늦가을이 되면 각 문중들 마다 조상 산소에 시제(時祭)를 올리느라 바쁘다. 필자 금삿갓도 조선 선비의 후손으로서 예외일 수는 없다. 직계 선조들은 4대 봉사(奉祀)를 하다가 시제와 추석 차례를 합하여 1회로 간소화하였지만, 시조(始祖)나 중시조(中始祖), 파조(派祖), 입향조(入鄕祖) 등 선조의 시제는 만고강산 계속되니 어쩔 수 없다. 매번 우리 문중의 시제 때나 다른 문중의 묘소들을 관찰해 보면 우리네 조상의 묘비는 너무 천편일률적으로 비슷하다. 망주석(望柱石)이나 문인석(文人石) 등을 제외한 대상자를 기리는 묘비(墓碑)는 거의 같은 모양이다. 간은 석물공장에서 주문 제작한 것도 아닌데, 어쩌면 그리 집안끼리나 세대별로나 전혀 차이를 느낄 수 없다. 물론 요즘 들어와서 젊은 세대 감각으로 매우 다양한 모양이나 형태로 만들어지는 것이 있지만 과거 것들은 판박이다. 전통적으로 가례(家禮)에 비석에 관한 여러 가지 기준이 존재하여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디자인이나 모양에서 좀 독특한 형태를 추구할 수 없었는지 의아하다. 예를 들어 사망자의 관직 품계나 기타 신분 서열 등으로 기준대로 하다 보니 그렇다고 하기에는 좀 그렇다.
<태종무열왕릉인데 비석이나 장식물이 별로 없다. 아마 조선시대 들어와서 석물 치장이 강화된 것 같다.>
필자 금삿갓은 해외여행 시에 근처에 묘지가 있으면 찾아가서 둘러보곤 한다. 그러면 그곳의 묘지들은 정말 독특하고 각 집집마다 다양한 형태와 디자인으로 묘지와 비석을 잘 장식하여 설치해 놓은 것을 볼 수 있다. 모양과 색깔, 크기 등 비슷하거나 같은 것은 눈을 씻고 찾아보아도 없다. 그래서 금삿갓의 기준으로 세상의 특이한 묘비 몇 개를 소개하고자 한다.
1. 네덜란드의 운명의 연인들(손잡은 무덤)
네덜란드 루르몬트 "Oude Kerkhof"("옛 묘지")로 불리는 Begraafplaats Nabij de Kapel in 't Zand(모래 예배당 묘지)에 남편인 고르쿰(Jacobus W. C. van Gorkum) 대령과 아내인 반 에퍼든(Van Aefferden) 부인의 무덤이 담장을 사이에 두고 사망한 지 150년이 되어가는 지금도 여전히 손을 잡고 있다. 1842년 두 사람의 결혼은 사회적으로 큰 스캔들이었다. 반 에퍼든 부인은 귀족 가톨릭 신자였지만, 대령은 평민 가문으로 개교 신자였기 때문이다. 1880년 반 고르쿰 대령이 먼저 사망하자 루르몬트의 개신교 묘지에 안장되었다. 아내도 가톨릭 묘지에 묻힐 것을 알고 남편 묘지 곁에 묻히고 싶다고 분명히 했지만 종교 때문에 불가능했다. 대신 두 묘지를 나누는 담 바로 옆, 남편의 무덤에 최대한 가까운 곳을 선택했다. 그리고 묘비를 똑같은 모양으로 만들어서 담을 사이에 두고 대칭으로 세우고 두 손을 맞잡게 디자인했다. 두 사람은 묘비 위에는 두 손이 담을 사이에 두고 마주 잡고 있는데, 이는 사랑이 죽음으로 끝나지 않음을 보여준다.
2. 파리 묘지의 비극과 로맨스 그리고 피어나는 한 송이 장미
파리를 느긋하게 여행할 경우 꼭 Père Lachaise 묘지에 가보길 권한다. 200년 이상된 묘원(墓園)인데, 조각가 제이콥 앱스타인이 만든 오스카 와일드(Oscar Wilde)의 묘비도 볼 수 있다. 극성스러운 여성들의 키스로 루즈 자국이 어지럽게 나자 지금은 유리 보호막을 설치하여 비석에 직접 바른 것은 없다. 페르 라셰즈 묘지는 아름다운 영묘와 묘비로 세계적으로 유명하여 묘지라기보다는 하나의 조각공원이나 조각도시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눈길은 끄는 것은 19세기 벨기에 작가 조르주 로덴바흐(Georges Rodenbach)의 묘비일 것이다. 그의 묘비는 로덴바흐의 청동상이 무덤에서 막 나오는 모습이 보이며, 손에 장미 한 송이를 꼭 쥐고 있다. 극적이고 낭만적인 로덴바흐의 무덤은 그의 작품의 의미를 반영한다. 그의 가장 유명한 작품인 상징적 소설 『죽음의 브뤼허(Bruges-la-Morte)』 는 브뤼허에 사는 한 홀아비가 죽은 아내와 닮은 오페라 무용수 여인을 맹목적으로 스토킹 하다가 살인을 저지르는 슬프고 가슴 아픈 이야기이다. 이 주제는 에리히 코른콜트(Erich Korngold)가 오페라 <죽음의 도시>로 작곡하여 우리나라에서도 공연된 적이 있다.
페르 라셰즈 묘지에 있는 또 다른 눈길을 끄는 청동 묘비는 1942년에 사망한 배우이자 음악가인 페르낭 아르벨로(Fernand Arbelot)의 묘비이다. 아르벨로는 우리에게 잘 알려진 바가 거의 없지만, 묘비에서 그가 들고 있는 얼굴은 그가 영원히 바라보고 싶어 했던 아내의 얼굴이라고 생각된다. 비석을 보는 순간 살로메가 헤롯왕에게 요구하여 받은 세례자 요한의 목을 떠올리는 건 금삿갓의 생각뿐일까? 그의 무덤에 새겨진 비문은 그와 그의 아내가 공유했던 사랑을 반영하고 있다. "그들은 삶의 끝까지 그들을 이끈 아름다운 여정에 놀랐습니다."
3. 계속 자라는 무덤도 있을까?
믿거나 말거나 우즈베키스탄 사마르칸트(Samarkand)에 있는 이 무덤은 수 세기에 걸쳐 엄청나게 길어졌단다. 구약성서의 예언자 다니엘(Daniel)의 마지막 안식처로 여겨지며, 지역 전설에 따르면 그의 시신이 사후에도 계속 자라 현재 18미터 길이의 무덤이 되었다고 한다. 투르크계 몽골인 지도자 티무르(Timur)는 현대 시리아를 정복하려 했지만 다니엘의 힘에 좌절했다고 한다. 마침내 성공했을 때, 그는 다니엘의 유해를 파내어 조국의 행운을 빌기 위해 사마르칸트로 가져와서 매장했다. 유해가 무덤에 안치되자마자 근처에서 자연 샘이 솟아올랐는데, 그 샘은 당연히 강력한 치유력을 지닌다고 전해진다.
4. 최고 댄서의 마지막이자 영원한 커튼콜
'춤의 제왕'으로 알려진 러시아 무용수 루돌프 누레예프(Rudolf Nureyev)는 20세기 발레계에서 가장 유명한 인물 중 한 명이자 영국 발레리나 데임 마고 폰테인(Dame Margot Fonteyn)의 유명한 댄스 파트너였다. 현존하는 가장 재능 있는 무용수 중 한 명으로 여겨지는 누레예프는 말년에 파리 오페라 발레단의 연출가이자 수석 안무가로 활동하다가 1993년 심장 합병증으로 사망했다. 그녀는 고급 카펫과 태피스트리를 열렬히 수집했다. 그녀는 발레 슈즈 한 켤레와 함께 묻혔고, 파리 근교의 러시아인 묘지가 생트 주느비에브 데 부아(Sainte-Geneviève-des-Bois)에 있는데, 그녀의 묘비는 호화롭고 섬세한 동양식 카펫을 닮았다. 무덤을 자세히 살펴보면, 카펫이 수천 개의 모자이크 타일로 만들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아름다운 착시 현상을 일으키기 위해 정교하게 만들어진 카펫은 그녀를 찬사 하는 영원한 커튼 골이 되겠다.
5. 24시간 365일 늘 생중계되는 묘비
필자 금삿갓이 현직에 있을 때 독도의 모습을 365일 생중계하는 영상을 각급학교와 공공기관에 제공하는 나라사랑 운동을 전개한 적이 있지만 묘비를 365일 생중계하는 것은 이것이 아마도 최초일 것이다. 바로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피츠버그에 있는 앤디 워홀의 무덤 묘비이다. 그의 무덤을 Erath-Cam으로 끊임없이 방송하는 것은 2013년, 예술가의 85번째 생일을 기념하기 위해 시작되었다. 성 요한 크리소스토모 비잔틴 가톨릭 성당에서 생중계되는 이 프로젝트는 'Figment'라는 예술 프로젝트이다. 이 프로젝트는 "저는 항상 제 묘비에 비문도 없고 이름도 없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사실 'figment'라고 적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말한 예술가 워홀에게 바치는 헌사이다. 이런 영상을 통하여 그의 유명한 작품 '캠벨 수프 캔'을 기리며 그의 무덤에 수프 통조림을 기부하는 것도 가능하며, 수익금은 그레이터 피츠버그 커뮤니티 푸드 뱅크에 기부된단다.
묘비명(Epitaph)은 묘비문이라고도 한다. 명(銘)은 문자를 돌이나 금속 등에 새겨 넣는 것을 말한다. 우리네의 묘비명은 전면에 아무아무 공의 묘라고 표시하고, 좌우와 후면에 생애의 행장(行狀)을 깨알 같은 문장으로 기록한 것이 주를 이룬다. 서양의 묘비명은 대체로 간결하고 독특한 형태를 나타내는 것과 대조적이다. 더구나 죽은 사람의 관직에 따라 묘비명을 쓰는 사람의 격이 정해있기도 하지만 선조를 현창 하기 위해여 사후 몇 십 년이 지나도 명문장가를 찾아가서 미사여구(美辭麗句)를 받아서 드러내는 게 도리였다. 서양의 특이한 묘비명 몇 개를 참고로 적어 보자. 가장 많이 알려진 조지 버나드 쇼(George Bernard Shaw)의 묘비명은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지"는 사실과 다다. 두 가지의 오류가 있다. 그는 화장되어 자신이 살던 집 '쇼스 코너(Shaw's Corner)' 정원 구석구석에 뿌려져서 묘지가 없으니 묘비나 묘비명이 존재하지 않는다. 둘째 이 문구의 원문은 "I knew if I stayed around long enough, something like this would happen"이라는 그의 위트 있는 말에서 와전된 것으로, '오래 머무른다면 언젠가 이런 일이 생길 줄 알았다'는 의미이다. 어쨌든 서양의 유명인들의 묘비명 중에서 우리 선조들의 묘비명에 비해 재미있거나 특이한 것을 골라 보자.
<존 키이츠의 묘비명>
1. 노벨문학상을 받은 위대한 정치인 Winston Churchill : 그의 사망하자 거대한 국장(國葬)이 치러지고 112개국에서 조문단을 파견하고, 150개국 외교관이 참석했다. 중계방송은 1965년에 3.5억 명이 시청했으니 미식축구 결승전 이상이다. 90세의 장수를 누린 노련한 정치가요 문학가답게 멋진 묘비명을 남겼다. “I am ready to meet my Maker, Whether my Maker is prepared for the great ordeal of meeting me is another matter!(나는 창조주를 만날 준비가 되었지만, 창조주께서 나를 만나는 큰 시련을 준비하셨는지는 또 다른 문제이다!)”
2. 25살에 요절한 의사 시인 John Keats : 마부의 아들로 태어나 조실부모하고 힘들게 어린 시절을 보내도 의사가 되었다. 적성에 맞지 않자 고작 4년간 시작 활동을 했음에도 영국 낭만주의 대표시인이 되었다. 결핵 치료차 로마에서 1821년 사망하였고, 고국 사람들의 무심함과 자신의 유산인 시들이 잊혀 질까 봐 극도로 고뇌하던 그는 다음과 같은 묘비명을 만들었다. “Here lies one whose name was writ in water.(여기에 물에 이름이 쓰인 사람이 잠들어 있다.)”
3. 미국의 국민 시인 Robert Frost : 그는 퓰리쳐 상을 4화 수상했지만 노벨문학상은 31번이나 후보에 올라도 결국 선정되지 못한 불운한 시인이다. 대학을 졸업하지 못했지만 미국의 하버드를 포함한 최고 명문대 40개에서 명예학위를 받았다. 그의 시 "오늘의 교훈"의 마지막을 그는 “……그리고 만약 비문이 내 이야기라면 / 나는 나만의 짧은 비문을 준비해 놓았을 것이다. / 나는 내 비석에 나에 대해 이렇게 썼을 것이다 :”라고 하면서 이 구절 “I had A Lover’s Quarrel With The World.(나는 세상과 연인의 싸움을 벌였다.)”로 마무리했다. 시도 끝나고 인생도 끝나듯이 이것이 그의 묘비명이다.
4. 시에 제목을 달지 않았던 시인 Emily Dickinson : 원래 그녀의 묘비에는 “EEE” 즉 Emily Elizabeth Dickinson의 이니셜만 새겨 있었는데, 그녀의 조카딸인 마사 딕킨슨 비앙키(Martha Dickinson Bianchi)가 지금의 비문을 만들었다. “Called Back.” 이 문구는 그녀가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내용에서 따온 문구하고 한다. 그녀는 한평생 독신으로 살면서 오빠의 아내이자 친구인 올케와 옆집에 살면서도 수많은 편지를 주고받았다고 한다.
5. 한 시대를 풍미한 소설가 F. Scott Fitzgerald : 술독에 빠져 살았던 그의 무덤 묘비명엔 의외로 술은 없다. <위대한 개츠비>의 마지막 문장인 “So we beat on, boats against the current, borne back ceaselessly into the past.(그래서 우리는 끊임없이 과거로 밀려가며, 흐름에 맞서는 배처럼 계속 나아간다.)”라는 문장이 영문학도들에게 채찍질은 한다.
<에밀리 딕킨슨의 묘비명>
6. 천(千)의 목소리 주인공 성우 Mel Blanc : LA 할리우드 포에버 묘지에는 잘 나가던 유명 연예인들의 묘지가 즐비하다. 여기에 미국 애니메이션의 황금기 동안 유명 캐릭터들의 목소리를 도맡았던 천 개 목소리를 가진 사나이, 멜 블랑의 묘비명이 이렇게 간단하게 새겨있다. “That's all folks.(그게 다예요, 여러분.)”
7. 가수 Frank Sinatra : 처음에 그의 히트 곡 제목 "The best is yet to come.(최고는 아직)"라고 그의 부인이 비문에 새겼다. 새엄마가 죽자 불화를 빚던 두 딸이 묘를 개장(改葬)하면서 이 비문을 파괴하고 새로운 비문 “Sleep warm, Poppa(따듯이 주무세요, 아빠)”라고 바꾸어 버렸다.
8. 인권운동가 Martin Luther King Jr. 목사 : 그의 멋진 연설인 <I have a dream>에서 따온 비명이 "Free at last, Free at last, Thank God Almighty I'm Free at last.(마침내 자유, 전능하신 하느님 감사합니다.)"라고 쓰여 있다. 묘 앞에 영원한 불꽃이 설치되어 있다.
9. 프랑스 소설가 스탕달(Stendhal) : 그의 본명은 Marie-Henri Beyle이고 스탕달은 필명이다. <적과 흑>으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그는 파리 사교계의 멋쟁이이면서 난봉꾼이었다. 시몬 드 보부아르와도 친했는데, 밀라노를 더 좋아했고 거기서 한 여인을 짝사랑하다가 마음을 얻자 차버렸다. 일기에 다르면 매독 치료를 위해 요오드와 수은을 복용하여 엄청 고생하다가 길에서 사망하여 몽마르트르 묘지에 안장되었다. 그는 36편의 유언장과 <자아주의의 회고록>을 썼고, 그곳에 자신의 묘비명에 대한 구체적인 요청사항을 기록해 두었다. “Errico Beyle, Milanese : visse, scrisse, amò.(Henri Beyle, Milanese : he lived, wrote, loved.) / 앙리 베일, 밀라노 사람 : 그는 살았다, 썼다, 사랑했다.”
10. 위대한 철학자 René Descartes : 그는 말년에 스웨덴 여왕의 가정교사를 하다가 죽어서 그의 유골이 170년 동안 몸과 두개골이 따로 떨어져 옮겨 다녔다. 그러다 파리 생제르맹 데 프레 성당에 안치되었는데, 비문은 없고 두개골에 스웨덴 의사가 새겨 놓은 문구가 두 개 있다. 하나는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이고, 나머지는 "1666년 J Fr. Planstrom이 가져온 르네 데카르트의 두개골. 시체가 프랑스로 반환되던 당시와 동일. Bang Jr."라는 보증 문구이다. 프랑스와 스웨덴 간의 유해 반환으로 옥신각신 했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