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玄都觀(현도관) : 현도단(玄都壇), 현단(玄壇)이라고도 한다. 도교의 신선(神仙)이나 도사(道士)들이 수련하는 곳으로, 당(唐) 나라 서울 장안(長安)의 숭업방(崇業坊)에 있던 도교(道敎)의 사원(寺院)으로 조정(朝廷)을 비유적으로 풍자하고 있다. 보통 도교(道敎)의 사찰을 ‘관(觀)’ 또는 ‘도관(道觀)’이라고 부른다.
* 百畝(백묘, 백무) : 백 이랑의 밭이란 뜻으로 땅 면적이 매우 넓다는 의미이다. ‘이랑 무(畝)’자 본디 음이 ‘묘’로 ‘6백 척(尺)’이다. 여기서는 백무(百畝)가 조정(朝廷) 크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였다.
* 桃花(도화) : 복숭아꽃을 뜻하며 말로, 여기서는 한 때 활짝 피어 부귀(富貴)만을 추구하는 소인배를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였다.
* 淨盡(정진) : 깨끗이 다했다 또는 조금도 남지 않다, 남김 없다는 뜻이다.
* 菜花(채화) : 채소의 꽃으로 중국에서는 ‘꽃양배추, 유채의 꽃’을 가리킨다.
* 道士(도사) : 도를 닦는 사람을 가키며, 여기서는 조정(朝廷)에서의 소인배 고관(高官)들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쓰였다.
뜰을 100 무라고 말했다면 전각이 이미 폐해져서 바라보기가 탕연해진 것을 알고 있는 것이다.
길에 다니는 사람이 없어 이끼가 끼었으니, 절반이 이끼라면 복숭아나무 남은 것이 없어 꽃구경하는 자들이 함께 다시 오지 않을 것임을 알은 것이다. 복숭아꽃이 깨끗이 다 없어져 100 이랑의 뜰이 텅 비고, 이끼가 섬돌에 가득하고, 천 그루의 복숭아나무가 이미 다 없어져 깨끗이 말라버린 것이다. 채소꽃이 피었다는 것은 들에 핀 유채꽃이다. 그의 자기가 쓴 서문에 말하기를 오직 유채와 귀리만이 봄바람에 흔들리는 것을 보았다라고 하였으니 바로 채소 꽃 따위다.
‘복숭아를 심은 도사는 어디로 돌아갔는가?’라는 것은 정사를 맡은 자들이 신귀를 재배하더니, 지금은 신귀가 다 없으니, 정사를 잡은 자들은 다시 어디에 있는가? 당시의 권세 또한 무엇을 의지하겠는가? 전날에 유랑(유우석)이 서울에 있을 적에 다만 꽃을 보고 지은 하나의 시다. 이어서 폄하되고 억류됨을 만나 지금 14년이 되었다. 다시 또한 이 꽃을 봄에 이르러 복숭아를 심은 사람이 먼저 있지 않으니, 옛날 집정자의 경박한 말을 깊이 조롱한 까닭이다.
내가 정원 20년 둔전원외랑이 되었을 때에는 이 관(현도관)에는 꽃이 없었다. 이 해에 나는 연주목이 되어 떠났다. 얼마 되지 않아 낭주사마로 바뀌어 10년을 지내다가 서울에 불려 오니, 어떤 도사께서 손수 선도를 현도관에 가득 심어서 붉은 노을과 같다고 사람들 마다 모두 이야기를 하였다. 그리하여 ‘전편(自朗州至京戲贈看花諸君子)’을 지어서 당시의 일을 기록하였다.
곧바로 다시 목사로 나갔는데, 14년이 지난 지금 다시 주객낭중이 되어 거듭 현도관을 거닐게 되었다. 복숭아는 다시 한 그루도 없어지고, 오직 유채와 귀리만 봄바람에 흔들릴 뿐이다. 이에 다시 28자로 제하여 후에 유람 오는 이를 기다리고자 하노라. 때는 대화 3년 2월이다.
* 貞元(정원) : 당 나라 덕종(德宗)의 연호이다. 정원 20년은 805년이다.
* 屯田員外郎(둔전원외랑) : 당나라 때 공부에 속한 관직. 군사지역 내의 둔전도 관리하고, 문무관원들의 직전 분배에 관한 사무도 맡아봄.
* 尋(심 : 뒤이어. 잠시 뒤. 얼마 있지 않아서.
* 志(지) : 기록하다. 표시하다.
* 旋(선) : 금방. 아주 빨리. 되짚어.
* 蕩然(탕연) : 완전히 없어진 모양.
* 兔葵(토규) : 너도 바람꽃. 유채 꽃. 菟(새삼 토) 葵(해바라기 규)
* 燕麥(연맥) : 귀리.
* 淨盡(정진) : 조금도 남지 않다.
* 前度(전도) : 전번에. 전에. 지난번에.
* 劉禹錫(유우석, 772-842) : 자(字)는 몽득(梦得), 낙양(洛阳) 사람이다. 당(唐) 정원(贞元) 9년에 진사(进士)에 급제했고, 감찰어사(监察御史)를 지냈으며, 왕숙문(王叔文)의 정치 개혁 운동에 참여했다. 나중에 왕숙문의 개혁이 공격을 당하자 그는 왕숙문의 일파로 간주되었고, 헌종(宪宗)은 유우석을 포함한 8명을 사마(司马)로 강등시켜 변방 지역으로 내보내 버렸다. 유우석이 내려간 곳은 낭주(朗州, 현재의 호남성湖南城 상덕常德)였는데, 그곳에서 10년을 살았다. 나중에 헌종은 유우석을 다시 장안(长安)으로 불러들여 직책을 맡기려고 했다. 당시 장안에는 현도관(玄道观)이라는 유명한 도교(道教) 사원이 있었다. 현도관에 복숭아 많아 유람객들이 꽃을 보려고 현도관을 찾았다. 어느 날 어느 친구와 현도관에 꽃구경을 가서 전편 시인 「희증간화제군자(戏赠看花诸君子)」라는 시를 지었다. 그는 이 시에서 당시 권세를 누리는 사람들을 빗대어 풍자했기 때문에 헌종의 불만을 샀다. 헌종은 화가 나서 그를 또다시 파주(播州, 현재의 귀주贵州 존의遵义)의 자사(刺史)로 보내 버렸다. 자사는 사마보다 한 등급 벼슬이 높았으므로 전에 비하면 승진인 것 같았지만, 실은 파주는 낭주보다 훨씬 더 외지고 황량한 곳이었다. 후에 유종원(柳宗元)과 대신 배도(裵度)가 유우석을 위해 헌종에게 잘 말해서 헌종은 유우석을 연주(连州, 현재의 광동广东 연현连县)로 보냈다. 다시 14년이 지나고 배도가 재상이 되자 유우석은 다시 장안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유우석이 장안에 다시 돌아왔을 때는 마침 봄철이었다. 그는 이전의 그 현도관을 다시 찾아갔다. 그런데, 현도관의 도사는 이미 죽었고 그 복숭아는 베어지고 뜰에는 잡초만 무성했다. 그는 느낀 바가 있어서 「재유현도관(再游玄道观)」이라는 시를 썼다. 이 시는 전편의 시보다 훨씬 신랄하게 권세가들을 비판했으므로 유우석은 이 시 때문에 또 화를 입어서 또다시 동도(東都)인 낙양(洛陽)의 태자빈객(太子賓客)으로 보내졌다. 우석은 백거이(白居易)와 함께 이름이 높아서 세간에서는 이 두 사람을 류백(刘白)이라 불렀다. 만년의 그의 시들은 점차 함축적이 되어서 풍자를 하면서도 그것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았다. 그는 시호(诗豪)로 불렸고, 시집 18권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