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일본어 통역관 출신 부자 - 변승업

부(富)가 대대로 전해지는 비결

by 금삿갓

변승업(卞承業, 1623년∼1709년)은 조선 후기 사역원(司譯院) 소속 일본어 통역관이었다. 그는 1645년(인조 23) 식년시(式年試) 역과(譯科)에 장원한 형 변승형(卞承亨)과 함께 연벽(聯璧) 즉 형제 동방(同榜) 합격했다. 그는 총 합격자 10명 중 5등이었다. 관직은 종 2품인 가의대부(嘉義大夫)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조선 시대 최고의 부자로 인삼 무역을 했던 가포(稼圃) 임상옥(林尙沃)이 있고, 통역관 출신 부자로는 변승업 보다 10년 앞선 중국어 통역관이며 사돈관계인 장현(張炫)과 일본어 통역관 김근행(金謹行)이 있었지만 변승업에는 미치지 못한 모양이다. 물론 변승업의 부는 그가 단독으로 이룬 것이 아니라 조부 때부터 축적한 결과이다. 그의 자(字)는 선행(善行)이고, 본관은 초계(草溪)이다. 그는 장희빈(張禧嬪)과도 연결이 되는데, 장희빈의 외할머니가 변승업의 당고모이다. 그의 조상 계보는 고조부가 세조 즉위에 공을 세운 정난원종공신(靖難原從功臣)이었던 변옥동(卞玉東)이고, 증조부는 예빈시(禮賓寺) 참봉을 지낸 변희완(卞希完)이다. 조부인 변계영(卞繼永)은 정 3품 당상관(堂上官)인 절충장군(折衝將軍)을 지냈는데, 이 변계영이 바로 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의 유명소설인 <허생전(許生傳)>에 등장한 변 부자의 실제 모델이라는 추측도 있다. 아버지 변응성(卞應星)도 역과에 3등으로 합격하여 종 2품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올랐으며, 최고관직이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변승업의 어머니는 예산정씨로 사과(司果)를 지낸 정세담(丁世淡)의 딸이다. 정세담의 직위는 종 4품 무관 선략장군(宣略將軍)에 이르렀다. 변승업의 조부 변계영의 큰형 변계운이 사역원 첨정을 지낸 일본어 역관 윤성립의 장인으로, 윤성립과 그의 부인 변씨가 바로 희빈장씨의 외조부모이다.

변승업의 아버지 변응성(卞應星)은 첫 부인으로 찰방을 지낸 상주 방씨의 딸을 맞았으나 아들을 못 낳자, 후실 부인으로 예산정씨와 결혼했다. 후실과의 사이에서 다복하게 9남 1녀를 얻었다. 장남을 무과로 입신시켜 양반의 신분을 갖게 했으며, 나머지 아들들에겐 잡과에 응시토록 했다. 조선 잡과(雜科) 방목(榜目)에는 막내아들인 변승업을 포함하여 밑으로 있는 아들 6명이 모두 역과에 합격했다. 넷째와 다섯째 아들이 한학(중국어) 역관, 여섯째와 일곱째 아들이 몽학(몽골어) 역관, 여덟째와 아홉째 아들이 왜학(일본어) 역관이 됐다. 장원급제가 둘이고, 나머지도 모두 상위권 성적으로 합격한 것을 보면 당시 사역원의 역과 시험은 같은 출신 집안에서 입신하기 좋은 구조인 것 같다. 조부 변계영이 이룬 부를 계속 관리하기 위함인지, 변응성은 역관에서 은퇴한 후에 의주에 머물며 장사로 재산을 더욱 불렸다고 한다. 변승업은 내의관 출신인 이춘양(李春陽)의 딸 영천이씨와 혼인했다. 이 시기에 역관·의관·화원 등 중인층들끼리 주로 통혼을 한 모양이다. 그는 역과에 합격 이후 일본어 통역관으로서 부산의 왜관(倭館)에 자주 파견되어 통역을 맡았으며, 이때 청(靑) 나라와 직접교역이 불가능한 일본이 중개무역을 함으로써 조선의 역관들에게 막대한 이득을 안겨 주었다. 한 집안의 6형제가 3개 국어를 통역하는 통역관이니, 조선이 상대하는 모든 나라와 무역할 수 있는 위치가 된 것이다. 더욱이 형제가 협력하면 수수료 없이 중계무역(中繼貿易)도 가능해진다. 변씨 가문은 청나라의 비단을 일본에 가져다 팔고, 일본의 은을 청나라로 가져오는 등 청(靑)과 왜(倭)의 중계무역으로 막대한 부를 축적할 수 있었다.

변승업의 간략한 경력 즉 연보를 살펴보자. 역과에 합격한 후 동래의 왜관을 주무대로 활동하다가 1664년(현종 5년)에는 왜학훈도(倭學訓導)가 되었다. 왜학훈도는 참상관(參上官) 즉 종 6품에서 당하관(堂下官)까지의 품계로 동래에 근무하면서 왜관과의 외교와 무역 및 일본어 교육 통역을 담당했다. 훈도는 당시 배통사(陪通事)·소동(小童)·사령(使令) 등 10여 명을 거느리고 일을 했다. 이는 대일본 및 대마도와의 외교와 무역을 총 관장하는 역할이고 동래부사의 지휘를 받았다. 1666년 현종(顯宗) 7년에 그의 장남 변이창(卞爾昌)이 중국어 역과에 차석으로 합격한다. 아들은 나중에 정 2품 자헌대부(資憲大夫) 까지 승진한다. 1671년(현종 12년)에는 역관에게 무관직을 제수하여 일본 사신을 대신 맞이토록 하자는 비변사(備邊司)의 장계(狀啓)로 정 3품 당상관 무관직인 절충장군에 제수된다. 이를 기화로 그의 차남 변이흥(卞爾興)도 무과에 응시하여 합격하고 부사과(副司果)의 관직에 오른다. 중인의 신분에서 양반의 지위로 탈바꿈하게 되는 것이다. 1680년 (숙종 6년)에 일본의 4대 관백(關白) 도쿠가와 이에쓰나(德川家綱)가 사망하자 1681년(숙종 7년) 1월에 문위사(問慰使) 겸 조의사(弔儀使)로 임명되어, 당하관 이준한(李俊漢)을 대동하고 대마도에 파견되었다.

다음 해인 1682년(숙종 8년) 5월 8일부터 11월 14일까지 약 6개월 보름간 5대 쇼군 도쿠가와 쓰나요시(德川綱吉)의 요청으로 파견되는 사절단에 합류한다. 정사(正使) 경상도관찰사 윤지완(尹趾完)과 부사(副使) 홍문관 교리 이언강(李彦綱)의 수석 통역관으로서 일본에 갔다 왔다. 이 공로로 길이 든 말인 숙마(熟馬) 1 필과 특별히 종 2품 가선대부로 가자(加資)되었다. 1684년(숙종 10년) 1월, 탐학과 비리로 같은 서인 측(특히 소론)에게서도 맹렬히 비판을 받았던 동래부사 소두산(蘇斗山)과 함께 대마도주(對馬島主)에게 사사로이 뇌물을 받은 일로 의금부에 투옥되었다. 송시열의 문하였던 소두산은 1월 말에 무혐의로 방면되어 공흥도 관찰사로 임명되었지만 통역관에 불과했던 변승업은 6월 말에 이르러서야 방면될 수 있었다. 1686년(숙종 12년) 기사환국(己巳換局)의 여파로 노론 과격인물이었던 이사명(李師命)이 경신환국 후 남인을 함정에 빠트려 척살할 목적으로 왜와 내통했던 죄가 논죄될 때 1681년(숙종 7년) 대마도 파견 당시 대동하였던 당하 역관 이준한(李俊漢)과 함께 공범 혐의를 받고 체포되어 문초를 받았다. 1696년(숙종 22): 9월 9일 내의관(內醫官) 영천 이씨 이춘양의 딸인 부인 사망했다. 이때 왕의 관(棺)과 같은 옻칠한 관을 사용하여 문제가 되자, 이를 무마하기 위해 요로에 수 십 만금을 뿌릴 만큼 자산을 갖추고 있었다.

그와 그의 조상들이 부를 축적하는 과정을 상세하게 기록한 문헌은 없다. 다만 그 당시 역관들의 밀무역과 중개무역에 관해서는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 있다. 변승업 가문은 이런 무역업만 운영한 것이 아니라 금융업 즉 금전 대출로 더 큰 부를 쌓았을 것이다. 임상옥은 인삼 무역으로 거부가 되었는데, 그 성공의 연유는 두 가지 설이 있다. 이조판서(吏曹判書) 박종경(朴宗慶)이 궁했을 때 모친상을 당하자 임상옥이 4,000냥을 주어 장사를 치르게 한 것이 거부가 된 계기가 되었다고 한다. 그의 누이가 순조(純祖)의 생모 수빈(綬嬪) 박씨인데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의 총애를 입었던 실세였다. 박종경의 후원으로 임상옥이 국경 지방의 인삼 무역권을 독점하면서 거부가 되었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조선 후기 문신 이유원(李裕元, 1814~1888년)은 <임하필기(林下筆記)>에서 홍삼(紅蔘)의 시원(始源)을 밝히면서 임상옥의 치부(致富)에 관한 다른 이야기를 기록했다. 원래 중국에서는 붉은 삼인 자단삼(紫團蔘)을 높이 쳐주는데, 이것은 지금의 산서성(山西省) 태항산(太行山)과 난약산(蘭若山)에서만 나와서 천하의 보배로 여겼다. 어느 날 임상옥이 백삼(白蔘) 한 움큼을 따뜻한 아랫목에 두고 잊었는데, 나중에 보니 색이 붉게 변해 있었단다. 임상옥이 시험 삼아 북경에 가서 붉게 변한 삼을 중국 사람들에게 보여주자 크게 놀라면서 “촉삼(蜀蔘)이 동국(東國)에서 생산되는가?”라면서 후한 값을 쳐주었다. 여기에 착안한 그가 다음번부터는 본격적으로 홍삼을 제조하여 인삼보다 훨씬 고가에 판매함으로써 큰 이문을 보았단다.

변승업 가문을 포함한 역관들의 치부 상황에 대한 기록의 일 단면을 볼 수 있는 것이 연암 박지원이 지은 <열하일기(熱河日記)> 내용 중 <옥갑야화(玉匣夜話)>이다. <옥갑야화>는 연행(燕行)의 과정에서 옥갑(玉匣)이란 곳에서 하루 밤을 묵으면서 비장(裨將)들과 이야기를 한 내용이다. 여기에 그 유명한 소설 <허생전(許生傳)>도 포함되어 있다. 연행의 경험이 많거나 들은 풍월이 많은 비장들이 돌아가면서 역관들의 행태를 이야기한 내용들이 기록되어 있다. 빌린 돈을 떼어먹으려고 역병에 걸려 죽었다고 거짓말한 역관이 정말 역병에 걸려 죽은 사례도 있고, 아주 청렴하여 40년간 통역을 해도 은자 한 푼 만지지 않은 사람도 있다. 기생을 구해주고 그 보답으로 임진란의 구원병 파견의 허락을 얻어낸 홍순언(洪純彦) 이야기와 중국 갑부 정세태(鄭世泰)의 사연도 있다. 여러 비장들의 이야기를 들은 뒤에 결정적으로 어떤 비장이 변승업이 병에 걸려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 대한 이야기를 했다. 그러자 박지원도 본인이 윤영(尹暎)이란 사람에게 들은 변승업의 조부가 치부한 비결을 기록해 놓았다. 그 내용은 이렇다. “나는 일찍이 윤영(尹映)이란 이에게 변승업의 부(富)에 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의 부는 애초부터 유래가 있어서 승업의 조부 때에는 돈이 몇 만 냥에 지나지 않았더니, 일찍이 허씨(許氏) 성(姓)을 지닌 선비의 은(銀) 십만 냥을 얻어서 드디어 일국의 으뜸이 되었던 것이 승업에게 이르러서 조금 쇠퇴된 셈이다. 그가 처음 재산을 일으킬 때에 역시 운명이 있는 듯싶었다. 허생(許生)의 일로 보아서 이상스러우니, 허생은 끝내 자기의 이름을 드러내지 않았으므로 세상에서는 그를 아는 이가 없었다 한다. 이제 윤영의 이야기를 적으면 다음과 같다.” 이렇게 서두를 잡고, 이어서 소설 <허생전>을 기록했다.

변승업의 치부(致富)에 대한 태도와 재물을 관리하는 방법 등에 관한 대략적인 내용을 어떤 비장의 입을 통해 박지원은 다음과 같이 기술해 놓았다. “변승업(卞承業)이 중한 병에 걸리자 곧 변돈(邊錢 : 이자를 무는 빚돈) 놀이의 총계를 알고자 하여 모든 과계(夥計) 장부(帳簿)를 모아 놓고 통계를 내어본즉, 은(銀)이 모두 50여 만 냥이나 적립되었다. 그의 아들이 청하기를, ‘이를 흩는다면 거두기도 귀찮을뿐더러 시일을 오래 끌면 소모되고 말 테니 그만 여수(與受 : 주고받기)를 끊는 것이 옳겠습니다.’ 했을 때 승업은 크게 분개하면서, ‘이는 곧 서울 안 만호(萬戶)의 명맥(命脈)이니 어째서 하루아침에 끊어버릴 수 있겠느냐.’ 하고는, 곧 빨리 돌려보내게 하였다. 승업이 이미 나이 늙으매 그의 자손들에게 경계하기를, ‘내 일찍이 공경(公卿)들을 섬겨본 적이 많은데, 그들 중에 나라의 권세를 잡고서 자기의 사사(私事) 이익을 꾀하는 이 치고 그 권세가 삼 대를 뻗는 이가 없더란 말이야. 그리고 온 나라 사람 중에서 재물을 늘리는 이들이 으레 우리 집 거래를 표준 삼아서 오르내리는 것도 역시 국론(國論)인 만큼, 이를 흩어 버리지 않는다면 장차 재앙이 미칠 거야.’ 하였다. 그러므로 이제 그 자손이 번창하면서 모두들 가난한 것은, 승업이 만년에 재산을 많이 흩어버린 까닭이다.” 이로 미루어 보아 변승업은 누대(累代)에 걸쳐 거부를 이루었으나, 이로 인하여 신상이나 가문에 화가 미칠까 염려하는 태도를 보인다.

비록 조선 후기를 대표하는 거부였으나 중인인 역관에 불과한 신분 탓에 제약이 컸으며, 사돈인 장현(張炫)이 문관의 공적이 되어 수차례 화를 입고 결국 몰락하는 모습을 직접 목격하기도 했기에 장현과는 반대 행보를 걸었을지도 모른다. 이에 막대한 뇌물과 대출을 통해 집권 당파와 실세들의 비위를 맞췄으며, 일찍이 관직에서 물러나고 의복과 관대를 일부러 낡거나 뿔로 된 것에 옻칠과 금칠을 한 것으로 사용하는 등 문관에게 몸을 낮춘 덕분에 갑술환국과 무고의 옥 후에도 무사할 수 있었다. 노·소론이 공동으로 펼친 역관의 지위 및 권한을 대폭 축소하며 탄압하는 정책 아래에서도 화를 입지 않았다. 변승업의 부는 박지원의 표현에 따르면 한양의 상거래 기준으로 사용된다. 즉 사고파는 물건의 가격 결정이나, 금융 거래의 이자율 결정 같은 중요한 기능 말이다. 이는 바로 그의 사금융(私金融)이 오늘날 한국은행의 기능을 한 것이다. 그가 어느 날 갑자기 대출 금액을 회수하면 한양의 모든 경제가 숨통이 막히게 되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허생전>의 허생이 매점매석으로 독점권을 형성한 뒤에 가격과 물량을 마음대로 조절하여 큰 이문을 남기는 것과 흡사하다.

그런데도 그는 생전에 부를 과시한 부분이 많았다. 1652년(효종 3년)에 죽은 부친 변응성의 장례식에 당대의 내로라하는 역관들이 모였다. 그 장례식은 가히 권세가문의 장례식과 견줄 만큼 호화롭고 사치스럽다. 상여가 나가면서 변응성의 아들들과 며느리, 손자, 손녀들이 곡을 하며 뒤를 따른다. “가선대부 변응성”이라는 만장(挽章)이 바람에 나부낀다. 변응성의 아홉 아들 중 둘째 변승훈만이 스물아홉의 나이에 요절하고 나머지는 모드 무과나 잡과로 등용되었으니 그 규모가 가히 볼 만했을 것이다. 변승업은 아버지 변응성의 장례를 잘 치렀다는 인사를 핑계로 3 정승과 이조, 호조, 병조, 사헌부 등의 요로를 맡고 있는 고관의 집들을 돌며 값비싼 선물을 답례형식으로 돌렸다. 이 과정에서 조정의 중요한 정책 정보와 권력의 이동을 감지할 수 있었다. 한 번은 임신한 질녀가 옥교(屋轎)를 탄 것이 문제가 되었다. 평교자(平轎子)는 가마의 사방이 트여 있는 것이고, 옥교자(屋轎子)는 말 그대로 집처럼 사방이 막혔고 지붕과 문이 있는 가마이다. 원래 양반의 여인들도 평교자를 탔으나, 세종(世宗) 때에 남녀유별을 강화하기 위해 사대부의 부녀자는 모두 옥교자를 타도록 했다. 그러다가 1469년 예종(睿宗) 원년에 옥교자는 당상관의 어머니와 아내는 상시로 탈 수 있고, 음직(蔭職)을 받은 자의 신부(新婦)는 혼례식 때에만 탈 수 있었다. 즉 옥교자는 여성의 신분 척도였다. 그런데 이를 어기고 부를 과시한 것이다. 그래서 벌금을 물고 휘하의 식솔들에게 생긴 경조사에는 직접 참석하여 치하하고 축하해 주는 등 평판에 대한 관리를 한다. 시중의 동향을 읽고 시전상인들이나 어려워 돈을 빌리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별 조건 없이 빌려주기고 한다. 이 시절부터 변승업의 부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기 시작했고, 국중(國中) 거부라는 별명이 따랐다.

1696년 숙종 22년에 변승업에게 3남 6녀를 낳아준 부인 영천 이씨(永川 李氏)가 그의 곁을 떠난다. 아내가 사망하자 왕족에게만 사용이 허용된 옻칠을 한 관을 쓰는 등 거대한 장례식을 거행했다. 이 일로 조정대신들 사이에 크게 미움을 사게 되고, 물의가 일어나자 조정의 중신들에게 수만금을 뿌려 사태를 무마시키기도 했다. 변승업은 많은 돈을 써서라도 양반의 지위를 얻고자 무척 노력했다. 아들 변이창을 양반 반열에 올려놓기 위해 진휼청(賑恤廳)에 쌀 50석을 바치고 가설첨지첩(加設僉知帖)을 받으려 했었다. 그러나 진휼청 대간이 가설직은 선비직, 즉 사족(士族)이라야 할 수 있다고 반대하여 뜻을 이루지 못했다. 그는 현종 2년에야 사족에 비해 10석을 더 납부하고 동지첩(同知帖)을 받을 수 있었다. 변승업과 그의 가문은 외국어를 잘하는 특기를 바탕으로 부를 일구어 조선 최고 부자의 반열에 올랐지만 86세로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사망 직전 회계장부를 확인해 대출 상황을 헤아리니 자그마치 은 50만 냥에 달하였다고 한다. 변승업은 후손들에게 자신이 시중에 푼 대출금 은 50만 냥을 절대 모르는 척하고 받으려고 하지도 언급하지도 말라는 유언을 남겨 그의 사후에 발생할 가문의 화를 막았다. 박지원은 이 일로 변승업의 가세가 기울어 후손들이 가난해졌다고 하나, 그렇지 않다. 그가 가진 재산 중 현금으로 남에게 대출해 준 것만 탕감했지, 실제 보유하고 있던 전답이나 가옥 등 부동상과 시장을 지배할 수 있는 각종 이권은 그대로 후손에게 상속이 되었고, 대대로 역관의 지위를 누렸기 때문에 부가 말라버릴 수가 없다. 변승업의 생전에 장남 변이창에게 아들이 없어서 변정로를 양손(養孫)으로 삼았다. 그런데 변승업이 죽고 난 후에 아들 변이창이 변정로를 파양하고 조카 변정태(卞廷台)를 아들로 삼았다. 변정태 마저 죽고 난 후에 변이창의 아내가 죽자 변정태의 아들 변국신(卞國臣)이 상속자로 상복을 입는 문제와 양자의 상속권으로 분란이 생겼다. 영조(英祖) 10년(1734) 임금에게 보고되어 조정의 논란 끝에 영조가 원래대로 변정로의 핏줄로 정한 사례가 있다.

변승업이 죽은 이후 변씨 가문은 어떻게 됐을까? 장남이 친아들이 없어서 양자를 들이는 등 가계를 잇는 부분에서는 쇠퇴의 조짐이 보였지만 부자 망해도 3년 먹을 것 있다고 그 많던 부가 일거에 흩어지지는 않았다. 그들의 후손에 따르면 변씨 가문은 변응성 대부터 초계 변씨 또는 밀양 변씨의 족보를 쓰지 않고, 서울에 사는 그들 집안만의 경성보(京城譜, 물론 이런 이름은 나중에 붙였지만)를 만들었단다. 아무튼 서울 묵동, 태능 일대의 주변 땅이 변승업 가문의 땅이었다. 김양수 청주대 역사과 명예교수의 논문에 따르면, 옛날 교통의 요지였던 봉화산 아래 일대에 밀양 변씨 묘지가 산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망우리고개에서 변이표(卞邇標)의 묘지 상석이 무너진 것을 찾았고, 옛 육군사관학교 후문에서 남쪽으로 약 1km 되는 곳에서 변승업의 백부(伯父)인 군관 변응관(軍官 卞應寬)과 그 일족의 산소 약 6기를 찾았단다. 1m가 넘는 비갈(碑碣)과 하얀 상석이 양반집안 묘비보다 훌륭하였단다. 변승업의 묘지는 실전되었는데, 지금의 상봉터미널 근처 이화여대 생활관지역이 아닐까 추정한다. 19세기에 편찬된 변씨의 구보(舊譜)에는 역과 합격자와 관직이 상세하였는데, 밀양 변씨 역과 합격자가 106명이다. 아마 조선시대 역관 가운데 가장 많은 당상관(堂上官)을 배출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개화기의 대표적인 역관 변원규(卞元圭,1837∼1896)는 변승업의 후손으로, 역관 변광운의 아들로 태어나 백부 변광원에게 양자로 들어갔다. 조부와 양부가 모두 의원인데, 변원규는 19세 되던 1855년 역과에 장원하면서 역관으로 나섰다. 조선은 1876년에 강화도조약을 맺으면서 청나라가 아닌 외국과 근대적인 조약을 맺기 시작했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의 외국으로부터 조선을 지키려면 자체적으로 무력을 갖춰야 했다. 조선정부는 구체적으로 무력을 갖추기 위해 1880년 4월 25일에 변원규를 청나라에 보내 이홍장(李鴻章)을 만나게 했다. 변원규는 통역만 아니라 국제정세에 밝았고, 일개 역관이 아니라 외교관으로 활동했음을 알 수 있다. 변원규의 아버지도 추운 겨울에는 순라군들의 밤참을 만들어 주며 인심을 샀다. 임오군란 때에 성난 군사와 민중들에 의해 수많은 권력가들의 집이 파손되고 불에 탔지만, 변원규의 집은 무사하였다. 화가 오원(吾園) 장승업(張承業)도 그의 집에 식객으로 얹혀살며 그림을 그렸는데, 그의 작품이 많이 전하게 된 것도 변원규 덕분이다. 변씨 집안이 창성한 까닭은 변승업의 유훈을 후손들이 잘 지켰기 때문이라고 봐야 한다. 변원규는 조미통상조약에도 한몫을 맡았다. 역관으로는 드물게 서울특별시장인 한성부 판윤(정 2품)까지 승진한 것도 그의 외교력과 행정능력을 높이 산 결과일 것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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