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1. 판소리의 아버지 귀명창 신재효(申在孝)
판소리의 이론과 사설로 중흥기를 열다.
천생음골(天生陰骨) 강쇠 놈이 여인의 양각(陽脚)을 번쩍 들고 옥문관(玉門關)을 굽어보며, "이상히도 생겼구나. 맹랑히도 생겼구나. 늙은 중의 입일 런지 털은 돋고 이는 없다. 소나기를 맞았던지 언덕 깊게 패였다. 콩밭 팥밭 지났는지 돔부꽃이 비치었다. 도끼날을 맞았든지 금 바르게 터져 있다. 생수처(生水處) 옥답(沃畓)인지 물이 항상 고여 있다.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옴질옴질 하고 있나. 천리행룡(千里行龍, 멀리 뻗어간 산맥) 내려오다 주먹바위 신통(神通)하다. 만경창파(萬頃蒼波)의 조개인지 혀를 삐쭘 빼물었고, 임실(任實) 곶감 먹었는지 곶감 씨가 장물(臟物)이요, 만첩산중(萬疊山中) 으름인지 제가 절로 벌어졌다. 연계탕(軟鷄湯)을 먹었는지 닭의 벼슬이 비치었다. 파명당(破明堂)을 하였는지 더운 김이 그저 난다. 제 무엇이 즐거워서 반쯤 웃어 두었구나. 곶감 있고, 으름 있고, 조개 있고, 연계 있으니 제사상은 걱정 없다."
옹녀란 년도 살짝 웃으며 갚음을 하느라고 강쇠 기물 가리키며, "이상히도 생겼네. 맹랑하게도 생겼네. 전배사령(前陪使令) 서려는지 쌍걸낭(雙杰囊)을 느직하게 달고, 오군문(五軍門) 군뇌(軍牢)던가 복덕이를 붉게 쓰고, 냇물가에 물방안지 떨구덩떨구덩 끄덕인다. 송아지 말뚝인지 털고삐를 둘렀구나. 감기를 얻었던지 맑은 코는 무슨 일인고. 성정(性情)도 혹독(酷毒)하다, 화 곧 나면 눈물 난다. 어린아이 병일런지 젖은 어찌 게웠으며, 제사에 쓴 숭어인지 꼬챙이 구멍이 그저 있다. 뒷 절 큰방 노승인지 민대가리 둥글린다. 소년인사 다 배웠나, 꼬박꼬박 절을 하네. 고추 찧던 절굿대인지 검붉기는 무슨 일인고. 칠팔월 알밤인지 두 쪽이 한데 붙어 있다. 물방아, 절굿대며 쇠고삐, 걸낭 등물 세간살이 걱정 없네.“
<변강쇠가> 중의 강쇠와 옹녀가 산중 냇가 너럭바위에서 만나 벌건 대낮에 사랑놀음에 들어가기 전에 말하자면 전희(前戲)를 노래한 판소리 사설이다.
<영화 : 변강쇠>판소리는 17세기부터 등장한 것으로 여겨지는 한국의 전통 음악이자 고전 문학, 연극으로, 소리꾼 한 명이 북을 치는 고수(鼓手)의 장단에 맞추어 소리(노래), 아니리(말), 너름새/발림(몸짓)을 섞어 이야기를 풀어내는 예술이다. 판소리는 일반 하층민을 대상으로 시작된 예술 문화이지만, 18세기에 들어 양반 계층에게 받아들여지기 시작했고, 흥선대원군(興宣大院君)과 고종(高宗), 순종(純宗) 등 최상위 신분층인 왕족 및 최고 통치자인 임금까지 판소리의 예술적 가치를 높이 평가하며 판소리 명창들을 적극적으로 후원하게 되면서 곧 판소리는 조선 전역에서 사랑받는 문화가 되어 현재까지 전해 내려져 오고 있다. 양반들이 판소리 공연을 보고 관극시(觀劇詩)라는 판소리를 감상을 한시로 써놓을 정도였다. 이런 판소리를 집대성하고 저변을 확대하는데 지대한 공로를 한 사람이 바로 동리(桐里) 신재효(申在孝)이다. 그는 아버지 신광흠(申光洽)과 경주 김씨 김상려(金常礪)의 딸 사이에 외아들로 전라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선대는 경기도 고양에서 살았는데, 아버지가 고창 관아의 아전(衙前)으로 관약방(官藥房)을 맡게 되어 이곳에 정착하였다. 신재효(申在孝)는 1812년 11월 6일 태어나 72살 때인 1884년 11월 6일 눈을 감았다. 공교롭게도 태어난 날과 사망한 날이 같았다. 더욱 공교로운 것은 그의 아버지 신광흠도 생일과 제삿날이 겹친다는 사실이다. 그는 어려서부터 매우 총명하여 천재 소리를 들으며 성장한 그는 서당에서 사서삼경을 비롯하여 제자백가 등을 두루 익혔다. 그러나 중인(中人) 계급의 한계로 과거를 볼 수 없고 벼슬길이 막혔다. 아버지는 고창 관아의 아전이었는데 상당한 재산을 모았다. 아무리 뛰어난 재주가 있어도 과거를 보아 벼슬길에 나아갈 도리가 없었으니 신재효는 다른 일에 몰두했다. 평소 이재(理財)와 치산(治産)에 능력이 있어서 가산을 많이 늘렸고, 취미로 좋아하던 광대소리에 미쳐서 마침내 판소리의 중흥조로 우뚝 서게 만든 배경이 된 것이다. 그는 판소리를 직접한 명창이 아니라 귀로 듣고 분별하는 지음(知音)의 경지인 귀명창이었다.
지금 그의 생가로 알려지고 있는 고창 읍성인 모양성(牟陽城) 입구에 있는 집의 규모는 보통 여염 농가보다 크다고 볼 수 있겠으나 대부호의 거처였다고 볼 수 없겠다. 또 그 집이 생가로 알려져 있지만, 그의 일흔한 살 때의 호적 단자에는 주소가 고창 천남면 서문리(西門里)로 되어 있다. 비록 아전의 벼슬을 지냈지만 집안의 부와 젊을 적부터 뛰어난 학식으로 풍류를 즐긴 멋쟁이인 것만은 틀림없겠다. 그의 나이 몇 살 때인가 확실치는 않지만 아전인 호장(戶長)을 그만두고부터 오십 대 중반 이후 판소리 사설을 정리하고 소리꾼들을 가르친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신재효는 그의 집을 동리정사(桐里精舍)라 이름 붙이고 소리청을 만들었다. '동리(桐里)'는 그의 아호이다. 그가 소리청을 개설하고는 소리꾼들을 불러들였다. 당시 소리꾼들은 대개 무식하여 판소리의 가사내용을 이해하지도 못할 뿐만 아니라 음을 제멋대로 부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그는 소리꾼들이 몰려들자, 소리꾼들에게 문자를 가르치고, 판소리의 정확한 발음과 뜻을 일러주었다. 물론 그 소리꾼들이 먹고 자는 일, 때로는 경비까지도 그가 대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판소리의 가사가 난잡하기도 하고 조리가 없기도 하여, 이에 체계를 세우고 정리하기도 했다. 곧 <춘향가>, <심청가>, <수궁>, <홍보가>, <적벽가>, <변강쇠가>의 가사를 정리하고, 이를 제자들에게 해설한 것이다. 그 당시 판소리 열두 마당 중에 위의 여섯 마당만 온전히 전해지고 있었던 것이다. 특히 춘향가를 남창(男唱)·여창(女唱)·동창(童唱)의 세 가지로 사설을 정리, 개작했으나 현재 <여창춘향가>는 전해지지 않는다. 그는 특이하게 판소리의 사설 중에 자기 자신을 카메오(Cameo)로 슬쩍 등장시키기도 했다.
<신재효의 생가>그는 소리청에서 많은 명창들과 어울러 술과 벗하며 소리를 늘리는 한편, 많은 제자들을 길러냈다. 이들 제자가 뒷날 명창이 된 춘향가의 김세종(金世宗)·적벽가의 정춘풍(鄭春風)·여류명창 진채선(陳彩仙)·여류명창 허금파(許錦波) 등이었다. 신재효는 80여 명의 판소리꾼을 길러냈으며 <광대가(廣大歌)>를 지어 판소리 이론을 세웠다. 그 당시의 소리청 전경을 정현석이라는 사람은 "멀고 가까움을 가릴 것 없이 배우러 몰려든 사람들이 매일 그의 집 문을 꼭 채울 정도였는데, 모두 재워주고 먹여 주었다."라고 그리고 있다. 그는 또 유달리 인정이 많아 가난한 사람을 잘 도와주었고, 아무리 천한 사람이라도 깍듯이 대해 주었다 한다. 그 자신이 아전 출신인 탓도 있었겠지만, 그가 선비대접을 받는 처지에서 이런 태도는 바로 그의 인품을 나타낸 것이기도 하다. 어느 날, 그는 한 선비와 함께 길을 가다가 갓 만드는 상놈 출신 갓장이(笠工)를 만났다. 그는 이 갓장이와 인사를 반갑게 나누고 이야기를 다정스레 주고받았다. 그 선비는 난처해하면서 "체신 머리 없이 상놈에게 그토록 다정하게 대하는가?"라고 나무라자, "양반은 통갓을 쓰고 뽐내면서 갓을 귀하게 여기지만 갓 만드는 사람을 얕보는 버릇이 있네. 선비의 할 짓이 아니야."라고 대꾸했다고 한다. 그가 꽤나 높은 벼슬을 받은 처지였으니 이런 모습은 그의 인품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리라.
그는 판소리 여섯 마당을 정리한 것 이외에도 <도리화가(桃李花歌)>·<성조가(成造歌)>·<광대가(廣大歌)>·<오섬가(烏蟾歌)>·<어부사(漁父詞)>·<방아타령>·<괘씸한 양국 놈 가> 등의 작품을 남기기도 했다. 그런데 그의 작품이 서울 궁중에서 불려질 기회가 있게 되었다. 흥선대원군이 집권하여 왕실의 권위를 회복하고자 임진왜란 때 불 탄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판소리를 좋아했던 흥선 대원군은 경복궁의 역사(役事)를 벌일 적에 많은 노래를 지어 일꾼들에게 부르게 했다. 대원군이 노랫가락을 좋아한 탓도 있었지만 일의 능률을 올리고 일의 즐거움을 느끼게 만들려는 의도도 있었던 것이다. 경복궁의 역사가 끝나고 경회루에서 낙성연(落成宴) 축하잔치가 벌어졌는데, 이때 신재효의 제자요 연인인 진채선과 김세종이 이 자리에서 판소리를 불렀다. 당시 판소리는 여자들이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기 전이라서 진채선은 갓을 쓰고 도포를 입고 스승이 손수 지은 <명당축원가(明堂祝願歌)>·<성조가>·<방아타령>과 <춘향가>를 불렀단다. 춘향가를 제외한 세 곡은 모두 경복궁 중건을 위해 새로 지은 것이란다. 누구보다도 지음(知音)에 가까운 대원군의 눈에 진채선이 금방 띄지 않을 리가 없었다. 단번에 진채선은 대원군의 총애를 받게 되었고, 운현궁(雲峴宮)에서 대령기생(待令妓生)이라 하여 두 명의 명창을 묶어 두었는데, 진채선이 여기에 끼게 되었다. 그래서 진채선은 사랑하면서 존경하는 스승 신재효에게 돌아올 수가 없었다. 신재효는 이에 그리운 정을 이기지 못하여 날밤을 지새웠으나 그리움만 쌓여갔다. 상대는 국왕도 꼼짝 못 한다는 흥선대원군이었다. 신재효는 어쩔 수 없이 애틋한 마음을 담은 <도리화가(桃李花歌)>를 지어 운현궁으로 보냈다. 그때 신재효의 나이 쉰아홉 살, 진채선의 나이 스물네 살이었다. 신재효는 부인이 죽고 홀아비로 있었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돼서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흼도 흴사 오얏꽃이
향기 쫓는 세오충은 젓대북이 따라가고
보기 좋은 범나비는 너풀너풀 날아든다.
(중략)
두 손님뿐이었지, 절대가인 없었으니
언제나 다시 만나 소동파를 우어 볼까.
진채선의 나이로 시작하여 언제 다시 만나 어울릴까 이렇게 끝냈다. 소리의 사설 마지막에 “증(贈) 선낭(仙娘)”이라고 써서, 제자가 아닌 사랑하는 여인에게 주는 노래로 표현했으니, 스승의 사랑이 넘치고, 애끓는 듯한 <도리화가>에 진채선이 넋을 잃었다. 스승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담아 그 판소리를 부르자, 대원군이 노래의 출처를 물었다. 진채선은 스승에 대한 것을 사실대로 말해주었다. 대원군은 신재효에게 오위장(五衛將)이란 감투를 내렸다. 무관직이고 실제 벼슬에 부임하지 않는 정삼품의 당상관이다. 중인 출신에게는 과분한 자리였으나 그는 이런 감투보다 소리를 함께 할 진채선이 소중했지만 그녀는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신재효는 그리움을 삭이느라 더욱 판소리에 매달렸고, 그 결과는 우리 국악계에 많은 업적을 남겼다. 종래 계통 없이 불리어 오던 소리를 통일하여 12마당을 춘향가·심청가 등 6마당으로 정립하고, 사설의 과장된 표현을 품위 있게 다듬으며 한문 투로 많이 바꾸기도 했다. 1876년 큰 흉년이 들었을 적에 그는 빈민 구휼(救恤)을 위해 돈 500냥을 기부하였고, 1877년에 경복궁 중건에 원납전(願納錢)을 내어 그 포상으로 정 3품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를 받았다. 그 후 가선대부(嘉善大夫) 호조참판(戶曹參判) 까지 올랐다. 이리하여 신재효는 전국에서 유명한 인물이 되었고 향리에서 떠받드는 명망가가 되었다. 고을 원들도 그의 앞에서 노리(老吏 : 늙은 아전)라고 깔보지 못할 뿐만 아니라 떠받드는 처지가 되었다. 그런데 한양으로 간 제자 겸 연인 진채선에게서는 다시 온다는 기별도 없었다. 물론 진채선도 일구월심 스승을 그리며, 마음속 정인(情人)인 신재효를 위해 정성 멀리서나마 정성을 다했던 것이다. 대원군의 위세가 고종보다 위였으니, 그의 수청 기생이라도 궁녀의 법도와 비슷했을 것이다. 수청 든 기생은 추후에 감히 다른 남자를 겪지 못하도록 했을 것이다. 일설에는 대원군이 청나라에 볼모로 간 후에 진채선이 운현궁에서 빠져나와 고향 고창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그녀가 신재효의 소리청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벌써 신재효는 세상을 떠난 뒤였다. 그리고는 그녀의 신상에 관한 이야기나 기록을 전하지 않았다.
신재효와 진채선과의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는 더 알려진 것이 별로 없다. 그러나 신재효의 여성관은 판소리 사설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기도 하다. 신재효는 <춘향전>에서 월매의 입을 통해 늘 이렇게 늘어놓고 있다. “재전일 생각하면 지금 것들 우습더구. 우리 처녀 시절에는 이십 먹은 계집애도 서방생각 안하더니, 요새 년들 우습더구, 열다섯 안팎 되면 젖통이가 똥도도름 장기 궁짝 되어가고, 궁둥이가 너부데레 소쿠리 엎어 논 듯, 봉숭아꽃 벌어지면 머리 글고 딴홰내고……뒷동산에 두견 울면 한숨 쉬고 잠 안자기, 우리 집 딸아기도 그네 뛰는 핑계하고 바깥출입 팔짝팔짝 못 듣던 사람소리 방안에서 소곤소곤, 정녕 무슨 탈이 났제” 당시 자유분방한 여속(女俗)의 모습을 이렇게 그리고 있는 것이다. 봉건제도의 질곡에서 신음하는 민중의 삶을 그는 사설 곳곳에서 날카롭게 늘어놓고 있다. 현실을 보는 그의 비판정신은 살아 꿈틀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가 정리한 사설에는 한문 투가 지나치게 많다는 비판을 받기도 하며 또 선비투를 낸다고 나무란다. 그러면서 한편으로는 우리의 사설문학을 정리·집대성했다는 평가로 하여 '한국의 셰익스피어'라고 추앙하기도 한다. 그의 삶에 대해 당시 고창현감(高敞縣監)이었던 유청람(柳淸嵐)은 이런 시를 써서 보냈다.
만 권의 책을 쌓고 한 몸 편안이 지내면서
남은 재물 남김없이 주린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네.
그윽한 향기 감도는 꽃밭에 난초를 키우나니
태수(太守 ; 지은이를 가리킴) 나날의 삶이 그대 배우기 어렵겠네.
아무튼 그는 개인의 능력을 떠나 중인(中人) 신분으로서 찌든 현실을 이렇게 내면으로 승화시켰으며 강한 행동적 저항을 일시에 접어두고 민중의 삶을 노래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신재효는 몇 편의 한시(漢詩)도 남겼으나 무엇보다 그의 두드러진 문학·예술 활동은 판소리 관련 활동이다. 그가 남긴 판소리 사설은 <신오위장본집(申五衛將本集)>(6 책)과 <동리유집초(桐里遺集抄)>에 전한다.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등 판소리 관련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은 향리의 직책에서 물러난 1860년 이후로 추정된다. 개인적인 취향 외에 그가 판소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는 판소리가 발달한 호남 지역에서 생장하였다는 것과 특히 전라도 감영(監營)과 각 군현(郡縣)의 이서(吏胥)들이 관청에서의 각종 연회(宴會) 때 판소리 창자들의 선발과 초청에 관여한 풍속을 들 수 있다. 나아가 그의 향리(鄕吏)로서의 신분 의식도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활동의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의 밑에서 지방의 행정 실무를 맡은 향리는 양반 계층보다 낮은 신분이어서 관직 진출과 사회적 대우 등에서 큰 차별을 받았으며, 신재효가 향리 생활을 했던 19세기 후반기는 부정부패와 관련하여 향리 계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악화된 때였다. 신재효는 이러한 향리에 대한 신분 제약과 사회적 인식에서 유발된 심리적 갈등을 판소리를 매개로 표출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신재효는 예술가로서의 삶보다도 민중과 애환을 함께 하며, 같이 한숨 짓고 눈물 흘리는 인간이었던 것이다. 그가 지은 노랫말에는 재산을 모으는 방법을 읊은 <치산가(治産歌)>도 있는데, 그 스스로도 치산의 능력을 훌륭하게 수행하였다. <치산가>는 “부지런하고 검박하면 가장기물 절로 있네. 사치하고 무도하면 범법수죄 자주 하고, 패가망신 아주 쉽네.”라고 노래했다. 그래서 일군 부를 근거로 판소리꾼들을 양성하고, 기근이 들었을 때 구휼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 함대의 침략 등 서양 세력의 침입을 걱정하는 노래 <괘씸한 양국 놈가> 등 사회적인 내용이 담아내기도 했다. 정노식(鄭魯湜)의 <조선창극사(朝鮮唱劇史)>에 따르면 신재효가 활동하던 시기에 어떤 창자(唱者)라도 신재효의 지침과 평가를 받지 않고는 명창의 반열에 들 수 없었다면서 이날치, 박만순, 김세종, 정창업, 김창록, 진채선, 허금파 등이 신재효의 지침을 받았다고 한다. 특히 김세종은 심재효의 지시를 받아서 직접 학생을 실기로 가르치는 교사의 역할을 했다. 아무튼 그의 말년 작품인 <광대가>의 내용을 보면 판소리의 이론뿐만 아니라 그의 다양한 한문 문학적 식견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금삿갓 芸史 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