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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8> 憶東山(억동산) / 동산을 추억함.

금삿갓의 漢詩工夫(250928)

by 금삿갓

憶東山(억동산) / 동산을 추억함.

- 李白(이백)


不向東山久

불향동산구

●●○○●

동산으로 향하지 못한 지 오래라


薔薇幾度花

장미기도화

○○●●◎

장미는 몇 번이나 꽃 피었던가


白雲還自散

백운환자산

●○○●●

흰 구름 도로 저절로 흩어지니


明月落誰家

명월낙수가

○●●○◎

밝은 달은 어느 집으로 지는가?

東山(동산)은 在江寗雰南(재강녕분남)하니라. ◯ 東山有薔薇洞(동산유장미동)하니, 多此花(다차화)라. 今固不向中已久故(금고불향중이구고)로 問其幾度花也(문기기도화야)라.

동산은 강녕부의 동남쪽에 있다. ◯ 동산에는 장미동(薔薇洞)이 있으니, 이 꽃이 많다. 이제 진실로 동산으로 향하지 않은 지가 이미 오래되었으므로, "몇 번이나 꽃이 피었던가?"라고 물은 것이다.

山中(산중)에 有雲(유운)하야. 因無人焉(인무인언)하야. 還自消散而已(환자소산이이)라. 山中(산중)에 有月(유월)하야. 今無人玩月(금무인완월)하니, 不知落到誰家去也(부지낙도수가거야)라.

산중에 구름이 있으나 사람이 없음으로 인하여 도리어 스스로 사라져 흩어질 따름이고, 산중에 달이 있으되 이제 달구경 하는 사람이 없으니, 누구의 집에 떨어지는지를 알 수가 없다.

夫空山雲月(부공산운월)이 以無人而寥寂如此(이무인이료적여차)하니, 安得不憶(안득불억)이리오.

대저 공산의 구름과 달이 사람이 없기 때문에 아주 고요하고 쓸쓸함이 이와 같으니, 어찌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 이백은 같은 제목으로 두 수(首)를 지었는데, 이것이 1번이다. 시숙(施叔)의 《회계지(会稽志)》에 따르면 동산은 상위현(上虞縣) 남서쪽 45리에 있고, 진태부(晉 太傅) 사안(謝安)의 거주였다. 그래서 일명 사안산이라고도 했다. 여러 봉우리 사이에 우뚝 솟아 있어서 다른 봉우리가 공손하게 읍하며 마치 난학처럼 날고 있다고 썼다. 그곳에는 백운당과 명월당의 유적지가 있으며, 수많은 산들이 숲을 이루고 아래로는 창해를 바라보며 천수가 맞닿아 절경을 이루고 있다.산을 내려와 길을 나서면 국경사이고, 태부의 고택이 있었다. 옆에는 태부가 기녀를 데리고 잔치를 벌인다는 전설이 있는 장미동이 있었다. 동산객은 은자, 즉 사안(谢安)을 가리킨다. 사안은 진나라를 누란위 위기에서 구한 명재상이지만, 공명을 버리고 동산에 은거했기 때문에 이백이 그를 동경하여 쓴 시이다.

* 이백(李白, 701~762) : 중국 성당기(盛唐期)의 시인으로서 자는 태백(太白)이며 호는 청련거사(靑蓮居士)다. 이백은 중국의 수많은 시인 가운데 두보와 더불어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칭송되며, 오늘날 이두(李杜)라 병칭 하며 두보를 시성(詩聖), 이백을 시선(詩仙)이라 부른다. 출생지와 혈통에 관해서는 정설이 없고 관련 기록을 참고하여 유추해 보면 수나라 말에 그의 먼 조상이 서역(西域)으로 유배되어 갔다가 당나라 신룡(神龍) 원년(705)에 그의 부친 이객(李客)이 몰래 가족들을 데리고 촉(蜀)이라는 지방의 사천성(四川省) 면주(綿州) 창명현(彰明縣) 청련향(靑蓮鄕)에 들어와 살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백은 서역에서 태어나 5세 때 서역에서 무역상을 하던 아버지를 따라 들어와 25세까지 20년 동안을 이곳에서 생활하였다. 청련거사라는 그의 자작호도 자신의 고향이라 여긴 청련향의 이름에서 유래한 것이다. 호방한 성품의 이백은 학문에도 자질이 있어 부친으로부터 가학(家學) 교육받고, 일찍이 어려서부터 학문을 연마하여 다방면의 지식과 사상을 습득하였다. 이백은 지방 관리에게 자신을 천거하는 편지글에서 5세 때 60 갑자를 외웠고, 10세 때 유가를 비롯한 제자백가의 사상을 섭렵하여 황제 헌원 이후의 일을 알고 있었다. 15세 때 기서(奇書)를 읽고 부(賦)를 지어 사마상여(司馬相如, 기원전 179~기원전 117)를 능가하였으며, 검술을 좋아하고 두루 지방 관리들을 배알 하였다고 술회하였다. 송나라 축목(祝穆)이 편찬한 『방여승람(方輿勝覽)』의 기록에 의하면 이백이 미주(眉洲)의 상이산(象耳山)에서 독서할 때 공부에 싫증을 내고 하산하다가 한 노인이 시냇물 옆 숫돌에 절구를 놓아두었는데, 이백이 노인에게 왜 그것을 갈고 있느냐고 물으니 노인이 바늘을 만들려고 한다고 답했다. 이에 이백이 크게 깨달은 바가 있어 이후 학문에 계속 정진하기로 마음먹고 산으로 다시 돌아가 독서를 계속하였다고 한다. 이로부터 마저성침(磨杵針)의 고사가 인구에 회자되었다. 이백은 10대 후반에 민산(岷山)의 남쪽에서 동엄자(東嚴子)라는 은자를 스승으로 도술을 배우며 세속에서 누릴 수 없는 자유로운 생활을 했다. 동강(潼江), 지금의 재주(梓州) 부근의 산에서 은거하고 있는 은사 조유(趙蕤)를 방문하기도 하였는데, 그의 정치사상이 이백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 이백이 흠모하였던 역사상 인물들은 관중(管仲), 안영(晏嬰), 악의(樂毅), 장량(張良), 제갈량(諸葛亮), 소진(蘇秦), 노중련(魯仲連) 등이 있다. 특히 계책에 능하고 공을 세우고도 상을 받지 않고 절개를 지킨 노중련에 대한 이백의 존경과 추종은 지대하여 여러 편의 시에서 찬양하고 있다. 노중련에 대한 이백의 각별한 존경과 숭상하는 마음은 「고풍(古風)」 제10수에 잘 나타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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