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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2) 최초의 성공한 국제결혼 – 고조용, 고영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 (240218)

by 금삿갓

중국의 한족 국가인 서진(西晉)이 316년에 망하고, 북방의 5개 이민족들이 중국 본토를 차지하여 십육국(十六國)을 세우고 명멸하다가 선비족 출신의 탁발규(拓跋珪)가 386년에 위(魏)나라를 세우고 도무제(道武帝)가 된다. 이들은 유목민의 전통을 버리고 중국의 정치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국가의 기틀을 만들었다. 그 후 태무제(太武帝)가 439년에 강북 지역을 통일하여 통일제국이 되었다. 조조(曹操)의 위(魏)나라와 구별하기 위해 북위(北魏), 후위(後魏), 탁발위(拓跋魏), 원위(元魏) 라고도 부르는데, 주로 북위가 통용된다. 원위는 탁발씨가 중국화 하면서 성을 중국식으로 원(元)으로 고쳐서 붙은 것이다. 이 시기가 한반도의 역사로 보았을 때 고구려가 가장 강성했던 광개토왕과 장수왕(長壽王) 시대이다. 중국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없었던 시기에 북방 민족이나 한반도의 배달민족이 그 세력을 떨친 것이다. 이 시기에 오늘의 얘기인 가장 성공한 국제결혼이 이루어진 것이다. 서진(西晉)의 회황제(懷皇帝) 때 흉노족 국가 전조(前趙)의 유요(劉曜)에게 수도 낙양이 함락당하고, 본인은 적국에 끌려가서 망한 사건을 회황제의 연호를 써서 영가의 난(307~313)이라고 한다. 이때 무슨 연유인지 고구려 출신으로 그곳에 있던 고무(高撫)와 고고(高顧) 형제가 고구려로 들어가게 된다. 그들은 고구려에서 160여 년간 대대로 살다가 고무(高撫)의 후손인 고잠(高潛)이 먼저 북위의 제6대 헌문제(獻文帝) 시기에 북위로 돌아갔다. 고잠이 돌아오자 북위 헌문제는 그에게 개양남(開陽南)이라는 작위를 주고 무성공주를 주어 그를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삼았다. 그 후에 고고(高顧)의 후손 고양(高颺)은 동생 고승신(高乘信)과 함께 고구려의 장수왕 시대인 470년경에 귀족들의 숙청을 피해 북위로 돌아갔다. 이때 북위의 제7대 효문제(孝文帝)는 고양에게 여위장군(厲威將軍)이란 직위를 주었고, 동생 고승신에게는 명위장군(明威將軍)이란 직위를 주었다. 그리고 노비, 소와 말, 비단 등을 하사 받고 북위의 귀족 대우를 받았다고 한다.

고잠이 무성공주와 혼인을 한 것이 성공한 국제결혼이 아니라 진짜 성공한 국제결혼은 고양(高颺)의 자식들에게서 이루어진다. 고양(高颺)은 아들 4명(고곤, 고언, 고조, 고현)과 딸 1명(고조용)을 두었다. 고양(高颺)의 딸인 고조용(高照容)이 제7대 효문제의 후궁인 귀비(貴妃)가 되고, 아들 원각(元恪)을 낳는데, 그녀가 바로 후에 문소황후(文昭皇后)이다. 이후 아들 원각은 북위의 제8대 선무제(宣武帝)가 된다. 셋째 아들 고조(高肇) 또한 효문제의 딸인 고평공주와 혼인하면서 고양(高颺)의 집안은 북위 황실의 강력한 외척세력으로 등장하였다. 또한 고조뿐만 아니라 고조의 맏형인 고곤(高琨)의 아들 고맹(高猛)은 선무제의 여동생인 장락공주와 혼인했으며, 고조의 둘째 형인 고언(高偃)의 딸 고영(高英)은 선무제의 계비가 되어 숭헌황후(崇憲皇后)가 된다. 이렇게 고양(高颺)의 집안은 북위 황실과의 끈끈한 2~3중 혼인관계로 북위 황실의 막강한 외척세력으로 조선 후기의 안동김씨 이상의 파워를 가지게 되었다. 고구려에 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중국으로 옮겨가서 이만한 성공적인 국제결혼을 한 전례(前例)도 없고 후례(後例)도 없을 것이다. 효문제의 귀비(貴妃)가 된 고조용의 이야기는 약간 전설적인 면이 있다. 그녀는 일찍이 자신이 방 안에 서 있는데 햇볕이 창문으로 들어와서 그녀를 뜨겁게 내리쬐는 꿈을 꾸었다. 그녀가 이리저리 옮겨 다니며 그 빛을 피하면 오히려 햇볕이 더 뜨겁게 그녀를 비추었다. 어릴 때 그녀가 이런 꿈을 자주 꾸자, 아버지 고양은 술사(術士) 민종(閔宗)에게 해몽을 부탁하니 장차 임금의 사랑을 받아 제왕을 낳게 될 계시라고 했다. 원래 원각은 장남이 아니고 차남이라서 황제가 될 수 없었지만, 황태자인 장남 원순(元恂)이 궁궐 내의 권력 암투에서 벌어지는 골육상잔으로 죽음을 당하자 졸지에 황위 계승 서열 1번으로 올라서 황제가 된 것이다. 꿈의 해몽대로 아들 선무제가 운 좋게 황제의 자리에 앉게 되자 귀비였던 어머니 고조용을 문소황후로 추존한 것이다. 그리고 외삼촌인 고조와 고현(高顯)을 황궁으로 불렀다. 고조에게 평원군공(平原郡公), 고현에게는 징성군공(澄城郡公)이란 벼슬을 주었다. 고조와 고현은 선무제의 총애로 빠른 속도로 출세를 하게 되었고, 얼마 안 가서 고조는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 령이부(領吏部), 기주대중정(冀州大中正)이, 고현은 고려국대중정(高麗國大中正)이라는 직책에 올랐다. 이렇게 되어 고영의 자식들로 북위 황실의 최대의 친위세력이 형성된 것이다.

먼저 문소황후 고조용의 결혼 스토리를 살펴보자. 뿌리 깊이 본다면 제6대 황제 헌문제의 출생부터 살펴야 한다. 헌문제는 제5대 문성제(文成帝)와 계비(繼妃) 이씨 사이에 태어났다. 정비(正妃)인 문명황후 풍씨(馮氏)가 자식이 없어서 이씨의 자식을 황태자로 삼은 것이다. 당시 북위는 외척의 발호를 척결하는 유목민의 습속에 따라 자귀모사(子貴母死) 즉 자식이 황태자가 되면 어미를 죽이는 제도이다. 그래서 친모는 요즘 모 야당 대표 사건의 관련자처럼 자결당하는 것이다. 그래서 헌문제는 배다른 어머니인 황후 풍씨의 손에 양육되고, 즉위하고도 계속 풍태후의 수렴청정을 당한다. 즉위 5년 만에 풍태후와의 갈등으로 퇴위당하고, 황후 이씨(李氏)와의 사이에 낳은 아들 원굉(元宏)이 5살의 나이에 제7대 효문제로 즉위하는 것이다. 물론 원굉의 어머니 황후 이씨도 자결하게 된다. 이 어린 효문제도 역시 할머니 풍태후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정비(正妃)로 풍태후의 질녀 풍윤(馮胤)을 들인다. 그녀가 어떤 이유인지 폐위가 되고 다시 그녀의 동생 풍청(馮淸)이 다음 황후가 된다. 그런데 효문제는 이 여자를 매우 총애하였으나, 이 여자가 피부병에 걸려 어쩔 수 없이 친정으로 돌려보낸다. 사랑하는 여인이 없이 하룻밤도 못 보내는 황제는 다시 정황후(貞皇后) 임씨(林氏)를 들여서 황태자 원순(元恂)을 낳았다. 당연히 임씨도 자결한다. 그러니 여자가 궁하던 차에 13살의 애리애리하고 예쁜 고조용이 궁궐에 들어오니 효문제는 눈이 휘둥그레져서 밤낮없이 그녀만 찾아서 끼고 산다. 그래서 금슬이 무척 좋아서 정비들로부터 얻지 못했던 자식들을 2남 1녀를 얻은 것이다.

이 당시만 해도 무척 잘 나가는 중이었다. 그런데 궁궐 내 풍씨 집단이 고구려계의 발흥을 처절하게 응징하려고 하는 시도가 암암리에 이루어진다. 풍태후는 야망을 버리지 못하고, 피부병에 걸린 조카 대신에 또 그 밑의 여동생을 소의(昭儀)의 직첩을 주면서 후궁으로 불러들인다. 이 여자는 효문제의 총애를 차지하기보다 궁중 내부의 각종 권력 싸움이나 정보 수집의 목적을 띄고 있었다. 궁중의 모든 정보를 풍태후에게 보고하고 각종 밀명을 받아서 처리하곤 했다. 그 당시 효문제가 친중정책으로 반대를 무릅쓰고 수도를 낙양으로 옮겼는데, 문소황후 고조용이 새로운 도읍인 낙양으로 가던 중 공현(共縣, 지금의 허난성 후이현)에서 갑자기 사망했는데, 풍소의(幽昭儀)가 사람을 보내 살해했다고 하는 것이 유력하다. 결국 고조용 즉 문소황후는 나이 서른도 못 채우고 저승길로 가버린 것이다.

오늘의 실제 주인공, 가장 성공적으로 국제결혼에 골인한 숭헌황후 고씨 고영(崇憲皇后 高氏 高英)의 이야기를 보자. 그녀는 고구려에서 넘어온 고양(高颺)의 둘째 아들 고언(高偃)과 그의 부인 무읍군부인 왕씨(武邑君夫人 王氏)의 딸이다. 전임 황제의 부인 문소황후 고조용이 고모이고, 조정에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고조(高肇)가 삼촌이다. 제8대 황제 선무제는 17살에 즉위했는데, 첫 번째 부인 즉 정비(正妃)는 순황후 우씨(順皇后 于氏)이고, 고영은 둘째 부인으로 들어갔다. 선무제가 고영을 사랑하여 일찍이 아들을 낳았는데, 영아(嬰兒)일 때 사망했다. 당시 정비에게 아들이 없는 상태에서 본인이 먼저 아들을 낳았으니 자귀모사(子貴母死)의 제도로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여 아들을 살해했을 거라고 사관들이 추측한다. 사실 고영은 황후 우씨를 시기하고 우씨의 황후 자리를 노리고 있었다. 그런데 다시 정비인 순황후 우씨(順皇后 于氏)가 아들 원창(元昌)을 낳았다. 그러니 더욱 우씨가 미웠을 것이다. 그 당시 북위의 조정 실권은 풍태후가 죽은 후이기 때문에 풍씨에서 고씨로 넘어온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선무제는 자귀모사 제도가 너무 잔인하다고 생각하여 정비 순황후 우씨를 죽이지 않으려고 했다. 그것을 고씨 집안에서 강력히 주장하여 관습대로 황후 우씨를 자결시켜야 고영이 정비의 자리를 찾이할 수 있었다. 그래서 선무제를 꼬이고 설득하고 협박해서 그녀를 자결하도록 한 것이다. 드디어 제2인자에서 제1인자로 고영이 등극한 것이다. 고영이 정비 황후가 되면서 처음에는 황궁 내에서 활동력이 뛰어나고 임금의 총애를 받았다. 무슨 일인지 우씨가 낳은 아들 원창(元昌)도 어머니 우씨가 죽은 뒤 2년 만에 죽어버렸다. 황궁의 대를 잇든 말든 질투심 많은 고영은 후궁에 대한 통제를 엄격히 하여 선무제가 다른 후궁들과 밤을 보내는 게 점차 어려워졌다. 더구나 고구려 출신 황후의 숙부 고조와 황후인 조카가 모든 권력을 틀어쥐고 국정을 좌지우지하자 당시 사람들의 강한 반감을 불러일으켰다. 고영은 임금의 총애를 받고 있지만 아들을 못 낳고 겨우 딸 건덕공주(建德公主)를 낳았다. 그러자 궁궐에서는 후사(後嗣)를 걱정하게 되었다. 그러나 고영 황후의 질투심에 불타는 눈초리도 무섭고, 아직 자귀모사 제도가 시퍼렇게 존재하고 있어서 후궁들도 적극적으로 임금의 은총을 입으려고 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당시 궁궐에 호씨(胡氏)라는 미인 궁녀가 있었는데, 그녀는 겉으로 드러내고 자귀모사가 두려워 아들을 낳지 않는 것은 궁녀의 도리가 아니라고 했다. 그녀는 임금의 은총을 입을 기회만 주어진다면 아들을 낳겠다고 나선 것이다. 내심 권력에 대한 꿍꿍이 음모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궁궐에서 후사가 걱정되었으므로 황후 고영도 임금이 궁녀 호씨에게 성은을 내리는 것을 막을 방법이 없게 된 것이다. 임금 선무제는 마누라 고영의 위세에 눌려 다른 여자 맛을 잘 보지 못하고 있던 차에 절호의 찬스가 온 것이다. 그래서 밤이면 밤마다 호씨의 침소를 찾아 날이 새는 줄도 모르고 그 짓에 열중한 것이다. 아직 한창 젊은 나이의 선무제가 온갖 산해진미를 먹고 힘을 쓰니 날밤을 새는 것쯤이야 식은 죽 먹기 아니겠는가. 호씨 또한 임금의 총애를 고영황후로부터 자기에게 쏠리게 하려고 온갖 방중술을 동원하여 임금을 옴짝달싹 못하게 만들었다. 허구한 날 밤낮으로 호씨의 몸을 탐하는 선무제 덕분에 드디어 호씨가 임신을 하게 되었도, 열 달이 되어 아이를 낳으니 그렇게 바라던 아들이었다. 궁궐의 모든 사람들은 경사라고 축하를 했다. 아들을 못 낳은 고씨 황후조차도 너무나 경사라면서 눈에 가시 같은 존재인 호씨에게 수고했다고 칭찬을 했다. 그러면서 그녀를 제거할 절호의 찬스가 왔다고 생각한 것이다. 그래서 시간만 나면 선무제에게 호씨가 낳은 아들 원후(元詡)를 빨리 황태자로 책봉하라고 했다. 그 아들이 황태자로 책봉되면 자귀모사 제도를 이용하여 어머니 호씨를 관례에 따라 제거하면 사랑의 정적도 없애고 권력도 더 튼튼히 만들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여기서 문제가 생긴 것이다.

이제 까지 고분고분하던 선무제가 이번에는 자귀모사 제도를 폐지한다고 선언해 버린 것이다. 고씨 황후와 삼촌 고조가 아무리 설득하고 겁박을 해도 그가 말을 듣지 않고 도리어 호씨를 승진시켜서 후비(後妃)로 삼기로 한 것이다. 혹을 떼려다가 혹을 키운 것이다. 자귀모사를 피한 호씨 또한 만만하지 않았다. 고씨 몰래 은밀히 황실 내의 권력자들에게 임금의 총애와 차기 권력인 황태자를 낳은 유리한 국면을 이용하여 영향력을 행사했다. 그래서 점차 자기 진영으로 포섭을 하여 고씨에게 대항할 정도의 세력을 구축한 것이다. 그런데 어느 날 사건이 터지고 말았다. 임금 선무제가 갑자기 세상을 떠나고 말았다. 그러니 어린 아들 원후(元詡)가 효명제(孝明帝)로 즉위하게 된 것이다. 죽은 아버지 선무제의 황후가 고씨와 호씨 둘이지만 관례에 따라 정비인 고씨가 황태후로서 섭정을 맡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런데 원후를 직접 낳은 호태후 또한 만만치 않았다. 자기 소생이 황제가 되었으므로 자기가 섭정을 맡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녀는 사전에 고씨 몰래 궁궐 내의 권력관계를 자기에게 유리하도록 손을 봐 놓은 것이다. 신료들도 차기 황제 생모의 눈치를 더 볼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호씨를 자귀모사 제도로 황천으로 날려 보내지 못한 고씨는 땅을 치고 한탄하게 된다.

세상의 힘은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섭정을 맡은 호씨는 속으로는 무척 악독했지만 겉으로는 인정이 많은 척하며 모든 조치를 하는 것이다. 철천지 원수 같은 고씨를 태후에서 폐위시켜 여승으로 강등하고 요광사(瑤光寺)에 기거하도록 했다. 한 동안 북위(北魏)의 조정의 모든 권력을 움켜쥐고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고씨 집안의 몰락도 여기서부터 서서히 진행되었다. 고씨 황후가 낳은 건덕공주(建德公主)도 호씨가 키우게 된 것이다. 518년 9월 폐황후 고영은 어머니 무읍군부인을 찾아갔다. 당시 월식이 일어나 곧 국모가 무너질 것이라는 소문이 수도 낙양에 떠돌자 둘 모녀는 하늘이 그들에게 기회를 준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일은 도리어 딴 곳에서 발생한 것이다. 이런 소문은 영태후 호씨도 알고 있었다. 자기가 죽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해서 액막이를 하고자 한 것이다. 그녀는 고영으로 액막이를 한 것이다. 그날 밤 비밀리에 군사를 보내어 고영과 고영 어머니의 저택에서 처형하고 그 시신을 요광사로 돌려보냈다. 그해 10월에 고영은 비구니 신분으로 망산(邙山)에 매장되었다.

일찍이 사납고 악랄하기로 악명 높았지만, 영태후 호씨가 섭정을 하고부터는 그보다 더했지 못하지 않아 고영의 죽음에 오히려 동정을 사기도 했다. 황태후 호씨는 섭정이 되어 정권을 장악하고 모든 국정을 요리하게 된다. 그러면서 사리사욕을 채우기 위해 자기 편의 많은 총신을 앉혔다. 《양서·양화전(梁書 梁華傳》에 따르면 명장 양화(梁華)는 용모가 뛰어나고 힘이 장사였다. 그는 젊은 황태후 호씨의 눈에 띄어 중책을 맡게 되면서 궁궐을 무시로 들락거린다. 물론 둘이 눈이 맞아서 배도 맞추게 된 것이다. 그들은 공공연히 궁궐에서 사통을 하지만 누구 하나 입방아를 찢을 수가 없었다. 황제는 어리고 아들이었으므로 어미의 소행을 눈 감을 수밖에 없었다. 세월이 흘러 아들 원허 효명제가 자라 친정을 할 연령이 되었으나 끝까지 정권을 돌려주지 않고 아들의 세력까지 약화시키고 있었다. 원허와 가까운 사람은 누구나 살해당하자, 효명제 원허도 모후의 뜻을 알게 되었다. 아들의 의도를 눈치챈 모후 호씨가 선수를 쳐서 정부(情夫)와 짜고 아들 효명제를 독살한다. 그러자 아들이 없던 효명제가 죽자 후사를 이를 아들이 없으니, 호태후는 효명제의 딸 원씨를 아들로 변장시켜 즉위시켰다. 인심이 안정되면 원씨를 폐위하고 효명제의 5촌 조카인 원쇠(元钊)를 황제로 바꾸니 세칭 북위의 유주(幼主)라고 한다. 이런 변고들이 생기자 민심이 이반 되어 변방을 지키던 장수 이주영(爾朱荣)이 군사를 이끌고 낙양으로 쳐들어와서 15일 후에 수도 낙양을 점령하고 원쇠와 호태후는 사로잡혔다. 어린 유주(幼主)인 원쇠와 호태후를 황하로 압송했다. 호태후는 이주영 앞에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다했지만, 이주영은 들은 척도 하지 않고, 어린 유주인 원쇠와 호태후를 황하에 빠뜨려 익사시키고, 별도로 원자유(元子攸)를 즉위시니 그가 바로 효장제(孝庄帝)였다. 호태후는 영황후(靈皇后) 또는 선무영황후(宣武靈皇后)로 추서 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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