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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9) 중국 최초의 여장군 - 부호(婦好)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50919)

by 금삿갓

인구 많기로 제일인 중국에서 유명한 여인이 결코 적지 않지만, 아주 고대에 여성으로서 특별한 활동을 한 여성은 그녀가 최고일 것이다. 수많은 역사서의 그 어디에도 한 마디조차 거론되지 않다가 3,000년의 긴 잠을 잔 후, 땅을 뚫고 나와서 역사적 보물로 화려하게 등극한 것이다. 그녀는 바로 기원전 12세기 상(商) 나라 중기의 위대한 왕 무정(武丁)의 왕후인 부호(婦好)이다. 그녀는 중국 역사상 최초의 여성 군사 통수권자이다. 그녀는 평생 동안 전장을 넘나들며 수많은 전쟁을 치렀고, 국토를 넓혀 상(商) 나라의 눈부신 번영을 이루는데 일조했다. 오늘날 신강(新疆)의 일부 지역은 한 때 강(羌)족이 점유했는데, 부호가 죽음을 불사하고 싸워 생명을 대가로 찾아왔다. 부호는 중국 최초의 여성 영웅임에 손색이 없다. 이러한 최초의 여장군 부호(婦好)의 비하인드 스토리를 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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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당시 상나라의 형세이다. 무정(武丁은 상 왕조의 23번째 왕이자 20번째 왕 반경(盤庚)의 조카이다. 반경이 즉위할 때 이미 상나라가 내란과 외환을 동시에 일어날 조짐을 보이자, 반경은 곤경에서 벗어나기 위해 상나라의 도읍을 북몽(北蒙, 지금의 하남 안양)으로 옮겼다. 반경이 도읍을 옮기는 쾌거를 이룬 몇 년 후, 상 왕조의 중흥의 왕인 무정이 왕위를 받았다. 무정의 공적은 거의 3천 년 후의 러시아 표트르 대제(大帝)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다. 무정의 아버지 소을(小乙)은 반경의 넷째 동생으로, 자신이 왕위를 계승할 수 있을 것이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못했다. 그 당시 비록 상탕왕(商湯王) 시기의 태평성대는 아니었지만, 여전히 도덕을 숭상하는 사회였다. 전통 고풍의 영향을 받아 사회 전체가 도덕을 중시하게 되었고, 귀족 자제들의 주류는 도덕적 소양과 문화 수양의 모범이 되는 것을 추구했다. 그래서 무정이 어렸을 때, 아버지 소을은 자신의 아들 무정을 민간에 보내 생활하게 했다. 무정은 자신이 왕족 혈통을 가지고 있다고 자부하지 않으며, 누구에게도 자신의 신분을 털어놓지 않고 일반인처럼 다양한 노동과 지식을 배웠다. 또한 여러 가지 고통을 겪었으며, 이는 그가 미래에 중흥 왕조에 즉위할 수 있는 기초를 마련했다. 그에게는 후대 제왕의 위엄과 존비 관념이 없었고, 현명한 인재를 선발하여 덕과 재능만을 중시했다. 그런데 그런 인재가 없었다. 어느 날 꿈속에서 집 짓는 노예 출신의 부열(傅說)이라는 성인을 만났고, 그를 현실에서 찾아서 재상으로 삼았다. 이 부열은 명성이 자자하며, 맹자(孟子)는 "부열은 판축(版築) 사이에 있다."는 예를 들어 하늘이 누군가에게 큰 임무를 내릴 때, 반드시 "먼저 그 몸을 고생시키고, 그 마음을 고생시킨다."는 이치를 증명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사후에 성인으로 추앙받은 반면, 부열은 살아 있는 당대에 성인으로 불릴 만큼 존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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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볼 때, 하늘에서 대대로 문치무공(文治武功)을 이룬 위대한 제왕은 훌륭한 신하와 현자가 함께 보좌하는 것 외에도 훌륭한 배우자와 어울리는 것이 필수적이며, 천생연분이라 할 수 있다. 그 옛날 복희(伏羲)의 아내 여와(女媧), 황제(皇帝)의 아내 누조(螺祖), 후대에는 당 태종의 아내 장손황후(長孫皇后)가 있었는데, 모두 남편과 해와 달을 빛낼 수 있는 행운의 여신이었다. 무정은 상나라에서 공적이 가장 찬란한 군주였고, 그의 행운의 여신은 바로 부호였다. 그녀는 무정을 도와 중흥제왕을 이루었고, 무정이 일생 동안 가장 사랑했던 여인이었다. 무정은 공식 사료에 등장하는 '제부(諸婦)'가 60여 명에 달하며, 그중 왕후의 지위를 가진 사람은 세 명뿐이고, 부호(婦好)는 첫 번째이다. 또한 갑골 문헌에서는 이름이 자주 등장하여 아무도 필적할 수 없다. 갑골혈(甲骨穴)에서 출토된 만여 개의 갑골 중 부호라는 이름이 200번 이상 등장했다! 게다가 무정이 점술로 하늘에 기원하는 내용을 포함하고 있으며, 부호의 여러 생활 측면, 즉 전쟁, 출산, 질병, 심지어 그녀가 세상을 떠난 후의 상태까지 포함하고 있다. 부호는 무정의 마음속에서 독보적인 위치에 있다. 아름다운 외모와 나라의 기둥이 될만한 능력이 한 여자의 몸에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것이다. 그녀의 풍채는 설역의 지하에 3200여 년을 잠들다가 갑골문(甲骨文)의 발견과 부호묘의 발굴에 따라 혜성처럼 나타나 눈부신 빛을 뿌렸다. 그녀가 바로 오늘의 주인공 중국 최초의 여장군 부호이다.

우(禹) 임금이 하(夏)나라를 세워서부터 중국의 문명역사는 새로운 한 페이지를 열었다. 그리고 4백여 년이 흘러 하 나라의 걸(桀) 임금이 무도한 기회를 타서 성탕(成湯)이 상(商)나라를 세워 하 나라를 대체했다. 그로부터 또 4백여 년이 흘러 상나라도 내리막길을 걸어 하나라처럼 곧 멸망의 위기에 빠지게 되었는데, 다행히 무정(武丁)이 상나라의 보위에 올랐다. 무정 왕은 현숙하고 총명하고 아름다운 왕후 부호에 의지해 나라를 다스려 상나라를 다시 눈부신 흥성의 길에 올려 세웠다. 그로써 평범한 중국의 한 여성인 부호는 중국 최초의 여장군, 여성 영웅이 되어 사서에 길이 남게 되었다. 부호(婦好)는 성(姓)이 부(婦)가 아니라, 아버지의 성은 시(兕)였다. 그녀는 왕 무정(武丁)과 결혼하여 왕후가 된 후, 무정(武丁)은 그녀에게 상당히 두둑한 봉토(封土)와 사민(士民)을 주었다. 그녀의 봉지에서 호(好)라는 씨명(氏名)을 얻었으며, 존경의 의미로 '부호(婦好)' 또는 '후부호(後婦好)'라고 존칭 되었다. 부호의 사망 후에 묘호(廟號)는 '신(辛)'이며, 상 왕조의 후손들은 그녀를 '모신(母辛)', '비신(妣辛)', '후모신(後母辛)'이라고 존칭 했다. 부호(婦好)는 무정(武丁)의 첫 번째 왕후이다. 그녀는 무정에게 시집가기 전의 신분은 아마 어느 부족의 우두머리나 공주로 비범한 출신과 식견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부호는 매우 총명하고, 또한 비상한 용기와 지혜를 가지고 있었다. 부호는 팔 힘이 뛰어났다. 그녀가 사용한 병기 청동월(靑銅鉞 ; 일종의 큰 도끼)은 무게가 9Kg에 달하며, 그녀의 무예가 뛰어나고 용맹하며 싸움을 잘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무정 시대의 개척과 영토 확장의 혁혁한 공에는 부호의 공로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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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200여 년 전의 어느 달밤, 밝은 달이 산마루에 걸려 있는 모습은 5천 년 전의 달밤과 다를 바 없었다. 단지, 화하(華夏) 민족의 가옥이 과거의 반지하식 초가집으로부터 흙으로 외벽을 바르고, 두 겹의 지붕을 한 상(商)나라 식 건물로 바뀌었을 뿐이었다. 이런 건물의 왕궁에서 상나라의 임금 무정과 왕후 부호가 국가대사를 논의하고 있었다. 무정 왕이 걱정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금(禽) 장군과 우(羽) 장군이 모두 북방에서 토방(土方) 국과 대치하고 있어서 남는 전력이 없는데 강인(羌人)들이 또 서쪽 변경을 넘어오고 있소이다. 언젠가는 반드시 강족을 멸해야 할 것이오.” 부호가 그 말을 받았다. “다른 일은 제쳐두고 먼저 급한 불부터 끕시다. 토방국이 감히 북방의 변경을 넘어와서 물건을 약탈하니, 그들을 그냥 놔두면 다른 나라들이 그들을 본받을 것입니다. 반드시 본때를 보여야 합니다. 그러기 때문에 금장군과 우장군의 병력을 빼올 수 없으니 강인을 혼내는 것은 다른 방법을 생각해 봐야겠어요.” “모든 전력이 북방에 집중되어 내 손에 병사 한 명이 없는데, 무슨 수로 강인과 대적한단 말이오?” “제가 친정에서 데리고 온 사병들이 있는데, 농사철에는 농사를 짓다가 농한기에는 구리를 주조하고, 전시에는 싸움에 능하도록 훈련시켰습니다. 제가 그들을 데리고 강인들의 기염을 꺾어 놓겠습니다.” 말을 마친 부호는 갑자기 무정 왕의 손을 덥석 잡으며 말했다. “우리 팔씨름 한 번 합시다. 내가 이길 수 있는지 보여드릴게요!” 무정은 왕후의 손에서 일반 인을 압도하는 힘을 느꼈다. 무정이 놀란 얼굴로 말했다. “왕후는 언제 무예를 연마했소?” “저는 어릴 때부터 부친에게서 무예를 익히고, 힘을 키워 무거운 칼도 마음대로로 휘두릅니다.” 무정 왕이 머리를 갸우뚱하자 부호가 말을 이었다. “제 사병들은 제 말만 들으니 반드시 제가 가야 합니다.” “내일 아침 점을 쳐봐서 신령에게 물어보고 신령이 동의하면 그렇게 합시다.”

이튿날 아침, 점을 보니 크게 길한 점괘가 나왔다. 밝은 햇빛이 비추는 가운데 황금빛으로 번쩍이는 갑옷을 입은 부호는 3천 명의 병사들을 거느리고 출정했다. 당시의 하서주랑(河西走廊)은 수초가 살찐 목장이었다. 강인들이 상나라에 침입해 살인과 약탈을 일삼은 주된 목적이 바로 이 땅을 차지하기 위해서였다. 부호의 군대가 도착하자 강인들은 도주하기에 바빴고 부호는 승승장구로 그 뒤를 쫓아 그들을 멸하고 빼앗긴 땅을 되찾았다. 개선하고 돌아온 부호는 일약 이름을 날렸고 무정 왕은 그녀를 군대의 통수로 임명하고 그녀에게 군권을 맡겼다. 부호가 서쪽의 침입자를 성공적으로 물리쳤으나, 북쪽 토방국과의 전쟁은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다. 무정 왕이 근심 어린 목소리로 재상인 부열(傅說)에게 물었다. “이어지는 북쪽의 전쟁으로 나라의 국고가 거덜 나게 되었으니 어떻게 하면 좋단 말인가?” 부열이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우리 상나라는 국토가 넓고 국력도 강해서 한 번의 전쟁으로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전방에서 필요한 군수품은 제가 충분하게 보장할 터이니 문제가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의 재정이 어려우면 토방국은 더욱 그렇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그들의 소굴을 겨냥하면 군대의 사기가 흔들려 금방 전쟁에서 물러나지 않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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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열의 그 말에 무정 왕은 왕후의 3천 명 군사를 머리에 떠올리고, 당장 후궁으로 부호를 찾아갔다. 부호는 자신을 바라보며 웃기만 하고 말을 하려다가도 멈추는 무정 왕을 보고 참지 못하고 물었다. “천하의 대왕께서 어이 입을 떼기 어려운 일이 있으십니까? 전쟁에 관한 일이죠?” 무정 왕이 여전히 미소를 머금고 입을 열었다. “중요한 국가대사는 결국 제사(祭祀)와 전쟁 두 가지가 아니겠소. 지금 모든 전력이 북쪽에 집중되어 있으니 물론 전쟁에 관한 일이오.” “알겠어요. 제 휘하의 3천 군사를 쓰시겠다는 말씀이죠? 안 돼요. 저의 군사는 저만 지휘할 수 있습니다. 저를 어디로 보내려고 하는지 말씀해 보시죠.” 무정 왕이 머리를 흔들었다. “음산(陰山)에 있는 토방국의 소굴은 너무 멀어서 왕후를 가게 할 수 없소. 반드시 내가 가야 하오.” "멀기는 하지만 저의 말은 천리마이니 어려운 일이 아닙니다. 좋은 말을 구해주시면 제가 3백 명의 기마병을 인솔해서 움직이겠습니다. 용병은 신속하게 행동해야 승리할 수 있어요.” “일리 있는 말이오. 토방국은 유목민족이라 조정(朝廷)이 텐트에 있고 경비가 허술할 터이니, 왕후가 3백의 군사를 거느리고 기습을 해서 토방국왕의 가족을 잡아오면 전쟁은 끝날 것이오.”

사흘 후 부호는 3백 명의 정예군을 거느리고 토방국의 소굴을 향해 출발했다. 부호가 탄 백마는 하얀 용처럼 번개 같은 속도로 북쪽을 향해 달리고, 3백의 기마병이 그 뒤를 따라 곧 토방국의 조정에 이르렀다. 그들이 음산(陰山)에 이르러 보니, 짐승의 가죽으로 지은 둥근 텐트들이 커다란 버섯처럼 산자락에 산재해 있었다. 때는 밤이라 조각달이 어스름하게 비추는 가운데 음산은 고요하기 짝이 없었고, 토방국의 후궁은 모두 깊이 잠들었으며 호위병사도 문밖에서 끄덕끄덕 졸고 있었다. 부호와 그녀의 군사는 신속하게 호위병사를 제압하고 텐트에 쳐들어가 토방국의 왕후와 왕자를 생포했다. 생포한 왕후와 왕자를 데리고 변방에 돌아온 부호는 진영의 앞에 그들을 내세웠다. 자신의 왕후와 왕자가 생포된 것을 본 토방국 국왕은 대경실색해서 급히 말에서 내려 항복했다. “나의 가족을 돌려보내주면 나는 즉시 돌아가 다시는 귀국을 침범하지 않겠다.” 3백의 군사로 천군만마(千軍萬馬)를 이기고 북방 변경의 항구적인 평안을 찾은 것이다. 부호는 기쁜 마음으로 모든 병사들을 거느리고 개선가를 높이 부르며, 상나라의 도읍인 북몽(北蒙), 오늘날의 하남(河南) 안양(安陽)으로 돌아왔다. 상나라는 백색을 숭상해 눈처럼 하얀 군기(軍旗)가 바람에 펄럭이며 승리를 환호했다. 승리의 소식을 들은 무정 왕은 기쁜 심정으로 개선하는 군사를 맞이하고자 성을 나섰다. 부호의 아름다운 모습과 날렵한 몸매가 눈앞에서 삼삼해 무정 왕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백 리나 마중을 나갔다. 그때 저 멀리서 바람에 나부끼는 군기가 보이고 우렁찬 군가가 들려왔다. 격동의 마음을 억누르지 못한 무정 왕이 말을 달려 마주 갔다. 부호도 무정 왕이 말을 달려오는 것을 보고 역시 말을 달렸다. 오랜만에 만난 무정 왕과 부호의 말도 반가운 듯 나란히 벌판을 달렸고, 말 잔등의 두 사람도 환한 웃음을 띠고 서로 마주 보며 만남의 행복과 승리의 즐거움을 누렸다. 걸음을 멈추고 멀리서 무정 왕과 왕후 부호의 행복한 모습을 바라보던 상 나라 군사들은 흠모와 존경으로 가득 차서 노래로 화답했다.

“위풍이 당당한 우리의 상나라 무정왕이여! 용병이 신속한 우리의 상나라 왕후여! 토방의 후방을 기습해 승리를 거두었다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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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호는 수많은 전쟁을 치르면서 많은 곳들을 상나라의 국토에 편입시켜, 상나라의 국토를 몇 배나 늘렸다. 나라의 국토를 넓힌 첫 번째 공신인 부호는 혁혁한 무공으로 내외에 이름이 자자했으며, 무정 왕도 그녀의 공에 근거해 그녀에게 많은 땅을 봉지(封地)로 하사하고, 수많은 재물도 내려 부호는 상나라의 한 제후(諸侯)가 되었다. 부호는 늘 자신의 영지에 머물렀다. 그녀의 영지에서 그녀가 해야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토지의 산출을 점검하고, 노예들의 노동을 배치해야 했으며, 3천이 넘는 군사도 훈련해야 했다. 부호는 또 자신의 소득에 따라 남편인 무정 왕에게 납공(納貢)하면서 국왕과 제후 간의 예의를 지켰다. 자신의 영지를 잘 관리하면서 부호의 자산은 눈덩이처럼 커졌다. 그녀의 영지에는 또 동광(銅鑛)이 있어서 부호는 많은 청동기를 주조(鑄造)했다. 그중 가장 유명한 청동기는 무게가 5백 킬로그램이 넘는 네모난 정(鼎 ; 발이 3개인 솥)이다. 솥은 고대에 국가의 중요한 도구로 천자(天子)를 상징하는 것이라 아무나 마음대로 만들 수 없었다. 역사적으로 여자가 솥을 주조한 것은 부호(妇好)가 첫 번째 사람이었고, 그 후에 볼 수 있는 것은 부호 딸이 주조하는 솥뿐이었다. 이는 부호(妇好)의 유풍을 계승한 것일 수 있다. 이로부터 중국 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왕후 겸 제후인 부호의 재력과 능력을 알 수 있다. 그러던 어느 날, 부호가 3천 명의 군사를 훈련시키고 있는데 즉시 왕궁으로 돌아오라는 무정 왕의 어명이 전해졌다. 부호는 즉시 훈련을 중단하고 말에 올라 쉬지 않고 왕궁에 도착했다. 부호가 왕궁에 도착하는 것과 거의 동시에 또 다른 왕비 부형(婦刑)도 도착했다. 부호의 영지는 도읍에서 멀지 않았으나 부형의 영지는 멀리 떨어진 형대(刑臺)였다. 그 멀리에 있던 부형까지 왔으니 아마도 큰일이 있는 모양이라고 부호는 속으로 생각했다.

무정 왕은 왕후와 왕비가 다 도착한 것을 보고 서두도 없이 직접 본론으로 들어갔다. “나는 우리나라의 군대 1만 명을 우사(右師)와 중사(中師), 좌사(左師) 세 사단으로 분류해서 상비군으로 개편했소. 최근에 강인들이 또다시 우리 변경을 넘보니 이번에는 내가 직접 정벌해서 강인의 땅을 우리 국토에 편입시켜 영원한 평안을 찾아야겠소. 출정에 앞서 제사를 지내야 하니 부호 그대가 제사를 맡아줘야겠소.” 상나라 사람들은 국가 대사의 두 가지를 전쟁과 제사로 볼 정도로 제사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들은 사람의 생사와 전쟁의 승패, 곡식의 풍작 여부 등 거의 모두를 신령에게 제사를 지내면서 점괘로 알아보았다. 그러니 강인과의 싸움을 앞두고 무정 왕은 당연하게 제사를 지내려 했고, 부호가 바로 제사를 주재하는 제사장이 되었다. 부호가 말했다. “이번 제사는 반드시 성대하게 치르겠습니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강인은 워낙 사나운 족속들이라 그들과의 싸움은 어려운 전쟁이 될 것입니다. 반드시 제가 나가겠습니다. 제가 강인과 싸워 본 적이 있기 때문에 어떻게 그들을 대처해야 하는지를 알고 있습니다.” 무정 왕이 웃으며 되물었다. “나라를 다스리는 공은 재상 부열에게 빼앗겼는데, 나라를 지키는 공을 당신이 빼앗겠다는 것이오?” “이번에는 당신도 나와 함께 가야 합니다.” 그 말에 왕비 부형도 나섰다. “나도 가겠어요. 우리 세 사람이 협동하면 강인을 전멸시킬 수 있을 거예요.” 무정 왕이 부형에게 말했다. “왕비를 오라고 한 것은 정벌 때문이 아니라 대신 농사와 내정을 관리하라고 함이오. 왕후가 정벌에 동참할지 여부는 제사를 통해서 결정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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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왕의 말에 부호와 부형이 모두 수긍했다. 그리고 이튿날 성대한 제사의식을 치르고 무정 왕과 부호의 정벌을 결정했다. 출정에 앞서 부호는 정벌계획을 세우고 무정 왕과 협력해 매복전을 치르기로 결정했다. 이는 갑골문에 기록된 대 규모의 전쟁이었다. 부호는 대군을 거느리고 몰래 변경에 다가가서 산골짜기에 매복했다. 보고를 받은 무정 왕은 군사를 거느리고 정면에서 강인들과 싸우다가 패한 것처럼 보이며 부호가 기다리는 산골짜기로 퇴각했다. 무정 왕의 뒤를 쫓아오던 강인의 군대가 전부 산골짜기의 매복 범위에 들자, 부호는 산골짜기의 어귀를 막았다. 퇴각로가 차단되고 도주하는 척하던 무정 왕이 돌아서서 반격하며 사면으로부터 공격이 가해오자 강인의 군대는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항복과 죽음 두 갈래 길만 보이자 강인군(羌人軍)의 사기가 떨어져 강인의 두령은 하는 수 없이 무기를 내려놓고 항복했고, 그의 군사들도 전부 두 손을 들었다. 이 멋진 전투로 상나라는 많은 강인을 포로로 생포했고 강인의 지역을 상 나라의 국토에 편입시켰다.

푸른 소나무에 바람이 소슬한데 백마가 슬피 울었다. 상나라 왕궁에는 수심이 가득 어렸다. 왕후 부호가 온몸이 기진맥진한 부호가 침대에 누워 있었다. 이때 부호의 나이 서른셋으로 출산을 하는데 난산(難産)이라서 생명이 위독했다. 사랑하는 아내의 혈색을 잃은 꽃 같은 얼굴과 핏기 하나 없는 하얀 입술, 다시는 뜨지 않을 듯 굳게 감긴 눈을 지켜보는 무정 왕이 눈물을 줄줄 흘려 부호의 얼굴에 방울방울 떨어졌다. 부호의 죽음이 전쟁 중 부상이 원인인지 출산의 난산이 원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갑골문에는 비를 흘린 부상의 기록도 있고, 출산에 대한 점괘에서 불길한 기록도 있는데, 여자애를 출산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부호는 여전히 의식을 찾지 못했고 무정 왕은 마음속으로 아내를 부르고 또 불렀다. “왕후여, 가지 마시오! 나도 그대를 필요로 하고 상나라도 그대 없인 안 됩니다!” 하지만 무정 왕이 아무리 불러도, 무당이 아무리 굿을 해도 부호는 자신이 지키고 자신이 넓혀온 상나라를 더는 보지 못하고 영원히 두 눈을 감았다. 그러자 평소 부호를 보살피고 지켜온 16명의 호위 병사 전부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또 부호가 가장 아끼던 백마도 슬프게 울며 더는 풀을 먹지 않고, 그녀가 가장 귀여워하던 사냥개 두 마리도 애처롭게 울기만 하고 먹이를 거부하더니 모두 부호를 따라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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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정 왕은 부호를 왕릉에 묻지 않고, 왕궁의 정원을 부호의 영원한 안식처로 정했으며, 부호에게 신(辛)이라는 묘호(廟號)를 하사했다. 그에 후세 사람들은 부호를 모신(母辛)이라 부르게 되었다. 부호는 자신이 생전에 사용했던 모든 생필품과 보물, 무기와 함께 묻혔다. 또한 스스로 목숨을 끊은 16명의 호위병사와 백마, 사냥개도 부호의 지하궁전 옆에 묻혀 영원히 부호를 지키게 되었다. 무정 왕은 정원에 거대한 규모의 능묘를 조성하고 시시(時時)로 제사를 지내고, 때때로 와서 그녀를 기렸다. 훗날 발굴 시 부호묘에서 백 여 점의 옥기가 발견되었는데, 모두가 귀중한 화전옥(和田玉)이다. 부호묘 발굴에 의하면 부호는 서구인으로부터 화전을 지키다가 목숨을 잃었다. 부호의 장례식을 치른 무정 왕의 가슴속에는 복수의 불길이 타올랐다. 부호가 귀방족(鬼方族)과의 전투에서 부상을 입고 삶을 마감한 것을 생각하면서 무정 왕은 복수의 칼을 갈았다. 귀방인은 푸른 눈에 붉은 수염을 가지고 있어서 귀방이라 불렸다. 과거에는 해마다 보석과 옥을 공물로 진상하다가 그 해에 갑자기 공물을 중단하고 상나라 사람들의 진입을 금지시켰다. 후에 서구의 야만인들이 귀방족을 패배시키고 화전옥이 나는 곤륜산(崑崙山) 남쪽 산자락을 강점했다.

무정 왕이 몸소 출정에 나섰고 부호가 군사를 이끌고 앞장서서 싸웠다. 하지만 10Kg에 근접하는 부호의 도끼도 야만인의 완력을 당하지 못해 부호는 어깨에 부상을 입었다. 무정은 하는 수 없이 아내를 호위해 철수했던 것이다. 아내의 장례를 치른 무정 왕은 더 없는 슬픔과 함께 타오르는 분노도 느꼈다. “왕후가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쳤는데 복수하지 않는다면 어이 왕이라 할 수 있고, 어이 세상 사람들의 얼굴을 본단 말인가?” 무정 왕은 복수의 일념으로 야만인과 결전에 나설 군사를 훈련시켰다. 그리고 출정에 앞서 무정 왕은 부호묘를 찾아 상나라 군대의 승리와 복수의 성공을 기원했다. 부호의 영령이 멀리 가지 않았고 무정 왕의 명성 또한 높았다. 3개월의 어려운 싸움 끝에 무정 왕은 끝내 야만인을 귀방족의 땅에서 몰아내고 상나라의 세력 범위를 곤륜산 자락에까지 확대시켰다. 그로부터 화전의 옥은 온 세상에 퍼졌고, 옥문관(玉門關)도 오늘날까지 이어져 온다. 3200여 년 전에 부호는 선후(先後)로 20여 개의 지역을 정복해 상나라의 부흥에 기여했으며, 오늘날 중국이 넓은 국토를 보유하게 된 것도 부호가 한몫했다고 할 수 있다. 여성도 남성 못지않음을 보여주는 역사가 부호에게서부터 시작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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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론적으로, 부호(妇好)가 어떤 원인으로 세상을 떠났든, 그녀의 불행한 죽음은 무정(武丁)을 매우 안타깝게 만들었다. 그래서 그는 자손들을 이끌고 부호들을 위해 여러 차례 대규모 제사를 지냈고, 부호를 위해 여러 차례 영혼결혼을 거행하여 그녀의 영혼을 세 명의 선대 상왕에게 차례로 헌납했다. 당시 최고의 영예가 죽은 사람의 영혼을 위대한 사람과 결혼을 맺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무정의 6대조 조을(祖乙), 11대조 대갑(大甲), 13대조이자 초대왕인 성탕(成湯)을 마지막으로 부호의 배필로 만든 후, 무정은 마침내 마음을 놓았단다. 최대 세 명의 위대한 선조들이 함께 돌보니, 부호가 음세(陰世)에서 안전과 보살핌을 받을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했다. 부호는 무정(武丁)에게 효기(孝己)라는 아들을 남겼다. 부호에게서 태어난 딸 중 적어도 두 명은 상나라 조정에서 관리로 일한 적이 있으며, 부호처럼 자신의 봉지를 소유하고 있었다. 그들은 자타(子妥)와 자미(子媚), 즉 자타정(子妥鼎)과 자미정(子媚鼎의 주인이었다. 생각건대 이 두 딸도 무예가 뛰어난 사람이어서 그 시기에 한 지역을 관할할 수 있었다. 역사 기록에 따르면, 부호가 세상을 떠난 지 여러 해가 지난 후에도 무정은 여전히 그녀를 잊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국가 제도에 따라 무정은 부호 사후에 새로운 왕후를 책립 했다. 그러나 이 왕후는 부호의 자리를 대신할 수 없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이 왕후는 우울한 마음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세 번째 왕후를 들였다. 근대에 와서 허난성 안양 소둔촌의 은허(殷墟)는 차례로 발굴되었지만, 안양에 정착했던 11명의 상왕 대묘는 빈 능만 남아 있으며, 3천 년의 역사 속에서 이미 텅텅 비어 있었다. 아무도 처음처럼 잘 보존된 것이 부호묘일 줄은 몰랐다. 1976년, 부호묘가 발견되었고, 무덤에서는 4개의 청동 거울과 4개의 청동 월, 130개의 청동 병기가 출토되었다. 한 쌍의 사모신(司母辛) 대방정(大方鼎)을 비롯한 200여 점의 청동 예기(禮器) 외에도 15종 156점의 주기(酒器), 신장(新疆) 등지에서 온 옥기 장식 755점, 대만(臺灣) 하이난(海南) 또는 더 먼 곳에서 온 조개 7,000여 점, 다양한 보석 제품 47점이 있었다. 그리고 각종 토기 석기 소라 등등. 그 외에도 부호(婦好)를 위해 순장된 16명의 순인(殉人)과 6마리의 순견(殉犬)이 있었다. 이렇게 풍부한 부장품은 무정이 아내에 대한 경애심을 나타낼 뿐만 아니라, 부호 생전의 다채로운 삶을 보여준다. 그녀는 장군일 뿐만 아니라 싸움을 잘하고 술을 잘 마실 수 있으며, 또한 존귀한 귀부인으로서 아름다움을 사랑하고 수식(修飾)에 능숙하며, 독립적인 경제 능력을 가진 영주이자 방대한 신하를 보유하고 있었을 것이다. 부호(婦好), 중국 역사상 이렇게 전무후무한 위대한 왕후가 갑골문이나 주조된 솥이 출토되지 않았으며, 또한 오늘날 사람이 갑골 문자를 해독할 수 없다면, 누가 그녀를 알 수 있겠는가? 무정 왕 시기의 상나라가 그렇게 인간적으로 활력이 넘치고, 문명적이며 강력한 국가였는지 누가 알았겠는가?(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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