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조선의 국수(國手) - 김종귀·정운창

사각의 판 위에 펼쳐지는 인생과 세상

by 금삿갓

옛말에 신선놀음에 도낏자루 썩는 줄 모른다고, 바둑에 빠지면 시간이 훌쩍 간다. 바둑은 중국의 고전 <박물지(博物誌)>에 실린 '요조위기 단주선지(堯造圍棋 丹朱善之)'라는 문구에 따르면 기원전 2300년 전 요임금이 그의 아들 단주를 가르치기 위해 바둑을 발명했다고 추정한다. 또 <설문(說文)>에는 기원전 2200년경 순임금이 우매한 아들에게 바둑을 만들어 가르쳤다고 밝히고 있으며, <중흥서(中興書)>에도 '요순이교우자야(堯舜以敎愚子也)' 즉 요순 임금이 어리석은 자식을 가르치려고 바둑을 만든 글이 전해지고 있다. 우리나라는 삼국시대 고구려의 승려 도림(道林)이 백제의 개로왕(蓋鹵王)과 바둑을 두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필자 금삿갓의 중시조(中始祖) 영열공(英烈公) 금의(琴儀) 할아버지가 고려 중엽에 정승에서 은퇴하고 거문고와 바둑으로 소일하였다고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묘지명에 기록되어 있어서, 사대부가 바둑을 한 기록으로는 최고 오래된 것이다. 바둑도 놀이다 보니까 항상 승패가 갈리고, 내기를 하게 되는 게 상례다. 그래서 늘 최고의 실력자를 가리는 것이 시대와 장소를 불문하고 관심사이다. 현대 과학의 발달로 AI 바둑기사가 인간 기사(棋士)를 능가해서 이젠 바둑도 좀 시들해졌지만 두뇌 게임으로는 아직 최고의 경지이다. 나라 안에서 최고의 바둑 고수(高手)를 현재는 국수(國手)라고 하지만, 조선 시대에 문헌에 보면 국수(國手)보다는 국기(國棋)라고 표현했다. 그러다가 국수(國手)와 국기(國棋)를 혼용해 쓰다가, 1956년 동아일보가 바둑대회의 이름을 <국수전>으로 걸고 매년 개최하다 보니 국수로 굳어진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 이래로 바둑이 일상화 되다가 보니 바둑용어가 일상용어로 변한 것이 많다. 이를 보면, 정수(正手)·악수(惡手)·꼼수·초강수(超强手)·묘수(妙手)·자충수(自充手)·무리수(無理手)·승부수(勝負手) 등 바둑의 기술에 관한 용어가 많고, 바둑판의 형세를 보는 포석(布石)·국면(局面)·판세(版勢)·대국(對局) 등 다양하다.

이렇다 보니 조선왕조실록에 바둑이 380건, 승정원일기에 260건 정도 기록되어 있다. 태종(太宗) 대에 방복생(房福生)이 바둑이 강해서 세자 양녕대군(讓寧大君)과 어울려서 실각에 한몫했고, 세종(世宗)은 조순생(趙順生)이 바둑의 고수라서 사복시(司僕寺)에서 말을 다루다가 통훈대부(通訓大夫)를 제수하자 사간원에서 부당하다고 간언을 해도 듣지 않았다. 인생이 새옹지마(塞翁之馬)인지 조순생은 바둑 덕분에 승진해다가 바둑 때문에 도리어 명을 단축했다. 세조(世祖)의 계유정난(癸酉靖難) 때에 그가 늘 안평대군(安平大君) 집에서 대국(對局)했기에 교형(絞刑) 당하고, 부인은 이몽가(李蒙哥)의 노비가 되었다. 산조(宣祖) 때에 국기(國棋)로 이름을 날린 종실(宗室) 덕원군(德原君)이 있었는데, 성명은 상고할 수 없다. 참고로 김도수(金道洙)의 <춘주유고(春洲遺稿)> 권 2 〈기자전(碁者傳)에 “선조 때 종실 덕원령이라는 분이 있어 바둑을 잘 두었다. 덕원은 7, 8세 때 이미 바둑을 배웠는데, 너무나도 바둑을 좋아한 나머지 거처하는 방의 사면 벽에다가 바둑판을 그려놓고 날마다 그 속에 누워 손으로 벽에 그려진 바둑판을 짚어가며 수련을 하였다. 이윽고 현묘(玄妙)한 기술을 터득하여 세상에 나가 바둑을 두자 대적할 자가 없었다. 남과 대국할 때마다 번번이 술을 잔뜩 마셨는데, 손놀림이 비호(飛虎) 같았으며 기기묘묘한 수를 끝없이 쏟아내었다.”라고 했다. 임진란 때에 명(明) 나라 장수 이여송(李如松)이 조선에 와서 쓸데없이 성질을 부릴 때, 통역 이억례(李億禮)가 그를 달래서 덕원령과 바둑 대국을 함으로써 진정시켰다고 한다.

그의 바둑 실력 소문을 듣고 전국 각지에서 대국하러 온 모양이다. 하루는 시골 촌부가 나귀 한 마리를 끌고 와서 대국을 청했다. 그는 행색이 초라한 그를 보고 귀찮아서 무릇 대국에는 돈을 걸지 않으면 재미없으니 무엇을 걸겠느냐고 물었다. 촌부는 나귀를 걸겠단다. 그러면서 대감은 겨울을 날 수 있는 양식을 걸라고 했다. 삼판 양승제인데 촌부가 두 번을 내리 져서 나귀를 넘겼다. 촌부는 툴툴 털고 일어나서 작별하고 가버렸다. 다음 해 이른 봄에 다시 그 촌부가 와서 재도전을 하겠단다. 생각이 없었지만 저번에 이긴 것이 있으니 응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덕원령이 두 판을 내리 졌다. 깜짝 놀란 그가 이번의 실력을 보니 저번의 실력과 격차가 심해서 몇 달 만에 그렇게 될 수가 없었다. 자초지종을 물으니, 촌부가 상번(上番)을 서로 왔는데 나귀를 근무처에 끌고 갈 수 없어서 꾀를 써서 대감의 노여움을 사게 되었다고 무릎 끓고 사죄했다. 호되게 당했지만 바둑 실력의 차이를 극복할 수 없어서 걱정 말라고 용서했단다. 덕원령의 다음 국기(國棋)는 생몰년대가 미상인 윤홍임(尹弘任)이고, 그다음이 숙종(肅宗) 때에 유찬홍(庾纘弘)이다. 유찬홍은 자는 술부(述夫), 호는 춘곡(春谷)이다. 천부적인 소질을 타고나 서당 훈장에게 손을 얻어맞으면서도 바둑돌을 놓지 않았고, 신혁(神奕)이라 불리었다. 그다음으로 장문익(張文翼)인데 군관(軍官)으로, 숙종은 청(靑) 나라 사신들이 오면 그를 영접도감(迎接都監)에 가서 바둑 접대를 시켰다. 장문익은 청나라 사신단에 군관 신분으로 가서 바둑 실력으로 만력제(萬曆帝, 신종)의 친필 휘호를 얻어와 숙종을 감동시킨다. 장문익의 계보는 다시 한대수로 넘어간다. 영조실록에 등장하는 고수다. 조정은 요동에 청의 흠차대신(欽差大臣)이 귀양을 오자 바둑 고수 한대수(韓大壽)를 그의 귀양지로 파견 보내어 관계를 돈독히 한다. 그 이후 화가이며 최칠칠(崔七七)로 불리던 최북(崔北), 신경(申經), 황오(黃五) 등이 문헌상에 나타나며, 조선 후기의 김만수(金萬壽), 백남규(白南圭), 윤경문(尹敬文), 노사초(盧史楚) 등으로 이어지면서 기보(棋譜)와 함께 갖가지 일화가 전해지고 있다.

여자 프로 바둑기사 김효정의 바둑 관련 논문을 보면, 조선 전기엔 바둑이 들어간 한시(漢詩)가 1,200 여수인데 후기엔 4,270여 수로 3배 이상 늘어난다. 전기(前期)의 바둑 회화는 ‘상산사호도(商山四皓圖)’가 상징하듯 신선의 분위기였으나, 후기(後期)엔 대장장이, 무당, 엿장수, 포목장수, 기생 등과 더불어 바둑 두는 모습이 담겨있다. 통도사 감로탱(甘露幁)처럼 바둑을 두다가 싸움을 벌이고 심지어 바둑판을 뒤엎어버리는 모습도 있다. 조선 전기 바둑은 은일, 초탈, 무욕의 탈속적 상징을 지니고 있었다. 바둑은 지극한 이치가 담긴 인생의 축소판으로 여겨져 용병, 치세 등 수많은 분야에서 인용됐다. 동시에 완물상지(玩物喪志), 즉 유희에 빠지면 뜻을 잃는다는 유학 쪽의 경계심도 강했다. 하지만 후기에 이르러 바둑이 크게 유행하면서 벽(癖)이 없고 취미에 몰두하지 못하는 사람을 ‘생기 없는 밥보따리’라 비하하는 일까지 벌어졌다. 아무튼 조선 중·후기 들어서 바둑이 크게 유행하여 많은 사람들이 바둑을 즐긴 모양이다. 바둑에 대한 전반적인 이야기를 하였으니, 조선 제일의 국수라는 명성을 떨친 김종귀(金鍾貴, 또는 鍾基)에 대해 알아보자.

김종귀는 숙종 20년(1694)에 태어나서 영조 52년(1776)까지 82세를 살았다. 출신지는 평양(平壤)이다. 젊어서는 서울에서 이씨(李氏) 성을 가진 대갓집 문객(門客)으로 지내면서 실력을 쌓아 이름이 알려졌다. 이후 평양으로 터전을 옮겨 바둑대회에 참가하거나 찾아오는 도전자들을 맞이하여 대국을 하며 지냈다. 만년(晩年)에 젊은 나이로 혈기왕성하고 바둑 실력 또한 뛰어난 김한흥(金漢興)이 찾아와 내기 바둑을 청하자 고전(苦戰)을 거듭한 끝에 어렵게 이겼다. 그런데 새로운 바둑의 고수로 떠오른 장우벽(張友壁)과의 대국에서 결국 승복(承服)하고 말았다. 그 후 바둑의 고수로 김한흥‧고동(高同)‧이학술(李學述) 등이 이름을 날렸다. 조희룡(趙熙龍)의 <호산외기(壺山外記)>에 그의 바둑 인생을 간략하게 기록해 놓았다. 김한흥은 김종귀와 더불어 나란히 이름이 났는데, 그때 한창나이가 젊어서 스스로 적수가 없다고 여겼다. 일찍이 김종귀와 내기 바둑을 둘 때에, 구경꾼들이 빽빽이 모여들었다. 김한흥은 눈빛이 바둑판을 뚫어져라 바라보면서, 종횡으로 끊고 찌르는 것이, 마치 준마(駿馬)나 굶주린 매와도 같았다. 김종귀는 늙고 병들어서 손이 바둑돌을 놓을 때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것처럼 하였다. 그 형세를 살펴보니, 김종귀가 이미 반국(半局)을 지고 있었다. 구경꾼들이 귓속말로 수군거리며 말하였다. "오늘의 한 판은, 김한흥의 독보적인 것에 양보를 해야 하겠군." 김종귀가 바둑판을 밀어 놓으면서 탄식을 하면서 말하였다. "늙어서 눈이 침침하구나. 놓아두고 내일 아침에 정신이 조금 맑아질 때를 기다려야 하겠다. "그러자 여러 사람들이 말하였다. "옛날부터 이름난 고수가, 한 판의 바둑을, 이틀씩 둔다는 말은 듣지 못했다." 김종귀가 손으로 눈을 비비며, 다시 바둑판을 당겨 앉아, 한참 동안 똑바로 들여다보더니, 홀연히 기묘한 한 수를 내어, 흐르는 물을 끊고 관문을 무찌르듯 하였다. 마침내 거의 완패했던 대국을 역전시켜 승리하니, 좌중에 앉았던 모든 사람들이 놀라며 감탄하였다. "잘못되지 않는 것에 대해 두려워할 것이 아니라, 그 잘못된 경우에 대해서 두려워할 것을 알아야 한다."라고 일렀다.

호산거사(壺山居士) 조희룡은 김종귀의 전기를 위와 같이 쓰고 바둑에 대하여는 아래와 같이 말한다. "고금의 놀이 중에서, 가장 오랜 세월 동안 전해온 것으로, 바둑만 한 것이 없다. 그 열고 닫는 개합(開闔)과 마음대로 움직이는 조종(操縱)과 나아가고 물러나는 진퇴(進退)와 취하고 버리는 취사(取捨)와 기이하고 올바른 기정(奇正)과 텅 비고 실한 허실(虛實)등의 기술은 참으로 병법에서 칼전대와 들메끈을 신는 최상의 책략과 같은 것이다. 맹자도 칭찬한 바둑의 명인 혁추(奕秋)나 한(漢) 나라 유흠(劉歆)의 <서경잡기(西京雜記)>에 바둑의 명인으로 소개된 두부자(杜夫子)는 ‘이치를 정밀히 하는 자는 족히 성인의 가르침을 크게 보충할 수 있다.’고 하였다. 중국 남제(南齊) 사람으로 강남 최고의 명수였던 왕항(王抗)과 동진(東晉) 사람 호군장군을 지냈으며 <세설신어(世說新語)> 방정(方正) 편에서 ‘박학(博學)으로 이름이 났으며 바둑을 잘 두어 중흥(中興) 연간의 으뜸이었다.’고 하는 강반(江虨)이나 왕적신(王積薪)은 당(唐) 나라 사람으로 그가 촉(蜀)에 갔을 때 고부(姑婦)가 말로써 대국하는 것을 듣고 다음 날 그들에게 물었더니, ‘공수(攻守)·살탈(殺奪)·구응(救應)·방거(防拒)’의 방법을 취하면 세상에 대적할 자가 없다고 하였다. 당(唐) 희종(僖宗) 시대의 한림대조(翰林待詔)로 바둑을 잘 두었는데, 활능이 어떤 소년과 바둑을 두는 사이에 황소(黃巢)가 황궁을 범하여 희종은 피난을 떠난 것을 인지하고 급히 따라가려고 하자 그 소년은 자신은 사실은 천제(天帝)가 보낸 사람이라며 집안일이나 잘 돌보라고 하였다고 하는 활능의 재주는 지금까지 그 정도가 얼마나 되는지 알지 못한다. 지금까지도 전해오는 왕적신이 만난 고부의 이야기는 사실과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여 그 허황된 것을 믿기에는 부족한 것 같다.

지금 남아 있는 기보(棋譜)로 이른바 <대소철망(大小鐵網)>이나, <권렴변(捲簾邊)>이나 <금정란(金井欄)> 등은 백(百)으로 셀만큼이나 많지만 이는 모두 배워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육상산(陸象山)은 바둑판을 매달아 놓고 쳐다보면서 관찰하다가 ‘하도(河圖)의 수(數)’를 깨달았다고 하는데, 총명하고 재주 있는 선비들 중에는 세밀한 마음으로 연구를 하여도 그러나 능히 깨닫지 못하는 자가 있다. 중국 남송(南宋) 시인(詩人)으로 자는 의경(儀卿)이며, 창랑(滄浪)이 호(號)인 엄창랑(嚴滄浪)이 이르기를, ‘시(詩)에는 특별한 재주가 있는 것으로 학문과는 관계가 없다.’라고 하였는데, 나는 바둑에 대하여서도, 또한 그렇게 말하는 바이다. 조희룡의 주장은 국수가 되려면 바둑에 특별한 재능을 타고나야 한다는 것이다. 김종귀와 같은 시기에 시골 출신 바둑 고수가 있었는데 이에 대한 기록을 보자. 강산(薑山) 이서구(李書九)의 저서 <자문시하인(自問是何人言)>은 그의 청년기의 기호와 문예를 기록한 것이다. 이 중에 <기객소전(碁客小傳)>이 속해 있는데, 바둑 기사 정운창(鄭運昌)의 일생을 ‘전(傳)’ 형식으로 서술하여, 바둑을 단순한 오락이 아닌 문학적 성찰의 대상으로 제시하였다. 정운창의 인품과 풍모를 사실적으로 기술하면서도, 그의 기예에 대한 집념과 고결한 기상을 부각시켜 청년기 이서구가 기예의 세계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하고자 한 지향을 보여준다.

백탑시사(白塔詩社)의 일원이었던 이덕무(李德懋)와 이서구는 동일한 문화적 환경을 공유했지만, 바둑을 바라보는 시선에서는 뚜렷한 차이를 보였다. 이덕무가 <혁기론(奕棋論)>에서 바둑을 인생의 본업을 해치고 성정을 무너뜨릴 수 있는 기예라며 경계한 반면, 이서구는 바둑을 소재로 <기객소전(碁客小傳)>을 지어 바둑의 원리를 학문적 담론의 비유로 전환하였다. 정운창의 이야기를 보자. 정운창은 전라도 보성 출신이다. 처음에는 사촌형으로부터 바둑을 배웠다. 5~6년 동안 문밖으로 발이 나가지 않았다. 그뿐 아니라 날마다 자고 먹는 것을 잊기 일쑤였다. 사촌형은 늘 “이보게 아우! 그렇게 하지 않아도 세상을 휘어잡기에 넉넉하다네.”라고 만류했으나, 그는 여전히 한층 열심히 노력하는 자세를 버리지 않았다. 오로지 바둑으로 10년을 보낸 뒤 어느 날 활연대오(豁然大悟)하였다. 실력을 갈고닦은 정운창은 시골에서는 더 상대할 사람도 없어 답답했다. 그는 한양으로 진출하여 국수의 명성을 누리는 자들과 대국할 것을 결심하고 보성에서 한양까지 걸어서 올라왔다. 처음 서울에서 노닐 적에 그의 능력을 알아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당시 한양에서 국수(國手)로 명성을 날리는 자들은 김종귀, 양익분, 변흥평 등이었다. 이들과는 선을 댈 수도 대국을 청할 수도 없는 처지였다. 또 바둑 실력을 인정받던 사대부로 대장 이장오(李章吾)와 현령 정박(鄭樸)이 있었다. 이때 정운창은 꾀를 내어 정박과 한번 솜씨를 겨룬다. 정운창은 정박이 남산에서 바둑 모임을 갖는다는 소식을 듣고 가서 구경하였다. 정박이 실수를 하자 정운창이 옆에서 슬쩍 훈수를 둔 것이다. 아무도 훈수를 못 둘 상황에서 찔러본 것이다.

정박이 되돌아보며, “객도 바둑을 잘 두오?”라고 묻자 정운창이 “시골 사람으로 일찍부터 바둑 둘 줄을 알아 밥을 먹지요.”라고 답했다. 정박이 그의 용모가 몹시 촌스러운 것을 보고서 가장 하등의 기사(棋士)를 나오라 하여 대국하게 하였다. 10여 착(着)을 두자 정박이 “네 적수가 아니다.” 하고 그다음으로 센 사람에게 두게 하였다. 겨우 반국(半局)을 두자 “네 적수가 아니다.” 했고, 또 자기 다음으로 잘 두는 사람을 시켜 두게 하였다. 하지만 집을 계산할 정도가 되지 않았는 데도 정박은 “네 적수가 아니다.” 하고 분연히 바둑판을 당겨서 자기가 직접 두었다. 그러나 세 판을 두어 세 판 내리 졌다. 그러자 좌우에 늘어선 모든 사람이 “당신은 누구요? 국기(國棋)일세!”라고 입을 모았다. 이리하여 운창의 명성이 하루아침에 서울 장안에 퍼졌다. 이후부터 정박을 비롯해 명성이 자자하던 대장 이장오(李章吾) 등은 정운창을 보기만 하면 손가락을 문지르며 물러나서 감히 바둑알을 가지고 맞먹으려 들지 않았다. 하지만 최고의 고수 김종귀는 평양에 있어서 대국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김종귀의 서울 복귀를 기다리다 지친 정운창은 스스로 평양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평양에 이른 정운창은 김종귀를 만나게 해 달라고 부탁하면서 감영(監營)의 포정문(布政門)에서 사흘을 머물렀으나, 감영의 아전은 이 시골뜨기를 들여보내지 않았다. 사흘을 기다리다 지친 정운창은 탄식했다. “재능을 소유한 선비가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지 못하는 불운이 그래 이런 정도란 말인가? 내 차마 걸음을 되돌릴 수가 없구나! 내가 떠나온 고향 땅에서 평양까지의 거리가 거의 수천 리다. 고갯길의 험준함과 나그네의 고생도 마다하지 않고 어렵사리 여기까지 이른 이유는 한 가지 기예를 가지고 다른 사람과 자웅을 겨뤄서 잠깐 사이의 상쾌한 기분을 맛보자는 심사이다. 그러나 끝끝내 사람을 만나지 못하고 돌아간다면 어찌 기구하지 않으랴.”

정운창은 포기하지 않고 또 사흘 동안 감영 문밖에서 자리를 뜨지 않았다. 그 사연을 들은 감사가 뭔가 낌새를 채고 김종귀에게 “이 자는 대체 무엇하는 사람일까. 특이한 점이 있는 것이 분명해. 자네는 물러나서 내 하명을 기다리게.”라고 한 뒤 사람을 시켜 정운창을 들어오라고 했다. 정운창과 몇 마디 주고받은 다음 감사가 “내가 듣기에 자네는 남쪽 지방에 산다고 하던데, 이제 발이 부르트도록 걸어 이곳까지 와서 김종귀를 한번 보려는 것을 보니 김종귀와 구면식(舊面識)인가 보구만!”했더니 정운창이 “아닙니다. 그렇지 않습니다.”라고 답했다. 그제야 감사는 김종귀와 대국하려는 그의 속내를 알아차렸다. 감사는 이때 재미있는 일을 꾸몄다. 감사는 말을 이었다. “정녕 그렇다면 자네가 김종귀를 만나려는 이유를 내 짐작하겠네. 그러나 그 김종귀가 지금 여기에 없으니 어쩐다? 그래도 그만두지 않겠다면 이곳에는 김종귀보다는 약간 모자라지만 그와 더불어 상하를 다툴 자가 있으니 시험 삼아 먼저 두는 것이 그래 어떻겠는가?” 이에 정운창은 “황공합니다. 삼가 말씀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꾸했다. 감사는 김종귀를 그 자리로 불렀다. “저 사람이 김종귀와 더불어 기예를 다투고 싶어 하지만 지금 그가 없으니 어찌하면 좋겠는가? 자네가 그를 대신하여 바둑을 두게나!” 감사가 김종귀에게 눈을 꿈쩍 하니 그가 거짓으로 “황공합니다. 삼가 말씀을 받들겠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이에 좌우에서 바둑판을 펴고 바둑알을 올렸다. 두 사람이 모두 포진(布陳)하자 형세가 비슷했는데, 한두 수를 더 두자 김종기는 번번이 마음대로 하지 못했으나 정생(鄭生)은 몹시 느긋하였다. 감사가 짜증 내듯 말하였다. “지난번 노름꾼 종놈과 대국할 때는 손바닥을 치고 기운을 토하며 스스로 온 나라에 짝할 이가 둘도 없다고 으스대더니, 지금은 위축되어 실의 한 사람 같고 착수할 때도 과감하고 빠르지 못하니 무엇하는 겐가?” 한참 동안 이처럼 어물대더니만 종기는 더욱 겁을 먹고 허둥거리다가 결국 정생(鄭生)을 무너뜨리지 못하였다. 정생 또한 마음속으로 이상하게 여기며 김종기에게 “우선 조금 쉽시다.”라 하더니, 다시 “그대와 김종기 중 실력이 누가 낫습니까? 또 지금 그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었지만, 김종기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혔다. 감사는 더욱 화가 났지만 역시 어떻게 할 도리가 없었다. 이에 사실대로 말하고 백금 스무 냥을 그에게 주었다. 이 장면은 두 인물의 대비되는 심리적 상태를 통해 극적 긴장감을 효과적으로 형상화했다. 김종귀를 물리치고 정운창은 평양감사의 식객이 됐다. 시일이 흘러 평양감사가 서울로 돌아갈 때 정운창과 김종귀도 함께 왔다. 그들은 서울에서 양익빈, 변흥평 등의 기사들과 어울려서 바둑을 두고 놀았다.

바둑이란 서로 엎치락뒤치락하며 이기고 지는 맛이 있어야 하는데 정운창을 다른 국수가 이기기 힘들었다. 최고의 영예를 누리던 김종귀에 대한 사람들의 존경과 경외심은 이제 정운창에게로 쏠리고 김종귀는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지거나 무시당했다. 이러한 상황을 짐작하게 하는 일화가 이옥(李鈺)이 쓴 <정운창전(鄭運昌傳>에 기록되어 있다. 승상 아무개는 바둑을 몹시 좋아하였다. 그가 정운창을 불러 김종귀, 양익빈, 변흥평 등의 무리와 날마다 바둑내기를 하게 하였다. 그런데 정운창이 그다지 수준 높지 않았다. 승상은 정운창이 바둑 두는 데 힘을 쓰지 않는다고 의심하여 남원산 상화지(霜華紙) 200번을 상금으로 걸고 다짐을 하였다. “힘을 기울여 열 번을 이기면 이것을 네게 주고, 김종기는 회초리로 때리겠다.” 정운창이 이에 바둑돌을 당당하게 두어 만전을 기하는 태도를 보였다. 포위하기는 성벽과 같이, 끊기는 높은 봉우리같이 하고, 세우기는 지팡이를 꽂듯이 하고, 합하기는 천을 꿰매 듯하고, 대응하기는 종이 울리듯 하고, 솟구치기는 봉우리와 같이 하고, 덮기는 그물을 치듯이 하고, 비추기는 봉홧불과 같이 하고, 빠트리기는 냄비 뒤집 듯하고, 변화를 주기는 용과 같이 하고, 모이기는 벌떼와 같이 하였다. 그러자 김종기는 땀을 뻘뻘 흘려 이마를 적셨지만 당해내지를 못하였다. 세 판에 이르자 김종기는 일어나 측간에 가면서 눈을 꿈적여 정운창을 나오라고 하였다. 한참 뒤에 들어가 다시 바둑을 두었는데 정운창이 때때로 실수를 하였으니 김종기의 구걸 때문이다.

이 장면은 조정의 최고위직 관리가 상금을 내걸고 경쟁을 시켜서 프로바둑대회를 여는 당대의 관행도 보여준다. 대회는 대체로 공개적으로 열리고, 승자에겐 명예와 경제적 이익까지 주어졌다. 이 시합에서 이긴 정운창은 남원산 상화지(霜華紙) 200번을 부상으로 받았는데, 당시론 거금이었다. 여기서는 정운창 바둑의 특징이 비유적으로 설명된다. 상대에게 빈틈을 보이지 않고 예리하게 공격하는 정운창의 특징을 이옥은 다분히 문학적으로 묘사했다. 진 사람에겐 회초리를 맞는 모욕이 뒤따랐다. 실제 회초리를 대기야 했겠는가마는 그런 정도의 굴욕을 느껴야 하였다고 짐작할 수 있다. 평소에는 가볍게 두던 정운창도 상금이 걸린 바둑대회에서는 심각하게 바둑을 두었다. 바둑은 명예뿐만 아니라 생계수단이었기 때문이다. 정운창 이래로 사실 한국에서 국수가 많이 나온 지역이 바로 전라도다. 조선후기 학자들은 대체로 호남에 지관(地官), 점쟁이, 바둑 잘 두는 사람이 많다는 점에 동의했다. 현재 한국의 국수로 대를 잇는 조남철은 전북 부안, 조훈현은 전남 목포 사람이고, 이창호는 전주, 이세돌은 신안 출신이다. 이 밖에도 부산에서 태어났지만 조남철의 조카인 조치훈도 호남 계보이고, 김인·송태곤 등이 강자이다. AI가 인간의 바둑 영역을 모두 침탈했지만 그래도 인간이 AI에게 끊임없이 학습하고 도전하고 있으므로 바둑의 역사는 끊어지지 않고 이어질 것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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