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에는 영화와 소설의 영향으로 드라큘라(Dracula)와 흡혈귀(吸血鬼)를 동일시하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소설과 영화의 드라큘라의 원형은 흡혈귀와는 전혀 다른 존재로써 흡혈귀가 사람 성별을 가리지 않는 반면 드라큘라는 오직 여성의 피만 빨아먹는다. 소설상의 드라큘라(Dracula)는 아일랜드의 작가 브램 스토커가 쓴 1897년작 소설로, 흡혈귀인 드라큘라 백작이 주인공이다. 납량특집(納涼特輯) 공포영화 부동의 단골 주인공인 흡혈귀로 등장하는 드라큘라의 모델은 15세기 루마니아 트란실바니아 지방 출신의 왈라키아 공(公) 블라드 체페슈 공작으로 그의 별명이 드라큘라로 알려져 있다. "체페슈"란 "꿰뚫는 자"라는 뜻으로, 죄인이나 포로를 꼬챙이에 꿰어 죽이는 공포정치를 하여 붙은 별명이고, "드러쿨레아"란 "용의 아들"이라는 뜻으로, 아버지 블라드 2세 드러쿨의 별명을 이어받은 것이다. 그는 오스만 제국에 볼모로 잡혀가서 살다가 나중에 오스만 튀르크족을 물리친 명장으로 기록되었다. 쇠꼬챙이로 행한 엽기적 살인과 고문으로 수천 명을 처형하는 등 인류 잔혹사에 당당히 한 페이지를 장식했다. 그가 얼마나 잔인한 인간인가 하면 투르크족 사절단이 머리에 쓴 터번을 벗지 않은 채로 절을 올리자 당장에 터번 위에다가 굵다란 쇠못을 박아 버린 무시무시한 놈이다. 한 술 더 떠 단지 심심풀이 재미를 위해 수천 명을 산 채로 날카로운 말뚝에 박아서 세워 놓기를 즐겼던 것이다.
그런데 이 친구 뺨치게 잔혹한 여자 흡혈귀가 있었으니 바로 오늘의 주인공이다. 주인공 바토리 에르제베트(Báthory Erzsébet : 1560 ~ 1614)는 합스부르크 왕조와 비견될 정도로 트란실바니아(루마니아 중서부 지역)에서 가장 유서 깊고 유복한 바토리가(家)의 조지 바토리 남작과 안나 바토리 남작의 딸로 태어났다. 부모인 George와 Anna는 둘 다 태어날 때부터 Bathory가(家)의 가족이었다. 당시 트란실바니아 공(公)이나 헝가리의 재상은 사촌지간이었다. 당시 유럽의 유력 가문들은 막대한 재산과 영지를 지키기 위해 근친혼(近親婚)을 많이 하였는데, 그로 인한 정신이상자나 기형아가 나오는 등 부작용이 많았다. 에르제베트의 경우도 마찬가지로 그녀의 친척 중에는, 악마숭배자인 숙부, 고모는 황음에 빠져 남편 세 명을 골로 보냈고, 형제들 중에 색정광(色情狂) 등이 있었다. 그녀 역시 어릴 때부터 감정의 기복이 심하고 괴팍한 성격을 지녔다고 전해진다. 그녀는 당시 고등 교육을 받았으며, 헝가리어, 라틴어, 그리스어에 능통했다. 그런데 어린 나이인 14살에 농부인 애인의 딸아이를 임신했다고 한다. 그 애는 농부에게 맡겨져 양육되고 한 동안 그녀는 격리된 생활을 했다.
바토리는 이 가문에서는 그녀가 15살이 되자 그녀보다 5살 연상인 헝가리의 나더슈디 페렌츠(Nádasdy Ferenc) 백작에게 시집을 보낸다. 남편인 페렌츠가(家)도 역시 한 끗발 하는 당대의 문벌이지만 그녀는 남편보다 더 높은 신분이었기 때문에 결혼한 후에도 바토리라는 성을 유지했다. 페렌츠는 오스만 제국과 치른 전쟁에서 헝가리군을 지휘했는데, 용맹하기로 유명하였지만 동시에 잔혹하기로도 유명하였다. 어쨌든 남편 페렌츠는 허구한 날 전쟁터에 나가 병정놀이나 해대니 자연히 집에 혼자 남은 그녀는 잔소리꾼 시어머니와 늘 같이 지내게 될 수밖에 없다. 시어머니는 전통적인 장군 집안의 큰 마나님답게 매사 엄격하고 절도 있는 매너를 그녀에게 세뇌(洗腦) 시킨다. 그러니 말만 결혼 생활이지 감옥이나 생지옥에 다름없는 규제 속에서 그녀는 점차 말이 없고, 냉담하고, 음습한 여인으로 변모한다. 그녀는 무료한 시간을 보내기 위해 수많은 청년들을 몰래 연인으로 삼았다고 한다. 그녀는 심지어 이들 중 한 명을 데리고 도망갔지만, 아주 짧은 시간 후에 다시 돌아왔단다. 그녀는 또한 공개적인 양성애(兩性愛)로 당시 유명했던 이모(姨母)와도 오래 시간을 같이 보냈으며, 이것이 그녀의 성적 양면성 즉 변태적인 성격의 형성으로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그래도 띄엄띄엄 만났지만 남편과의 사이에 4명의 아이를 두었다. 1602년쯤에 바토리는 남편을 여의어 과부가 되었다. 이후 그녀는 시어머니를 피해 자신의 소유지인 슬로바키아 지방의 체이테(Cachtice) 성으로 주거지를 옮겼다.
바토리가 그곳에서 젊은 날 좋던 피부가 쭈그렁 할망구가 된 데다 얼굴에 주근깨 기미마저 늘어나자 만날 놈도 없지만 인생이 불만이다. 시어머니, 남편 탓이 크다고 생각한 그녀는 모든 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 그래서 그녀는 마법사나 연금술사가 알려주는 각종 비방(祕方)과 민간요법을 총동원해서 비단결 같고 윤기 나며, 처녀 속살 같은 피부를 되찾으려 줄기차게 노력한다. 그러나 매번 말짱 도루묵으로 실패하게 된다. 현대 의학으로도 안티 에이징이 말도 안 되는데, 그 당시 연금술사들이 어떻게 그런 비법을 고안하겠는가. 그랬다면 로레알이나 시세이도, 태평양화학이 생기지 않고, 그 친구는 지금까지 대대손손 세계 최고의 재벌이 되어 왕도 부러울 게 없는 사람이겠지. 모든 것이 수포로 돌아가자 드디어 최후의 비책(祕策)인 엽기적 방법을 시도하기에 이른다. 그건 다름 아닌 처녀들의 피다. 연금술사나 마법사도 모르는 비방을 어떻게 알았을까? 그건 바로 바토리 집안의 유전병 때문이다. 그녀의 친정은 근친혼으로 인하여 자손들이 각양각색의 유전병을 앓고 있었던 것이다. 그녀는 간질 즉 뇌전증으로 가끔 발작을 하곤 했다. 한 번은 하녀의 부축을 받고 정원을 걷다가 간질의 발작 증세가 나타났는데, 부축하던 하녀의 팔을 사정없이 물어뜯었다. 떨어진 살점과 피로 인하여 그녀의 얼굴과 팔뚝 등이 피로 얼룩이 졌는데, 간질 환자인 그녀의 눈에 피가 묻은 자기 얼굴이나 피부가 훨씬 탄력 있고 젊어진 것으로 착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처녀의 피가 자기의 간질병도 고치고 피부를 젊게 한다고 생각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주기적으로 처녀의 피가 필요했던 것이다. 그런데 집안에 고용하고 있던 하녀의 숫자가 한정되어 있으니까 당연히 더 많은 처녀가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하인들을 풀어 체이테성(城) 주변의 시골처녀들을 돈을 주고 사들일 수밖에 없었다. 당시 TV가 없으니 광고 전단이나 교차로 등에 구인광고를 대대적으로 하게 된다. “하녀 급구, 20세 미만 여성 한정, 월수 300 이상 보장, 초보자 무방, 기숙사 제공, 4대 보험 제공, 학력제한 없음, 신원 및 재정보증 불필요, 무시험 선착순” 획기적인 구인 광고가 나가자 온 동네의 처녀들이 구름처럼 모여들게 된다. 돈에 굶주린 부모들은 그 말에 혹해 딸들을 바토리 성의 하녀로 취업시키기 위해 발을 벗고 나선다. 바토리 성으로 들어온 처녀들을 일단 곡물저장고 같은 창고나 허름한 숙소에 갇힌 째, 살이 포동포동하게 오르도록 잘 먹여 사육한다. 그 뒤 때가 되면 한 명씩 또는 단체로 살해하여 그 피로 마사지를 하거나 목욕통에 피를 받아서 입욕을 하는 엽기적 행각을 저지른다. 근처 마을로 처녀들을 모집하러 가는 역할은 하인인 피츠코(Ficzko)라고도 불리는 요하네스 위바리(Johannes Ujvary)였는데, 난쟁이이며 절름발이였다고 한다. 그리고 바토리의 잔혹한 행위를 거든 사람은 간호사 출신의 일로너(Ilona Joo)라는 추녀(醜女)와 도르커(Dorko)라는 큰 몸집의 여자였다. 일로너와 도르커는 곡물 저장고나 후미진 곳에 있는 빈 건물에 처녀들을 수용하고 사육하다가 바토리가 필요할 때 지하실로 처녀들을 데리고 갔다.
인간의 피가 다른 인간의 피부를 젊게 만들어 줄 수 없는 것은 당연한데, 그런 짓을 하다 보면 스스로 사디스트(Sadist)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처녀들이 고통으로 몸부림치거나 절규하면서 죽어 갈 때, 처녀들의 피를 받아 마실 때, 피로 욕조를 가득 채우고 목욕할 때 등 괴기적인 상황이 오히려 묘한 희열과 쾌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진실과 허구의 명확한 증거가 없지만 훗날 기록된 다양한 기록에는 기상천외한 고문 도구가 등장한다. 물론 뒷날 작가들의 상상력과 허구가 많이 가미되었겠지만 당시 바토리가 즐겨 사용했다는 대표적 고문도구를 보면 아래와 같다. 그 첫 번째가 <철의 처녀(Iron Virgin)>이다. 당시에 ‘리오넬’이라는 이름이 붙어 있었는데, 영어로 아이언 메이든(Iron Maiden)이라고도 했다. 바토리가 비밀리에 유명한 기술자에게 특별 주문 제작한 것이란다. 사람의 신체 모형을 본뜬 철갑옷처럼 생긴 통이다. 문처럼 생긴 뚜껑을 열고 닫을 수 있도록 고안되었고, 안에는 날카로운 못들이 촘촘하게 있어서 사람을 들어가게 하고 문을 닫으면 온몸이 못에 찔려서 피를 흘리게 되어있다. 그 피는 밑으로 흘러서 바토리가 목욕을 할 욕조로 모아지는 구조였단다. 또 다른 것은 <철의 새장 <Iron Cage)>이다. 모양이 철창으로 만든 새장 같은 곳에 처녀를 가둬 놓고 도르래로 천정까지 들어 올린 뒤 밧줄을 당기면 철장 안에서 날이 선 칼날들이 튀어나와 처녀의 몸 구석구석을 난자하게 된다. 그러면 피가 새장 밑으로 떨어지고 그 아래에 있던 바토리는 쏟아지는 피를 맞으며 현대인이 샤워를 하듯이 피 목욕을 하곤 했단다. 그런데 이런 것들은 그 당시 바토리가 정말 사용한 것인지에 대하여 의문점이 있다. 바토리의 범죄 사실이 드러나서 경찰이 수사를 하거나 재판을 할 때 이런 기구들이나 살인 수법에 대한 기소 내용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물론 당시 바토리가 왕족이고, 친척이 왕이라서 그녀에 대한 조사가 형식적으로 그치고, 처벌 도한 흐지부지 된 것은 사실이라서 사건이 은폐되거나 축소되었을 수는 있겠다.
아무튼 이러한 살인 기법은 공포영화의 거장인 윌리엄 프리드킨(William Friedkin)이나 스릴러 영화의 천재 알프레드 히치콕(Alfred Hitchcock) 감독조차 도저히 상상 못 했을 잔혹의 극치 같다. 남편도 일찍 죽고 시어머니까지 죽게 되자 그녀의 흡혈귀 행동은 더욱 대담해지기 시작한다. 일설에는 남편이 그녀의 엽기적인 살인행각을 눈치채고 견제하려 하자 그녀가 선수를 쳐서 남편을 교묘히 살해했다는 설도 있다. 처녀들에 대한 바토리의 잔혹함은 기록상으로 당양한 방법으로 등장한다. 금화를 훔치다 들키면 불에 시뻘겋게 달군 금화를 손바닥에 올려놓는다. 옷 세탁 담당 하녀가 바토리의 옷을 잘못 다림질하면 시뻘건 인두로 얼굴을 지져 놓는다. 어쩌다 수다를 떨다가 우울한 바토리에게 걸리면 굵은 바늘로 입을 꿰매 놓는다. 과일 훔치다 들키면 발가벗겨서 온몸에 꿀 발라 불개미에게 뜯어먹게 한다. 어떤 때는 심심하다고 죄 없는 처녀의 알몸을 꽁꽁 묶은 뒤 얼음 위에 굴리기도 했다. 돈을 벌려고 바토리가 사는 체이터성(城)에 들어간 처녀들은 두 번 다시 살아서 돌아오지 않는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져 있음에도 성 밖의 가난한 백성들은 거금의 돈을 탐내 자신의 딸들을 계속해서 성으로 들여보냈다. 그러니 꼬리가 길면 밟히게 마련이다.
바토리는 어떤 때에 수십 명의 처녀들을 모아 연회를 베풀기도 하였는데, 연회가 끝나면 그녀들을 모두 알몸으로 벗겨 차례차례 죽인 뒤 그 피를 모두 통 속에 모아, 옷을 벗고 그 안에 들어가 몸을 담그고는 아직 죽지 않은 처녀들의 신음을 들으며 흥분했다는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가끔 몸 상태가 안 좋을 때는 직접 처녀들의 팔이나 가슴, 목을 물어뜯어 생피를 빨아 마시고 그 고기를 먹었다고도 전한다. 나중에 귀족 처녀의 피가 더 좋다는 이야기를 들은 바토리는 일종의 귀족 여학교를 설립하여 그곳의 여학생들을 희생자로 삼기도 했다. 아무튼 이 엄청난 엽기적 사건이 들통나게 된 것은 농부들의 딸로도 피가 부족해진 나머지 무리한 흡혈 행위를 위해 귀족의 딸에게까지 손대다 꼬투리를 잡혔기 때문이다. 현지에 거주하는 루터교 목사가 바토리를 수상히 여겨 그녀가 기이한 행각을 벌인다는 소문을 당국에 알렸지만 바토리 가문의 명예를 고려해 수사를 제대로 진행시키지 못했다. 그러나 이상한 소문은 헝가리 궁정에 까지 알려지긴 했다.
그러다가 1610년에는 감금당했던 소녀 한 명이 극적으로 탈출하여 당국에 신고하면서 마침내 수사가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1610년 12월 30일 수사당국에서 강력팀을 급파해 체이테성(城)을 샅샅이 뒤져보니 50여 구의 여자 시체가 발견되었다. 더불어 온갖 종류의 고문 도구와 피가 말라붙은 정, 칼, 송곳 따위가 즐비했다고 한다. 조사결과 그동안 성에서 살해된 처녀들의 숫자는 600여 명에 달했다고 한다. 일설에는 바토리가 이처럼 죽인 여자의 수는 1,568명이 넘었다고도 한다. 그녀의 일기에는 1600년부터 1610년까지 만에도 모두 612명의 여성을 죽였다고 쓰여 있었다. 조사가 끝난 이듬해 1월 헝가리의 비체에서 그녀에 대한 재판이 열렸지만 바토리는 출석하지 않았다. 그녀의 일족들이 탄원서를 제출했고, 그것이 황제의 마음을 움직였기 때문이다. 대신 재판에서는 생존자와 피해자 가족들의 증언을 토대로 사건과 관련된 시녀나 하인들을 고문한 끝에 수많은 범죄행위를 실토하게 되었다. 왕족이었던 고귀한 신분의 바토리는 사형을 면하는 대신 종신금고형이 선고되었으나, 그녀의 하수인들은 목이 잘린 후 화형(火刑)에 처해졌다. 바토리는 그녀의 가문에서 탄원서를 제출하여 사형대신 종신형을 받은 것이다. 무시무시한 여자 흡혈귀 바토리는 감옥에서 3년 반을 살다가 1614년 8월 21일에 54살의 나이로 사망했다고 한다.
역사적으로 잔혹한 살인마가 무척이나 많았다. 15세기 프랑스에 질 드 레(Gilles De Rais : 1405~1440)라는 후작이 있었다. 몽모랑시 라발(Montmorency-Laval) 가문의 출신으로 백년전쟁 당시 잔다르크 군대의 장군이자 그녀의 부관으로 그녀에 버금가는 영웅으로 전쟁에서 맹활약했던 장군이다. 1431년, 잔 다르크가 영국군에 붙잡힌 끝에 결국 화형 당하면서 그의 인생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1435년에 은퇴하여 신의 존재를 부인하고는 동성애의 타락에 빠져버린다. 이 친구는 3~6백 명의 소년들을 농락하고 살해한 죄로 1440년 처형되면서 “지금까지 나만한 행동을 한 사람은 없었고, 금후로도 나만한 사람이 나오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라고 호언장담했다고 한다. 재판과정에서도 반성은커녕 재판장들에게 호통을 치기 일쑤였단다. 질 드 레는 살인, 남색, 이단, 교권 침해와 관련된 34개 항목으로 공식 기소되었다. 그의 행각을 보면 이렇다. 미소년을 납치하여, 그에게 생애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하였을 호강을 누리게 해 준다. 좋은 옷을 입히고, 진미(珍味)를 먹이며, 술도 먹인다. 그 뒤 소년을 내실로 데리고 가 자신에게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도 모르는 채로 천천히 고통스럽게 죽였다. 그리고 그 숨이 다할 무렵 소년을 강간하는 것이었다. 살해 수법이나 고문 수법은 그때그때 달랐지만 모두 다 점잖은 자리에서 설명하기 힘든 것들뿐이었다. 질 드 레는 매 건 강간하는 것 자체를 빼먹지 않았지만 강간보다도 고통스럽게 죽어가는 모습에 더욱 가학적 희열을 느끼기도 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이때까지는 목적의식이 없는, 그저 끝 간 데 모를 파괴적 충동의 발산이었다. 그때 목적의식이 없는 살인에 목적을 부여한 건 프렐라티란 남자였다. 그는 미남에, 마술사였으며, 수많은 외국어를 능숙하게 구사하는 화술의 달인이었다. 그러니 질 드 레는 그를 철석 같이 믿기 시작하였으며, 그 뒤로는 악마에게 살해한 어린이들을 바치기로 하였다. 질 드 레와 악마의 추종자들은 프렐라티가 가르쳐준 대로 심장, 내장, 성기 등등을 적출하여 악마를 소환하는 의식을 치렀지만 악마는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다. 다만 그때마다 프렐라티는 더욱 잔인한 요구를 하였고, 질 드 레는 무엇에 홀린 듯이 그 요구에 응하였다. 질 드 레의 악마 숭배와 희구는 광적인 수준을 뛰어넘고 있었다. 그런데 그 기록을 여지없이 깬 여자가 바로 바토리였던 거다. 그 뒤로 바토리의 흡혈사건은 모든 흡혈귀 소설의 원형이 됐으며, 많은 영화로도 각색돼 오늘날 우리들의 간담을 오싹하게 만들고 있다. 영화뿐만 아니라 미니 시리즈, 게임, 소설의 주요 소재로 유명해졌다. 영화나 시리즈물은 1971년에 <드라큘라 백작부인(Countess Dracula)>, 2006년에 <살아 남은 것>, 2007년에 <헬보이: 블러드 앤 아이언>, 2008년년에 <바토리 - 전설의 또 다른 얼굴>, 2009년에 <백작부인>, 2010년에 <바토리 전설 시리즈>, 2015년에 <Salem 시리즈 Blood Bath> 등이 있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