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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 콩가루 집안의 색녀 왕비 – 마리아 루이사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 (240327)

by 금삿갓

우리말에 ‘콩가루 집안’이란 말이 있다. 콩가루처럼 고소한 맛이 나는 집안이 전혀 아니고 서로 고소(告訴)해서 못 잡아먹는 관계다. 이 말의 발생 원인은 쌀이나 보리, 밀 등의 가루는 어느 정도 점성이 있어서 반죽을 하면 뭉쳐지지만 콩가루는 반죽을 해도 뭉쳐지지 않는다. 그래서 점성이 강한 떡을 서로 달라붙지 않고 고소한 맛을 보강하기 위해 겉에 콩가루 즉 콩고물을 바르는 것이다. 유사 이래 지금까지 역사를 쥐고 흔들던 가문 중에 이런 콩가루 집안이 아주 많았다. 요즘엔 용어도 다양해져서 막장가족, 양아치 가족 등으로 대체되기도 한다. 우리 역사에도 연개소문 일가, 견훤 일가, 신라말기의 왕가 등등 무수하고, 현대의 경우 북한 김정은 일가, 재벌가 등이 매스컴을 장식하였다. 중국이나 서양의 역사에도 마찬가지다. 인간이란 본성이 비슷해서 발생하는 일의 패턴도 비슷한 것이다. 오늘의 여주인공 마리아 루이사의 가족도 막장 콩가루 집안이어서 후세 사람들이 흥미롭게 들여다볼 수 있다. 그녀의 본명은 루이사 마리아 테레사 아나 데 보르본파르마(Luisa María Teresa Ana de Borbón-Parma)로 엄청 긴 이름이다. 그녀의 넷째 딸도 이름이 마리아 루이사(Maria Luisa)여서 그 둘을 분별하기 위하여 주인공인 어머니 마리아 루이사에게는 파르마(Parma)를 붙이고, 딸에게는 스페인(에스파냐)을 붙여서 불렀다. 그것은 그들이 태어난 곳을 붙임으로써 구분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여주인공의 성격이나 행실(미모는 좀 빠질지도)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마리 앙트와네트와 메리여왕, 다이애나 왕세자비를 뭉쳐서 섞어놓은 상태라고 볼 수 있었다. 콩가루 집안의 전형적인 한 형태였던 것이다.

파르마의 마리아 루이사(María Luisa de Parma, 1751~1819)는 파르마의 필리포와 프랑스의 엘리사베타 사이에서 막내딸로 태어났으며, 어머니 엘리사베타는 프랑스의 루이 15세의 딸이었다. 친할아버지는 스페인의 왕 펠리페 5세, 외할아버지는 프랑스의 왕 루이 15세로, 아버지는 본래 스페인의 왕자였다. 오스트리아 왕위 계승 전쟁의 여파로 아버지가 파르마 공작으로 임명되면서 파르마 궁정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을 보냈다. 어머니의 영향으로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자랐다. 8살 때 어머니가 사망하고 그다음 해에 언니 이사벨라가 신성 로마 제국으로 시집을 가면서 외로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성장하면서 마리아 루이사는 빼어난 미인으로 유명했던 언니에는 못 미치지만 그런대로 매력적이라는 평을 받았다. 그녀의 나이 14살이 되던 1765년에 사촌 오빠인 아스투리아스 공(公) 카를로스(Charles) 왕세자와 결혼하는데, 당시 시어머니인 왕비 마리아 아말리아도 사망하고 없어서 며느리이지만 궁궐 내에 여자 서열 1번이었다. 왕세자는 1788년 국왕으로 즉위한 카를로스(Charles) 4세다. 그는 아버지 카를로스 3세가 나폴리 왕도 겸하고 있어서 이태리에서 태어나 청소년기까지 거기서 보냈다. 어릴 때부터 신체는 건강했으나 다른 형제들과 달리 영민하지 못하여 석두(石頭)라는 소리를 귀에 못 박히도록 들었다. 그래서 부친은 왕세자이지만 국정에 참여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대부분의 시간을 사냥과 목공, 시계 수선하는데 허비하였고, 취미는 보체리니(Boccherini) 음악과 궁정화가들의 그림에 심취하곤 했다.

반면에 마누라는 일찍부터 프랑스식 교육을 받고, 약간 영악하면서 교활한 성격에 적극적으로 정치에 참여를 하려는 편이라서 3살 연상의 남편은 마누라 앞에서 쪽도 못 쓰는 형편이었다. 아들이 칠칠치 못하자 시아버지 카를로스 3세는 똑똑하며 활기찬 며느리가 좋아서 그녀의 입지를 많이 인정해 주었다. 그러니 점점 간이 배 밖으로 나와 궁정에서 무서울 게 없었다. 왕세자비 13년 동안에 그런 정도로 설쳤으니 왕비가 되면 볼 장 다 본 거다. 이런 스토리는 마치 프랑스의 마리 앙트와네트와 루이 16세의 조합을 떠올리게 하는 거다. 루이 16세도 정치에는 관심도 능력도 없어서 그저 자물쇠 가지고 놀기가 최고였다. 성인 유머에 남자는 만능키를 갖고 있다고 했는데, 이놈은 그 만능키로 마누라의 비밀문은 열 생각도 않고 엉뚱한 자물통만 들고 있으니 한심할 노릇이다. 마찬가지로 카를로스 또한 맨날 사냥을 하고 돌아오면 피곤하다며, 보체르니의 첼로 협주곡이나 듣고 있다가 심심하면 궁정화가들을 불러서 테피스트리에 그림 그리라고 하고는 그걸 보는 게 일과였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맨날 그런 것에 빠져 살면서 마누라가 무슨 짓을 하건 관심도 없었는데, 그들 부부는 결혼생활 동안 20번이 넘는 임신을 하였단다. 밤일에 있어서 의무방어전을 착실히 잘 치렀는지, 아니면 아랫것들의 도움을 받았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유효한 안타를 20번이나 쳤다. 그녀는 중 반은 유산했으며, 유아기에 요절한 아이들도 많았다. 성인이 될 때까지 생존한 아이는 7명뿐이었다. 그나마 생존한 아이들도 하나같이 작고 허약해서 궁중에서는 왕비의 행실이 불순해 저주에 걸렸다는 흉흉한 소문이 돌았다. 수차례 임신과 출산, 유산을 반복하면서 마리아 루이사의 미모는 점점 쇠퇴했다. 그리고 건강을 해치게 되어 마흔이 되기도 전에 대부분의 이빨이 빠졌다고 한다. 그러나 야심 찬 마리아 루이사는 늘 열정적이었으며, 온갖 국정에 큰 관심을 두었단다. 임신은 자주 했지만 유산을 자주 하니 시아버지 카를로스 3세도 점차 그녀에게 호감을 거두고 국정 참여를 막으려고 했지만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며느리의 남성편력에 대해서도 눈치를 채고 신경을 거스르게 한 것이다.

신파조(新派調) 스타일의 스토리를 전개하면, 서방이란 놈이 허구한 날 사냥이나 음악, 그림에 빠져서 관심을 보이지 않는 게 어린 신부일 때는 좋았을 수도 있다. 그러나 몸이 익을 대로 무르익은 한창 나이의 루이사는 밤이면 밤마다 욕구불만이 생길 수밖에 없다. 임신 횟수를 봐서 알겠지만 남의 씨가 약간 섞였다고 해도 많은 횟수이다. 횟수만 봐서는 서방이란 놈이 밤마다 줄기차게 바를 정(正) 자를 벽에다 빼곡하게 적어놓고 했거나, 달력에 날짜 표시해 가면서 의무 방어전을 했지 않을까 싶다. 그러나 횟수만 많으면 뭐 하나. 횟수가 조금 간헐적이더라도 루이사를 홍콩 아니 모나코 정도까지라도 보내주는 질적인 문제가 해결되어야 여자는 행복을 느낄 텐데. 허구한 날 똑같은 폼으로 준비운동인 전희(前戲)도 없이 짧은 퍼터하나 들고 홀 주변을 쓰리 퍼팅으로 깔짝거리다가 대충 집어넣고, 홀아웃 하고는 뒤처리도 않고 그린에서 퇴장해 버리는 매너였다면 볼 장 다 본 것이다. 이런 플레이어는 당연히 동반자가 싫어해서 다음부터는 콜이 들어오지 않는다. 그린 필드에서는 타수가 적고, 플레이가 빠른 게 좋을지 모르지만 화이트 필드(White Field)의 계곡코스(Valley Course)에서는 이리저리 견주고, 홀 주변을 오래도록 왔다 갔다 하면서 심혈을 기울이고 정성스럽게 홀인한 후, 깃대를 최대한 천천히 빼는 것이 최고의 매너이다. 임신 20번이라는 스코어가 아무리 좋아도 짤순이 똑딱 볼에 얌체 퍼팅만 후딱 하고, 홀 상태는 돌아보지도 않는 골퍼는 베드 필드(Bed Field에서는 매력이 없어서 환영받지 못한다.

하지만 강호의 무수한 필드에는 카를로스 같은 매너 없는 골퍼만 있는 게 아니다. 각자의 장기와 비밀병기로 무장한 화려하고 스마트한 골퍼들이 왕궁 주변에는 수두룩 빽빽이다. 대물 드라이버를 장착한 장타자도 있고, 칼날같은 정교한 기술 샷을 마음껏 구사하는 아이언 맨도 있고, 홀 주변에서는 누구의 추종도 불허하며 세밀한 홀 상태를 읽어 홀이 원하는 방향으로 넣어주는 홀맨도 있고, 물 없는 벙커에서도 물 만난 잉어처럼 유연하고 리드미컬하게 플레이하는 벙커맨도 있으며, 오비성 픽사리가 나서 덤불 속이나 숲 속에서도 멋지게 홀 근처에 붙여서 파 세이브하는 트러블맨도 있다. 멍한 서방만 쳐다보면서 공이 홀로 들어오길 기다리던 루이사는 눈을 돌리자 같이 라운딩 할 플레이어들이 줄을 서서 기다리는 것이다. 이런 별천지를 두고 매일 밤마다 욕구불만에 몸을 떨었던 지난 날이 후회스럽다. 루이스는 ‘청춘을 돌려다오’라고 소리치면서 장타자 테바백작, 기술 샷의 펜테스 백작, 홀 기술자 랑카스트레 백작, 벙커맨 오르티스 백작 등 다양한 강호의 내로라하는 플레이어들을 콜 하여 베드(Bed) 필드로 이끌었다. 그녀는 모든 라운딩에서 자신이 홀라당 벗겨지든 그들이 두 손을 들든 진검 승부를 걸어서 그들의 등짝에 그녀의 시퍼런 손톱자국을 남기곤 했다. 중이 고기 맛을 알면 절간에 빈대가 남아나지 않는다고, 육정의 깊은 맛을 알고난 루이스는 이들을 하나같이 오로지 자기 것으로 만들고 싶었지만 어불성설이다. 잘난 놈은 모두 기혼자라는 말이 있듯이, 만나는 놈들 모두가 마누라 눈치 보느라 부킹 날짜를 잡을라치면 마누라 핑계 대고 여간 성가신 게 아니다. 그래서 루이사는 자기만의 일대일 레슨 프로 즉 기둥서방이 필요하다고 느꼈다. 그래서 귀족이 아닌 자기 맘대로 후릴만한 계급에서 고르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다가 어느 날 궁궐을 산보하듯 한 바퀴 도는데 정말 훤칠하고 옹골차고, 튼실하고 믿음직한 한 젊은이가 눈에 딱 들어온 것이다. 이 친구가 오늘의 남자 주인공 마누엘 고도이(Manuel de Godoy, 1767~1851)이다. 그는 가난한 하급 귀족 가문 출신으로 마리아 루이사 보다 12살이 어렸고, 당시 17살의 영계 때인 1784년에 왕실 근위대가 되었다. 신분이 낮은 근위병이었는데, 그 당시 기준으로 엄청 잘 생겼나 보다. 당시 나르시스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빼어난 호빠(Host Bar)성 미남자였다. 원래 잘 나가는 여성들이 보디가드 혹은 근위병,매니저들과의 로맨스가 가끔 발생한다. 그만큼 가까이서 자주 접촉을 하다 보면 자기도 모르게 정이 들 수도 있겠다. 마돈나도 젊었을 때 보디가드 겸 애인으로 제임스 울브라이트와 관계했고, 늙어서도 35세의 연하남인 보디가드 겸 조수인 알라말릭 윌리엄스와 관계하고 있다. 다이애나 왕세자비도 남편 찰스가 외도를 하자 화가 치밀어 올라서 자신의 보디가드인 매나키와 맞바람을 피다가 엘리자베스 여왕에게 걸려서 보디가드가 해고되는 일을 겪기도 했다. 아무튼 근위병이던 마뉴엘 고도이는 마리아 루이사가 한눈에 뻑가게 반한 모양이었다. 당근 장가도 안 간 총각이고 한참 젊고 싱그러운 사내의 맛에 반하지 않을 중년 여인이 있으려나. 이 친구가 얼마나 루이사를 위해 밤일을 열심히 그리고 잘했는지 문틈으로 들여다보지 못해서 자세히는 알 수 없다. 그러나 그 친구의 승승장구하는 이력을 보면 뭔가 집히는 게 있을 것이다. 이 친구가 루이사의 몸과 정신을 얼마나 살살 녹여 놨는지 그의 이력을 잠깐 보자. 보자마자 장교가 된 후로 급속도로 승진을 거듭해 6년 만인 1790년에 지휘관이 되었으며 이듬해에는 육군 중장이 되었다. 1791년 총리 플로리다블랑카(Floridablanca)는 고도이와 왕비가 애인 관계에 있다고 폭로하려다가 루이사에게 도리어 되치여 이듬해 초 실각했다. 후임 아란다(Aranda) 총리 또한 10 개월 만에 실각하자 1792년 11월 15일, 나이 25세에 고도이는 최연소 총리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여당대표였던 이준석보다 더 어린 나이에 벼락 출세를 한 것이다. 그는 알쿠디아(Alcúdia) 공작의 작위를 받았으며 황금양모 기사단의 단원이 되었다. 또 이듬해에는 총사령관, 스에카 공작, 알바레즈 후작, 소토 데 로마(Soto de Roma) 경에 봉해졌다. 꽃밭에 물 잘 준다고 어린 나이에 국정의 최고 책임자로 앉혀 놓이니 나라꼴이 말이 아닌 것은 누구나 알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그래도 걱정하거나 눈 하나 까딱 않고 있던 사람은 스페인 국민들이 아니고 딱 세 사람이었다. 바로 카를로스 4세 국왕과 왕비 마리아 루이사, 그리고 총리 겸 그녀의 애인 마뉴엘 고도이뿐이다. 어떤 일이 있어도 루이사는 고도이를 칭찬하는데 여념 없다. 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아무리 죽고 못 사는 사이라도 사랑은 시효가 3년을 넘지 못할 텐데, 무슨 연유일까? 비법은 바로 고도이가 전형적인 B형 남자이면서 B급 남자였던 것이다. 금삿갓이 민완 기자로서 당시의 루이사를 만나 가상 인터뷰한 내용을 재구성해 보겠다.

금삿갓 : 얼굴에 웃음꽃이 지지를 않는데 무슨 특별한 건강 비결이라도 있는가?

루이사 : 당근 있다. 사랑을 해봐라. 사랑을 하면은 예뻐진다는 노래도 안 들어 봤냐?

금삿갓 : 사랑 좋지. 그런데 한 사람과 사랑이 그리 오래 가나?

루이사 : 사랑은 삼 년이라고 하지만 개 코 같은 소리다. 상대에 따라 다르다.

금삿갓 : 고도이 그 친구의 뭐가 그리 좋은가? 밤무대? 매너? 힘?

루이사 : 그걸 어떻게 말로 다하나. 걔는 정말 죽여주는 아이다. 시시껄렁한 젊은 놈 열 명 줘도 안 바꾼다.

금삿갓 : 구체적으로 어떤 면인지 자세하게 말해달라.

루이사 : 말로 표현할 수 없지만, 이제까지 만난 다른 놈들과는 질이 달라. 다른 놈들은 그저 내 앞에서 내 비위만 맞추려고 하고, 한 라운딩만 하면 빌빌 거리고 고분고분 댔는데 걔는 달라.

금삿갓 : 테크닉이 다르다는 건가? 힘이 다르다는 건가?

루이사 : 아 참, 그걸 어떻게 말로 표현해? 뉘앙스의 차이를 말로 표현 못하지. 그냥 느껴야 알지. 아무튼 어떨 때는 날 아주 거칠게 다뤄. 마치 나를 하인 취급하거나 강간하는 듯해.

금삿갓 : 그대는 마조히스트인가?

루이사 : 무슨 그런 섭한 말씀. 아주 정상이다. 너는 맨날 집 밥만 먹나? 짜장면이나 순댓국 생각은 안 나니?

금삿갓 : 그거야 밥의 종류를 바꾸는 것이니까 상대를 바꾸는 것과 같지.

루이사 : 맞아. 바로 짚었어. 걔는 상대가 바뀌지 않았는데도 늘 상대가 바뀐 것 같은 느낌이 들어. 늘 새장 문을 열면 날아가 버릴 것 같은 걱정이 되거든. 나를 창녀 취급하다가, 귀부인 서비스 하고, 갖고 놀기도 하고 종잡을 수 없이 나를 황홀하게 해.

금삿갓 : 겪어보지 못해서 느낌이 멍하구먼.......쩌업.

사태가 이 정도였는데 남편인 카를로스 4세가 이런 사실을 몰랐을까? 이들의 관계가 그냥 낭설이고 깨끗한 관계라서 남편이 신경 쓸 필요가 없다는 설이 있고, 원래 대가 센 마누라에 휘둘려서 꼼짝 못 하는 남편이 그냥 알고도 눈감고 넘어갔다는 설이 유력할 수도 있다. 낭설인지 모르지만 당시 스페인을 꼴깍 집어삼키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나폴레옹이 스페인 국왕 카를로스와 나눈 정상급 외교의 뒷 담화 문서가 비밀 봉인이 해제되어서 잠깐 들춰보니 대충 이렇다. 대화 비망록에는 나타나 있지 않지만 행간의 의미를 읽을 수 있는 능력이 있는 독자만이 해답을 구할 수 있다.

나폴레옹 : 국왕께서 궁을 자주 비우고 국사에 열심인데 주로 역점 사업이 무엇인가?

카를로스 : 일이라는 게 책상에 앉아 있다고 되는 게 아니다. 우문현답 즉, 우리의 문제는 대부분 현장에 답이 있다. 이것이 나의 통치 철학이고 역점 사업이다.

나폴레옹 : 좋은 생각이고 좋은 말이다. 그래도 매일 궁을 비우는데, 왕이 자주 가는 현장은 주로 어디인가?

카를로스 : 현장은 여러 곳이다. 계절에 따라 동물들의 활동이 다르므로 정확한 답을 잘 찾아야 한다.

나폴레옹 : 아하, 중요한 현장이군. 백성들의 삶은 안 살펴보나?

카를로스 : 그거야 나 아니라도 그걸 좋아하는 마누라 루이스와 훌륭한 고도이 총리가 있으니 난 신경 끄고 살아도 된다. 그 사람들 만나봐야 요구사항만 많고 안 만나는 게 낫다.

나폴레옹 : 마지막으로 한 가지만, 궁에 남아 있을 때는 잠들기 전까지 하는 취미나 오락은 무언가?

카를로스 : 남아 있을 때도 별로 없지만, 화가들 불러서 그림 그리라고 하고, 이들과 노닥거리다가 잠잘 때까지 악사들 불러서 음악 듣고 나서 와인 몇 잔 마시고 잔다. 취미와 오락은 고상하고 우아한 음악 감상과 그림 감상이다. 그대처럼 교양없이 모양 빠지게 총칼 들고 설치지 않는다.

국왕이라는 작자가 정치는 대리인에게 맡기고 오로지 야생동물들 뒤꽁무니만 쫓아다니니 할 말이 없다. 그래도 여자 꽁무니만 쫓아다니는 것보다 나은 것인가? 이런 상황이니 왕비 루이사와 고도이는 거의 대놓고 쾌락과 부와 권세를 한껏 누린다. 그래서 가톨릭 국가의 국민들 답게 이들 세 사람을 일컬어 "지상의 삼위일체"라고 조롱했다. 삼위일체란 성부와 성자와 성령으로 일체인데, 이들은 마치 "사창가의 포주와 창녀와 기둥서방"이 일체가 된 것이라고 꼬집은 것이다. 특히 고도이의 벼락 출세와 정권 장악을 보고 몸을 팔아 권력을 산 "소시지 장수"라는 별명을 붙여 주었다. 그런데 이 삼위일체 콩가루 집안의 이야기는 그들만의 리그로 끝나지 않고 궁궐 밖으로 까지 연결되어 뭉게구름처럼 피어오른다. 그건 바로 끓는 피를 주체 못 하는 고도이가 늙은 왕비 하나로 성에 차지 않아서 뭇 여자들을 닥치는 대로 건드리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마드리드의 고도이 총리 집무실 앞은 연일 호화찬란한 마차를 타고 온 귀부인들로 넘쳐나서 마치 거대한 카바레나 살롱을 방불하게 했다. 그러자 힘 좋은 젊은 고도이가 열 여자마다 않고 손만 뻗치면 나긋나긋한 귀부인들이 치맛자락을 들춰주었다. 그러자 질투심으로 눈에 쌍심지를 켠 루이사 왕비가 고도이의 집무실로 씩씩거리며 쳐들어갔다. 하지만 고도이는 콧방귀도 안 뀌고 도리어 사람들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왕비에게 면박을 주거나 자꾸 대들면 심지어 싸대기를 때리기도 했단다. 육정(肉情)이 들고 색욕에 눈먼 루이사에게 이젠 수치심이고 나발이고 없다. 어떻게 하면 애지중지한 고도이를 다른 여자들 치마폭으로 빼앗기지 않고 자기 침대로 끌어들일까만 궁리한다. 자기의 잔소리나 감시만으로는 고도이의 바람기를 잡을 수 없다고 판단한 루이사는 남편에게 SOS를 친다. 자기 정부(情夫)의 바람을 막기 위해 남편의 힘을 빌려 그를 체포하도록 요구한다. 그러나 남편인 카를로스는 소 닭 보듯이 고도이가 정치를 잘 이끌고 있는데 왜 체포하느냐며 허락하지 않는다. 그러자 그녀는 로마 교황청에 사람을 보내서 고도이의 체포 명령을 받아 오도록 하였으나, 심부름 간 사자가 돌아오는 길에 나폴레옹에게 잡혀서 체포 영장을 빼앗기고 만다. 루이스는 되는 게 하나도 없이 속만 끓인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시녀들과 그룹토의와 브레인스토밍을 한 결과 좋은 방안을 하나 찾았다. 바로 고도이를 야리야리한 예쁜 영계와 결혼을 시켜서 그 신부로 하여금 고도이의 발목을 잡게 만들고, 대신 자기가 필요할 때는 언제든지 궁으로 불러들일 수 있도록 하는 거다. 등기는 없지만 자기가 전용으로 사용하다가 일단 다른 여자 명의로 등기를 내주는 꼴이므로, 등기된 그 여자가 왕비의 명령에 깜빡 죽는 관계라야 할 것이다. 그리하여 1797년에 고도이 나이 34살로 법률적 노총각 딱지를 띠게 되었다. 루이사는 당근 46살로 당시에는 할머니급이 된 것이다. 루이사 왕비는 이런저런 처녀 중에 남편 카를로스의 4촌 여동생인 마리아 테레사를 애인의 마누라로 골라서 결혼을 시킨 것이다. 테레사는 당시 꽃같이 어여쁘고 야리야리한 방년 18세로 고도이와 결혼하였다. 그러나, 제 버릇 개 못 주고 개 꼬리 3년 두어도 황모 못 된다는 말대로 고도이의 난봉 엽색 행각은 변하지 않는다. 고도이는 결혼 전에 왕비 루이사와 놀았지만, 결혼하고도 바람을 계속 피워서 애인을 또 한 명 더 사귀고 있었으니 페피타라는 여인이다. 이 여자와 사이에는 마누엘과 루이스라는 두 아들을 두었다. 스페인의 삼위일체인 국왕, 왕비, 총리라는 작자들이 사창가의 삼위일체처럼 국사는 올바로 하지 않고 개차반이니 나라꼴이 제대로 굴러갈 리 만무하다. 모든 사실을 안 국민들이 등을 돌렸다. 국민의 신망도 국정의 능력도 없이 왕비의 육욕을 채워주면서 획득한 권력을 바탕으로 정치와 외교를 하자니 실수 투성이다. 프랑스와 전쟁이 지고, 아주 불평등한 바젤 조약을 맺은 것도 모자라, 1897년에는 나폴레옹의 꼬임에 속아 포르투갈을 정복하러 가는 프랑스 군대에게 길을 열어주게 되는 퐁텐블로 조약을 체결한다. 고도이 입장에서는 포르투갈을 프랑스와 같이 점령하여 분할 통치를 하면 국가 재정에 이바지가 될 것으로 본 것이다. 이것이 바로 중국 고사에 나오는 가도멸괵(假道滅虢)의 수법이다. 진헌공(晉獻公)이 우(虞)나라의 길을 빌려 괵(虢)을 치고 돌아오는 길에 우(虞)나라도 삼켜버린 것이다. 일본이 명나라를 치러 조선에 길을 빌려 달라는 임진왜란과 같은 것이다. 조약에 따라 합법적으로 스페인에 진주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 10만 명은 포르투갈을 치기도 전에 1808년 스페인을 합병하였다. 스페인이 대륙봉쇄령을 어기고 영국과 밀무역을 했다는 빌미를 잡은 것이다. 그러고는 자신의 친형인 조제프를 스페인 국왕으로 임명했다.

콩가루 집안의 가족들의 실상은 이들만 있었던 게 아니고, 카를로스의 장남 페르난도 7세도 비슷했다. 장남은 왕실의 개혁을 주장하는 개혁파를 규합하여 아버지 국왕 카를로스와 고도이가 프랑스 군을 피해 스페인 남부 아랑후에즈에 망명 와 있는 것을 기회로 반란을 일으키자 카를로스는 퇴위를 했다. 그리고는 고도이를 감옥에 가두었다. 그러나 얼마 후에 카를로스가 퇴위를 번복하고 본인이 왕이라고 선언하면서 나폴레옹에게 자기를 지지해 달라고 요청한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이 나폴레옹은 그들을 불러서 중재해 주겠다고 하고는 그들이 도착하자 모두 잡아서 유폐시켜 버린다. 그래서 결국에는 손 하나 까닥 못하고 실질적으로 프랑스에게 고스란히 접수 돼 버린다. 그런 후에 나폴레옹이 대륙봉쇄령을 명분으로 사실상 합병을 한 것이다. 나라를 통째로 상대에게 갖다 바친 콩가루 집안의 전형이다. 나중에 나폴레옹이 스페인 왕권을 페르난도 7세에게 양도하였으나 이 집안의 왕권 다툼을 끊이지 않았다. 카를로스 국왕은 스페인으로 돌아오지 못하고 콩피에뉴, 마르세유 등 프랑스의 여러 도시들을 전전하며 망명생활을 하다가 1819년에 결국 로마에서 그의 생을 마감하였다. 고도이도 페르난도 7세의 박해로 망명 생활을 하면서 국왕 카를로스 4세의 애인이었으며, 자신의 애인이었던 페피타와 재혼하여 84세로 장수하다가 1851년에 죽었다. 억세게 운이 좋은 이 사나이는 국왕의 본처와 애인을 모두 차지할 영광과 행운을 가졌다. 마리아 루이사도 늙고 갓끈이 떨어지면 별수 없다. 스페인 왕실의 값나가는 재물을 바라바리 챙긴 다음 하인 시녀 1백여 명을 대동하고 남편 카를로스를 따라 프랑스로 이태리로 망명하는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로마에서 남편 보다 1주일 전에 죽는다.

한 때 아랫도리 힘도 있고, 권력의 힘도 있어서 잘 나가던 고도이와 프란시스코 고야의 그림에 관련된 일화가 있다. 원래 고도이는 그림 하고는 거리가 먼 가난한 가문 출신이었지만 아랫도리의 힘으로 고관대작이 되고 보니 문화적 욕구도 생겼나 보다. 더구나 국왕인 카를로스가 심심하면 화가들을 불러서 테피스트리를 그리는 걸 보았을 거다. 그래서 필자 금삿갓의 취미처럼 점차 그림 특히 누드화에 집착을 많이 했다. 원래 프란시스코 고야도 여자를 무척 밝히는 스타일이었다. 젊었을 때의 고야는 닥치는 대로 여자에게 손을 댔다. 로마에서 그림공부를 하고 있을 때는 수녀원에 몰래 숨어 들어가 거기에 기숙하고 있던 이탈리아 상류계급의 딸을 호린 일도 있었다. 이 사건은 결투로까지 발전했지만 그는 이겨서 이 소녀와 관계를 맺게 되었다고 한다. 사라고사 출신인 그는 1773년 마드리드에 정착하여 전에 알게 된 친구 프란시스코 바이유를 찾게 된다. 그는 카를로스4세와 왕비 마리아 루이사의 잘 나가는 궁정화가였다. 프란시스코는 누이동생인 호세퍼를 고야에게 소개하자, 밝힘증인 그는 금방 그녀를 임신시켜서 어쩔 수 없이 결혼하게 된다. 이 결혼으로 그는 친구이자 처남의 연줄로 궁정과 인연을 맺게 되고, 다시 잘 나가는 실세 고도이와도 연이 된 것이다. 고야에게 고도이를 알게 된 것이 기회가 아니라 마드리드의 귀부인들과 무시로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더 출세인 것이다. 귀부인들과 놀다 보니 마누라 호세퍼는 보이지도 않았던 모양이다. 마누라는 그 흔한 초상화 한 장뿐이다. 귀부인 중에서 가장 매력적이었던 것은 방자하고 재기 발랄하며 개방적인 당시 20세의 알바 공작부인이었다. 그녀는 겨우 13살이었을 때 약간 괴짜인 비야부랑카 후작에게 시집을 갔는데, 정도 없고 마음 붙일 곳이 없어서 고야를 처음 만나자 둘은 홀딱 빠져서 찰떡궁합이 되어버렸다. 당시 고야가 써놓은 글이나 편지의 행간의 표현을 보면 알 것이다. “‘알바 공작부인의 머리털은 한 가닥 한 가닥이 욕정을 돋운다. 그만큼 아름다운 사람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다.”, “‘부인이 그럴 생각으로 나한테 은밀하게 찾아와서 용무를 끝냈지만, 나로서는 말할 것도 없이 캔버스에 그리는 것보다 훨씬 즐거운 일이었다네.”, “‘난 겨우 인생이 무엇인가를 알았네.” 아무튼 알바공작부인은 남편이 죽자 아예 고야와 같은 집에서 기거를 하면서 그림을 그리게 하였다. 고야의 가장 유명한 그림인 <발가벗은 마하>와 <옷을 입은 마하>가 바로 그녀가 모델이 되어 고야가 그린 명작이다. 알바공작부인이 별안간 죽으면서 고야에게 유산을 일부 남겨 주기도 했다.

고도이는 마리아 루이사의 애인이자 총리로서 막강한 힘을 갖고 있었으니 고야의 후견인이 될 수가 있었겠다. 둘 다 음탕하게 여자를 좋아했으니 취미와 오락이 일맥상통하여 더 잘 어울렸을지 모른다. 이러한 연유로 고도이는 그림을 즐기고 특히 여인의 나체화에 빠져들게 된다. 당시 스페인은 강력한 가톨릭 국가라서 누드화 등 음란한 그림은 그려서도 안 되고 보거나 소지해서도 안 된다. 야동금지법에 걸리면 종교 재판에 회부되어 심한 처벌을 받아야 했다. 원래 금단의 열매가 달다고, 하지 말하고 하는 것은 더 하고 싶은 법. 고도이는 자기의 힘과 재력을 이용하여 남몰래 누드화를 수집했다. 그는 누드화만을 보관하기 위해 “에로틱 케비넷”이라는 특수한 방을 마련해 누드화들을 걸어 놓고 수시로 보고 즐겼다고 한다. 이 방에 디에고 벨라스케스의 <비너스의 단장>도 소장되어 있었다. 이 그림은 뒤돌아 누워있는 비너스의 뒤태가 정말 아름답고 금방이라도 돌아누워서 손짓을 할 것 같다. 그는 이 방에 <옷 벗은 마하>는 뒤에 <옷 입은 마하> 앞에 두 작품을 겹쳐서 걸어놓고 도르래에 줄을 묶어서 앞의 작품을 올렸다가 내렸다가 하면서 혼자 감상하다가 누가 오면 다시 겹쳐 놓았다고 한다. 고도이가 실각하여 감옥에 갇힌 후에 경찰이 고도이의 집과 사무실을 뒤질 때 이 누드화들이 발각되어 종교재판에 회부되면서 화가인 고야도 재판에 불려 나갔다. 당시의 재판 기록은 없고, 다만 미술품 징발 감독이 기록한 것에 따르면, 고야는 이 누드화를 티치아노의 <다나에>와 벨라스케스의 <비너스의 단장>을 보고 벤치마킹해서 그렸다고 한다. 티치아노와 벨라스케스는 교회 미술에서 매우 중요한 자리를 차지하는 존경받는 대가였으므로, 두 대가를 따랐다고 한 고야는 처벌받지 않았다. 이 그림의 모델이 알바공작부인이라는 주장이 비등한데, 1945년 알바공작부인의 한 후손이 조상의 명예 회복을 위해 그 유골을 발굴하여 측량까지 하는 일이 있었으나 확인을 할 수는 없었다고 한다. 1999년에 스페인에서 제작된 영화 <Naked Maja>에서는 마야 그림의 모델인 알바공작부인의 두 애인 고도이와 고야가 같은 날 같은 장소에 초대되는데, 그날 밤 그녀가 의문의 죽음을 맞이한다. 영화적 상상력이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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