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노비 출신 나무꾼 시인 – 정초부(鄭樵夫)

굶주림에서 나오는 시의 진실

by 금삿갓

정초부(鄭樵夫, 1714~1789)는 조선 후기 영조와 정조 시대, 즉 조선의 르네상스라 불리는 문예 부흥기에 살았던 노비이며 나무꾼(樵夫 : 초부)이었다. 그는 당시 경기도 양평(당시 양근)의 명문가였던 여춘영(呂春永) 집안의 가노(家奴)로 태어났다. 여씨 집안의 세거지는 지금의 경기도광주시 남종면 수청리(水靑里)이다. 수청리는 당시에는 양근현(楊根縣)에 속했고, 우리말로 물푸레여울인 수청탄(水靑灘)이 여기에 있었다. 지금도 수청리에는 이 집안을 중흥시킨 영의정 여성제(呂聖齊) 대부터 내려오는 오래된 사랑채 한 채가 남아 있다. 다산 정약용 집안을 비롯한 명문가들과 나란하게 이 일대에서 명망을 지키며 대를 이어 문과 급제자와 쟁쟁한 명사들을 배출했다. 여춘영은 여선응(呂善應)의 둘째 아들로 여선장(呂善長)의 양자(養子)로 들어가 영의정을 지낸 여성제의 양(養) 고손자로 집안을 이었다. 여춘영은 여동근(呂東植)과 여동식(呂東根)을 낳았는데, 두 아들은 모두 문재가 뛰어났고 현달했다. 이들은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과도 교분을 맺어 만년의 다산과 자주 오갔다. 여춘영은 문과를 치르지 않은 채 시인으로 활동했고, 참봉 등의 음직을 제수받았으나 한 번도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그의 문집 헌적집(軒適集)에 정초부에 대한 시(詩)가 많이 있다. 정초부는 바로 이 혁혁한 명문가 소유의 종이었고, 그가 젊은 시절 모셔야 했던 주인이 바로 여춘영이었다. 문집에는 정초부와 함께 지은 시가 여러 편이고, 아예 정초부를 대상으로 지은 시가 10여 편에 이르며, 심지어 정초부가 죽었을 때 지은 제문까지 실려 있다. 그 정초부 제문을 토대로 추정하면, 1714년에 출생하여 1789년에 사망했다. 여춘영보다 20세가 많은 나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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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문에서 “그 주인의 친구이자 그 마을에 사는 자는 실로 헌적(軒適)뿐인데, 그 두 아들을 데리고 큰 술잔 하나를 가지고서 그 무덤에 찾아왔노라”라고 한 대목을 보면, 여춘영은 본인이 주인임을 명확하게 밝히지 않았다. 양반 신분이 노비의 무덤에 잔을 올리고, 제문(祭文)과 만시(挽詩)를 짓은 것이 체면상 거리끼어 주인의 친구라고 완곡하게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그 마을에 함께 산 기간이 34년이라고 한 언급을 볼 때 더욱 그렇다. 여춘영은 1789년 정초부가 76세로 사망하자 만시 12수를 남겼는데, 그 가운데 “어릴 때는 스승, 어른이 되어서는 친구로 지내며, 시에서는 오로지 내 초부 뿐이었지. [少師而壯友(소사이장우), 於詩惟我樵(오사유아초)]”라는 구절이 있다. 그를 묻은 후에 지은 시를 보면 그가 정초부를 생각하는 마음이 남다른 것을 느낄 수 있다.

黃壚亦樵否(황로역초부) / 저승에서도 또 나무하는가?

霜葉雨空汀(상엽우공정) / 서리 맞은 잎은 빈 물가에 떨어지는데

三韓多氏族(삼한다씨족) / 삼한 땅에 명문가 많으니

來世托寧馨(내세탁녕형) / 내세에는 그런 집에 나시오.

이렇듯 여러 정황으로 보아 정초부는 여춘영이 어릴 때부터 집에서 부리던 솔거노비(率居奴婢) 임에 틀림이 없다. 그럴 때는 도련님의 종으로서 또는 시를 가르치는 스승으로 생활하다가, 여춘영이 성장하여 가정의 대소사를 결정하는 권한을 가질 무렵에 정초부를 면천(免賤)시켰거나 외거노비(外居奴婢)로 풀어 준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제문에서 한 마을에 산 것으로 기록해 두었으니 최소한 외거노비이거나 면천한 것이다. 여춘영은 정초부의 재능을 한양의 사대부사회에 널리 퍼트렸다. 당시 세상이 정초부의 이름을 알게 된 것은 주인 덕분이었다.

Screenshot 2025-12-10 at 00.48.24.JPG <도강도의 일부>

역사적으로 한시나 한문은 사대부의 전유물이었다. 양민들도 어려운데, 더욱이 노비는 한문 공부에 접근하기가 더 어려웠다. 그러므로 노비가 한시를 짓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누구든 시인이란 호칭을 받는 것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렇지만 정작 사대부는 시인으로 불리는 것을 꺼려했다. 시는 사대부의 풍류(風流)와 여기(餘技)일 뿐, 본분 또는 본업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시를 즐기고 시를 잘 짓고 싶었지만 시인으로 불리기보단 학자로 불리기를 바란 것이다. 오히려 중인(中人) 이하 신분층에서 시를 즐겨 짓는 사람들은 시인으로 불리기를 선호했다. 사대부가 아니면서 사대부의 고유한 행위를 향유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중인도 그런 지경이니, 노비가 시를 짓는다는 것은 감히 넘볼 수조차 없는 사대부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는 행위였다. 그런데 정초부는 주인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적 고상한 행위를 주인과 함께한 것이다. 노비가 시인으로 불린다는 것은 당시에는 개천에서 용이 난 것만큼 큰 의미를 지닌다. 그렇다면 애초에 여씨 집안의 노비 정초부는 어떻게 시인이 되었을까? 강준흠(姜浚欽)이 쓴 <삼명시화(三溟詩話)>에는 정초부가 시를 배운 동기를 설명하고 있다. 그가 어렸을 때 날마다 낮에는 나무를 하고, 밤에는 주인을 모시고 잠을 잤다. 주인과 자제들의 글 읽는 소리를 귀동냥으로 듣고, 밤에는 몰래 붓글씨를 익히며 스스로 학문을 깨우쳤다. 어깨너머로 공부를 배운 것이다. 주인이 이를 기특하게 여겨 자제들과 함께 글을 읽도록 배려했는데 학업 성장이 빨랐다. 특히 과거시험에 필요한 과시(科詩)를 잘 지어 주인집 자제들이 그로부터 도움을 받을 정도였다.

Screenshot 2025-12-10 at 00.46.40.JPG <도강도의 컷>

황윤석(黃胤錫)의 <이재란고(頤齋亂藁)>에도 비슷한 기록이 전한다. 양근현에 사는 나무꾼이 본래는 종인데, 어려서부터 시를 잘 지었다. 주인을 위해 과거 시험장에 두 번이나 들어가 글을 써줘 급제를 시켰으며, 이에 주인은 그 대가로 그를 양인으로 풀어줬다는 것이다. 변재민(邊載岷)이란 아이가 전해준 말을 황윤석이 기록에 남겼다. 어디까지가 진실인지를 곧이 믿기는 어려우나 그럴 법하다. 아무튼 과거공부를 하는 명문가 자제들을 모시면서 그는 어깨너머로 공부를 하고, 그 지식을 바탕으로 시를 지은 것은 분명해 보인다. 노비로서 사대부들처럼 체계적인 공부와 독서가 뒷받침 되지 않은 상태에서 시를 짓는 것은 발전에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물론 감각적으로 시상을 떠올리거나 시를 얽는 재주가 뛰어나서 한시를 유려하게 지을 수는 있다. 그의 시에서 학문이 깊은 시인이 지은 시와 같은 품격을 논하기에는 어딘가 부족할 수도 있다. 그러나 어려운 글자나 현학적(衒學的)인 표현을 해야만 훌륭한 시가 되는 것이 아니다. 쉽고 평이한 어휘로 마음속의 소회를 매끄럽게 잘 표현하여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동을 받게 하면 되는 것이다. 이백(李白)의 <산중문답(山中問答)>에 어려운 한자가 없지만 모두들 절창이라 하지 않는가. 정초부의 서정성이 두드러지는 대표작을 한번 음미해 보자.

東湖春水碧於藍(동호춘수벽어남) / 동호의 봄물결은 쪽빛보다 푸르고

白鳥分明見兩三(백조분명견양삼) / 또렷하게 보이는 건 두세 마리 해오라기!

柔櫓一聲飛去盡(유노일성비거진) / 부드러운 놋 소리에 날아가 버리니

夕陽山色滿空潭(석양산색만공담) / 노을 속 산 빛만이 빈 물에 가득하다.

Screenshot 2025-12-10 at 00.38.05.JPG <정초부 제문의 일부>

그가 이 시에 사용한 글자는 현재의 상용한자 1800자에 대부분 해당되고, 남(藍)·노(櫓)·담(潭) 세 글자만 포함되지 않는다. 고등학교 한문 실력이면 충분히 읽고 뜻을 파악할 수 있는 평이한 한시이다. 그뿐만 아니라 시에서 나타내는 회화적 이미지도 대단히 선명하다. 정초부 특유의 '소리(柔櫓一聲)'와 '고요함(滿空潭)'의 대비가 돋보인다. 고된 노동 중에 잠시 멈춰 바라본 자연의 정경을 순간적으로 포착하여, 그 어떤 사대부 시인보다도 맑고 깊이 있는 경지를 보여준 것이다. 이렇게 수월한 서정시이니 만큼 당시 대표적인 시의 하나로 꼽힐 만하다. 정초부가 시인이라는 것을 온 세상에 퍼트린 바로 그 작품이다. 이 시가 얼마나 유명하고 폭넓게 퍼졌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로 김홍도(金弘道)가 그린 <도강도(渡江圖)>이다. 넓은 강을 건너는 평화로운 장면을 그린 산수화는 현재 두 폭이 전해지는데, 이 그림에 붙어 있는 제화시(題畵詩)가 바로 위의 시이다. 그림에는 정초부의 작품이라고 밝혀 놓지 않아서 김홍도의 시로 오해하는 사람도 있다. 김홍도가 화제시의 작가를 굳이 밝히지 않은 것은 그 시절에 이 시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기 때문일 수도 있겠다. 서정성이 풍부한 절구(絶句)가 그의 장기이다. 정초부는 신분이 어찌 되었든 본인의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나무를 해다 팔았다. 당시에는 수운(水運)을 이용하여 양평과 가평 일대에서 동대문까지 땔감을 실어왔다. 정초부도 거기에 모인 많은 나무꾼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나무꾼 생활을 묘사한 대목이 시에 자주 등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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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벽에 지게를 지고 동대문으로 나무를 팔러 들어오는 고단한 삶이 서정적으로 그려지는 것도 있지만, 가난한 천민의 곤궁한 생활상을 표현한 작품도 없지 않다. 그의 시구 가운데 “낙엽에는 쌀을 꾸는 편지를 자주 쓴다.[黃葉頻題乞米書(황엽빈제걸미서)”라는 구절도 있을 만큼 굶주림은 그의 끼니였다. 또 다른 작품에서 “밤중에 다락에 오른 건 달빛 구경이 아니고[半夜登樓非玩月(반야등루비완월)], 사흘 아침 곡기 끊은 것도 신선됨이 아닐세.[三朝辟穀未成仙(삼조피곡미성선)”라는 시구로 곤궁한 삶을 시적으로 완곡하게 표현했다. 굶주림을 묘사한 시 가운데는 명작이 있다. 굶주림을 참다못해 관아에 환곡미(還穀米)를 얻으러 갔으나, 관아 호적에는 아예 그의 이름이 없어 곡식을 빌리는 것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했다. 낙담한 그는 관아의 다락에 올라가 이 시 <환곡을 구걸하며(乞糶, 걸조)>를 지었다.

山禽舊識山人面(산새구식산인면) / 산새는 진작부터 산 사람 얼굴을 알건만

郡藉曾無野客名(군적증무야객명) / 군의 호적에는 아예 들 늙은이 이름이 없구나.

一粒難分太倉粟(일립난분태창속) / 큰 창고의 쌀을 한 톨도 나눠 갖기 어려워

高樓獨倚暮烟生(고후독의모연생) / 높은 다락에 홀로 기대니 저녁연기 피어나네.

일설에 따르면, 비렁뱅이가 시를 읊조린다는 보고를 군수가 듣고서 설마 천한 자가 시를 지었으랴, 하고 불러다가 다른 제목을 주어 시험했다. 정초부가 바로 시를 지어내자 군수가 깜짝 놀라 크게 칭찬하고 쌀을 하사한 뒤 그 사실을 널리 알렸단다. 그로부터 정초부의 이름이 세상에 두루 퍼졌고, 사대부들이 다투어 정초부와 시를 주고받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런 연유로 해서 정초부는 일약 양근 지방의 명사 반열에 끼이게 되었다. 그가 주로 머문 월계협(月溪峽)은 현재의 팔당대교 부근 협곡이다. 수륙 교통의 요지였던 이곳을 지나는 사대부들은 정초부를 떠올리고 그를 만나보고 싶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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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년 원세순(元世洵)이 편찬한 한시선집인 <병세집>(幷世集)에는 조선 후기에 활동하던 시인 300명의 시가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그의 시가 11수를 기록하고 작가를 아예 월계초부(月溪樵夫)라고 칭했다. 또 다른 기록에는 수청탄(水靑灘)에 사는 나무꾼이라 하여 수청초부(水靑樵夫)로 부르기도 했다. 수청(水靑)이라면 우리말 물푸레의 한역(漢譯)일 것이다. 물푸레여울도 팔당대교 부근에 있었다. 어쨌든 그는 18세기 후반에서 19세기 초반에 이 지역의 상징적 인물로 떠올랐다. 석북(石北) 신광수(申光洙)는 <관서악부(關西樂府)>를 지은 당대의 명사로서 유명한 시인인데 그가 여주를 가기 위해 월계를 지날 때이다. 그는 나무꾼 시인의 소문을 듣고 그를 만나려 했다. 그러나 그가 나무하러 가서 만나지 못하자 몹시 아쉬워하며 “賣柴朝得江船米(매시조득강선미) / 아침에는 나무 팔아 배 위에서 쌀을 싣고, 倚樹秋吟峽寺鍾(의수추음협사종) / 가을에는 나무에 기대 산속 절의 종소리를 읊네.”라는 시를 써서 나중에라도 꼭 만나보고 싶다는 소망을 밝혔다. 그처럼 정초부는 많은 사대부들이 만나고 싶어 하는 대상이 되었다. 지금의 서울 동숭동에 있는 형조판서 이유수(李惟秀)의 정원에서 이조판서 윤급(尹汲)과 대제학 남유용(南有容), 우의정 유언호(俞彦鎬) 등이 포함된 13명의 노론의 핵심 인물들이 동원아회(東園雅會)라는 시회를 열었을 때도 정초부가 초빙되어 시를 주고받았다. 이 성대한 모임을 기념하기 위해 그린 <동원아집도(東園雅集圖)>가 있다. 순조 때 영의정을 지낸 남공철이 이 그림에 기문(記文)을 써서 한 사람 한 사람의 태도와 표정을 묘사했다. 그 가운데 패랭이를 쓰고 도롱이를 입고 구부정하게 대청 아래에 서서 시를 바치는 사람이 바로 수청초부 정일(鄭逸)이라고 밝혔다. 정일(鄭逸) 본명이 아니고 누항(陋巷)에 묻힌 일사(逸士)를 나타내는 말일 것이다. 수원과 안동부사를 역임한 백우(伯) 김상묵(金尙黙)은 그와 주고받은 시집을 <백우초창시권(伯愚樵唱詩卷)>으로 만들기도 했다. 이 시권에 우의정 역임의 몽오(夢梧) 김종수(金鍾秀)가 서문을 써주었다. 정초부는 아예 자신의 이름을 숨겼다. 그의 심경과 처신을 <과객에게(贈過客)>라는 시에서 엿볼 수 있다.

江上樵夫屋(강상초부옥) / 강가에 있는 나무꾼 집일 뿐

元非逆旅家(원비역여가) / 원래 과객의 여관이 아니라오.

欲知我名姓(욕지아명성) / 내 성명을 알고 싶다면

歸問廣陵花(귀문광릉화) / 광릉에 돌아가 꽃에게 물으시오.

KakaoTalk_20251210_002735395.jpg <김홍도의 도강도>

그 시절 노비는 사람이 아닌 재산으로 취급되었으며, 교육은커녕 인간적인 대우조차 기대하기 어려운 최하층 신분이었다. 그런데도 그는 영민한 머리와 감성을 가지고 태어났고, 태어난 곳도 다행히 그의 능력을 알아주는 주인인 여씨 가문이어서 시인으로서 이름을 남길 수 있었다. 그가 남긴 작품은 이런저런 10여 권의 시선집에 실려 전한다. 그는 그만의 시집 <초부유고(樵夫遺稿)>가 있었다. 하지만 그 시집은 널리 퍼지지 않았고, 더욱이 간행되지도 않았다. 많은 사람들은 그의 시집을 보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생각했다. 안대회 교수는 그간 다른 문헌을 통해 이름만 알려진 <초부유고>가 고려대도서관에 필사본 형태로 소장 중이며, 한시 90수 정도가 실린 사실을 확인했다고 밝혔다. <초부유고>는 정초부를 포함해 정약용·박제가·이학규 등 4명의 시를 골라 묶은 필사본 시집 <다산시령(茶山詩零)>에 포함돼 있었다. 안교는 그의 이름이 정이재(鄭彛載)라는 것도 밝혀냈다. 월암(月巖) 남종현(南鍾鉉)이란 순조 연간의 시인은 어린 시절부터 그의 시를 외우고 있었기에 그의 시집을 보고 싶어 했다. 그러다 겨우 80여 수의 시가 수록된 <초부시권>(樵夫詩卷)을 얻어 보았다. 그가 보기에는 명성보다는 작품이 좋지 않아 실망스러웠다고 했지만, 나은 환경에서 독서를 더 했으면 성취가 더 높았을 거라고 지적했다. 추재(秋齋) 조수삼(趙秀三)은 83세에 진사시에 급제한 고령급제자인데, 정초부의 시를 “이 정도 수준의 작품이 많지마는 안타깝게도 그 전집이 전해오지 않는다.”며 아쉬워했다. 아무튼 그의 시가 최고 수준이 아니라 해도 좋다. 공부를 제대로 하지도 못한 노비 신분으로서 그만한 성취도 대단하다. 조수삼은 “동호의 봄 물결은 지금도 푸르건만/ 그 누가 기억하랴? 시인 정초부를”이라며 전설로 남은 그의 명성을 회고했다. 또 정약용의 아들이자 저명한 시인인 정학연(丁學淵)과 함께 지은 시에서는 “오백 년 문명이 영조 정조 때에 꽃 피웠으니/ 나무꾼과 농사짓는 여인네까지 시를 잘 짓네.”라고 했다. 여기서 나무꾼은 바로 정초부이고, 여인네는 여주에 사는 김씨 아낙임을 밝혔다. 정초부의 시는 관념적이거나 교훈적이지는 않고, 실제 생활과 노동의 현장에서 우러나온 생생한 서정성을 담고 있어 도리어 진정성이 높다. 가난과 고통을 노래하되, 직접적인 분노 표출보다는 자연과 자신의 처지를 담담하게 대비시키며 깊은 슬픔을 승화시키는 고전적 미덕을 보여준다. 정초부는 비록 노비 신분으로 태어나 고독한 나무꾼으로 생을 마쳤지만, 그의 시는 25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계층을 넘어선 인간의 보편적인 정서와 뛰어난 예술성을 인정받으며 한국 문학사에 가장 낮은 곳에서도 높게 빛나는 별이 되어 서민들의 가슴에 남아있다.

Screenshot 2025-12-10 at 00.34.23.JPG <정초부의 복원된 집>

조선 5백 년 동안 천민 시인이 정초부 한 명은 아니다. 그들의 계보를 간단하게 정리하면, 김해의 관노였던 어무적(魚無跡)과 전함노(戰艦奴)였던 백대붕(白大鵬)이 조선 전기를 대표하는 시인이다. 어무적은 아버지는 사대부였지만 어미가 관비라서 종모법에 따라 노비가 된 것이다. 어려서부터 아비를 따라 학문을 익혔고, 나중에는 면천이 되어 습독관이라는 미관말직을 했기에 엄밀한 의미의 노비 시인은 아니다. <유민탄(流民嘆)>과 <신력탄(新曆嘆)>이 유명하다. 백대붕은 스스로 전함사(典艦司)의 노예라고 주장하였고, 정확한 실체 파악이 안 된다. 천민 시인 유희경(劉希慶) 함께 노닐었고, 사대부로는 허봉(許篈)·심희수(沈希洙) 등과 교류했다. 서얼 출신으로는 송익필(宋翼弼)이 유명했으나 노비나 천민 출신은 아니다. 유희경도 천민 출신이었지만 임진란의 공으로 면천되고 그 후 승승장구하여 종 2품 가의대부(嘉義大夫)까지 올랐다. 17세기의 뛰어난 시인 홍세태(洪世泰)는 완전 천민은 아니고 중인층에 속했고, 나중에 영조가 그의 처지를 두둔해 주기까지 했다. 18세기의 정초부, 그리고 이단전(李亶佃)이 노비 시인을 대표한다. 그의 이름 단전(亶佃)은 진실로 단(亶) 자에, 소작인 전(佃) 자로 곧 진짜 머슴이라는 뜻이다. 호를 필한(疋漢)이라 했는데, 그 뜻은 필(疋) 자를 파자(破子) 하면 하인(下人)이 되고, 여기에 사나이 한(漢)을 붙였으니 스스로 노비라고 주장하는 셈이다. 늘 패랭이를 쓰고 다녔는데, 그의 얼굴이 곰보이고 애꾸눈이라서 초라한 몰골을 가리는 방편이었다. 그는 시 뭉치 <하사고(霞思稿)>를 재야의 문종(文宗) 이용휴(李用休)에 보이자 복숭아꽃을 꺾어서 주며 인정했다는 설이 있다. 여인으로는 봉화 닭실의 충재(충재) 권벌(權橃) 가문의 여종이었던 알현(閼玄)이 있는데, 그녀는 집에서 부엌일을 하면서 대청마루에서 글 읽는 소리를 듣고 글을 깨쳐서 시를 지을 수 있었단다. 석천(石泉) 권래(權萊)의 노비에서 기녀(妓女) 취선(翠仙)으로 되었다가 나중에 석전(石田) 성로(成輅)의 첩이 되었다. 호를 설죽(雪竹)·취죽(翠竹)·설창(雪窓)·월련(月蓮)·취선(翠仙) 등으로 자유재재로 바꾼 것을 보면 시재도 출중했나 보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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