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9. 노비에서 학자가 된 서기(徐起)

학문하는데 혈통의 구분이 있을까?

by 금삿갓

요즘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조선시대는 더 철저한 신분사회였다. 그리하여 양반출신이 아니고는 벼슬자리에 나가기는커녕 글을 읽는다는 것조차 생각할 수 없었다. 그러니 살고 있는 향촌에서도 제대로 대접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은 당연하다. 이리하여 아무리 선천적으로 총명하여도 천한 신분을 지닌 사람들은 자폐(自閉)하거나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틈새를 뚫고 역사에 이름을 올린 사람들이 구봉(龜峯) 송익필(宋翼弼)·정개청(鄭介淸)·서기(徐起)등이었다. 이들은 모두 한 시대를 파란만장(波瀾萬丈)하게 살면서 많은 일화를 뿌렸고 뒷날 천한 신분의 사람들에게 하나의 귀감(龜鑑)이 되었다. 오늘은 고청초로(孤靑樵老) 서기(徐起)가 걸어간 생애를 살펴보자. 그가 만년에 은거하던 공주의 공암(孔巖, 지금의 반포면 공암리)에는 계룡산 고청봉(孤靑峰)이 북쪽 기습 아래에 위치해 있었다. 그의 호 고청초로(孤靑樵老)는 거기서 따온 것이다. 그의 자(字)는 대가(待可), 다른 호는 구당(龜堂)·봉와(蓬窩)·이와(頤窩)를 썼다. 개울과 산이 둘러친 속에 골짜기가 있고, 이 골짜기에 마을이 있는데 이것이 바로 공암 마을이다. 이곳에서 서기는 만년에 학문을 익히고, 특히 주역(周易)에 심취했다. 이 소문을 듣고 각지에서 많은 제자들이 몰려들었다. 이 계룡산의 고청봉과 공암은 서기가 살았던 탓으로 더욱 유명해졌다. 그는 원래 서해 바닷가에 있는 남포(南浦, 보령군 남포면)의 제석리에서 1523년에 태어났다. 그의 본관이 이천(利川)이라지만 그 출신이 미천하여 내력이 불분명하다. 선대에 대해서는 잘 알려져 있지 않고, 신분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권문해(權文海)는 비미(卑微)로, 박지화(朴枝華)는 누세한족(累世寒族)으로 아버지가 사노(私奴) 서구령(徐龜齡)이라고 적고 있다. 허목(許穆)은 천인(賤人), 남하정(南夏正)은 전야인(田野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황경원(黃景源)의 묘표에는 할아버지를 서승우로 기록하고 있다.

서기의 출생에 대한 설화가 <매옹한록(梅翁閑錄)> <해동이적(海東異蹟)> 등에 수록되어 전하고, 충청남도 당진, 전라북도 부안 등에서 채록된 구비설화도 있다. 설화의 내용은 서고청의 출생담이 중심이다. 당진에서 채록된 설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서기의 어머니는 이진사 집 하인이었는데, 문둥병에 걸려 주인집에서 쫓겨나 유성 온천 근방의 공암(孔岩)이라는 바위굴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이때 마침 그곳을 지나던 한 소금장수가 비를 피해 바위굴로 들어왔다가 여자를 보고 관계를 맺은 뒤, 성만을 가르쳐 주고 달아났다. 그 뒤 여자는 잉태를 하고 문둥병도 나아 다시 주인집에 들어가서 아들을 낳았는데, 이 아이가 바로 서기이다. 서기는 종노릇을 하며 서당에서 어깨너머로 공부를 하였다. 후에 그는 재주가 인정되어 주인집에서 공부를 시켰다. 친구들이 아비 없는 놈이라고 욕을 하자 그는 어머니에게 자기의 출생 사연을 물어서 듣고는 공암 근처에서 술장사를 시작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공암을 바라보고 웃는 소금장수 영감을 만나 웃는 이유를 물어본즉, 그가 바로 자기의 아버지임을 확인하고 부자 상봉을 하였단다. 믿거나 말거나 설화이다. 아무튼 서고청은 송익필(宋翼弼)·정충신(鄭忠信)과 함께 삼노(三奴)의 명인(名人)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다.

이익(李瀷)은 “집이 미천하고 세상에서는 본래 종승(宗乘) 심열(沈悅)의 종이었다.”라고 기록하였으며,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에는 “척신(戚臣)인 심충겸(沈忠謙)이 하사 받은 노(奴)로 학문에 힘쓰고 행실이 독실하므로 면천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심충겸은 그가 학문에 열중하고 행실이 돈독하자, 종을 면하여 주었다 한다. 그리고 심충겸이 20년 이상 손위인 그를 부를 적에는 반드시 '처사(處士)'라고 했다 한다. 집안 분위기에 따라 종도 눈치껏 글을 배울 수 있는 처지였는지 모를 일이나, 그는 일곱 살에 마을 서당에 나가 글을 배우기 시작했단다. 하긴 아버지나 그 자신이 중한 죄에 연루되었을 때에는 죽거나 종이 되는 수가 있으므로 원래 혈통은 종의 신분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가 공부하던 서당 건물이 무너질 지경으로 퇴락해 있었다. 이때 어린 그는 시를 지어 훈장에게 바쳤는데 가로되, “서당아, 오래 무너지지 말아 다오.[書堂長勿毁(서당장물훼)] 내가 성헌(聖賢)의 학문을 배우게.[使我學聖賢(사아학성현)]”라고 했다. 이를 본 훈장은 놀라 칭찬해 마지않았다 한다. 어느 날 어린 그가 나물을 캐러 들판에 나갔다가 저녁에 빈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다. 무슨 장난질만 하고 빈 바구니를 들고 돌아왔느냐고 어른들이 꾸짖었다. 그는 이내 이렇게 대답했다. “어떤 새가 우짖으며 위아래로 날고 있어서 왜 그렇게 나는지를 궁리하다가 날이 저물었습니다.” 이처럼 그는 어리 때부터 사물이나 학문을 궁구(窮究)하는 자세였다. 이로 인하여 그는 어릴 적부터 신동이라는 소문이 자자하게 퍼졌다. 그는 조금 커서 제자백가(諸子百家)를 두루 읽고, 특히 불교에 심취했다. 아마 미천한 신분으로 벼슬길에 나갈 수도 없어서 이단의 학문에 깊이 빠졌는지도 모를 일이다. 서기는 출사(出仕)에 직결되는 성리학의 이론 학습보다는 다양한 학문과 사상에 학문적 정열을 쏟았다. 서기가 화담(花潭) 서경덕(徐敬德)·이조재(履素齋) 이중호(李仲虎)·토정(土亭) 이지함(李之菡)을 사사한 것도 이들의 학풍이 신분관이나 명분론에 얽매이지 않는 요소가 많았기 때문이다.

토정비결(土亭秘決)을 지은 이지함의 고향은 보령이었다. 토정은 서울 마포에 살다가도 툭하면 고향으로 찾아가 살았다. 토정은 혁혁한 양반 가문에다 이름난 학자였고 더욱이 당대의 거유(巨儒)인 서화담(徐花潭)의 제자이기도 했다. 학문에 남다른 정열을 지닌 그가 토정의 소문을 못 들을 리 없을 것이고, 더욱이 고청은 20여 살 때에 홍주(洪州, 지금의 홍성)에 살았다고 하니 보령과는 불과 20여 리 거리밖에 떨어져 있지 않았다. 서고청이 면천(免賤)을 한 후에 동리에서 서당인 ‘강신당(講信堂)’을 개설하여 많은 학동을 가르쳤는데, 서당을 분벽사창(粉壁紗窓)으로 꾸몄다. 이는 하얗게 꾸민 벽과 비단으로 바른 창이라는 뜻으로 주로 여자가 거처하는, 아름다운 방을 이르는 말이다. 어느 날 서고청이 출타한 때 한 사람이 찾아와 서당에 똥칠을 하고 사라졌는데, 서고청이 돌아와서 학동들로부터 이지함이 그랬다는 사연을 듣는다. 이런 사연으로 둘은 조우하게 된다. 토정은 불우한 사람과 어울리기 좋아하는 성정인데, 불우한 신분인 서고청이 찾아와 학문 배우기를 청하니 흔쾌히 수락했다. 반면에 서고청과 같은 처지로 친구였던 노비출신 정개청은 광주에 있는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을 찾아갔다가 거절당한 일도 있었던 것이다. 토정을 만난 후 그는 매일 또는 3, 4일에 한 번씩 찾아가 학문을 익혔다 한다. 비가 오나 바람이 부나 이 일을 몇 년 동안 계속했다 한다. 뒷날 토정은 명망 높은 선비인 중봉(中峯) 조헌(趙憲)에게 그를 두고 "그의 성실함은 금석을 뚫을 만하다."라고 칭찬해 마지않았다.

토정은 방랑생활을 즐겼다. 그리하여 조선에 그의 발길이 닿지 않은 곳이 없었다. 토정이 전국을 주유하면서 고청을 데리고 다녔다. 토정이 제주도에 갈 적에 고청은 토정과 함께 한라산을 올라보고 돌아왔다. 그것만이 아니라 시골에 사는 많은 명사들을 이런 여행길에서 토정으로부터 소개받기도 했다. 어느 때는 지리산 덕산에서 은거하는 남명(南溟) 조식(曺植)을 찾아갔다. 그런데 남명이 글을 가르치는 산천재(山天齋)가 화려하고, 방석이 사치스러운 것을 보고 이들은 늘 대단히 못마땅해했다. 마침 남명은 출타 중이었다. 이들은 신발을 신은 채 마루에 오르고 방석을 짓밟았다. 그리고 이들은 옷깃에 바람이 일세라 휑하니 가버렸다. 남명이 돌아와 이 꼴을 보고 웃으며 말했다. "이가(李哥), 서가(徐哥)가 여기를 다녀갔구나."라며, 남명도 이들을 알아보았던 것이다. 서고청이 계룡산 고청봉 아래로 오기 전에 지리산에서 산 적이 있다. 그는 고향에서 살 때 항약(鄕約)을 실시해서 비루한 풍속을 바로잡아보려 했다. 그러나 마을 사람들은 그의 가르침을 따라주기는 고사하고, 도리어 서당에 불을 질러 태워버렸다. 아마 그의 출신이 미천한 탓일는지 모른다. 그리하여 낙망을 한 끝에 지리산 속으로 가족을 이끌고 들어갔다. 그가 지리산에서 살던 곳은 홍운동(紅雲洞)으로 산의 가장 높은 곳이었으며, 백운산이 바라보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노고단에서 바라보면 백운산이 한눈에 들어오니 아마 이 근처일 지도 모른다. 아무튼 그는 화전(火田)을 일구며 학문에 열중했다. 양식이 떨어지면 아그배를 삶아서 주린 배를 채웠다. 그의 스승이요 동지인 토정과 중봉이 이 깊은 산골까지 그를 찾아왔고, 또 이들은 어울려 밤새는 줄 모르고 시사와 학문을 토론했다. 이 소문을 들은 많은 청년들이 또 이 골짜기로 들어와 그에게서 글을 읽혔다. 이렇게 4년을 지내다가 고청봉 아래로 옮겨온 것이다.

그의 산천유람은 그치지를 않았다. 그가 50세 즈음에 두류산(頭流山)에 있을 때 각 30살이 되던 조헌(趙憲)이 찾아와서 학문을 논하고 막역지우(莫逆之友)가 되었다. 그래서 어느 때는 옥천(沃川)으로 조중봉(趙中峯)을 찾아가기도 하고 어느 때는 그가 구봉을 찾아 나서기도 했다. 어느 때는 전라도의 정개청을 찾아보기도 했다. 그는 무슨 남모르는 꿍꿍이속이 있어서 이들을 찾아다녔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그의 나이 예순 살이 넘어 설 적에 조정에서는 당쟁이 한창 심하였고 또 왜구가 쳐들어 올 것이라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사귀고 있는 사람들은 조정에 불만을 품고 있었고, 뒤에 역적으로 몰려 죽기도 했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얼마 전, 일본은 사신을 보내 화의를 청했다. 이때 조중봉은 이를 결단코 거절하라는 상소를 올리면서 만일 난이 일어난다면 그 대장으로 서기(徐起)를 천거했다. 이 무렵, 또 재상으로 있던 박순(朴淳)은 난이 날 것에 대비하여 정개청을 도원수로 임금에게 천거한 적이 있었다. 서기나 정개청은 모두 미천한 출신이 아닌가? 이 일이 성사될 리는 결코 없었다. 또 당시 종의 자식인 송익필은 많은 일화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송익필은 율곡과 친분이 두터웠는데 율곡에게 많은 지혜를 빌려 주었다고 전한다. <연려실기술>에 따르면, 이런 송익필을 두고, 고청은 말하기를 "너희들이 제갈공명을 알고 싶으냐? 송구봉을 보면 된다."라고 했단다. 이렇게 서로의 인물을 알아주었던 것이다. 그가 예순일곱 살 때에 정여립(鄭汝立)이 모반을 일으켰다고 하여 기축옥사(己丑獄事)가 일어났다. 서고청의 친구인 정개청이 정여립과 친분이 있었다고 연좌(緣坐)되어 감옥에 갇혔다. 이에 이득윤(李得胤)이라는 사람이 와서 말했다. "개청이 선생을 끌어들이면 어쩔 작정이시오?" "내가 실로 개청을 아노라. 운명에 맡겨둘 뿐이라."

이렇게 사람을 알고 또 세상일에 동심(動心)하지 않았다. 만년에 그는 남악(南岳)연곡산(燕谷山)의 절에 들어가서 수도하면서 유불선(儒佛仙)의 세계를 두루 섭렵하였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일 년 전인 1591년(선조24) 11월 14일 병으로 죽었다. 그는 병석에 누워 있으면서 아내에게 말했다. "명년에 반드시 왜란이 있을 것이니 령(九嶺, 지명 미상)으로 피난하지 말라." 실제 그의 가족은 이를 잘 지켜 무사했다고 한다. 저서로는 <고청유고(孤靑遺稿)>가 있다. 그는 고청봉 아래 공암리에 묻혔다. 고청 서기의 묘소에는 총 4기의 비석이 있다. 그중 묘소 중앙에 있는 고청 서기 묘갈은 1775년(영조 51)에 건립되었다. 비문은 친구인 박지화(朴枝華)가 짓고 묘지(墓誌)는 조헌(趙憲)이 썼으며, 행장(行狀)은 고청의 5대손인 서행원(徐行遠)과 충청감사 홍계희(洪啓禧)의 주선으로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가 지었다. 병계(屛溪) 윤봉구(尹鳳九)는 이렇게 썼다. “선생은 진실로 호걸의 재주와 독실한 학문을 지녀서 온 세상에 찾아보아도 그와 짝하는 이가 드물다. 우리나라의 풍속이 비루해서 명분(名分)을 숭상하면서도 덕을 숭상하지 않는다. 이 때문에 선생은 태어나서 이름이 조정에 천거되지 않았고, 은택(恩澤)이 여염(閭閻)에 미치지 못하였으며, 죽어서는 조두(俎豆 ; 제기를 말하는데, 서원에 배향되는 것을 뜻함)의 향사(享祀 ; 유명한 학자를 서원에 모시고 제사하는 것) 또한 뭇 현인과 나란히 하지 못하셨도다. 이에 선비들이 모두 깊이 탄식하지 않는 이가 없다.” 사후에 제대로 대접을 못 받다가, 나중에 여러 선비들의 주선으로 끝내 그는 충남 공주의 충현서원(忠賢書院)의 별사(別祠)에 모셔졌고 증직(贈職)과 시호 문목공(文穆公)까지 받았다. 이익(李瀷)은 <성호사설(星湖僿說)>에서 천인 출신으로 유명한 학자들로 백대붕(白大鵬)·박인수(朴仁壽)·권천동(權千同)·허억건(許億健) 등을 열거하면서, 서기를 송익필과 함께 노비 출신으로서 <기호학파(畿湖學派)>를 일으키는 데 크게 기여한 재야의 학자들이라고 하였다. 또 <성호사설>에는 그와 심열의 인연 및 그 성품을 알려주는 다음과 같은 일화가 있다. 서기가 학문의 명성이 높아진 다음에 옛 주인인 좌의정 심열의 집을 방문했다. 옛날 노비 때처럼 천한 옷차림으로 찾아갔다. 그러나 장안의 사대부들이 잇달아 그 집을 찾아오게 되자, 서기는 곧 주인 심열에게, “천한 옷차림으로는 높고 귀한 분들을 접견할 수 없으니, 의관(衣冠)을 빌려주기를 원합니다.” 하니, 심열이 흔쾌히 의복을 갖추어 주고, 아주 극진하게 예(禮)로써 대우하였단다.(금삿갓 芸史 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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