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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 왕비가 된 중국 4대 추녀 - 무염 종리춘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251002)

by 금삿갓

중국의 역사상 4대 미녀 즉 서시(西施)·왕소군(王昭君)·초선(貂蟬)·양귀비(楊貴妃)에 대한 이야기는 넘쳐난다. 반면에 4대 추녀(醜女)의 이야기도 있다. 4대 미녀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대부분 경국지색(傾國之色)으로 나라나 임금을 무너지게 하는 역할이다. 그 대척점에 있는 4대 추녀는 얼굴이 못 생긴 것에 초점이 있지만 그 내면은 도리어 남편을 잘 내조하여 나라를 부강시키는 역할이다. 평가자에 따라서 대상이 달라지기도 하지만 대체로 4대 추녀는 모모(嫫母)·종리춘(鐘離春)·맹광(孟光)·완녀(阮女)를 꼽는다. 오늘은 우선 종리춘(鐘離春)에 대해서 이야기하자. 중국의 춘추전국(春秋戰國) 시대에 수많은 제후국들이 명멸했지만 그중에서도 나름 왕성한 활동으로 두각을 나타낸 나라나 그 임금을 춘추오패(春秋五霸), 전국칠웅(戰國七雄)으로 부른다. 이 두 곳에 모두 속하는 나라가 제(齊)와 초(楚)인데, 주인공이 바로 제(齊)나라 사람이다. 제(齊)나라는, 천자국 주(周)나라의 재상으로 낚시꾼의 대명사 강태공(姜太公: 본명 姜尙)이 제(齊: 산동 반도) 지역의 제후(諸侯)에 봉해져 기원전 1044년에 시작된 나라이다. 황하(黃河) 하류의 비옥한 땅을 토대로 한 풍부한 물산과 태산(泰山)이라는 천혜의 방어벽까지 갖춘 제나라는 건국 이래 꾸준히 강국의 위상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후계자 문제로 흔들리기 시작한 제(齊)나라는 기원전 386년 32대 군주 강공(康公)을 마지막으로 끝이 난다. 이후 군주의 자리는 진(陳)나라에서 제(齊)나라로 망명하여 세력을 구축한 전(田)씨에게 넘어가는데, 군주의 성씨(姓氏)가 강성(姜姓) 여씨(呂氏)에서 규성(嬀姓) 전씨(田氏)로 바뀌어 역성혁명(易姓革命)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도 국호와 수도는 그대로 유지되면서, 이전을 강제(姜齊: 기원전 1044∼기원전 386), 이후를 전제(田齊: 기원전 386∼ 기원전 221)로 부른다. 그리고 이 전제(田齊)는 전국칠웅 중에서 가장 마지막까지 버텼지만 결국 기원전 221년, 진(秦)나라의 공격에 무너진다. 전제(田齊)는 비록 진(秦)나라에 멸망하기는 했지만, 부자 망해도 3년이라고, 4대 군주 전인제(田因齊) 때는 스스로 위왕(威王)으로 칭할 정도로 국력이 강성하여 진(秦)나라와 쌍벽을 이루었다. 위왕의 아들 선왕(宣王), 선왕의 아들 민왕(湣王) 때의 시기가 강국의 시기였고, 군사면에서 손빈(孫臏), 학문면에서는 순우곤(淳于髡), 순자(荀子), 정치면에선 맹상군[孟嘗君, 전문(田文)]이 활약하던 때이다. 그리고 그다지 훌륭한 자질을 갖춘 왕은 아니었던 선왕(宣王)이 전제(田齊)의 전성기를 만들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할 때 반드시 등장하는 사람이 바로 선왕(宣王)의 왕후인 추녀(醜女) 종리춘(鐘離春)이다.

기원전 319년 왕위에 오른 선왕(宣王)은 초기에는 제자백가(諸子百家)들을 중용하는 등 부친의 뜻을 이어받아 선정(善政)을 펼쳐 나갔다. 또 군사적으로도 기원전 314년에는 연(燕)나라를 쳐서 그 수도인 계(蓟: 오늘날 북경)를 50여 일만에 함락시켜 강국의 위세를 떨쳤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자만심으로 나태와 안일에 빠진 선왕(宣王)은 정사는 돌보지 않고 술과 가무(歌舞), 여색에 빠지기 시작한다. 오로지 가무를 즐기기 위한 목적으로 설궁(雪宮)이라는 화려한 궁을 지어 매일 밤 자신만을 위한 사냥터로 사방 40리의 원유(苑囿)를 만들어 사냥을 즐겼다. 당연히 듣기 좋은 말만 하는 간신들을 가까이하고, 바른말을 하는 신하들은 내친다. 그러니 정치는 부패하고 나라는 점점 엉망이 되었으며, 백성들의 삶도 힘들어진다. 이런 상황에서 종리춘(鐘離春)이 등장하는데, 종리춘은 제(齊)나라 땅인 산동성 무염현(無鹽縣: 오늘날 태안시泰安市 동평현東平縣) 출신이다. 종리춘(鐘離春)은 모든 사람들이 생각하는 못 생긴 얼굴이지만 시서(詩書)를 읽고 덕행과 재주를 갖추었다. 품성이 어떻든 예나 지금이나 그녀는 못생긴 외모로 인하여 나이 마흔이 넘도록 결혼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녀의 외모는 한(漢)나라 사가(史家) 유향(劉向)의 <열녀전(烈女傳)> 「제종리춘(齊鐘離春)」에서 이렇게 묘사되고 있다. "절구처럼 튀어나온 이마에 움푹 들어간 눈, 남자 같은 장대한 몸매에 콧구멍이 위로 치켜진 들창코와 굵은 목에는 남자의 목젖이 있고, 큰 머리에 머리숱은 적고, 허리는 굽고 가슴은 새가슴처럼 돌출되었으며, 피부는 옻칠을 한 것처럼 검었다." 눈에 커다란 붉은 반점이 있었다는 다른 기록도 있다고 한다. 따라서 오늘날 TV를 통해 볼 수 있는 그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사극, 판타지, 로맨스극 등에서 종리춘 역의 눈에 커다란 붉은 반점이 있는 모습이 많이 소개되고 있다. 그리고 그녀를 상징하는 "무염녀(無鹽女: 소금이 없다는 것이 아니라 무염 출신의 여자)"라는 말은 추녀의 대명사처럼 쓰이게 되었다. 시집을 못 갈 정도의 미모이지만 마음속에는 항상 국가의 안위를 걱정하고 있었고, 도탄에 빠진 국민을 구하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라도 방안을 찾기에 골몰하고 있었다. 제(齊) 선왕이 마침 실정을 거듭하자, 나라를 생각하는 마음에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종리춘은 선왕(宣王)을 만나기 위해 수도 임치(臨淄)로 향했다.

그녀는 임금의 연회가 열리고 있는 설궁(雪宮)을 찾아간다. 그리고 궁문을 지키던 병사에게 자신은 나이가 마흔을 넘었지만 아직 시집을 가지 않은 제나라 처녀인데, 궁에서 왕의 시중을 들며 모시려고 왔으니,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한다. 원컨대 후궁에 들어가서 물 뿌리고 마당 쓰는 일에 쓰임을 받고자 한단다. 궁지기가 보니, 형편없는 용모에 다 떨어진 옷을 입은 여인이 이런 말도 안 되는 이야기를 하며 왕을 만나게 해달라고 떼를 쓰는 게 너무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그녀는 돌아가지 않고 계속 병사들과 실랑이를 벌였다. 궁문 밖이 시끄러워지면서 선왕(宣王)에게 이런 사실이 보고되자, 이야기를 들은 연회석의 모든 사람들이 웃음을 터뜨리며 비웃었다. 선왕(宣王)도 "천하에서 가장 얼굴이 두꺼운 여자(此天下强顔女子也) 구나!"라고 하면서, 일단 그 여인을 안으로 들이도록 한다. 종리춘의 못생긴 외모를 보고 다시 한번 놀란 선왕은 "그 정도 얼굴이면 시골 백성 중에도 데리고 살겠다는 사람이 없을 것 같다"라고 하면서 “내 궁중에는 비빈이나 시녀들은 이미 자리가 찼는데, 지금 그대의 추한 용모로는 마을에서도 용납되기 어려울 것 같다. 그러나 그대는 베옷을 입고 천승지국의 왕을 찾아와 그 짝을 구하고 있으니 그대는 특이한 재주라도 갖고 있는가?” 했다. 이에 종리춘이 대답하기를, “첩은 기이한 재주는 없지만, 특별히 은어(隱語)를 쓸 줄 압니다.” 했다. 제선왕이 말하기를, “그대는 시험 삼아 은어를 말해 보라. 과인이 헤아려보고, 만약 은어 속에 쓸만한 게 없으면 당장 네 목을 칠 것이다.” 하니, 종리춘이 이에 눈을 치켜뜨고(揚目) 이를 드러내어(衒齒) 손을 여러 번 휘젓고(舉手再四) 무릎을 두드리며(拊膝) 큰소리로 외치기를, “위태롭고 위태롭다!” 했다.

제선왕이 그 뜻을 알 수가 없어 여러 신하에게 물었으나 아무도 대답하지 못했다. 제선왕이 말하기를. “종리춘은 내 앞으로 와서 과인을 위해 분명하게 말해다오.” 하니, 종리춘이 머리를 조아리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첩을 죽이시지 않겠다고 하신다면 감히 말씀을 올리겠습니다.” 했다. 제선왕이 말하기를, “네 죄를 용서하겠다.” 하니, 종리춘이 말하기를, “첩이 눈을 치켜뜬 것은, 왕을 대신하여 변경이 위급하다는 봉화를 보았기 때문이고, 이를 드러낸 것은, 왕을 대신하여 충간을 거부하는 것을 경계한 때문이며, 손을 들어 휘저은 것은, 왕을 대신하여 참소하고 아첨하는 신하를 물리치기 위함이고, 무릎을 두드리는 것은, 왕을 대신하여 누대에서 잔치를 벌이는 것을 물리치려는 것입니다.” 했다. 선왕이 대로하여 말하기를, “과인이 어찌 네 가지 잘못이 있느냐? 시골 여인네의 망령된 말이다!” 하고, 고함쳐서 참수하라고 명했다.

종리춘이 말하기를, “대왕의 네 가지 잘못을 말씀드리게 한 다음에, 형벌을 내려주십시오. 첩이 듣기에, 진(秦)나라에서는 상앙(商鞅)을 등용하여 나라가 부강해지고, 머지않아 함곡관(函谷關)을 나와서 제나라와 승리를 다투게 되면 틀림없이 으뜸 근심거리가 될 것입니다. 대왕께서는 안으로 믿을 만한 장수가 없고, 변경의 방비가 점점 해이해지니, 이로써 제가 대왕을 위해 눈을 치켜뜨고 그것을 보게 했습니다. 첩이 듣기에 ‘군주에게 간언(諫言)을 올리는 신하가 있으면 그 나라는 망하지 않고, 아비에게 간언을 올리는 자식이 있으면 그 집은 망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대왕께서는 안으로는 여색을 탐하시고 밖으로는 국정에 힘을 쓰지 않고 있으며, 충간을 드리는 신하들을 물리쳐 용납하지 않으니, 제가 이를 드러내 웃어 보여 대왕을 위해 충간을 들이는 신하들을 용납하라고 청한 것입니다. 또한 왕환(王驩) 등은 대왕께 아첨하여 총애를 얻어 어진 사람을 가리고 그 지위를 도적질 하였고, 추연(騶衍) 등은 황당무계한 말로 헛소리만 하지 실질이 없습니다. 대왕께서 이런 자들을 믿고 임용하시니 제가 사직이 잘못될까 걱정하여 손을 들어 대왕을 위해 휘저었습니다. 왕께서는 설궁(雪宮)과 원유(園囿)를 만들고, 누각을 짓고 연못을 파는 데 백성들의 힘을 고갈시키고 나라의 재화를 허비했습니다. 그래서 제가 왕을 위해 무릎을 두드리며 물리치라고 한 것입니다. 대왕께서 4가지의 실정을 하시니 나라는 알을 포갠 듯 위험에 처하게 되었고, 목전의 안락만을 탐하고 후일의 환란을 돌아보지 않아서, 첩이 죽음을 무릅쓰고 간언을 올리니 만약 제 말을 들어주신다면 비록 죽어도 한이 없겠습니다.” 했다.

종리춘의 이야기를 들은 선왕(宣王)은 크게 감동을 받고, 탄식해 말하기를, “종리춘의 말이 없었다면 과인이 저지른 잘못을 듣지 못했을 것이다!” 했다. 그날로 주연을 파하게 하고, 수레에 종리춘을 태워서 궁전으로 돌아가 정비로 세웠다. 종리춘이 사양하며 말하기를, “대왕께서 첩의 말을 용납하지 않으면서, 어찌 첩의 몸을 쓰려하십니까?” 하니, 이에 제선왕이 어진 이를 초빙하고 선비를 겸손히 대했으며, 총신과 아첨꾼들을 멀리했다. 직하의 유세객들을 모두 해산시키고, 전영을 상국으로 삼았으며, 추나라 사람인 맹가(孟軻)를 상빈으로 삼으니 제나라는 크게 다스려졌다. 이후 선왕(宣王)은 자신의 잘못을 뉘우치고 종리춘의 충고대로 나라를 재정비하는 데 전력을 다하였는데, 공사 중이던 5층 누각(樓閣)을 철거하고, 여악(女樂: 기생들이 하던 노래와 춤)을 중지하였으며, 간신들을 배척하고 인재를 중용했다. 또 신하들의 직언(直言)을 받아들여 군마(軍馬)를 양성하고, 나라 재정을 튼튼하게 만들어 제나라의 국력이 크게 신장된다. 그 결과 전제(田齊)는 최전성기를 구가하게 되고, 진(秦)나라에 버금가는 강국(强國)이 된다. 그리고 종리춘은 선왕(宣王)의 정식 왕비가 되고, 무염의 땅을 종리춘의 집안에 봉하고, 무염군(無鹽君)이라는 칭호를 받는다. 그런데 종리춘이 왕비가 될 때에는 그녀의 나이 마흔이 넘었고, 선왕(宣王)의 나이도 또한 적어도 30대 후반 정도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때까지 왕비가 없었다는 것이 좀 이해가 되지 않는다. 기록이 미흡한 탓인지 종리춘의 선행만을 높이고자 함인지 모르지만, 사서(史書)에는 선왕(宣王)의 왕비로는 종리춘만 나타나고 있다. 아마 주색잡기를 워낙 좋아했던 선왕(宣王)이 한 여자에게 얽매이게 될까 봐 왕비를 책봉하는 것을 싫어했는지도 모른다. 종리춘이 최초의 정식 왕비가 되었다고 하는 기록도 있고, 일설에는 선왕(宣王)이 기존의 왕비를 폐하고 종리춘을 왕비로 책봉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이후 종리춘의 행보는 별로 전해지는 것이 없는데, 외모를 떠나 나라를 생각하는 그녀의 정신은 후세에도 크게 칭송을 받는다. 그녀의 이야기는 잡극(雜劇) 등을 통해 널리 알려지는데,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전설적인 이야기가 더해진다. 먼저 이름부터 “소금 염(鹽)” 대신 “아름다울 염(艶)” 자를 써서 "종무염(鐘無艶)"이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 "종무염(鐘無艶)"은 현대에 만들어진 그녀의 이야기를 소재로 한 드라마, 영화의 제목으로도 많이 쓰이고 있다. 또 종리춘이 직접 군사를 이끌고 진나라, 연나라와 싸워서 이겼다는 이야기가 더해지면서, 손빈(孫臏)·방연(龐涓) 등과 같이 귀곡자(鬼谷子)로부터 동문수학한 이야기로도 발전한다. 종리춘은 나라를 구한 건괵영웅(巾帼英雄: 여성 영웅)으로 소개되기도 한다.

"종리춘(鐘離春)"은 4대 추녀에 이름을 올린 여인이지만, 역사에 아름다운 이름을 남긴 여인이었다. "각화무염(刻畵無鹽)"이라는 성어가 있는데, 동진(東晉) 원제(元帝) 때의 명신(名臣)이었던 주의(周顗)를 두고, 주변 사람들이 악광(樂廣: 동진의 담론가)과 같이 고결한 사람이라고 칭찬을 하자, 주의는 "어찌 무염이 화장을 한다고, 갑자기 서시가 되겠는가(何乃刻畵無鹽 唐突西施也)"라고 말하며, 겸손하게 자신을 낮추었다. 여기서 각화무염(刻畫無鹽)이란 말은 4대 추녀인 무염(無鹽)이 아무리 꾸며도 4대 미녀 서시(西施)가 될 수 없다는 말로, 너무 차이가 나서 서로 비교할 수 없는 것을 비유할 때 쓰는 말이다.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화장을 떡칠한 무염(無鹽)이 마치 서시(西施)인 것처럼 나서는 일은 없어야 할 것이다. 종리춘의 덕분으로 제나라 선왕은 여러 인물을 우대하였고, 그가 제나라를 통치하던 시기에 천하의 학자와 철인들이 제나라에 모여 관학인 직하학궁(稷下學宮)에서 천인(天人)을 이야기하고, 의리를 설(說)하며, 고금을 논하고, 왕패(王霸)를 논하였다. 그래서 백가쟁명(百家爭鳴)을 황금 단계로 이끌었고, 중국 문화는 전례 없이 번영하였다. 후세 사람들이 백가쟁명을 이야기할 때 제 선왕을 빼놓지 않는 이유이다. 사관(史官)이 종리춘의 일에 대해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六宮粉黛足如花(육궁분대족여화) / 육 궁의 여인들은 모두 꽃처럼 아름다웠는데

醜女無鹽取自夸(추녀무염취자과) / 못생긴 무염이 찾아와 감히 스스로 뽐내며

指点安危言鑿鑿(지점안위언착착) / 나라가 처한 위험을 하나하나 분명히 지적하니

滿朝文武不開牙(만조문무불개아) / 조당에 가득한 문무백관들은 입도 뻥긋 못했다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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