선설(性善說)’를 주창했고, 제나라 출신인 순자는 그 반대인 ‘성악설(性惡說)’을 주창했다. 누구 주장이 맞고 틀리고를 떠나서 이상과 현실 중 어느 것을 더 우선하느냐의 문제일 것이다. 두 지방의 기질을 나타내는 야화(野話)가 있다. 늙은 총각이 아닌 노나라의 노총각(魯總角)과 제나라의 제처녀(齊處女)에 대한 이야기이다.

독자들은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을 알 것이다. 일정한 거처가 없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을 말하는데, 이 말의 원래 유래가 제처녀(齊處女)의 이야기이다. 당(唐) 고종(高宗)의 명으로 구양순(歐陽詢)이 편찬한 백과사전 격인 《예문유취(藝文類聚)》에 나오는 이야기다. 옛날 제나라의 어느 마을에 한 처녀가 있었다. 혼기가 찬 그녀에게 두 집안에서 함께 청혼이 들어왔다. 그런데 동쪽지방(제나라)의 총각은 못 생겼으나 부자였고, 서쪽지방(노나라)의 총각은 인물이 출중했지만 가난했다. 어느 쪽을 신랑으로 선택해야 할지 곤란하여 부모는 딸에게 의사를 물어보기로 했다. 부모는 딸의 난처한 입장을 고려해서, 말로 대답하기 민망하면 소매를 걷어서 표현하라고 했다. 왼쪽 소매는 동쪽, 오른쪽 소매는 서쪽으로 정했다. 그런데 한참 망설이던 처녀는 양쪽 소매를 다 걷어 올렸다. 부모가 깜짝 놀라서 딸에게 그 까닭을 묻자 그녀는 현실적인 제나라의 처녀답게 이렇게 대답했다고 한다. “낮에는 동쪽 집에 가서 먹고 있다가, 밤에는 서쪽 집에 가서 자면 어떨까요?” 여기에서 동가식서가숙(東家食西家宿)이라는 말이 나왔다. 이런 기질상의 차이로 인하여, 내륙 노나라에서는 추악하기 이를 데 없는 남녀 스캔들이 바닷가 제나라로 가면 아름다운 로맨스로 포장되는 것이었다. 우리나라도 조선시대에는 바닷가 지방 즉 갯마을 출신과는 혼사를 꺼리는 관습이 있었다. 노나라에는 공자, 맹자, 안회 등이 유가(儒家)의 대표적 위인이 있었다는 데서 엿볼 수 있듯이 도의를 숭상하고 농업과 학문에 힘써왔다. 반면 제나라 사람은 실리를 추구하고 상업과 출세에 몰두하였다. 그 대표적 인물로는 강태공(姜太公)과 관중·포숙(管仲·鮑叔), 자공(子貢), 정정(程鄭), 조한(刁閑)이 있다. 이들은 하나같이 상인출신으로 재상의 지위에 올랐거나 거부로 재상의 반열이 되었다. 사마천의 「화식열전」에 등장하는 인물 중 많은 사람이 제나라 출신 아니면 제나라에서 활약하며 큰돈을 벌었던 자들이었다.

다른 하나의 야화는 근세 중국에서 일어난 것이다. 문화대혁명시대, 산둥반도 서부지방의 한 총각, 즉 노(魯) 총각이 산둥 동부 즉 제나라 지방의 한 농장에 감독으로 파견되었다. 노총각은 거기서 옥수수 농장을 감시하는 일을 맡았다. 그런데 하루는 그 마을의 제(齊) 처녀가 옥수수를 훔치다가 노(魯) 총각에게 들켰다. 당시 규정대로라면 제 처녀는 노 총각의 포승에 묶여 시장 바닥에 끌려 나와 구경꾼들에게 갖은 창피를 당하게끔 되었다. 그녀는 ‘만인에 당하기보다는 한 사람에게 당하는 게 낫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몸으로 때우려고 작정하고 노 총각에게 살살 눈웃음을 치며 콧소리 섞인 말로 교태를 부렸다. "저는 방년 18세인데 사귀는 남자가 없어요."라고 하니, "18살나 먹었는데 도둑질을 하다니!" 하면서 손을 덥석 잡는다. 자기의 추파가 성공한 걸로 착각한 처녀가 "저쪽 수수밭이 더 무성해서 잘 보이지 않는데....." 하며, 부근의 수수밭을 가리켰다. 그러나 그 총각 말하기를, "저 수수밭도 내가 관리하는 거야?"라면서 포승줄을 묶더란다. 이는 제나라 사람의 기민하고 실용과 이익, 모험과 융통을 추구하는 특징과 대조적으로 노나라 사람의 우직하고 명예와 도덕, 가족과 원칙을 존중하는 특성을 잘 말해주는 우스개라 할 것이다.

이런 제(齊)나라는 낚시꾼의 원조(元祖)인 강태공(姜太公)이 세운 제후국이다. 따라서 왕(王) 즉 제후의 성이 강씨(姜氏)이다. 낚시로 세월을 낚다가 주(周)나라 무왕(武王)에게 발탁되어 역대 중국 최고의 재상이 된 태공망 여상(呂尙)이 봉토를 받아 세웠는데, 825년간 존속했다. 제나라의 간판 인물들 중에는 강태공 이외에 중국 역사상 최고의 선정을 베풀었다는 평을 듣는 춘추오패(春秋五霸) 중의 하나인 제환공, 불세출의 명재상으로 지금도 꾸준히 존경받는 관중(管仲)과 안영(晏嬰)이 있는데, 관중은 관자(管子), 안영은 안자(晏子)로 불린다. 사마천은 안영의 시대에 살았다면 그의 마부가 되어도 좋다고 할 정도였다. 제나라의 경공(景公) 때 안영이 재상으로 있으면서 치세를 잘하여 명재상이 되었다. 당시 공자(孔子)가 경공에게 유세를 와서 교화를 하자, 경공이 공자에게 땅을 주어 봉작을 하려고 안영에게 상의했다. 안영은 유학자 무리들은 예(禮)·악(樂)·상(喪) 등을 숭상하며 겉만 꾸며서 백성들을 잘 다스리지 못한다고 반대했을 정도다.

제나라 13대 왕인 희공(僖公)의 아들딸 3남 2녀를 두었다. 이들 중에서 역사적으로 대단한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주인공이 있는 것이다. 아들은 제아(諸兒), 규(糾), 소백(小百)이 있고, 딸은 선강(宣姜)과 문강(文姜)이다. 장남인 제아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 14대 왕인 양공(襄公)이 되었는데, 세자 시절부터 이복 여동생인 문강과 근친상간을 하곤 했다. 희공이 생전에 조카 공손무지를 아들 제아랑 비슷한 대우로 사랑하자, 제아가 집권해서 사촌동생의 모든 특혜를 빼앗아 버렸다. 여동생과의 불륜, 여동생 남편인 노나라 환공의 살해 등으로 평판이 나빠지자 사촌 공손무지에게 살해되고 그가 15대 왕으로 즉위한다. 그러자 영공의 동생이었던 규(糾)와 소백(小白)은 각각 관중과 포숙의 도움으로 망명을 떠나서 재기를 노리는 경쟁을 하게 된다. 이 집안의 딸들이 자의든 타의든 간에 가문에 온갖 똥칠을 해댔다. 우선 간략한 예고편을 맛보기로 보면 세 자매의 아사리판 엽기행각은 이렇다. 차녀 문강은 시집가기 전부터 이복 오빠인 제아(諸兒, 훗날 양공襄公)와 수년간 근친상간의 불륜을 맺었고, 3녀 애강은 언니 문강의 아들과 결혼한 것도 모자라 시동생과 놀아났고, 장녀 선강은 본의 아니게 위(衛) 나라 세자 급(伋)에게 시집간 첫날 밤에 시아버지(위衛 선공宣公)에게 가로채여 애첩이 되었다. 그 후 다시 그의 아들 소백(昭伯)과 결혼한다. 콩가루 집안이 따로 없다. 원래 제나라에는 이들 두 자매의 고모인 정말 미인인 장강(莊姜)이 있었는데, 장강은 위나라의 장공(莊公)에게 시집을 갔다. 얼굴도 예쁘고 행실이 너무나 밝아서 시경(詩經)의 위풍(衛風)에서 그녀를 찬양했다. 논어(論語)에 나오는 유명한 사자성어(四字成語)인 회사후소(繪事後素)가 그녀의 아름다움과 덕행을 두고 이야기한 것이다. 위장공이 이런 현숙한 미인 본부인을 도외시하고 자매간인 여규·대규·이강(夷姜) 말고도 여럿을 첩으로 두었다.

그럼 둘째 딸 문강의 적나라한 불륜스토리를 살펴보자. 문강은 날 때부터 정신이 가을 물같이 맑고, 얼굴은 부용(芙蓉)과 같이 아름다워서, 꽃에 비하면 꽃이 말을 하고, 옥에 비하면 옥이 향기를 내니, 참으로 절세가인이요, 고금의 국색(國色)이었단다. 뿐만 아니라 고금의 일에 두루 통하고, 말을 입 밖으로 내면 바로 훌륭한 문장이 되었다. 그로 인해서 호를 문강(文姜)이라고 했다. 그런데 이런 여자가 태생적으로 음란한 몸을 가졌던지 그녀는 성(性)이 뭔지는 모를 어린 시절부터 오빠인 제아(諸兒, 훗날 양공襄公)와 몸 비벼대며 놀기를 즐겨했던 계집이다. 처음에는 찌릿찌릿한 그 느낌이 딱히 뭔지 모른 채 그저 좋아 지내다가 어느덧 몸이 성장해 경도(經道)가 터지고, 섹스에 눈을 뜨자 그 맛을 즐겼다. 남매간의 용서받을 수 없는 근친상간은 화염처럼 불붙어 용광로처럼 녹게 된다. 제아도 나면서부터 키가 크고 자라면서 뼈대가 굵었다. 게다가 얼굴은 분을 바른 것 같고, 입술은 붉어서 타고난 미남자였다. 문강과는 어울리는 한 쌍이 될 만도 하였단다. 문강도 그렇거니와 오빠인 제아 역시 음탕하기 짝이 없어서 주변의 눈초리도 아랑곳 않은 채 틈만 나면 문강의 몸을 덮치는 것이다. 꼬리가 길면 밟힌다고, 이를 눈치챈 아버지 희공(僖公)이 이것들을 죽이지도 살리지도 못하고, 고민하다가 딸 문강을 반강제적으로 노(魯)나라 환공(桓公)에게로 시집보내버린다. 노환공은 늙은 나이까지 노총각으로 있다가 늙어서 즉위한 총각 왕이었다. 오빠의 싱싱한 몸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는 문강에게 노나라 환공의 푸석푸석한 피부와 비실비실한 몸, 흐물흐물한 물건은 영 밥맛 아니 밤맛이 뚝이다. 그러다 보니 문강은 자나 깨나 환공을 멀리하고 오빠를 그리느라 긴긴밤 꼬박 새우기 일쑤다. 그래도 요행이 허니문 베이비가 들어서서 훗날 노장공(魯莊公)이 될 아들 동(同)을 낳았다. 그러던 어느 날 친정인 제나라에 남편 환공과 함께 출장 갈 일이 생긴다. 노환공이 천자국인 주(周)나라의 왕녀와 제양공의 혼사를 주선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함이다. 대소신료들이 모두 환공에게 제나라 행차를 하지 말도록 간언을 하지만 이들은 듣지 않고 제나라로 간 것이다. 발 없는 말이 천리를 간다고 오빠인 제양공과 여동생 문강이 처녀 총각 대 그렇고 그런 사이란 것을 노나라 사람들도 알고 있었으나, 차마 임금에게 이실직고(以實直告)를 못하고 행차의 반대만 한 것이다. 그런데, 문강으로서는 첫사랑 이복오빠를 만날 생각에 밤잠도 설치고, 가슴이 벌렁거리며 아랫도리가 짜릿해지는데, 그 말이 귀에 들어올 리 없다. 그래서 남편을 밤새 꼬여서 행차를 성공시킨 것이다. 그때가 문강이 노나라에 시집간 지 자그마치 15년 되던 해의 일이니, 문강과 제양공의 그리움과 서로의 육체에 대한 갈증이 얼마나 심했겠는가.

우여곡절 끝에 남편 노환공과 함께 친정인 제나라에 도착한 문강의 이글이글한 눈길은 오직 한 사람 연인이면서 오빠인 제아(諸兒) 아니 이젠 임금인 제양공에게만 일직선으로 꽂혀 있다. 제양공도 늘 눈에 나타나는 야실야실한 몸매의 여동생이 그리웠고, 도착한 그녀의 타는 듯한 눈길이 뭘 뜻하는지 모를 바보가 아니다. 양국의 공식적인 외교행사가 끝나기가 무섭게 은밀히 만난 두 남녀가 뭘 할지는 뻔할 뻔자 아닐까? 15년 동안 제 임자를 못 만난 뼈와 살들의 합창소리가 극에 달했다. 그날 이후 둘은 남의눈을 피해 밤낮을 가리지 않고 기력이 다하도록 정사에 탐닉한다. 미련을 버리지 못한 두 사람은 계속해서 궁중에 유숙하며, 해가 높이 뜰 때까지 서로 껴안고 누워 일어나지 않았다. 꼬리가 길면 잡히는 법, 남편인 노환공이 이상한 눈치를 챈 거다. 아무리 남매간에 정이 두텁다 한들 하루 이틀도 아니고 여러 날을 밤낮으로 같이 붙어 있다는 것이 수상했다. ‘내 이런 더러운 년을 찢어 죽이리라’ 노환공은 질투와 배신감에 치를 떨면서 문강에게 빨리 귀국하자고 종용한다. 노나라에 돌아가자마자 죽여버리겠다는 심사였다. 그러나 여자의 육감과 잔머리는 언제나 남자 머리 꼭대기에서 춤을 추는 것이다. 사태의 심각성을 감지한 문강은 쪼르르 오빠에게 달려가서 날름 품 안에 안겨 꼬드긴다. “오빠! 난 이제 노나라에 돌아가면 죽은 목숨이에요. 저 늙다리 남편을 오빠가 손 좀 봐줘요. 흑흑” 오빠인 제양공도 올 것이 오고야 말았구나 생각하고 마음을 단단히 먹었다. 그리고 은밀히 측근을 불러 계책의 의논한 것이다. 그래서 나온 시나리오를 실행에 옮기기로 했다.

노환공 부부의 귀국을 위한 성대한 환송식을 우산(牛山)에서 베풀고 정적(政敵)이 아닌 정적(情敵) 환공을 대취하게 만든다. 그런 뒤 충직한 팽생(彭生)이라는 힘 좋은 심복을 시켜 환공을 수레에 부축해 싣는 척하면서 갈비뼈가 으스러지도록 껴안아 몰래 죽여 버리고 만다. 팽생은 옛날 기(紀)나라 정벌전에서 노나라의 군사에게서 화살을 맞았던 원한을 기억해 내고 흔쾌히 제양공의 명을 받들었다. 이날 우산의 송별연은 노래와 춤을 성대하게 벌이고, 제양공도 정성을 다하여 접대했다. 그러나 노환공은 머리를 숙이고 말이 없었다. 제양공은 여러 대부들에게 명하여 노환공과 함께 술잔을 돌려 마시게 하고, 또한 궁녀와 내시들에게 명하여 술독을 받들고 옆에 꿇어앉아 술을 따르게 했다. 노환공은 마음속의 울분을 술잔에 담아 괴로운 심정을 잊고자 들이켜다가 모르는 사이에 대취하여 헤어질 때 인사도 할 수 없었다. 제양공이 공자 팽생에게 노환공을 안아서 수레에 태우게 했다. 팽생은 곧 노환공과 함께 타고 성문을 나와 2리쯤 갔을 때, 노환공 깊이 잠들었음을 보고 팔을 뻗어 그의 옆구리를 잡았다. 팽생은 힘이 장사라 팔뚝은 마치 쇠뭉치 같았다. 노환공의 옆구리를 잡아 꺾으니, 그가 크게 한 번 소리 지르고, 피를 수레 안에 가득 쏟은 후에 죽었다. 제양공은 노환공이 갑자기 죽었다는 말을 듣고 거짓으로 통곡한 후에, 즉시 극진히 염하여 입관하라고 명하고, 사자를 노나라에 보내 노후의 영구를 모셔 가도록 알렸다. 노나라의 수행원들이 귀국하여 노후가 수레 안에서 피살된 경위를 노나라 신료들에게 자세하게 설명했다. 물론 문강을 아예 제나라에 눌러 앉히고는 날마다 음락에 파묻혀 지낸다. 이 사건으로 제나라와 노나라는 원수지간이 돼버렸지만 힘이 약한 노나라로서는 어쩔 수가 없어서 살인자 팽생을 처형하는 선에서 마무리했다. 그리고 노장왕은 효도를 다해야 한다면서 어머니인 문강을 노나라로 모시려고 했다. 그러나 문강과 제양공은 차마 헤어지기 싫었지만 남의 눈 때문에 어쩔 수가 없어서 헤어지게 된다. 문강을 시집으로 돌아가다가 두 나라의 경계쯤인 작(禚) 땅에서 더 이상 돌아가지 않고 그곳에서 살겠다고 하니, 아들인 노장공인 축구(祝邱)에 궁을 지어 줘서, 그곳에서 양국을 자유로이 왕래하면서 살았다. 제양공은 주나라에서 시집온 정부인 왕희(王姬)가 죽은 이후로 더욱 거리낄 것이 없었다. 문강을 생각하다가 사냥을 핑계로 수시로 작(禚) 땅에 가서 사람을 축구(祝邱)에 보내 그녀를 몰래 데려와서 주야로 음탕함을 즐겼다. 한편 제나라는 양공 남매의 짐승 같은 불륜에 환멸한 충신들이 하나둘 나라를 뜨게 된다. 남동생인 규(糾)와 소백(小白)도 다른 나라로 피신하게 된다. 그러다 보니 나라꼴은 차츰차츰 곪아 터져 갔고, 급기야 군대가 반란을 일으키면서 사촌동생인 공손무지에게 양공이 암살된다. 이때 공자 규를 따라 노나라로 망명길에 나선 사람이 관중(管仲), 소백을 따라간 거(莒)나라에 간 사람이 포숙아(鮑叔牙)로서 관포지교(管鮑之交)의 고사성어를 낳게 한 제나라의 걸출한 충신들이다. 형 양공을 살해한 공손무지도 암살되자 공자인 규와 소백이 제나라의 왕이 되기 위해 치열한 경쟁을 벌이고, 절친한 친구사이인 관중과 포숙 역시 각자의 군주를 위해 온갖 지혜를 쏟아부으며 선의의 경쟁을 하게 된다. 결국 포숙아가 지원한 소백이 왕위에 오르게 되니 이 양반이 중국역사에 그 유명한 춘추오패의 한 사람이 제환공(齊桓公)이다. 문란한 딸 과는 남매간이다. 환공은 경쟁 반대파를 모조리 숙청하는데, 포숙아가 자기의 친구 관중의 능력이 자기보다 훨씬 뛰어나다고 죽이지 말고 등용해서 쓰리고 천거하여, 관중이 정치를 잘하여 제나라가 부강해졌다.

장녀 선강(宣姜)의 드라마틱한 근친상간의 진수를 들여다보자. 선강은 원래 위(衛)나라 선공(宣公)의 아들인 급자(急子)에게 시집을 가기로 되어 있었다. 그런데 위선공(衛宣公)이라는 이놈은 세상에 둘도 없는 껄떡쇠 호색한으로 행동이 제멋대로였다. 머리에 피도 안 말랐던 어린 나이에 아버지 장공(莊公)의 첩 이강(夷姜)과 놀아났던 놈이다. 사통(私通) 중에 아들을 낳자 민간에 맡겨 길렀는데, 이름을 급자(急子)라고 했다. 아비가 죽고 선공이 즉위할 때 본부인 형비(邢妃)는 총애를 받지 못했다. 오직 아비의 첩이었던 이강만이 총애를 입어서 마치 부부와 같았다. 그래서 급자를 세자로 세우고, 우공자(右公子) 직(職)을 스승으로 삼았다. 급자가 장성하여 16세가 되었을 때, 제희공(齊喜公)의 장녀를 맞이하여 배필을 삼으려 했다. 결혼 전담 사자가 돌아와서 제희공의 딸이 절세 미녀라는 말을 선공에게 했다. 그 말을 듣고 마음속으로 그 미색을 갖고 싶었지만, 그러나 자기 입으로 말하기가 어려웠다. 이에 이름난 장인들을 동원하여, 기수(淇水) 가에 높은 누대를 짓고, 붉은 난간과 화려한 기둥에 겹겹이 늘어선 궁궐을 지었다. 수많은 방이 있어 지극히 화려했으며, 이름을 신대(新臺)라고 붙였다. 그리고는 아들 급자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내고, 그런 뒤에 좌공자(左公子) 설(泄)을 제나라에 파견하여 며느리감인 강씨를 맞이하여 신대에 데려와서, 자신의 부인으로 삼았다. 그녀가 바로 선강(宣姜)이다. 일찍이 아버지의 첩도 겁 없이 후려낸 잡놈인데, 아들의 마누라를 건식하는 건 심심풀이 땅콩에 불과하다. 뭐 작전이고 꼼수고 다 때려치우고 그냥 직진해버린 거다. 첫날밤 신방에 아들대신 들어가 며느리인 선강을 덮쳐 버리고 만다. 선강도 이런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반항은커녕 무슨 테크닉이 이렇게 끝내 주냐면서 시아버지에게 찰싹 붙어 버린다.

선공이 싱싱한 선강(宣姜)의 맛을 보자 한 물간 첩인 이강은 자연히 멀어지게 되었다. 급자 또한 세자의 자리가 위태로울 수 있었다. 이 둘은 3년 동안 연달아 아들 둘을 낳았는데, 큰아들을 수(壽)라 했고, 작은아들을 삭(朔)이라 했다. 예로부터 이르기를, ‘그 어미가 총애를 받으면 그 자식도 귀해진다.’고 했다. 선공은 선강(宣姜)을 너무 총애하여, 옛날 급자를 사랑하던 마음을 모두 수와 삭에게 옮겨갔다. 마음속으로 장차 죽은 후에 위나라의 강산을 수와 삭에게 전할 생각을 품고, 옛날 급자 한 아들만을 사랑했던 것보다 더 흡족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공자 수는 천성이 효성스럽고 우애가 있어서 급자와 같은 어머니에게서 낳은 친형제처럼 서로 가까이 지냈다. 매양 부모 면전에 있을 때 그 형을 위해 주선했다. 급자 또한 성격이 온유하고, 매사에 조심하여 조금도 도리에 어긋나는 일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공은 세자를 바꾸려는 뜻을 선뜻 드러낼 수가 없었다. 공자 수를 좌공자 설(泄)에게 맡기면서 장래에 그를 군주가 될 수 있도록 도우라고 은밀히 당부했다. 그러나 공자 삭은 공자 수와는 같은 어머니가 낳은 형제였지만 어질고 어리석음이 현저하게 차이가 났다. 나이가 가장 어렸던 공자 삭은 천성이 교활하였으며, 그 어머니가 총애를 입고 있다는 것을 믿고 비밀리에 자객을 길러 장래에 엉뚱한 일을 저지르려고 하는 마음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어머니 선강을 꼬드겨 우선 급자를 처리하기로 했다. 선강의 입장에서도 원래 급자의 부인이 되어야 하는데 시아버지의 부인이 되었으니 급자를 대하기가 껄끄러운 것이었다. 그래서 모자가 공동전선으로 선공 앞에서 급자를 험담하였다. 급자가 원래 자기 마누라가 될 선강을 아비가 죽기를 노려 자기 것으로 만들려고 한다고 거짓 험담을 해서 질투심을 부추겼다. 결국 그 꾀에 넘어간 선공이 급자를 제나라 사신으로 보내고, 가는 도중에 자객을 보내 몰래 죽이려고 계획했다.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선강의 장남 마음씨 착한 수가 급자에게 술을 많이 먹여 취하게 한 후, 자신이 급자의 복장으로 출장길에 오른다. 그 길에 자기 동생 삭이 보낸 자객의 손에 죽게 된다. 술에서 깬 급자도 놀라 동생 수를 쫓았으나, 벌써 일을 당한 후였다. 자객은 돌아오는 길에 급자를 만나 처음에 잘못 처리한 것을 알고, 급자 또한 죽여서 두 개의 수급(首級)을 챙겼다. 돌아와서 공자 삭에게 보고하여 큰 상을 받았다. 그런데 공자 급자와 수를 모시던 우공자(右公子) 직(職)과 좌공자(左公子) 설(泄)이 사건을 경위를 파악하여 선공(宣公)에게 보고하니, 두 아들을 한꺼번에 잃고, 특히 가장 사랑한 아들 수를 잃은 슬픔으로 곧 사망한다. 그래서 야망이 많던 삭이 위혜공(衛惠公)으로 즉위한다. 이때 배다른 형인 공자 석(碩)은 자가 소백(昭伯)인데, 신변이 위태로워 제나라로 망명했다. 혜공은 제나라와 연합하여 기(紀)나라를 치러 변방에 나갔다. 서울에 임금이 없는 틈을 타서 충신인 직(職)과 설(泄)이 주군의 원수를 갚는다고 반란을 일으켜 또 급자의 동생인 공자 검모(黔牟)를 왕으로 세웠다. 그리고 위혜공의 입국을 막고, 선강을 모후에서 폐하여 서울 밖에 거주토로했다. 위혜공을 할 수 없이 외삼촌의 나라인 제나라 양공(襄公)에게 의탁한다. 제나라가 힘을 합쳐 자기의 복위를 성공시키면 나라의 보물 모두를 주기로 했다. 제양공의 생각에 위나라 사람들이 자기 누이 선강을 언제든지 살해하지나 않을까 걱정되었다. 그래서 공손무지(公孫無知)로 하여금 제나라에 망명하고 있는 공자 석을 데리고 위나라에 가게 했다. 제양공은 공자 석이 선강과 관계하게 하면 조카 위혜공 삭을 위나라로 복위시키는 데 도움이 된다고 공손무지에게 은밀히 당부했다. 공손무지가 양공의 명령을 받고 공자 석과 함께 위나라에 가서 새 군주 검모를 알현했다. 그때 공자 석의 부인은 이미 죽고 없었다. 공손무지가 제양공의 뜻을 위나라의 군주와 신하들에게 두루 알리고 또한 선강에게도 전했다. 남편이 죽은 후에 허전하고 음탕한 선강은 그 말을 듣고 오히려 마음속으로 기뻐했다. 위나라의 여러 신하들은 평소에 선강이 중궁의 자리를 참칭한 것을 미워하여, 오늘에 이르러 그 이름을 더럽히는 일이라고 제양공의 뜻을 따르지 않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오로지 공자 석만이 부자간의 윤리를 생각하여 완강하게 거절했다. 공자 석은 아버지 선공과 이강 사이에서 급자 동생으로 태어났기 때문에, 또다시 아버지의 여인을 부인으로 맞게 되는 것이다. 그래서 공자 석을 연회에 청한 후에 기녀들로 하여금 술을 권하게 하여 흠뻑 취하도록 만들었다. 술에 취한 공자 석을 별궁에 부축해 들여서 꽃단장을 하고 기다리던 선강과 함께 자게 했다. 취중에 만리장성을 쌓고 술에서 깨어나 후회했지만, 이미 어쩔 수가 없었다. 선강과 공자 석은 결국 부부가 되어 후에 5남매를 낳았다. 장남 제(齊)는 어려서 죽고, 차자는 대공(戴公) 신(申)이며, 삼남은 문공(文公) 훼(燬)이다. 두 딸은 송나라 환공(桓公)과 허(許)나라 목공(穆公)의 부인이 되었다. 선강의 팔가가 기구해서 그런지, 선천적으로 색을 밝혀서 그런지 몰라도 원래 정해진 신랑감의 부친 되는 시아버지와 살면서 아들 둘을 낳았고, 남편이 죽자 그이 배다른 아들의 부인이 되어서 5남매를 둘 정도였으니, 촌수가 너무나 복잡하다.

이 집안 딸에 대한 추가 사리로 애강(哀姜)의 이야기가 있다. 제양공은 여동생 문강과의 불륜으로 노환공을 죽이고, 조카 노장공이 즉위하자 애인이자 누이동생인 문강과의 불륜을 계속 이어가기가 껄끄럽게 되었다. 말하자면 원수지간인데 서로 얼굴 보기도 그렇고, 후환도 두렵다. 그래서 문강과 합작해서 낸 계책이 자기의 딸 애강(哀姜)을 노장공과 결혼시킨다. 외사촌간이면서 원수의 딸이다. 힘의 논리에 따라 결혼을 하는데, 애강의 동생 숙강(淑姜)까지 잉첩으로 따라와서 일타쌍피가 된다. 그런데 이상하게 노장공과 애강 사이에는 후손이 생기지 않는다. 숙강은 아들 개(開)와 신(信)을 낳았다. 그런데 노장공은 이 두 여자보다 장공의 진정한 사랑은 대부 당씨의 딸인 맹녀였다. 당씨 집을 방문하였다가 그 집 딸인 맹녀를 발견하고 매우 좋아하게 되어 부인을 삼겠다고 약속하고 아들 반(斑)을 낳았다. 장공은 반(斑)을 후계로 삼고 싶어 하고, 아들이 없는 애강은 동생 숙강의 아들 개를 후계로 삼으려고 했다. 모사를 꾸밀 힘이 부족한 애강은 남편 장공의 형인 경보를 꼬여서 내연 관계를 맺는다. 그런데 경보 또한 보위를 차지할 욕심을 갖고 있었다. 장공에게는 이복형인 경보·숙아와 동생인 계우가 있었다. 장공의 사후에 형제와 조카들 사이의 권력 다툼 끝에 경보의 능력으로 숙강의 아들 개(開)가 왕위에 오르니, 애강과 경보는 제 세상을 만나듯이 한 이불을 덮으면서 국정을 농단하고, 온갖 분탕질을 했다. 간이 커지자, 애강은 조카보다 애인이 왕이 되는 것이 더 좋아서 조카 개를 살해했다. 그러나 다시 반란이 일어나 경보도 도망가고, 개의 동생 신이 옹립되었다. 애강의 친정인 제나라는 아버지인 양공도 살해되고, 삼촌이자 역사적인 최고의 통치자인 제환공의 시대였다. 제환공은 자기 집안의 문란한 여인들에 환멸을 느껴 애강을 제거했다. 이때 노나라가 정적을 제거할 때 항복을 하면 자결하도록 하고 후손들이 조상을 모시는 것 허락하게 하여 장공의 세 형제인 경보·숙아·계우의 후손들이 각각 맹손씨(孟孫氏)·숙손씨(叔孫氏)·계손씨(季孫氏)로 가문을 형성하여 공자(孔子)의 시대 이후까지 이어지게 되었다.

정말 추가 사리를 하나 더 하면, 강태공의 직업은 무엇일까? 대부분 낚시꾼으로 알려져 있다. 그럼 원래의 직업은 무엇이었을까? 웨이수이(渭水:위수)에서 10년간 3천6백 개의 낚싯대를 꺾으며 때를 기다리던 강태공의 생업이 설마 전문 낚시꾼은 아닐 테고. 강태공의 고향 역시 산둥반도의 동쪽 바닷가다. 그는 주나라 문왕(文王)을 만나기 전 약 30여 년간을 고향 근처의 조가(朝歌)라는 곳에서 소를 잡아 팔고, 맹진(孟津)이라는 곳에서 식당을 경영하였던 정육점 주인 겸 식당주인이었다. 주문왕과 무왕을 도와 상(商 또는 은殷)나라를 멸한 1등 공신이 된 후 강태공은 고향 제나라의 초대 제후로 봉해졌다. 30여 년간 장구한 세월을 상업에 종사하였던 그가 제나라를 다스리며 상업 발전을 중시하는 정책을 편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제나라 전역은 중상주의 문화의 특징이 마치 바닷가 갯내음처럼 물씬 풍겨났다. 그 후 제나라를 춘추오패의 반열에 올린 제환공도 역시 장사꾼 출신의 관중(管仲)을 재상으로 기용하여 부국강병을 이루었다. 학자나 정치꾼들보다 장사꾼들의 국가 경영이 한 수 위일 수 있다. 현실에서도 미국의 트럼프도 장사꾼이고, 전에 뉴욕 시장이었던 블룸버그도 장사꾼이었다. 이명박도 장사꾼이었고, 장사꾼은 아니었지만 김대중과 노무현도 상업고교 출신이다. 중상주의가 자원이 없는 나라의 국부에 중요한다. 수출하지 않고 살 수 없는 나라가 대한민국이다.

반면 도덕군자의 표상, 주공(周公)의 아들이 초대 제후로 부임했던 노나라는 경제발전을 정치의 전략적 위치에 놓지 않고 농업만을 중시하는 등 중농억상 정책을 폈다. 그러다 보니 유교사상만 강조했지 강대한 제후국으로 발전하지 못했다. <사기(史記)>의 '화식열전'에는 제나라 지역의 풍토는 염분이 많은 불모지이며, 백성들이 많지 않으므로 강태공은 여성인력을 육성하고 기술을 발전시키는 동시에 어업과 수산업을 육성시켰다는 내용이 실려 있다. 이러한 방침은 대를 이어 철저히 관철되었다. 제나라의 천연 제염업은 열국 중 최고 수준이었고, 소금은 멀리 외국에까지 팔려나갔다. 자연히 상업만 전문적으로 하는 시장이 생겨나게 되었고, 전문상인과 수공업자도 등장하였다. 제나라의 수도 임치(臨淄)에는 동서남북 사방에 시문(市門)을 설립하고, 여기에 공무원인 시리(市吏)를 두어 관리하게 하였다. 후세 시장과 시장을 둘러싼 번화가를 의미하는 시(市)도 이렇게 생겨난 것이다. 도시(都市)라는 단어도 시(市) 앞에다가 지방수령의 청사(廳舍)와 그것을 에워싼 관청가를 뜻하는 도(都)를 붙여 만들어 진 것이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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