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 조선 최고의 보컬 밴드 뮤지션 – 김성기
우리 음악의 맥과 혼을 지킨 자존심
사람이 살아가는 어느 시대나 장소에든 음악은 있게 마련이다. 지금 우리의 K-Pop이 세계를 무대로 신기록을 경신하고 있지만, 조선 시대에도 이런 음악과 음악가들이 인기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우리의 선조들은 옛부터 부여(夫餘)의 영고(迎鼓)나 동예(東濊)의 무천(舞天) 등 서양의 추수감사절 같은 대규모 행사를 하면서 춤과 노래를 즐겼다. 그런 우리 민족의 본성이 유학의 시대인 조선이라고 사라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놀이 상황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는 것이 가사(歌辭)인데, 조선 말기의 한산거사(漢山居士)가 지은 <한양가(漢陽歌)>를 살펴보면 잘 알 수 있다. "화려(華麗)가 이러할 제 놀인들 없을 소냐? 장안소년(長安少年) 유협객(遊俠客)과 공자왕손(公子王孫) 재상자제(宰相子弟) 부상대고(富商大賈) 전시정(廛市井)과 다방골(茶房-) 제갈동지(-同知) 별감무감(別監武監) 포도군관(捕盜軍官) 정원사령(政院使令) 나장(羅將)이라. 남북촌(南北村) 한량(閑良)들이 각색 놀음 장할 시고. 선비의 시축(詩軸) 놀음, 한량(閑良)의 성청(成廳) 놀음, 공물방(貢物房) 선유(船遊) 놀음, 포교(捕校)의 세찬(歲饌) 놀음, 각사(各司) 서리(書吏) 수유(受由) 놀음, 각 집 겸종(傔從) 화류(花柳) 놀음, 장안의 편사(便射) 놀음, 장안의 호걸(豪傑) 놀음, 재상(宰相)의 분부(分付) 놀음, 백성(百姓)의 중포(中脯) 놀음, 각색놀음 벌어지니 방방곡곡 놀이처(處)라.” 이렇듯 각계각층의 놀이 문화가 만발하니 음악이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음악과 춤을 연주할 사람 즉 뮤지션과 댄서가 동원됨은 말할 필요가 없다. <한양가>에는 이렇게 읊고 있다. “금객(琴客) 가객(歌客) 모였구나. 거문고 임종철이, 노래에 양사길이, 계면에 공득이며, 오동복판 거문고는 줄 골라 세워놓고, 치장 차린 새 양금은 떠는 나비 앉혔구나. 생황 퉁소 죽장고며, 피리 저해금이며, 각생 기생 들어온다. 예사로운 놀음에도 치장이 놀랍거든 하물며 승전놀음, 별감의 놀음인데 범연히 치장하랴? 백만교태 다 피우고 모양 좋게 들어온다. 늙은 기생, 젊은 기생, 명기(名妓), 동기(童妓) 들어온다.” 한바탕 놀이판이 흐드러진 모양이다. 조선의 선비들도 이런 풍류(風流)를 즐겼다.
<황병기 교수의 가야금 연주>풍류와 관련된 말로 줄풍류, 대풍류, 풍류방, 풍류객 등이 있다. 줄풍류는 거문고·가야금·해금·세피리·대금·장구 연주자 각 한 명씩으로 편성하여 현악영상회상을 연주하는 것을 말하고, 대풍류는 피리, 대금, 해금 등 대나무 관악기가 중심인 풍류음악이다. 풍류객이 풍류방에 모여 이러한 풍류를 즐겼으며, 대갓집의 행사나 기타 행사에 초청받아서 풍류를 선보이기도 한 것이다. 위의 <한양가>에 나오는 임종철이나 양사길의 150년 이전인 조선 숙종(肅宗), 경종(景宗) 시대에 한양을 주름잡았던 뮤지션이 있었다. 그가 바로 김성기(金聖基)이다. 1649년에 태어나서 1725년에 사망한 당시의 최고의 음악가였다. 자(字)는 자호(子瑚)·대재(大哉)이고, 호(號)는 낭옹(浪翁)·어옹(漁翁)·어은(漁隱)·조은(釣隱)·강호객(江湖客) 등 다양하게 사용했다. 어려서 음악을 무척 좋아하고 노래를 잘 불렀으나 천한 신분과 가난 탓으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상의원(尙衣院)에서 활을 만드는 장인바치노릇을 했다. 그는 활을 만드는 조궁장(造弓匠)의 일을 하는 틈틈이 거문고 등 악기 연주를 독학했다. 그는 과거 음악을 철저하게 공부한 바탕 위에서 새로운 음악을 창조해 그만의 악보를 만들었고, 현재 그 악보가 전해진다. 그의 생애에 관하여는 한 세기가 넘게 지나서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이 그의 저서 <이향견문록(里鄕見聞錄)>에 기록해 놓았는데, 이는 완암(浣巖) 정래교(鄭來僑)의 <완암집(浣巖集)>의 내용을 많이 활용한 것이다. 정래교가 김성기보다 32세 늦게 태어났지만 그가 활동하던 시기와 겹치니 그의 인기를 들어서 알고 있을 것이다. 정래교와 동시대의 인물인 임상정(林象鼎·1681~1755)이 그의 문집 <자오록>(自娛錄)에서 김성기와 그 제자를 다루었다. 임상정은 정 3품 직인 장악원(掌樂院)의 정(正)에 있었기에 장악원 소속이나 다른 예인들의 현황에 대하여 잘 알 수 있었을 것이다.
<낭옹신보>어쨌든 정래교의 <완암집(浣巖集)>에서 기술한 김성기의 생애를 살펴보자. “거문고 연주가 김성기라는 사람은 처음엔 상의원(尙衣院)의 활 만드는 사람이었는데, 성품이 음률을 좋아해 작업장에 있으면서 만드는 일을 소홀히 하고, 사람을 따라다니며 거문고를 배워 연주법을 정밀하게 할 수 있었기에 마침내 활 만드는 일을 그만두고 거문고에 전념했다.” 상의원은 상방(尙方)이라고도 한다. 궁중의 기물과 의복, 음식 등을 관장하는 임무, 또는 이를 관장하는 관청이다. 조선 시대 임금의 의복을 진공(進供)하고 궁중의 재물과 어보(御寶) 등을 관리하던 기관이다. 그의 재능을 이렇게 표현했다. “악공 중에 잘하는 이들이 모두 그의 문하에서 나왔는데, 또한 퉁소와 비파도 곁가지로 이해하여 모두 오묘함을 다함으로 스스로 새로운 소리를 지을 수 있었으니, 그의 악보를 배워 이름을 떨친 이들이 또한 많았고, 이때에 서울에 김성기의 새로운 악보들이 있게 되었다. 인가에서 손님을 모아 잔치하며 마실 적에 비록 뭇 광대들이 당(堂)을 채우더라도 성기(聖基)가 없으면 부족하다고들 생각했다.” 그의 성품과 만년의 삶을 다음과 같이 적었다. “그러나 성기(聖基)는 집이 가난하고 물결처럼 떠돌기 때문에 처자식은 주림과 추위를 면하질 못했다. 만년에 서호(西湖 : 마포·서강·양화진 일대) 가에 집을 세내어 기거했다. 작은 거룻배를 사고 대나무 도롱이를 쓰고, 낚싯대를 가지고 왕래하며 물고기를 낚시질하여 자급자족하면서, 스스로 호를 조은(釣隱, 낚시터로 은둔한 이)이라고 했다. 매일 밤바람은 고요하고 달은 휘영청 떠 있을 적엔 중류(中流)로 노를 저어 퉁소를 가져다 3~4 곡조를 불어대면 애절하고 구슬프며 맑고도 밝은 소리가 구름을 뚫어 하늘에 닿을 정도였다. 언덕 위에서 듣는 이들이 많이들 배회하며 떠나질 못했다.”
<완암집>그가 한 성깔 하는 은둔의 선비 같은 모습을 보이는 것은 경종(景宗) 당시에 대궐의 지관(地官)이면서 거드름을 매우 피우던 목호룡(睦虎龍)이란 사람과의 사연이 있었다. 목호룡(睦虎龍, 1684년~1724년)은 본관은 사천(泗川)인데, 서얼 출신이다. 1722년(경종 2년) 음력 3월 임금을 죽이려는 모의가 있었다는 삼급수설(三急手說)을 고해바쳤다. 임금은 즉시 정국(庭鞠)을 열고 목호룡이 역적이라고 지적한 정인중(鄭麟重)·김용택(金龍澤)·이천기(李天紀)·백망(白望)·심상길(沈尙吉)·이희지(李喜之)·김성행(金省行) 등 60여 명을 잡아들였다. 백망은 심문을 당하면서 이것은 세력을 잃은 소론·남인이 왕세제(王世弟) 연잉군(延礽君, 훗날 영조)을 모함하려고 조작한 것이라고 주장했으나 당시 심문을 담당하고 있던 남인들은 이를 인정하지 않았다. 이리하여 이천기·이희지·심상길·정인중·김용택·백망·장세상(張世相)·홍의인(洪義人) 등과 앞서 왕세제를 세운 소위 건저(建儲) 4 대신인 이이명·김창집(金昌集)·이건명(李建命)·조태채(趙泰采) 등이 차례로 사형을 당했다. 고변자인 목호룡은 부사공신(扶社功臣)에 오르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의 벼슬을 받고 동성군(東城君)에 봉해졌다. 목호룡은 시중의 왈패(曰牌) 비슷하게 행동하고 다닌 모양인데, 제 입으로 한 고변 한 마디에 일약 공신에 종 2품 벼슬을 얻으니 그 위세가 대단했을 것이다. 김성기와 얽힌 사연이다. “한 번은 목호룡 패거리들이 모여서 술을 마실 때에, 안장 있는 말을 대령하고 김금사(金琴師)를 간곡히 청하였다. 그러나 김성기는 병을 핑계하며 거절하고 응하지 않자, 심부름을 온 자들이 여러 번 다녀갔지만, 오히려 꼼짝도 하지 않고 누워서 움직이지 않았다. 목호룡이 잔뜩 화를 내어, 이에 협박을 하면서 말하기를, ‘오지 않으면, 내가 너를 크게 욕보이리라.’라고 하였다. 김성기는 마침 손님과 더불어 비파를 뜯고 있다가, 이 말을 듣고서 크게 화를 내면서, 심부름 온 자에게 비파를 내던지며, 꾸짖어 말했다. ‘돌아가서 호룡에게 전하거라. 내 나이 칠십이다. 어찌 너를 두려워하겠느냐? 네놈이 고변을 잘한다고 하니, 나를 또한 고변해서, 나를 죽여 보거라.’ 목호룡은 이에 기가 질려서 모임을 그만두고 말았다.” 이는 김성기가 73세 정도의 시기라서 죽기 3년 전의 일이다. 그 일 뒤에 김성기는 도성 안에 발걸음을 끊고는 남에게 나아가 연주하는 일도 드물었다.
<삭대엽평계제일>그러나 혹 마음에 맞는 사람이 있어서, 그가 서강으로 찾아 이르면, 곧 퉁소를 불어서 즐기면서도, 또한 몇 곡조에 그칠 따름이었고, 한 번도 흥청만청 즐겁게 노는 적이 없었다고 한다. 정래교는 또 이렇게 적었다. “나는 어린 시절부터, 김금사의 이름이 귀에 익었다. 일찍이 친구의 집에서 그를 만나본 적이 있는데, 수염과 머리가 허옇고, 두 어깨가 솟아서 뼛골이 불거져 있었으며, 숨을 헐떡이고 기침이 끊이지 않았다. 그러나 억지로 비파를 뜯게 하였더니, 영산곡(靈山曲)을 변조(變調)로 하는데, 자리에 앉은 손님들은 모두 눈물을 떨구었다. 비록 노쇠하여 죽음이 가까웠으나, 손끝이 오이처럼 이러지는 묘기는, 사람들을 감동시키는 것이 이와도 같았으니, 그의 한창 시절을, 가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라고 그의 기량을 평가했다. 정래교는 금성기의 사람됨을 다시 한번 더 강조해서 사대부로서의 부끄러움을 깨우쳤다. “김금사의 사람됨은 자세하고 곧으며, 말수가 적었으며, 술을 좋아하지 않았다. 서강에서 궁하게 살아, 일생을 마치려 하니, 이 어찌 스스로 지키는 바가 없이 그럴 수 있겠는가? 더욱이 그가 목호룡을 매도함에 늠름하여 범하지 못할 바가 있었으니, 아아! 이 또한 당(唐) 현종 때의 궁중 악사로 안녹산(安祿山)의 반군에게 끌려가 연회의 음악을 거절하여 죽음을 맞이한 뇌해청(雷海淸)의 부류가 아닐런가? 세상에서 사대부로, 지조와 분수없이 쫓아다니며 옳지 못한 것에 붙어서, 자신의 자취를 더럽힌 자들은, 김금사(金琴師)를 보게 되면, 또한 부끄러움을 알게 되지 않겠는가?” 뇌해청(雷海淸)은 당 현종(唐玄宗) 때에 악공(樂工)으로, 황제의 파천(播遷)을 마음 아파하고 역적이 퍼짐을 분해하며 악기를 땅에 던지고 서쪽을 향해 통곡했다고 한다.
<옛 날의 놀이 문화>김성기의 젊은 시절 거문고 수련에 얽힌 이야기다. 18세 때 김성기는 상의원(尙衣院)에 소속되어 활을 만드는 궁인(弓人)이었다. 그런데 김성기는 그때 왕세기(王世基)라는 사람이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처음 듣고는 넋이 나갈 정도로 빠져든다. 그 길로 김성기는 왕세기를 찾아가 거문고를 가르쳐 달라고 청하지만 왕세기는 가르쳐 줄 수 없다고 딱 잘라서 한 마디로 말하고는 축객령(逐客令)을 내린다. 그러나 김성기는 그것에 실망하지 않고 계속 찾아가 제자로 받아 달라고 수십 번 청하지만 왕세기는 눈썹 한 자락도 꿈쩍하지 않는다. 할 수없이 물러나온 김성기는 밤마다 그 집으로 숨어들어 왕세기가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을 몰래 훔쳐 듣고는 집에 와서 나름대로 연구하여 거문고를 연주하며 악보를 만들었다. 꼬리가 길면 밟히듯이 어느 날 왕세기가 연주를 하다가 문득 손을 놓고 툇마루로 난 문을 확 열어재꼈다. 거기에 김성기가 쪼그리고 앉아서 귀를 쫑긋거리다가 뒤로 벌렁 넘어진 것이다. 왕세기는 불같이 화를 내다가 자기 앞에서 훔쳐 듣고 나름대로 공부한 것을 연주해 보라고 한다. 훔쳐 듣고서 공부한 김성기가 자신과 거의 흡사하게 거문고를 연주하는 것을 듣자 왕세기는 김성기의 재능과 끈기를 인정하게 된다. 그래서 제자로 삼아 거문고를 가르쳐 준다. 왕세기로부터 거문고를 배우자 김성기의 거문고 실력은 당대 최고라는 칭송을 받는다. 그때부터 장악원(掌樂院)의 악사가 되고, 고관대작들의 잔치마다 불려 다니는 최고의 인기 연주자가 되었다.
<조승연의 일러스트레이션 : 악사>그러던 어느 날 김성기는 평생을 함께 가객(歌客)으로 지낼 잊지 못할 지우(知友)를 만난다. 어느 연회모임에 거문고를 연주하러 갔다가 시조창을 하러 왔던 남파(南坡) 김천택(金天澤)을 만난다. 그는 김성기보다 20여 세가 어린 사람으로 포도청의 포교로 있는데, 그의 시조창은 듣는 사람들로 하여금 옷깃을 여미게 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였다. 김성기와 김천택은 소문은 들어왔지만 서로 만날 기회가 없다가 처음으로 만나서 얘기를 하자 서로에 대한 신뢰가 생기고 즉석에서 김성기의 거문고와 김천택의 시조창으로 공연하게 된다. 당대의 최고수가 만나 공연을 하니 환상적안 앙상블로 사람들의 반응은 폭발적이다. 자신들 스스로도 만족스러운 공연이 되었다. 그러던 중 김천택이 김성기에게 자신의 속내를 내비친다. 중인출신이라는 같은 신분의 경아전(京衙前) 서리들이 시사(詩社)를 만들어 시를 지으며 세상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존재를 알리듯이 우리 가객들도 가단(歌壇)을 만들어 서로 교유하고, 음악을 더욱 발전시키는 것이 어떻겠냐는 제의다. 김성기도 흔쾌히 찬성하고 적극적으로 가단에 참가하겠노라고 한다. 그렇게 해서 김성기와 김천택은 당대의 가객들과 교류하며 가단을 만드니 그 이름이 “경정산(敬亭山) 가단(歌壇)”이다. 경정산(敬亭山)은 중국의 산으로, <독좌경정산(獨坐敬亭山)> 또는 <경정산(敬亭山)>이라는 이백(李白)의 오언절구(五言絶句) 제목인데, 시구에 “相看兩不厭(상간양불염) / 서로 바라봐도 싫증 나지 않네.”라는 것이 있는데, 바로 가단의 구성원들끼리 서로 싫증 내지 않고 잘 화합됨을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그들의 구성원은 김성기(金聖器), 김유기(金裕器)를 비롯해서 탁주한(卓柱漢), 박상건(朴尙健), 이차상(李次尙), 김우규(金友奎), 박문욱(朴文郁) 등으로 당시 한양에서 내로라하는 가객들은 거의 모두 경정산 가단에 참가했다. 이 보다 조금 뒤에 김수장(金壽長)이 주도한 노가재가단(老歌齋歌壇)과 같이 쌍벽을 이루었다. 그들은 때때로 모여서 서로의 기량을 뽐내기도 하고, 공동으로 연구도 하고, 서로의 음악을 전수하기도 하며 음악을 한층 발전시키고 계승하는 역할을 한다. 그들이 가단을 통해 발전시킨 자신들의 작품을 모아서 김천택이 한 권의 서책으로 만드니 그 이름이 <청구영언(靑丘永言)>이라는 시가집이다.
조수삼(趙秀三)은 김성기와 왕세기의 사제 관계를 칠언절구로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幾曲新飜捻帶中(기곡신번념대중) / 새로 지은 몇 곡을 연주하던 중
拓窓相見歎神工(탁창상견탄신공) / 창을 열다 마주하니 그 신공에 탄복할세.
出魚降鶴今全授(출어강학금전수) / 고기 뛰고 학이 내리게 지금 전수하노니
戒汝休關射羿弓(계여휴관사예궁) / 활의 명수를 쏴버릴 근심을 말게나.
하지만 사제관계에 대한 자세한 계보는 밝히지 않았다. 그런데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지낸 임상정이 기록한 바에 따르면 그에 대한 근거가 나온다. 최고의 연주자였고 김천택과 가단을 만들었으니 당연히 가르친 제자도 많았을 것이다. 당대의 가객들 모두가 거문고명수라고 찬사를 아끼지 않은 김중열(金重說)도 그에게 거문고와 퉁소를 배웠고, 왕족 출신의 남원군(南原君) 이설(李樆)도 그와 친분 관계를 가지고 거문고를 익혔다. 임상정이 남원군에게 거문고를 누구에게 전수받았는지 물었다. 그가 대답하기를 “자네는 예전에 어은(漁隱) 김성기란 분이 있었다는 말을 듣지 못했는가? 그분이 바로 내 거문고 스승일세. 옛날 융경(隆慶) 만력(萬曆) 연간에 홍복원(洪復元)이라는 사람이 거문고로 유명하여 중국 사신으로부터 칭찬을 들었네. 홍복원은 이지윤(李志尹)에게 전수했고, 이지윤은 어은에게 전수했네. 이것이 내가 거문고 솜씨를 전수받은 유래일세.”라고 했다. 그런데 여기에 왕세기는 없다. 김성기는 속악(俗樂)이 갈수록 어지러워지는 현상을 염려해 홍복원과 이지윤 두 스승이 전해준 곡을 책으로 만들고자 했다. 그러나 오류를 바로잡는 작업을 마치지 못한 채 세상을 떴고, 남원군이 뒤를 이어 악보를 완성했다. 현재 전해지는 김성기의 악보인 <낭옹신보(浪翁新譜)>에는 각각의 곡마다 누가 채보했는지를 밝혀놓았는데 대부분의 곡 하단에는 ‘원태전기’(原台傳記)라는 네 글자가 쓰여 있다. 여기서 ‘원태(原台)’는 남원군(南原君) 대감을 지칭하고, ‘전기(傳記)’는 낭옹(浪翁)의 음악을 전해서 기록한다는 의미다.
임상정과 비슷한 시대의 학자인 이영유(李英裕)가 장악원 첨정(僉正)이 되어 각종 악보를 개찬(改撰) 하기도 하고 음악 관련 글을 썼다. 그가 쓴 <운소만고(雲巢謾藁)>에서 <기악공김성기사(記樂工金聖器事)>에서 그의 또 다른 제자인 맹인 악사 주세근(朱世瑾·?~1749)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나의 성품이 거문고에 탐닉하여 오래도록 주고사(朱瞽師: 주세근)와 더불어 노닐다가 악공 김성기의 이야기를 들었는데 자못 상세하다. ··· 김성기는 원래 경성 사람으로 장악원에 소속된 악공이다. 사람됨이 오만하고도 기개가 있고, 꼿꼿하여 굴함이 없었다. 신축년(1721)에 서호(西湖) 강가에 집을 얽고 물고기를 낚으며 스스로 즐겼다. 음률을 심오하게 이해했고, 비파에는 더욱 뛰어나 여러 악공(樂工)들 가운데 가장 빼어났으므로 귀족이나 부호 집에서 다투어 초빙해 갔다. ··· 날마다 나룻배에 술을 싣고 나가 술을 마신 후에는 홀로 강가에서 낚시를 했다. 간혹 이틀 묵고 돌아오기도 했다. 돌아올 때에는 반드시 퉁소를 불고 거문고를 연주했으며, 표연히 세상을 초탈한 듯한 뜻이 있었다. ··· 주고사(朱瞽師)의 이름은 세근(世瑾)이요, 또한 비파를 잘 타는 것으로 이름이 났다. 보통 비파소리는 애원청초(哀怨淸楚)한데 오직 주고사는 웅장하면서도 깊고 그윽하고도 예스러운 소리를 내었으니 생각건대 거문고 소리와 비슷했다. 그의 수법은 대개 김성기로부터 나온 것이다. 그다음 해(1749) 겨울에 그도 병으로 죽었다. 죽은 후에는 그 비법이 전해지지 않았다고 한다.”
<명인 이생강>성대(成大) 안대회 교수는 <조선의 비주류 인생>에서 이렇게 기록했다. 스승 김성기가 죽은 해 겨울의 기억을 되살려 주세근이 임상정에게 말한 내용이다. 죽기 직전 서강으로부터 성 안에 들어온 김성기는 주세근의 손을 붙잡고 빈집의 밀실로 데리고 들어가 쓸쓸히 마주 앉아 비파를 꺼내놓고 몇 곡 탔다. 그러고는 이렇게 말했단다. “이는 고려의 옛 가락이다. 고려의 옛 가락은 오로지 이 곡만 남아 있다. 개성 기생 황진이로부터 나온 이 곡은 김성천(金成川) 댁의 여종이 악기를 탈 줄을 몰라 입으로 연주하여 내게 전해주었다.” 그는 성천부사를 지낸 김 아무개 집의 여종으로부터 고려의 옛 가락을 배웠다고 했다. 그 곡이 저 유명한 개성 기생 황진이로부터 전해졌다는 것이다. 이야기의 진실성은 차치하고라도 신비스럽게 꾸며진 느낌이 든다. 황진이에 얽힌 사연은 너무나 세속화돼서 그녀를 거론하면 진실성이 사라질 듯하다. 하지만 황진이는 거문고 연주에서 최고라는 평을 받은 악사였고, 그녀가 소장한 거문고는 귀중한 물건으로 취급되어 19세기까지 전해졌다는 기록이 있을 정도다. 공교롭게도 김성기가 복원해 놓았다고 하는 옛 음악인 <삭대엽 평조 제일(數大葉 平調 第一)>의 곡은 황진이의 시조로 널리 알려진 “어져 내 일이냐 그릴 줄을 모르더냐 / 있으라 하더면 가랴마는 제 구태여 / 보내고 그리는 정은 나도 몰라하노라”이다. 그가 황진이로부터 전승됐다고 하는 고려의 옛 가락이 이 시조를 직접 가리키는지는 알 수 없으나 황진이가 전래한 음악과 관련성이 있을 법하다.
<청구영언>천한 직업인 악사를 스승으로 둔 왕족인 남원군은 스승이 죽은 뒤에도 사모하는 마음을 잃지 않았다. 그가 스승의 무덤을 찾아가 추모의 의식을 치르는 모습은 음악 하는 스승과 제자 사이가 얼마나 끈끈하고 절실한 정으로 연결되었는지를 인상 깊게 보여준다. 남원군 이설과 선전관(宣傳官) 이현정(李顯靖)을 비롯한 제자들이 스승을 그리워해 가기(歌妓) 대여섯 명을 데리고 무덤을 찾아가 술과 안주를 올렸다. 술을 붓고 나서 남원군이 직접 몇 곡을 연주하고, 다른 제자들은 각자 익힌 곡을 연주해 하루 종일 마음을 위로하다가 연주를 마치자 대성통곡하고 돌아왔다. 이때의 일을 신익(申熤)은 장례를 치를 때의 사연으로 묘사했다. “김성기가 죽자 이현정은 남원군과 함께 시신을 지고 광릉(廣陵)의 산에 가서 장사를 지냈다. 그때 하늘의 구름은 빛을 바꾸었고, 산골짜기에는 어둠이 몰려왔다. 새와 짐승들은 모여들어 구슬프게 울면서 오르내렸다. 둘은 큰 잔에 술을 따라 무덤 위에 뿌리고 서로 마주 보고 통곡하였다. 통곡을 마치자 거문고를 안고서 제각기 자기가 배운 것을 연주하였다. 연주를 채 마치지도 않았는데 백양나무에서 처량한 바람이 일어나 우수수 소리를 내었다. 둘은 거문고를 던지고 다시 대성통곡하였다. 길가를 지나던 사람들은 누구도 그들이 왜 그러는지를 몰랐다.”
<추재집>남원군은 스승의 장례를 치르고서 이런 시를 지었다. “靑山新葬伯牙琴(청산신장백아금) / 백아(伯牙)의 거문고를 막 청산에 묻었으니, 天下於今絶古音(천하어금절고음) / 천하에는 이제부터 옛 음악이 끊어졌네.”라고 하면서 거장을 잃고 난 세상의 적막감과 위대한 스승을 보낸 제자의 고독감이 필마 타고 홀로 왔다 홀로 간다고 표현했다. 김천택이 <청구영언>을 만들 때 당시 새로운 가곡 작품을 수집하는 경로가 쉽지 않았는데, 이러한 어려움에도 김천택은 선가자(善歌者)의 명성을 듣고 오랜 수소문 끝에 작품을 찾아내었다. 그는 선가자 6명을 발굴하여 ‘여항육인(閭巷六人)’으로 묶어서 편집하고, 발문을 붙여 발굴 경로를 밝혔다. 그중 ‘어은(漁隱)’의 명칭으로 김성기를 다음과 소개하고 있다. “나는 일찍부터 가벽(歌癖)이 있어 국조 이래의 명인과 여항인의 작품을 수집하였다. 유독 어은(漁隱) 김성기의 가보(歌譜)만은 이따금 세상에 전하여 읊조려지나 그 전보(全譜)를 아는 자가 드문 까닭에 널리 구하여도 얻지 못하여 마음이 항상 한스러웠다. 지난번에 서호 김중려(金重呂)군을 문욱재(文郁哉)의 처소에서 만났는데, 군은 즉 어은의 지기(知己)이다. 내가 그에게 말하기를, ‘그대는 일찍이 어은을 따라 머물렀으니 그가 지은 노래를 많이 기록하여 소장하고 있을 거라 생각하는데, 나를 위하여 모두 보여주겠는가?’ 하니, 그가 대답하기를, ‘나는 어은과 더불어 십수 년을 강호에서 함께 머무르며 그가 평소에 회포를 푼 것과 흥을 맡긴 것을 모두 기록해 두었다네. 그중에는 유연히 사람을 감동시키는 것이 많으나, 어리석은 사람들이 알아주지 않는 까닭에 상자 속에 모두 감추어 두고 호사가를 기다린 지 오래네. 그대가 이와 같이 말하니, 이 곡들이 장차 세상에 널리 전해지겠군.’하고, 드디어 그 전편을 건네주었다. 세 번 반복하여 읊어보니 산수에서 질탕하게 노는 맛을 얻은 것이 가사에 저절로 드러나서 표연히 세상 밖으로 높이 날아오르려는 뜻이 있었다. 대개 어은은 세상을 소요(逍遙)하는 한가로운 한 사람으로, 무릇 음률에 오묘하지 않음이 없었고 성품이 강산을 좋아하여 서강 가에 작은 집을 구하며 호를 어은(漁隱)이라 하였다. 맑게 갠 아침과 달뜨는 저녁이면 혹 버드나무 서 있는 물가에서 거문고를 연주하기도 하고, 혹 안개 낀 물결을 희롱하며 퉁소를 불기도 하며, 갈매기를 친압(親狎)하며 세상을 잊고 물고기를 바라보며 즐거움을 알아 스스로를 형해(形骸)의 밖에 놓았으니, 이것이 그가 자적(自適)하며 가곡을 뛰어나게 잘하는 까닭인가! 무신년(1728) 3월 16일, 남파노포(南坡老圃) 쓰다.”
<뇌연집>아무튼 18세기 풍류음악의 전개에서 금사(琴師) 김성기의 역할은 지대하다. 그는 고조(古調, 옛 곡조)·전승·신성(新聲, 새로운 창작곡) 창작·시조(時調) 창작·사후의 2종 악보 편찬과 거문고·비파·퉁소 등의 악기 계승 등 음악사적으로 많은 업적을 남기며 풍류방 음악의 기틀을 마련한 대표적인 인물이었다. 김성기와 관련한 업적 논의에서 그동안 가장 중시되었던 측면은 신성의 창작이었는데, 김성기는 상류층과 교유하며 고조를 신성 못지않게 중시하였다. 그로 인해 <낭옹신보> <평조 고조심방곡> 및 <삭대엽 평조제일>, 김천택 편 <청구영언> 소재 <이삭대엽> 8수를 남길 수 있었으며, <운소만고>의 「기악공김성기사」를 통해 고려의 구조까지 계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김성기는 당대 다른 음악인들과는 확연히 차별화될 만큼 많은 문헌에 일화가 수록되어 있는데, 대표적으로 정래교(鄭來僑)의 <완암집(浣巖集)>(1765)과 남유용(南有容)의 <뇌연집(雷淵集)>(1782), 조수삼(趙秀三)의 <추재집(秋齋集)>(1939), 이영유(李英裕)의 <운소만고(雲巢謾藁)>(연대미상), 김창업(金昌業)의 <노가재집(老稼齋集)>(1820), 이형상(李衡祥)의 <병와가곡집(甁窩歌曲集)>(1805) 등이 그 예이다. 또한 김성기가 생전에 후학들에게 남겨준 가락이 그의 사후에 <낭옹신보>(1728)와 <어은보>(1779)에 수록되었으므로 당시 음악에 대한 실제적 자료로 충분히 활용 가능하게 한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