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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 청상과부가 중국 최고 갑부로 - 주영(周莹)

★ 금삿갓의 은밀한 여성사 ★ (240126)

by 금삿갓

중국은 예로부터 땅덩어리도 크고 인구도 많아서 재산을 일구어 거부(巨富)가 된 사람이 많다. 중국에서 돈 많은 중년 여성을 부파(富婆)라고 한다. 역사서에 등장하는 남자 부호(富豪)는 제쳐놓고 여성 부자를 살펴보면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 <화식열전(貨殖列傳)>에 나오는 청(淸)이라는 과부(寡婦)가 최초이다. 그녀 선조가 주사(朱砂)인 단사광산(丹砂鑛産)을 경영하여 몇 대째 그 이익을 독점하니 재산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청(淸)은 과부였으나 가업을 유지하고 재산과 자신을 잘 지켜내 그 부와 유업을 침범당하지 않았다. 진시황(秦始皇)도 그녀를 정조가 있는 부인으로 여겨 손님처럼 대하는 한편 그녀를 위해서 여회청대(女懷淸臺)를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 대는 지금의 쓰촨성 장수현 남서쪽 천불향(千佛鄕) 룽산자이(龍山寨)에 있다. 그 외에도 많지만 오늘의 주인공은 1869년 산시성(陝西省) 싼위안(三原)현 루차오(魯橋)진 멍뎬(孟店)촌에서 태어난 저우잉 즉 주영(周莹)의 이야기이다. 이 여인의 우리나라의 최고 여성갑부인 제주의 의녀(義女) 김만덕(金萬德 : 1739~1812) 같은 사람이다. 김만덕도 12세에 고아신분에서 기녀가 되었다가 양인으로 환원해서 제주의 제일 큰 상단의 객주(客主)가 되어 거부를 이루었다. 그리고 제주에 기근(饑饉)이 들자 쌀 500석을 풀어서 기아자(饑餓者) 천여 명을 구하여 정조(正祖)가 소원을 들어주겠다고 해서 금강산 여행을 국비로 다녀왔다. 아무튼 중국의 상인(商人)이란 개념은 주(周)나라에 망한 상(商)나라 사람들이 고향을 떠나 이곳저곳으로 다니면 상행위를 하면서 생존하던 것에서 유래되었다. 그래서 중국의 상인들은 지역마다 독특하고 강력한 상인정신을 전통으로 뭉쳐서 장기간 그 명맥을 유지해 온 것이다. 진상(秦商)이라고도 하는 섬상(섬商)은 중국에서 가장 먼저 출현한 상파(商派)로 여겨지며, 역사적으로 ‘실크로드’, ‘차마고도’, ‘주서구(走西口)’라는 잘 알려진 단어는 모두 진상(秦商)에서 유래한 것으로 중국 상업문화의 살아있는 화석이라고 할 수 있다.

주영은 일명 안오상부(安吳商婦) 또는 안오과부(安吳寡婦)로 불리며 한 시대의 진상(秦商) 중 전설적인 여인이다. 청(淸)나라 동치제(同治帝; 1856~1875) 8년에 태어난 그녀는 원래 상인 집안 출신이었다. 그녀의 증조부 저우메이춘 즉 주매촌(周梅村)은 거상이면서 형부원외랑(刑部員外郞)을 지냈으며, 가산(家産)이 풍부하여 자선도 많이 하며, 주팔야(周八爺) 활재신(活財神)으로 알려져 있었다. 가경제(嘉慶帝; 1760~1820) 연간(年間)에 삼원(三原)의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주씨 가문은 장사가 번창했는데, 한편 쑤저우(蘇州)에서 포목을 사서 산시성(山西省)에서 염색하여 북서쪽에 팔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장시성에서 도자기를 취급했으며, 양저우 소금 산업에도 참여하여 36만 냥의 재산을 축적했다는 기록이 있다. 안타깝게도 함풍제(咸豐帝; 1831~1861) 시절에 시국이 불안정해졌고, 서북 무슬림의 반란 등으로 지역 자체가 큰 타격을 입고 그 가문의 형편도 급전직하하게 되었다. 그러자 형제들이 합심하여 가업을 다시 일으켜 세우려 하지 않고 오히려 분가를 일으켰고, 결국 주씨 집안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가세가 쇠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주씨 일가가 살던 저택은 현재 섬서성 삼원현의 민속박물관으로 보존되어 있다. 집안이 망하고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시는 바람에 주영은 올케의 주선으로 17세가 되던 해에 안오보촌(安吳堡村)의 오씨 가문의 아들 오빙(吳聘)과 결혼하게 된다.

어려서부터 벼슬아치의 집에서 태어난 주영은 천성이 총명하고 시서를 잘 읽었으며 산학(算學)에 능했다. 주영이 출가한 오씨 가문은 갑부이고 가업을 대대로 이어온 집안으로 주영의 시아버지 오위문(吳蔚文)은 현지에서 유명하고 부유한 상인이다. 그들이 운영하는 점포인 유륭전(裕隆全)과 염무총호(鹽務總号)는 한 해 매출이 당시 돈으로 수백만 냥이 되었다. 그런데 남편인 오빙은 병약하여 늘 탕약과 함께 했다. 이 때문에 주영과 오빙은 결혼 후 요절한 딸 한 명을 제외하고는 아이를 낳지 못했다. 오빙은 21세가 되던 해에 사망하였고, 당시 주영의 나이 겨우 20세가 채 안 되었다. 설상가상(雪上加霜)이라고 시아버지 오위문도 거래처에 물품 대금을 회수하러 갔다가 강에 빠져서 죽고 말았다. 그때 중요한 상업 정보가 담긴 장부도 홍수에 떠내려갔다. 주영은 아무도 의지할 사람 없이 외로운 등불과 찬비만이 함께했다. 밤이면 독수공방(獨守空房)인 그녀는 창가에 앉아 가랑비를 보며 흔들리는 촛불과 함께 긴 밤을 보내야 했다. 봉건 예법이 가장 가혹했던 시절, 사회는 여자들에게 이른바 ‘삼종사덕(三從四德)’을 엄격히 준수할 것을 요구했다. 여자는 남편이 죽은 뒤 함부로 개가(改嫁)할 수 없었다. 남편을 잃은 주영은 스무 살이라서 다시 결혼하고도 남은 조건이었지만 현지 관습상 과부로 정절을 지켜야 했다.


남편 오빙과 시아버지 오위문이 잇따라 세상을 떠난 후, 오씨 집안은 일을 맡을 사람이 없어졌고, 그때 주영은 어쩔 수 없이 오씨 집안의 가문의 모든 일을 떠맡아야 했다. 그러나 오씨 집안의 여러 점원들과 지배인은 주영이 단지 집안일만 하는 약한 여자일 뿐이라고 생각했고, 그래서 자기들끼리 연합하여 주영의 권력을 무력화시키고 재산을 모두 빼돌리려고 하였다. 그러나 주영은 대갓집 규수의 법도에 따라 키워졌지만 어릴 적부터 거상의 집에서 생활하며 산학을 익혔고, 귀동냥으로 장사의 원리를 견문하여 그녀의 실력이 그들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었다. 당시 청두(成都)의 천화총호(川花總号) 총경리(總經理 : 사장)와 양저우(楊州)의 유륭전(裕隆全), 염무 총호(鹽務總号)의 총경리가 오씨 집안의 남자들이 모두 죽은 틈을 타 오씨 집안의 상점을 자기 소유로 삼으려 했다. 그러나 주영(周莹)은 철저히 계획을 세운 후에 움직이는 성격이었다. 지점 사장들의 반심을 눈치챈 그녀는 당장 일을 키우지 않고, 몰래 묵묵히 부정(不正)한 증거를 수집한 뒤 만반의 준비를 갖춘 상태에서 반격을 가했다. 확실한 증거와 자료를 가지고 부정을 저지를 사장들을 법정에 세웠다. 이 일로 주영은 위신을 세우고 오가(吳家)에서 입지를 굳혔을 뿐 아니라 오가(吳家)의 권력을 일거에 자기 손에 쥐게 된다. 오가(吳家)의 대권을 장악한 후, 오가(吳家)의 가업을 어떻게 보존하고 성장시킬 것인가가 주영의 첫 번째 큰 과제가 되었다. 주영은 본인이 아직 젊은 여자이고, 오씨 집안에 기거한 시간이 그리 길지 않기 때문에, 그녀는 자신의 심복들을 갖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깊이 이해했다. 그래서 그녀는 끊임없이 자신의 심복을 증가시켰다. 그 후 오씨 집안사람들은 거의 주영을 진정한 주인으로 여겼다. 그 후 주영의 주변에는 수십 명의 유능한 사람들이 있으며, 그중 라천증(罗天增), 양무기(杨茂亭), 왕자서(王子绪), 왕유농(王幼农) 등이 그들이었다.

그 시절에 진상(秦商)은 이익보다 의리를 중시하는 경향이 많았다. 그러나 일반 상인들은 공급이 수요를 초과하거나 공금이 부족하면 그 틈을 타 폭리를 취했다. 예를 들면 어느 해 산시성 면화가 대풍년이어서 반가운 일이지만 산시성 상인들이 약속이나 한 듯 면화 수매 가격을 후려쳐 농가의 소득이 크게 줄었다. 관례적으로 주영도 다른 상인들과 마찬가지로 면화 수매 가격을 낮춰야 했지만 동정심이 많은 그녀는 그러지 않고 원래 가격으로 면화를 사들였다. 이렇게 되자 농가들은 하나둘씩 자신의 목화를 오씨 집에 팔았다. 주영의 이러한 행동으로 인해 오씨 상단은 많은 양의 면화를 구매할 수 있었다. 면화의 재고량이 많아지는 것은 사실 매우 위험한 일이지만, 다음 해에 면화가 흉작이 들자 다른 상인들은 면화 재고가 충분하지 않아 어쩔 수 없이 오씨 상단에서 면화를 구입해야 했다. 주영은 인심을 쓰다가 농민의 이익을 해치지 않고 대박을 터뜨렸다. 주영은 당시 목화시장에서 삼풍일흉(三豊一凶) 쌍평년(雙平年) 즉 3년 풍년에 1년 흉년, 2년 평년작 현상이 자주 나타나자 목화를 사들일 때 목화의 풍작 여부를 미리 알 수 없고, 가격 변동을 피하기 위해 평년 가격으로 이듬해 목화를 미리 사들였다. 말하자면 사전 계약재배와 비슷한 효과이다. 이런 헷징(Hedge) 거래 모델은 주영(周莹)으로 하여금 면화 가격의 기복이 심한 파동을 완벽하게 회피하게 해 주었다. 이 밖에도 주영은 나이 든 근로자와 집사들에게 연금을 지급하고, 사망한 근로자들의 장례를 치르는 등 당시로서는 획기적인 직원들의 복리후생 제도를 시행하였다. 오씨 상단 직원들은 자사주 취득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을 뿐 아니라 퇴직 후에도 연금을 계속 받을 수 있고, 심지어 사망 후에도 연금을 받을 수 있도록 하였다. 주식회사의 초기 형태를 갖춘 이 개혁은 의심할 여지없이 주영의 앞선 비전을 반영하여 직원의 이익과 회사의 성장이 연계되어 윈윈하도록 하였다. 예를 들어 어린 점원은 일 년에 봉급 중 은자 20냥을 인출하여 생활에 사용할 수 있고, 나머지 10냥은 주식 배당에 참여할 수 있도록 했다. 이 개혁이 있은 후, 모든 직원들은 주인 정신으로 적극성을 발휘하고 모두 근면하고 책임을 다했을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자제들도 오씨 상단에 와서 일하도록 하였다. 주영의 이런 경영 수완에 힘입어 오가 상단은 주변 관내의 상단에서 일약 전국 유명 면화 상단으로 도약하였다.

명실공히 오씨 상단의 최고 책임자에 올랐지만 주영은 과감히 권력을 위임하였고, 각 상점별로 전문경영인을 선임하여 경영을 맡기고 간섭을 하지 않았다. 한 번은 차상점인 유흥중(裕興重)의 전문경영인으로 등감당(鄧監堂)이란 사람을 영입했다. 등감당은 매우 고액 연봉을 받고 차상점의 전문경영인으로 취임 후 아무 일도 하지 않고, 하루 종일 바둑을 두며 빈둥빈둥 놀기만 했다. 그러니 차상점의 경영 실적은 참담했고, 오씨 상단의 모든 사람들은 모두 초조해했다. 그래서 주영(周莹)에게 일을 하지 않는 등감당 총지배인을 해고하라고 청했다. 그러나 주영은 등감당을 매우 신뢰하여, 등감당이 무슨 짓을 해도 절대 관여하지 않았다. 얼마 후 경양(涇陽) 차 시장의 상황이 급변하여 찻잎 가격이 로켓을 탄 듯 치솟았다. 그러자 일을 하지 않는 것으로 유명한 등감당은 창고에 있던 재고 찻잎을 아주 비싸게 팔았다. 이윤을 최고로 거두었을 뿐만 아니라, 유흥중(裕興重)은 현지 최대의 차 상점이 되었고, 일거에 시장의 60%를 독점하여 단숨에 오씨 상단의 간판으로 되었다. 주영(周莹)의 성실 경영에 대해 널리 알려진 이야기가 또 있다. 한 번은 고릉(古陵) 남당상호(南糖商号) 소금전문점이 바다소금을 진대청염(晋大青盐) 소금으로 잘못 팔았다가 한 노인에게 발각되었다. 노인이 상점의 총경리를 찾아가 따진 적이 있다. 이를 알게 된 주영은 즉시노인에게 3배로 환불하여 주고, 소금 가게에 고시를 붙여 잘못을 인정했다. 이를 들은 고릉(古陵)현 사람들은 주영의 경영방식을 칭찬했다. 주영은 중국 상업 역사상 단 두 개뿐인 계고(誡告) 현판 중 하나인 스스로 성실하고 거짓을 하지 않는다는 <성실무사자율자계(誠實無诈自律自戒)>라는 나무 현판을 가게 입구에 걸어놓게 했다. 오씨 상단은 날이 갈수록 최고조에 달했다. 중국 내 각 주요 상업 도시와 부두에는 모두 오씨 상단의 점포가 있고, 남과 북으로 통하고 전국을 하나로 연결하게 되었다. 전국 수백 개 지점에 있는 상점은 찻잎, 소금, 면화, 포목, 약재, 쌀과 곡물, 보석상, 기름 공장 등 다양한 분야가 포함되었다. 당시 오씨네 상단의 점원은 성을 넘어가고 현을 지나도 남의 집 밥을 먹지 않고, 남의 집 여관에 묵지 않는다는 전설이 있었다.

주영은 사업만 잘하는 것이 아니라 향리(鄕里)를 돌보는 일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고향에 학당을 짓고, 우물을 파고, 도랑을 파는 것은 우영이 마을 사람들을 위한 마음이었다. 그중에서도 배수로를 파서 알칼리성 땅 밑에 고인 물을 웨이허(渭河)로 끌어들이는 것만으로 얼마나 많은 옥토를 보호했는지 모른다. 더욱 칭찬할 만한 것은 섬서성을 포함한 관중(關中) 지방이 큰 가뭄과 흉년을 겪었을 때 주영은 의연히 죽 공장을 설립하여 고릉(高陵), 징양(涇陽), 순화(淳化), 싼위안(三原), 푸청(蒲城), 푸핑(富平), 두계대(斗鸡臺), 커우진(口鎭) 등의 양곡점을 동시에 열어 식량을 방출하여 한 사람의 힘으로 수많은 이재민을 구하여 백성들에게 <활불(活佛 : 살아있는 보살)>로 불렸다. 하지만 주영의 선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1900년 경자국변(庚子国变)으로 8개국 연합군이 북경에 쳐들어오자 서태후(西太后 : 慈禧太后)는 광서황제(光緖皇帝)를 데리고 섬서서수(陕西西狩)로 망명해 역사서에는 서수서안(西狩西安)이라 불렀다. 당시 이 지역의 관료와 부자들은 자희태후가 실각한 것으로 보고 대부분 피했다. 그러나 주영은 산시상회의 회장으로 징양(涇陽) 안우바오(安吳堡)에 살고 있었다. 그 소식을 들은 그녀는 징양(涇陽)에서 크고 튼튼한 젖소 다섯 마리를 사서 밤새도록 자희의 행궁이 있는 곳으로 달려갔다. 이튿날 놀란 자희태후가 일어나자 주영은 따뜻한 생우유 한 통을 바치고 조정에 은화 20만 냥을 기부했다. 망명 중에 있던 자희태후가 그 상황을 보고 감개무량했다고 한다.

이어서 서태후가 주영을 불렀다. 주영은 서태후 알현을 매우 중시하여 많은 진귀한 선물을 가지고 자희태후에게 주었다. 《경양사화속집(泾阳史话续集)》에 따르면, 주영이 자희태후에게 바친 헌물을 나열하면, 효주(哮珠) 팔찌 하나, 상아 돗자리 두 점, 금불상 하나, 경태람(景泰藍) 향로 하나, 남목 침대 하나, 남목 작은 둥근 병 여덟 개, 금 원숭이 하나, 경태람(景泰藍) 식함 한 쌍으로 총 여덟 점이라고 했다. 오씨 집안은 후에 조정에 은화 50만 냥을 추가 기부하였다. 자희태후는 산시(陝西)에서 1년 넘게 망명 생활을 했고, 환갑을 맞았을 때, 주영은 그녀에게 열두 폭의 병풍을 선물했다. 금과 옥으로 만든 조각은 가치가 매우 높아서 자희태후가 매우 좋아했다. 서태후는 서안을 떠나 귀경했지만 병풍이 너무 커서 들고 다니기 힘들어 가져가지 않았다. 현재 이 병풍은 산시(陕西)성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으며, 그들의 진관(鎭館)의 보물이다. 병풍과 기둥은 모두 자단나무로 만들었고 전면 상단에는 화조상수(花鳥湘綉)가 박혀 있고 모란·공작·까치가 그려져 있었다. 병풍 뒷면에는 붉은 비단 바탕에 금수로 쓴 다양한 모양의 전서체 수자(壽字)가 수없이 많다. 병풍의 허리 부분에는 민담 속 인물과 이야기를 담은 꽃과 새의 부조 문양이 새겨져 있다. 모든 병풍의 꼭대기는 투조(透彫)이다. 사자 머리를 새긴 두 개의 병풍 기둥이 있고, 기둥 몸체는 새긴 문양이 병풍 모티브와 잘 어울리는 소나무, 학, 사슴이 있어 ‘송학연명(松鶴延命)’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전문가들은 이 병풍의 제작 연대를 청대 중기인 건륭·가경 연간으로 추정하고 있다. 감동한 자희태후는 귀궁하자마자 친필로 <호국부인(護國婦人)>이라고 쓴 현판을 주영에게 선물했다. 나중에 신축조약(辛丑條約 : 1901)이 체결되자, 청은 국고가 비어 배상금을 지급할 능력이 없었다. 이때 주영은 가산을 정리하여 은과 물품을 기부하여 함께 국난 극복에 나섰고, 주영의 대의(大義)를 느낀 자희태후는 즉시 주영을 일품고명부인(一品誥命婦人)으로 봉했다. 그리고 서태후는 주영을 의녀(義女: 의붓딸)로 받아들였다.

장사가 한창일 때, 주영은 그녀의 오씨 장원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녀는 기개(氣槪)를 과시하기 위해 특별히 사람을 북경성에 보내 자금성(紫禁城)의 구조를 살펴본 후, 삼진사합원을 모방하여 편정공사원(偏正共四院)을 지어 오씨 장원(莊園)이라 불렀다. 장원은 호화스러워서 하인 수가 2000여 명에 이른다고 했다. 안오보(安吳堡)에서 동남쪽으로 2킬로미터 떨어진 구가촌(寇家村)에는 정원과 정자, 누각, 굴곡진 회랑, 인공 산, 연못, 그리고 온실 난방까지 갖추었다. 주영은 자식이 없어 오씨 집안의 조카인 우화이(吳懷 : 오회)를 양자로 삼았다. 나중에 오회는 오씨 장원을 넘겨받아 공산당에 기증했다. 1937년 낙천회의(洛川会议) 후 서북청년훈련반은 연안(延安)에서 경양(涇陽)으로 이전하였고, 1937년 10월부터 안오청년훈련반은 1938년 봄 당시 오씨(吳氏) 장원으로 이전하여 규모를 확대하였다. 전국 각지에서 연안을 찾는 공산당 열혈 청년들은 정치·군사 훈련에 참가하기 위해 이곳을 먼저 찾아야 한다고 했다. 안오청년훈련반에는 적의 무쇠발굽과 함락된 지역에서 탈출한 청년, 타향에서 돌아온 애국 화교, 노동자, 농민, 점원, 소상인, 예술가, 엔지니어, 유학생 및 군관과 병사 등이 있다. 가장 많을 때 교육생은 1,500명 이상에 달했고, 총 12,000명 이상의 교육생을 훈련하여 항일 구명 투쟁을 위해 옌안(延安), 항일 전선, 적진의 근거지, 국민당 우군 및 기타 지역으로 보냈다고 한다. 가장 자본주의인 상단의 근거지가 공산주의 청년 교육의 산실로 쓰이다니 역사의 아이러니한 면이다.

주영은 “지혜로 돈을 벌고 상업으로 나라를 다스린다(以智取财 以商事国)”라는 경영 철학을 계승하여 분발하고 끊임없이 발전하여 마침내 산시성 상업의 전설이 되었다. 그러나 주영은 자기 인생이나 가정은 불행의 연속이었다. 일찍 고아가 되었고, 결혼하였으나 청상과부가 되었고, 하나 있던 딸도 죽고 자식도 없었다. 오씨 집안의 조카 오회(吳懷)를 양자로 삼고 지극히 귀여워하면서 애지중지 키웠지만, 그녀는 응분의 보답을 받지 못했다. 오회가 어른이 된 후, 그는 주영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전혀 없었고, 덕도 없고 재능도 없는데 가업을 이어받으려고 했다. 주영은 양아들이 장사꾼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오회의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양아들이 먼저 주영에게 앙심을 품고 그를 키워준 어머니를 법정에 세운 것도 모자 사이에 큰 틈이 생긴 일이었다. 오랜 세월의 고생은 주영을 힘들게 했고, 양자의 배은망덕은 주영의 마음을 지치게 했다. 1908년, 마흔 살의 주영(周莹)은 지쳐 쓰러져 세상을 등지고 말았다. 주영은 오가(吳家)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지만 세상을 떠난 뒤 오씨 일족은 주영이 조상의 무덤에 묻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바로 그녀에게 자식이 없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황당한 이유인가! 이 오씨 선산은 주영이 생전에 많은 돈을 들여 지은 것인데 말이다. 주영(周莹)이 스스로 돈을 들여 지은 선산인데, 그녀가 머물 곳이 없으니 하늘의 도리와 양심이 어디 있겠는가? 그러나 시대가 변하여 산시성 오씨가(吳氏家)는 잊힌 지 오래지만 주영(周莹)의 이름은 결코 퇴색하지 않는다. 현대의 중국에서 주영의 일대기에 대한 드라마 <나년화개월정원(那年花开月正圆)>이 제작 방송되어 그녀의 뜻을 아름답게 전하고 있다. 우리나라에도 <꽃피던 그해 달빛>이라는 이름으로 방영되었다. 주영은 자기의 친정인 주가(周家)도 공들여 지어서 주가대원(周家大院)으로 만들었다. 싼위안(三原)현 루차오(魯橋)진 멍뎬(孟店)촌에 있던 주가(周家)대원(大院)은 수십 년에 걸쳐 17개의 원(院)이 세워졌다. 그 후 청동치(淸同治) 11년(1872년)에 전란으로 16원이 소실되어 현재 1원만 남아 주가대원민속박물관이다. 원래 이름은 오진대원(五進大院)으로 대지 면적 3,206㎡, 건축 면적 979.8㎡의 건축적 특성에 남북이 결합된 건축양식으로 남향과 북향, 길이 71m에 각각 대문을 사이에 두고 있으며, 중문을 모두 열면 뒷채가 한눈에 들어와 조용하고 아늑한 느낌을 주는 산시성 유일의 옛 민가이다.(금삿갓 운사芸史 금동수琴東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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