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항문(肛門)에 힘쓰다 죽은 조지 2세

학문에는 힘쓰되 항문의 힘은 무리하지 말고

by 금삿갓

모든 인간은 지식을 습득하려면 학문(學問)에 힘써야 하지만, 배설물을 몸 밖으로 내보내기 위해서는 항문(肛門)에 힘을 써야 한다. 오늘은 항문(肛門)에 너무 힘쓰다가 서거(逝去)한 조지 2세(George II)의 삶에 대해 알아보자. 독일 출신인 조지 2세의 삶은 그의 아버지와 마찬가지로 하노버에서 시작되었는데, 그의 아버지는 브런스윅(Brunswick) 공작으로 부인 Sophia Dorothea와의 사이에 1683년 10월에 아들로 태어났다. 아버지가 공작으로 있다가 나중에 조지 1세 왕이 되었지만, 태어난 어린 조지에게는 부모 간의 불화로 매우 불행했다. 그의 부모는 양측 모두 간통 혐의로 고발당했으며, 결국 1694년에 결혼은 돌이킬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파경을 맞았다. 그의 아버지 조지 1세는 어머니 소피아와 단순히 이혼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녀를 알든 하우스에 감금하여 남은 생애 동안 고립된 채 자녀들을 다시는 만날 수 없도록 했다. 부모들의 험악한 이별로 어머니는 투옥되었지만, 어린 조지는 프랑스어를 시작으로 독일어, 영어, 이탈리아어까지 배우며 균형 잡힌 교육을 받았다. 그는 시간이 흐르면서 군사 전반에 걸친 지식은 물론 외교의 모든 면을 익히게 되었고, 이는 그가 왕실에서 맡게 될 역할을 위한 준비가 되었다. 그는 아버지와는 달리 사랑으로 행복한 인연을 찾았는데, 안스바흐(Ansbach의 캐롤라인(Caroline)과 약혼했고 하노버에서 결혼했다. 군사학 교육을 받은 조지는 프랑스와의 전쟁에 참전하는 것을 매우 원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조지가 후계자를 낳을 때까지 참전을 허락하는 것을 꺼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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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7년, 아내 캐롤라인이 아들 프레데릭(Frederick)을 낳으면서 그의 소원이 이루어졌다. 아들이 태어난 후, 조지는 1708년 오우데나르데(Oudenarde) 전투에 참전했다. 그는 20대 초반의 나이에 말버러(Marlborough) 공작 휘하에서 복무하며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의 용맹함은 인정받았고, 전쟁에 대한 그의 관심은 조지 2세 왕으로 즉위하여 데팅겐(Dettingen) 전투에 참전했을 때 다시 한번 나타났다. 독일 하노버에 있을 때 조지와 캐롤라인 부부에게 세 명의 딸이 더 태어났다. 당시 영국 앤 여왕(Queen Anne)의 건강이 악화되었고, 1701년 왕실의 개신교 혈통을 우선시하는 왕위 계승법에 따라 조지의 아버지가 왕위 계승 서열 1위가 되었다. 앤 여왕이 사망하자 독일 출신인 그의 아버지가 조지 1세로 영국 왕에 즉위했다. 아버지의 왕위 계승으로 젊은 조지는 1714년 9월 성대한 행렬과 함께 영국으로 건너갔고, 그곳에서 웨일스(Wales) 왕자 작위를 수여받았다. 런던은 그에게 완전한 문화적 충격이었다. 하노버는 영국런던 보다 훨씬 작고 인구도 훨씬 적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지는 금세 인기를 얻었고, 유창한 영어 실력으로 아버지 조지 1세에 필적할 만했다. 1716년 7월, 아버지 조지 1세는 잠시 하노버로 돌아갔고, 조지는 국왕 부재중 제한적인 권한으로 통치하게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는 전국을 순방하며 대중과 교류했고, 인기는 급상승했다. 드루리 레인(Drury Lane) 극장에서 괴한의 위협을 받기도 했지만, 오히려 이러한 사건들은 그의 명성을 더욱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일들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을 더욱 심화시켜 적대감과 원한을 키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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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와 아들이 왕실 내에서 서로 대립하는 파벌을 대표하게 되면서 이러한 적대감은 더욱 커져갔다. 조지 1세의 왕실 거주지인 레스터(Leicester) 하우스는 왕에 대한 반대 세력의 거점이 되었다. 한편, 정치 지형이 변화하기 시작하면서, 로버트 월폴 경(Sir Robert Walpole)이 의회와 군주제의 상황을 바꿔놓았다. 1720년, 이전까지 웨일스공인 조지와 동맹 관계였던 월폴은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화해를 촉구했다. 하지만 이는 단지 대중의 지지를 얻기 위한 행위였을 뿐, 실상 조지는 여전히 아버지가 부재중일 때 섭정 역할을 할 수 없었고, 그의 세 딸 또한 할아버지의 보호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 시기에 조지와 그의 아내는 차리리 왕위 계승을 기다리며 조용히 지내기로 했다. 1727년 6월, 드디어 그의 아버지 조지 1세가 하노버에서 서거했고, 조지는 왕위를 계승했다. 즉위 후 그의 첫행보는 독일에서 열린 아버지의 장례식에 불참한 것이었는데, 이는 영국에 대한 그의 충성심을 보여주는 행동으로 영국에서 큰 찬사를 받았다. 놀랍게도 조지 2세의 통치는 특히 정치적인 면에서 아버지의 통치 시대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시작했다. 당시 월폴은 영국 정치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며 정책 결정을 주도했다. 조지 2세의 즉위 후 첫 12년 동안, 총리 월폴은 영국을 안정시키고 국제 전쟁의 위협으로부터 안전하게 지키는 데 기여했지만, 이러한 안정은 오래가지 못했다.

<어린시절 엄마와 여동생과 함께>

조지 왕의 통치 말기에 이르러서는 국제 정세가 완전히 달라져 세계적 팽창과 거의 끊임없는 전쟁 참여로 이어졌다. 1739년 이후 영국은 유럽 이웃 국가들과 여러 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군사적 배경을 가진 조지 2세는 전쟁에 적극적이었는데, 이는 월폴의 입장과 정면으로 대립하는 것이었다. 영국과 스페인 사이에 휴전이 합의되었지만, 이는 오래가지 못했고 곧 스페인과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특이한 이름의 ‘젠킨스의 귀(Jenkins Ear)’ 사건이 카리브해의 뉴 그라나다(New Granada)에서 발생했다. 카리브해 지역에서 영국과 스페인 간의 무역 야망과 기회를 둘러싼 대치 상황을 다루었는데, 스페인 해안 경비대가 영국의 Rebecca호 함장인 Robert Jenkins의 귀를 잘랐던 것이다. 그가 귀를 알코올병에 담아서 귀국하자 영국 사회의 여론이 들끓어서 결국 젠킨스의 귀(Jenkins Ear)의 전쟁이 시작됐다. 그러나 1742년이 되자 이 분쟁은 오스트리아 계승 전쟁이라는 훨씬 더 큰 전쟁에 편입되었고, 거의 모든 유럽 열강이 이 전쟁에 휘말리게 되었다. 1740년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6세(Charles VI)가 사망하면서 불거진 이 분쟁은 본질적으로 카를 6세의 딸인 마리아 테레사(Maria Theresa)의 후계자 자격을 둘러싼 것이었다. 조지는 이 문제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고자 했으며, 하노버에서 여름을 보내는 동안 진행 중인 외교 분쟁에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프로이센과 바이에른의 도전에 맞서 마리아 테레사를 지지하는 목소리를 내며 영국과 하노버를 분쟁에 끌어들였다.

<사랑하는 왕비 캐롤라인>

이 분쟁은 1748년 엑스라샤펠(Aix-la-Chapelle) 조약으로 종결되었지만, 관련 당사자 모두에게 큰 불만을 야기했고 결국 더 큰 폭력 사태를 촉발시켰다. 한편, 이 조약의 조건에는 영국이 노바스코샤(Nova Scotia)의 루이스버그(Louisbourg)를 인도의 마드라스(Madras)와 교환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더욱이, 영토 교환 후 프랑스와 영국의 해외 영토 획득에 대한 경쟁적 이해관계로 인해 북미 지역의 영유권 분쟁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위원회 구성이 필요하게 되었다. 전쟁이 유럽 대륙을 휩쓸던 동안, 영국 본토에서는 조지 2세와 그의 아들 사이의 좋지 않은 관계가 지속되었다. 아들 프레더릭(Frederick)과의 관계는 조지 2세가 얼마 전까지 조지 1세와 그랬던 것처럼, 거의 비슷한 방식으로 나타나기 시작했다. 프레데릭은 스무 살에 웨일스 공으로 책봉되었지만, 그와 그의 부모 사이의 갈등은 계속해서 심화되었다.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분열을 더욱 악화시킨 것은, 프레데릭이 아버지에게 정치적으로 대항할 수 있도록 독자적인 궁정을 구성한 것이었다. 1741년, 그는 영국 총선에서 적극적으로 선거 운동을 펼쳤다. 월폴은 프레데릭을 매수하려 했지만 실패했고, 한때 정치적으로 안정적이었던 월폴은 필요한 지지 기반을 잃고 사임하게 되었다. 조지 2세는 더욱 국제적인 갈등을 유발하며 세계적인 강대국으로 발돋움하게 되었다. 그 과정에서 아들 프레데릭이 먼저 세상을 떠났다.

1760년 10월 25일, 76세의 고령인 영국 국왕 조지 2세는 켄싱턴 궁에서 이른 아침에 눈을 떴다. 하인들은 그가 평소와 다름없이 '뚜렷한 이상 기색'이 없었다고 기억했다. 그는 시종을 불러 따뜻한 코코아를 가져다 달라고 했다. 코코아는 그가 즐겨 마시던 음료 중 하나였다. 조지 2세는 창밖을 내다보며 코코아를 마시고 매일의 일과인 화장실을 사용했다. 화장실은 집무실 바로 옆에 있었다. 하인들이 밖에서 들으니 화장실에서 쿵 하고 소리가 들렸다. 무슨 일인가 하고 급히 화장실로 들어가니 왕이 낙상으로 관자놀이 쪽에 부상을 입고 쓰러져 있었다. 그는 하의를 내린 채였고, 희미하고 약한 목소리로 하인에게 딸 '아멜리아(Amelia)를 불러오라'라고 말한 후 의식을 잃었다. 왕의 신하들은 즉시 왕을 들어서 침대에 눕혔고, 왕실 외과의와 의사들이 왕의 머리 부상을 치료하기 위해 불려 왔지만, 왕은 이미 사망한 것이 분명해졌다. 딸 아멜리아가 도착했을 때, 그는 사망이 확인됐다. 국왕의 사망 원인을 밝히기 위해 다음 날 켄싱턴 궁에서 국왕의 시신에 대한 부검이 실시되었다. 국왕의 주치의 두 명이 참여한 부검에서, 그들은 국왕의 신장 표면에서 '물집'이 발견되었고, 심장은 '우심실 파열'로 인해 '극도로 팽창'된 것을 확인했다. 그들은 이것이 국왕의 사망 원인이라고 결론지었다. 현대의 병명으로 대동맥 박리인데, 이는 용변을 보느라 항문에 힘을 주는 과정에서 자주 발생할 수 있다고 한다. 학문에 힘을 쓰는 것에는 무리를 해도 될지 모르지만, 밀어내기를 위해 항문에 힘은 무리하게 쓰지 않도록 해야겠다. 11월 11일, 조지 2세는 헨리 7세가 건축한 웨스트민스터 사원의 레이디 채플에 안장되었다. 그는 1737년에 사망한 왕비 캐롤라인과 함께 예배당 지하 납골당에 묻혔다. 여담이지만 그는 사랑하는 왕비 캐롤라인이 죽으면서 그에게 재혼하라고 권하자, 절대 재혼하지 않고 첩만 두겠다고 했단다. 1760년에 전해진 바에 따르면, 양초, 등불, 횃불, 그리고 여러 성악 및 기악 연주자들을 포함한 장례식 비용이 5만 파운드에 달했다고 하는데, 이는 조지 왕조 시대 영국에서는 엄청난 금액이었단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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