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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로코코의 전설 – 마담 퐁파두르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 (240329)

by 금삿갓

흥미진진한 여자 얘기로 들어가기 전에 유럽 왕실의 관습을 좀 알아보는 것이 좋다. 동양의 왕들은 법적, 공식적으로 후궁(後宮)을 둘 수 있고, 손(孫)이 없을 경우 후궁의 아들도 왕위를 계승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톨릭 국가인 유럽의 경우 일부일처제와 이혼 금지가 원칙이다. 왕족은 왕족과 같은 급끼리 결혼하여야 하고, 급이 다른 계층과 결혼하는 것은 귀천상혼(貴賤相婚 : Morganatic or Left-handed marriage)이라 하여 부인과 자식에게 상속권을 제한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따라서 아무리 왕이라 하여도 공식적으로 후궁 즉 첩(妾)을 둘 수 없고, 그냥 필요할 때 만나서 즐기는 애인 정도의 신분으로 지냈다. 같은 급에서 선택하다 보니 근친결혼이나 정략결혼이 많아서 왕은 왕 대로 부인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 수많은 애인 또는 정부(Royal Mistress)를 두게 되는 것이다. 유럽 왕들의 사생활은 이런 제도적 산물을 이해하고 보아야 동양의 왕들과 다른 것을 이해할 수 있다. 동양의 궁궐에서는 정비(正妃)와 후궁(後宮)들 간의 내명부(內命婦) 암투와 권력 다툼이 역사의 물줄기를 돌리기도 하고 현대에 와서 소설과 드라마, 영화의 최고의 소재가 되고 있다. 유럽은 왕의 정부들이 궁궐 내에 기거하는 경우가 흔하지 않고, 왕의 정부가 대체로 유부녀들이 많아서 동양처럼 칼바람 나는 암투나 권력 다툼은 그리 흔하지 않다. Royal Mistress는 어디까지나 왕의 내연녀에 불과하지만, 프랑스에는 메트레상티트르(Maîtresse-en-titre)라 하는 공인 정부(情婦) 제도가 있다. 왕의 여러 정부 중에서도 단 한 명만이 임명되는 자리였는데, 다른 정부들과 달리 남편의 집이 아닌 왕궁에 거주하며 왕에게 조언을 하거나 외교 사절을 접견하는 등의 공식적 권한을 가졌고, 그 자식들도 왕의 자식으로 공인되고 작위도 받았다. 그러니까 루이 14세가 거대한 궁전인 마르세유를 지으니 이 공인 정부가 당연히 궁내에 기거하게 된다. 그중에서도 불세출(不世出)의 정부(情婦)이자 국정을 농단하며 정부(政府) 노릇하던 여인이 있었으니 바로 마담 퐁파두르이다.

이 여자의 본명은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Jeanne Antoinette Poisson)이고, 1721년에 평민 출신인 아버지 프랑수아 푸아송(François Poisson)과 어머니 마들렌 데 라 모트(Madeleine de la Motte) 사이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약간 무능한 스타일로 사고뭉치였고, 어머니는 상당히 미인으로 고급 매춘부인 코르티잔(Courtesan)이 직업이었다. 그래서 그녀의 생부(生父)에 대한 논란이 많았다. 그녀가 9살 되던 해 어머니와 함께 점을 보러 갔더니, 훗날 왕의 마음을 뺏을 것이라는 예언을 듣는다. 야심 많은 어머니와 잔은 그날부터 삶의 목표를 오직 그녀가 왕의 애첩이 되는 것에 두고 장기적 전략을 세웠다. 그녀의 별명까지도 작은 왕비라는 뜻의 Petite Reine라고 불렀다. 어머니가 고급 매춘부 출신이니 얼굴과 피부 및 몸매는 미인으로 타고났는데, 출신이 문제였다. 이런 핸디캡을 커버하자면 상당한 교육을 받아야 한다. 아버지가 실형을 받을 것을 피하여 외국으로 도망가고 어머니가 생계를 꾸리니 집안이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래서 어머니의 부자 고객인 르 노르망 드 투르넴(Le Normant de Tournehem)이 후견인이 되어 모든 뒷바라지를 해주었다. 잔은 똑똑하고 아름다웠으며, 기필코 왕의 사랑을 차지하려는 꿈이 있어서 교육도 열심히 받았다. 음악은 노래와 피아노 연주에 능숙하고, 춤과 연기를 잘하였으며, 조각을 비롯한 미술에도 일가견을 가질 정도로 총체적인 교육으로 무장했다. 잔이 가진 실력과 교양만으로 파리의 상류 사교계 어디에 내놔도 항상 주목받을 수 있는 존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예언한 기회는 오지 않고, 스무 살이 되자, 그녀는 자신의 후원자이자 어머니의 애인이었던 투르넴의 조카인 샤를 기욤 르 노르망 데티올(Charles Guillaume Le Normant d'Étiolles)과 결혼했다. 남편의 직업은 국세청 직원이었으니 눈에 찰 리가 없다. 그래서 결혼했으나 조신하게 지내지 않고 왕인 루이 15세와 눈도장을 찍고 싶어서 파리 시내를 열심히 쏘다녔다. 일설에 그녀가 어릴 때 왕의 결혼식 행렬에서 왕을 처음 보고, 나중에 사냥터에서 왕과 우연히 만났다고도 한다. 또 다른 일설은 가면무도장에서 루이 15세가 나무로 분장하고 지나가는데, 그녀가 떨어트린 손수건을 왕이 주워 주면서 만났다고도 한다.


살을 붙이자면 자신이 일부러 떨어뜨린 손수건을 집으려고 허리를 수그렸다. 이때 지나가던 루이 15세가 완벽한 구형(球形)을 자랑하는 그녀의 가슴에 반하여 큐피드의 화살을 맞고 말았단다. 루이 15세는 어머니를 일찍 여읜 탓인지 여인의 가슴에 집착하는 취향이 강했다. 심지어 며느리 후보감 간택 씨에도 며느리의 가슴을 잘 보지 않은 신하에게 짜증을 내었단다. 어느 설이 정설인지는 불명확하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1745년 2월 25일에 열린 황태자의 결혼 축하 가면무도회에 참석해 달라는 루이 15세의 공식 초청장을 그녀가 받은 것이었다. 이때만 해도 잔은 평민이고 사교계에서 알려지지 않았을 때이다. 호색한 루이 15세는 15살에 7세 연상의 왕비 마리아 레슈친스카와 첫날밤에 8번의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그런 그의 당시 공식 정부는 쟁쟁한 가문의 여인들이 즐비했었다. 루이즈 쥘리 드 마이넬 가문의 5 자매 중 4명인 마이 백작부인(장녀), 뱅티미유 후작부인(2녀), 로라게 공작부인(3녀), 샤토루 여공작(5녀)까지 줄줄이 사탕이다. 이들은 모두 귀족 출신이고, 반면에 잔은 평민 신분이었다. 그때까지 평민 신분의 여인이 공식적인 정부로 베르사유 궁에 입성한 것은 그녀가 처음이었다. 이 무도회 이후로 둘 사이는 가까워졌는데, 당시 루이 15세는 공식 정부였던 마이넬 가문의 막내딸 샤토루 여공작이 죽어서 엄청 공허할 때였다. 하여간 잔은 1745년에 루이 15세에게 인정받아 퐁파두르 지방의 영지와 후작 작위를 하사 받아 퐁파두르 여후작이 되었다. 원래 공식적인 정부(情婦)가 되려면 왕족 중 누군가가 대모(代母)가 되어 궁에 소개하는 절차가 필요한데, 루이 15세가 직접 콩티 공 (Prince de Conti)의 미망인 루이즈 엘리자베트에게 빚을 대신 갚아주며 부탁해서 해결했다. 그렇게 잔 앙투아네트 푸아송은 최초로 평민 출신의 메트레상티트르가 되어 예언이 실현되면서 개천에서 용 난 것이다.

부모를 모두 일찍 잃은 루이 15세는 거의 가정교사의 손에 의해 양육되어서 다양한 교육을 받았고, 굉장한 미남이어서 당시 유럽 제일의 미남으로 꼽히기도 했다. 그러나 증조부 루이 14세가 태양왕으로 재위 72년이라는 전무후무한 장기집권으로 아들 그랑 도팽(Grand Dauphing : 왕세자), 손자 쁘티 도팽(Petit Dauphin : 왕세손)이 모두 먼저 죽다. 증손자 루이 15세는 증조부 루이 14세처럼 5살에 즉위했지만 모든 정사(政事)를 초기 8년간은 재종조부인 오를레앙에게 맡겼고, 그 후에는 가정교사였던 플뢰리 주교를 추기경으로 승진시켜 재상을 맡겨 위임 통치했다. 그러니 본업은 등한시하고 주색잡기에 빠질 수밖에 없었다. 18세기 유럽 궁정생활의 꽃은 단연 섹스와 문화였다. 당시 애인이 없는 군주와 귀족은 사교계에서 따돌림을 받고 야만인 취급을 받았다. 설령 여색에 관심이 없는 남성일지라도 눈가림용 정부(情婦)를 둬야 체면치레를 할 수 있었다. 그런 시대 상황이니 호색한이었던 루리 15세의 행동이야 말할 것도 없다. 원래 호색한이란 한 여자에 만족하지 못하고 이 여자 저 여자에게 껄떡거린다. 루이 15세도 학업에 뜻이 없는 전형적인 껄떡쇠인 데다 생김새도 뽀송뽀송 이쁘장하게 생긴 얼굴값을 하느라 허구한 날을 미녀들과 침대에서 라운딩만 한다.


처음에는 섹시하고 방중술이 뛰어난 퐁파두르랑 찰떡궁합이었다. 유명 고급 매춘부 파르티산이었던 어머니에게 습득한 기술을 맘껏 발휘하여 왕을 침대에서 비행기 태워 홍콩 홍콩으로 보내곤 했지만, 꽃노래도 한두 번이다. 매번 지극 정성을 다하기란 쉽지 않다. 이제 귀족작위에 영지도 받았고 공식 정부로 임명되어 궁정 생활을 하다 보니 왕에게 매일 밤 서비스 질이 떨어진다. 자신의 권력을 유지하기 위해 연금술사(鍊金術士)들로부터 주문한 기기묘묘한 최음제를 복용하고 왕을 상대해 봤자 다. 음식점 밥맛은 고객이 제일 먼저 안다. 루이 15세도 퐁파두르의 기술이나 정성이 예전 같지 않고, 자신도 새롭고 신선한 영계 생각에 몸이 근질거리는 것이다. 이외로 퐁파두르의 매력은 중년으로 가면서 다른 면에서 풍기게 되는데, 스스로도 잘 몰랐나 보다. 루이 15세는 몸이나 섹스의 기교, 신선함은 젊은 여성에 비해 비교가 안 되지만 해박한 지식과 문화적 교양미에서 어떤 여자들보다 뛰어난 퐁파두르의 숨겨진 매력에 더 빠져있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가 생각해 낸 게 사교클럽이다. 그녀는 베르사유의 숲 속에 「사슴의 동산(Cerf Jardin)」이라는 「뿌띠 메종(Petit Maison)」 즉 작은 집이 아닌 저택을 만들어 파리에서 쭉쭉빵빵하는 언니들을 모집했다. 이 무려 2~3 백여 명의 미녀들이 오로지 왕 한 명의 쾌락을 위해 존재했고, 성애술을 익히는데 매일매일을 보냈던 프랑스판 할렘이었다. 더구나 머리 좋은 퐁파두르는 그곳을 이용하는 유일한 고객인 왕에게 상대한 여자들의 육체적 특징과 매력, 관계 시의 반응, 서비스 품질 만족도 등을 조사하여 왕의 입맛에 맞도록 끝임 없는 리모델링과 리콜을 실시했다. 결국 이것이 유행처럼 번져 왕족과 귀족들 사이에선 루이 15세의 성적 놀음을 흉내 내는 색다른 취향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그러니 자연적으로 쁘띠메종에는 성적 욕구를 자극하는 온갖 음란한 조각과 포르노를 방불케 하는 그림들로 가득 차 있었고, 남자만이 아닌 재력 있는 귀부인들도 자기 별장을 지어 남자들을 끌어들여 즐기는 풍조가 생기기 시작했다. 이런 세태는 그 후에 마리 앙투아네트의 충신이던 티몰백작과 모나코 왕족인 라큐르느는 로자리라는 첩을 별장으로 데려와 쓰리썸 쾌락을 질탕하게 즐겼다고 한다. 귀족들 사이에서 이런 유행처럼 번져나가자 파리의 고급 사창가 포주들은 고객을 잃을까 싶어 그들도 고급 저택에 쁘띠메종 같은 멋진 저택을 지어 아름다운 창부들을 고용하여 쾌락의 향연을 제공하였다.

뿌띠메종은 점차 개방화되어 드나드는 사람들이 귀족과 명사, 음악가, 미술가, 학자, 문인 등 다양했으며, 이들은 관능적인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며 문화적으로도 다양한 이벤트를 만들어 내곤 했다. 이러한 다양한 노력으로 퐁파두르는 왕에게 육신 공양을 하지 않아도 공식 정부의 직위에서 해임되지 않고 권력을 누릴 수 있었다. 이 시기에 로코코 미술의 거장 프랑수아 부셰(Francois Boucher)가 그린 <마드모아젤 오머피 또는 금빛 오달리스크> 작품 속의 마리 루이스 오머피는 이런 과정에서 왕에게 픽업이 된 여인이다. 마리 루이즈 오머피(Marie-Louise O'Murphy; 1737-1814)는 아일랜드계 부모를 둔 처녀였는데, 희대의 바람둥이 카사노바의 눈에 띄어 부셰의 그림 모델이 되었다는 설이 있다. 이 그림은 퐁파두르의 남동생에게 넘어가고 다시 누나에게 가서 왕이 그림을 보고 간택을 한 것이다. 부셰는 청초한 여인이 아름다운 엉덩이를 부끄러운 듯 들어내면서 남성의 눈길을 유혹하는 노골적인 자세를 그렸다. 이런 아찔한 포즈는 슬쩍 한번 보는 순간 남성의 정욕을 자극시킨다. 보이는 예쁜 엉덩이도 육감적이지만, 그 아래 감춰진 여성의 은밀한 그곳에 대한 남성의 강렬한 호기심과 욕구를 유인하게 한다. 부셰는 고도의 기교를 발휘해 여인의 숨겨진 은밀한 그곳이 생의 근본이며, 이 세상의 재산, 명성, 권력을 끌어들이는 원천임을 보여준 것이다. 이 때문에 부셰는 "음탕한 화가" "젖가슴과 궁둥이 그림"이라는 혹평을 들어야 했다. 유혹의 천재인 퐁파두르는 쉬 싫증을 내는 왕의 심리를 분석해 완벽한 맞춤 서비스를 제공했다. 퐁파두르는 다양한 주제의 대화, 색다른 분위기 연출, 황홀한 섹스 비법 등 심지어 베르사유에 소극장을 만들어 연극의 연출과 배우로 출연까지 하면서 왕이 권태를 느낄 틈을 주지 않았다. 또 퐁파두르는 예술이라는 고상한 취미로 왕을 유혹했다. 덕분에 왕은 우아한 예술 애호가로 변신해 로코코 예술을 화려하게 꽃 피우게 된다. 미녀와의 섹스는 사정(射精)하는 딱 한 순간 즐겁지만 왕은 미모와 지성, 예술을 두루 갖춘 퐁파두르에게는 온종일 넋을 빼앗긴 것이다.

그녀는 이러한 왕의 두터운 신임을 바탕으로 정치와 외교, 군사문제에도 개입하여 감 놔라 배 놔라 시시콜콜 참견하기도 했다. 이런 행동의 이면에는 루이 15세가 내성적이며 샤이한 성격이라서 면전에서 장관들하고도 회의하는 것을 꺼리고, 특히 싫은 소리를 못해서 편지로 장관을 해임하기도 했다. 그러니 편지를 쓸 때 퐁파두르의 의견이 반영되는 건 불문가지다. 또한 타고난 사치 감각을 발휘해 새로운 패션 스타일도 많이 남겼으며, 프랑스 로코코 양식의 탄생에 중요한 영감을 제공하기도 했다. 그녀의 군사에 관한 업적 중 특이한 것은 세계 최초로 사관학교를 만들도록 한 것이다. 그녀는 왕으로부터 받은 후원금으로 평민 중에서 지원자를 받아 군 장교로 양성하는 왕립 군사학교를 설립하도록 하였다. 역사적 역설적인 사실이 일어나게 마련인데, 왕실을 타도하고 자신이 황제가 되는 나폴레옹이 바로 이 학교 출신이었다. 그녀의 도자기에 대한 심미안과 기호로 독일의 마이센(Meissen) 자기를 선호하자, 프랑스에서도 뱅센느(Vincennes) 자기가 개발되어 프랑스의 방센 세브르 도자기 제조업의 메카로 성장했다. 최초의 복권사업자이면서 바람둥이 카사노바의 젊은 시절 후견인이 되어 복권 사업의 수익금으로 파리 재건을 시도하기도 했다. 또한 프랑스의 유명한 경제학자 케네(Quesnay)는 원래 퐁파두르의 주치의였다. 그는 루이 15세의 사치와 낭비에 염증을 느낀 나머지 경제학을 연구했다. 그래서 <경제표(Tableau Economique)>를 저술해 사회적 총자본의 재생산과정을 과학적으로 분석하고 중농주의 경제학을 태동시켰다. 독특한 취향을 가진 예술 애호가로서 퐁파두르는 그녀만의 스타일을 추구하여 다양한 분야에 그녀의 이름을 남겼다. 퐁파두르 의상은 로브 아 라 프랑세즈(Robe a la Francaise) 복식, 퐁파두르 헤어 스타일, 퐁파두르 신발 등 다양하다. 다이아몬드 커팅 법 중 프린세스 컷 또는 Navette-cut(보트 모양)는 루이 15세가 그녀의 입 모양을 본뜬 것을 선호하여 생겼다고도 한다. 특히 좋아하는 색을 퐁파두르 핑크(파스텔 핑그)와 파스텔 민트였다. 분홍색과 하늘색의 혼합으로 엄청 유행이었고, 도자기 공장 세브르는 그녀를 위해 생산한 제품에 이 색을 사용했다. 푸른빛이 도는 분홍, 거기에 검정과 노랑이 약간 느껴지는 색이 바로 퐁파두르의 핑크이다. 화려하고 꽃잎이 큰 분홍색의 장미 이름이 퐁파두르를 딴 것이다.

그녀를 그린 그림을 보면 보석으로 장식한 귀부인들과 달리 대부분 그녀가 책을 들고 있거나 책을 주변에 배치한 구도이다. 이런 것이 그녀의 교양적인 모습이다. 실제에 있어서도 당시 드니 디드로를 비롯한 계몽주의 학자들이 저술한 <백과전서(Enciclopedie)>가 보수주의자들에 의해 출판이 금지된 것을 말 한마디에 해금(解禁)시켰다. 이것도 역사의 아이러니로 장 자크 루소, 볼테르 등 계몽주의 사상이 발전하여 프랑스혁명이 일어났으니 말이다. 퐁파두르는 총명했을 뿐 아니라 성격도 활발했고 모든 방면에 걸쳐 예술적 재능을 보였다. 전문 성악가와 배우들로부터 연기수업까지 받았던 그녀는 극작가 몰리에르의 작품을 비롯한 여러 목가극을 연기했고, 라모나 륄리의 오페라 아리아를 직접 부를 정도로 성악 실력도 탁월했다. 기타, 만돌린, 클라비코드와 하프시코드 연주에도 능했다고 한다. 춤에도 능했던 것은 루이 14세의 정부였던 마담 드 몽테스팡과 비슷했다. 퐁파두르 부인은 그녀가 거주했던 벨뷔의 성에 개인극장뿐 아니라 파리의 ‘드 랑트르솔 클럽’, 베르사유 소극장에서 몰리에르의 희극과 륄리의 오페라를 무대에 올렸는데, 때로는 배우로 직접 무대에 오르기도 했다. 벨뷔성의 벽화는 당대 최고의 화가인 부셰가, 식당 벽은 사냥 그림으로 유명한 장-바티스트 우드리가 담당했다. 전체 리모델링의 감독을 맡은 사람은 왕실 화가 샤를 반 루였고, 정원은 18세기 대표적인 조각가 피갈과 에티엔 팔코네의 조각으로 장식했다. 그녀는 와인 중에서 특히 샴페인 모에샹똥(Moët & Chandon)을 좋아했다. “마시고 난 이후에도 여성을 더욱 아름답게 해주는 와인은 샴페인뿐이다.”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는 그녀. 샴페인 하우스 모에 샹똥의 기록에 따르면, 1748년부터 베르사유 궁에 매년 120병씩 샴페인을 공급했다. 퐁파두르는 여름 별장에 200병을 따로 주문하기도 했다. 그녀의 가슴을 본떠 만들었다는 ‘퐁파두르 샴페인 잔’이 있었다고도 하니, 그녀가 샴페인을 좋아했음은 틀림없다. 어느 연회 석상에서 루이 15세가 퐁파두르에게 토카이 와인을 가리키면서 “마담, 이 포도주는 군왕이 마시는 술이며 포도주의 군왕입니다.”라고 격찬했다. 이후 이 말로 인하여 토카이 와인을 "왕들의 와인이며 와인의 왕"으로 부른다. 사실 이 말은 루이 14세가 한 것이라는 설도 있으나 확인 불가다. 토카이는 헝가리에서 생산하는 달콤한 귀부(貴腐 : Noble Rot) 와인이다. 18세기 상류층에서 최고의 인기를 구가했다. 프로이센의 프리드리히 대왕과 대영제국의 빅토리아여왕도 즐겨 마신 와인으로도 유명하다. 베르사유 궁에 들어가기 전 퐁파두르와 루이 15세가 편지를 주고받던 시기가 있었다. 그때 볼테르가 좋은 문구나 시를 퐁파두르에게 알려주었다고 한다. 볼테르는 그녀에게 토카이 와인을 선물로 받았다. 토카이 와인을 빚는 데 쓰는 포도는 헝가리 토종인 푸르민트와 할레브뤼(Harslevelu)다. 이 두 종이 블랜딩되어 깊고 훌륭한 맛의 흰 포도주가 빚어진다. 포도를 늦게 수확해 밭에서 이미 귀부병(포도가 썩어드는 상태)에 걸린 상태로 술을 빚는다. 며칠간 쟁반에 담아 두었다가 포도당이 최고조에 달할 무렵 즙을 내, 이 즙을 기본와인(Dry Base Wine)이나 머스트(Must, 포도송이를 파쇄한 즙)에 섞어 새로운 와인을 얻는다. 이 과정을 거친 토카이 화이트만 라벨에 Aszu(옷수)라고 표시할 수 있다. 옛날 수도원장이며 와인 생산 책임자였던 마테 셉쉬(Mate Szepsi)는 터키의 침략에 대비해 농부들에게 포도 수확을 늦추라고 했다. 이로 인한 포도송이에 귀부병 현상이 왔다. 이 덕분에 포도의 당분이 한껏 올라 특이한 향과 맛을 내는 토카이 와인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퐁파두르는 국왕의 정부로서 궁궐에서 호의호식하면서 방탕한 생활만 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그녀의 일상을 잘 살펴보면 엄청 스트레스를 받고 살았음에 틀림없다. 첫째 왕과의 사이에 자식이 없었다. 이것은 엄청남 핸디캡으로 지위가 흔들린다. 단 1분 1초도 자기만의 시간이 없었다. 시도 때도 없이 불러대는 소심한 왕 탓이다. 그리고 각종 국내외 행사와 연회에 무조건 참석해야 한다. 정치적 외교적 의사결정에 조언을 해야 한다. 자신의 신분이 평민 출신이라 남들의 따가운 시선과 뒤 담화를 잘 견뎌야 한다. 더구나 소식가인 자기와 달리 대식가인 왕과의 식사는 거의 죽음이다. 싫어도 꾸역꾸역 먹지 않을 수가 없다. 사냥은 좋아하지만 책은 멀리한 왕에게 책을 읽어주어야 했다. 하루 종일 격무에 시달리고 밤에는 침대에서 시달려 보라. 몸이 견디겠는가. 그래서 국왕의 연인이자 조언자였으며, 무엇이든 털어놓을 수 있는 절친한 친구로서 막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는 그녀는 1764년 폐결핵으로 사망한다. 지독한 편두통에 시달리는 등 루이 15세로부터 얾은 성병 탓이라는 주장도 있지만 일세를 풍미한 그녀는 43세에 세상을 등진 것이다. 그녀를 악평하는 반대파 어느 문학가 그녀의 비명이라면서 남기 기록이 다음과 같다. “15년 간 처녀였으며, 20년 간 창녀였고, 7년 간 뚜쟁이였던 여자, 여기에 잠들다.” 퐁파두르에 대한 루이 15세의 사랑은 깊었나 보다. 그녀의 시체가 궁을 나가는 것을 보면서 “짐이 그녀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눈물뿐이다.”라고 탄식했다. 그날 비가 왔던지라 “부인의 여행길에 날씨가 썩 좋지 않군”이라 안타까워했다고도 한다. 어쨌든 왕족이 아니기에 원래는 궁전에서 죽을 수 없었던 마담 드 퐁파두르에게 궁전에서 죽을 수 있도록 머무르는 것을 특별히 허락했다. 그녀가 고해성사를 하기 직전까지 같이 있었다는 것을 봐서는 루이 15세도 퐁파두르에 대해서 상당히 애정을 가진 듯하다.

현대에 들어와서 얘기지만 독일의 명품 만년필 제조사인 몽블랑이 역사적인 인물에 대한 한정판 제품을 연차별로 제작했는데, 2001년 제품이 퐁파두르에게 헌정된 것이다. 프랑스 로코코 시대의 전설적인 뮤즈였던 퐁파두르를 기리기 위해 <마르끼즈 드 퐁파두르(Marquise de Pompadour)>라는 만년필을 4,810개 한정 상품으로 제작하였다. 이것은 마이센(Meissen) 자기로 제품 외장을 장식하였으며, 제품 고유의 일련번호와 함께 마이센 자기의 트레이드 마크를 정교하게 조각해 놓았다. 캡은 백색의 마이센(Meissen) 자기로 제작되었다. 펜의 뚜껑에 그려진 장미는 퐁파두르가 가장 좋아하는 꽃으로 세피아 컬러(암갈색)로 손으로 직접 그려 넣었으며, 골드 컬러로 하이라이트를 주었다. 캡의 뒷면에는 275년간 이어온 Meissen 자기의 트레이드 마크, "Crossed Blue Swords"를 장식하였고, 캡의 장식은 래커칠을 한 도금된 몸통과 도금한 fitting, 로코코 양식이 표현된 18k의 펜촉과 조화를 이루도록 제작되었다. 이 제품은 전 세계의 성공한 마니아들에게 판매되었는데, 한국에는 50개 정도 배정되었고, 가격은 250만 원이었는데, 지금은 중고가 450만 원 정도로 올랐다. 몽블랑은 1906년 독일 출신의 문구상 C.J. 휘스, 은행가 C.W. 라우젠, 기술자 W. 잔보아 등 세 사람이 함부르크에 「심플로(Simplo)」라는 만년필 회사를 설립했다. 이들은 1910년에 회사명을 「몽블랑(Mont Blanc)」으로 바꾸고 고급 만년필 생산에 주력하기 시작했다. 모든 제품에 새겨진 몽블랑의 로고는 유럽 최고봉인 알프스의 몽블랑 정상의 만년설을 상징한다. 이는 펜촉에 새겨진 「4810」은 몽블랑의 고도이다. 18K의 펜촉은 철저한 수작업을 통해서 이뤄진다. 만년필 한 자루가 거쳐야 하는 공정만 무려 150가지가 넘기 때문에 한 자루를 만드는 데만 6주 이상의 시간이 소요된다. 이 같은 생산과정의 결정판이 바로 1924년 출시된 「마이스터스틱(Meisterstuck)」제품. 독일어로 「걸작」을 뜻하는 이 제품은 인체공학적 설계, 정교한 펜촉으로 몽블랑의 이름을 세상에 알리는 신호탄의 역할을 했다. 이 제품의 디자인은 1924년 출시된 이후 한 번도 변형된 적이 없다. 중국 시장을 겨냥한 <강희제> 한정판은 한 개에 9천만 원이 넘는 고가이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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