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121> 石頭城(석두성)

금삿갓의 漢詩工夫(241002)

by 금삿갓

石頭城(석두성)

- 柳禹錫(유우석)

KakaoTalk_20250109_221409842.jpg

山圍故國周遭在

산위고국주조재

○○●●○○●

산은 옛 나라를 감싸고 사방은 그대로인데


潮打空城寂寞回

조타공성적막회

○●○○●●◎

조수가 빈 성을 치니 적막이 돌아오네.


淮水東邊舊時月

회수동변구시월

○●○○●○●

회수의 동쪽 강변에는 옛 달이 떠오르니


夜深還過女墻來

야심환과여장래

●○○○●○◎

밤이 깊자 돌아지나 낮은 담장을 넘어오네.

* 石頭城(석두성) : 지금 남경(南京)에 한나라 시대 때에 석두산에 쌓은 성. 중국의 서쪽 카라코람 근처의 타스쿠르칸(塔什庫爾干) 지역에도 석두성이 있다.

* 周遭(주조) : 둘레, 주위, 사방, 바퀴.

* 淮水(회수) : 하남성 난양시 근처에서 발원하여 양저우에서 장강과 합류하는 물줄기.

* 女牆(여장) : 성위에 낮게 쌓은 담. 성가퀴.

石頭城(석두성)은 因山爲城故曰山圍故國(인산위성고왈산위고국)이니 指吳言(지오언)이라. 周遭(주조)는 城之四邊也(성지사변야)라. 在(재)는 謂國猶是也而城已空(위국유시야이성이공)하야. 有無限感慨意(유무한감개의)라. 石頭城(석두성)이 臨江故(임강고)로 被江潮來打(피강조래타)하야. 潮來有聲(조래유성)하고, 潮回則空城(조회즉공성)이 寂寞矣(적막의)라. 石城東(석성동)에 有秦淮水而月亦自東而升(유진회수이월역자동이승)하니 但恐舊時之月(단공구시지월)이 與今時之人(여금시지인)으로 不同耳(부동이)라. 舊時二字最重(구시2자최중)이라.

석두성은 산으로 성을 만들었으므로 산이 고국을 둘렀다고 말하였으니 오나라 가리키는 말이다. 주조(周遭)는 성의 사방 변두리다. 재(在)는 나라가 오로지 이와 같음은 이르니, 성이 이미 텅 비어 한없는 감개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석두성이 강에 임하여 있으므로, 강물의 조수가 밀려 닥침을 당하였고, 조수가 오니 소리가 있고, 돌아가니 곧 빈 성이 적막해진 것이다. 석두성의 동편에는 진나라의 회수가 있고, 달도 역시 절로 동에서 떠오르니 다만 옛적의 달이 오늘날의 사람과 같지 않은 것이 두려울 뿐이다. 구시(舊時)라는 두 글자에 가장 무게가 있다.

一首詩(일수시)가 只是感舊耳(지시감구이)라. 若論今時人(약논금시인)이면 好盛惡衰(호성오쇠)하야 來此空城(래차공성)하야. 作甚而舊時月(작심이구시월)은 雖至夜深寂寂(수지야심적적)이나 不厭空城(불염공성)하야. 還過女墻而來則月之不忘舊深矣(환과여장이래즉월지불망구심의)라. 此(차)는 夢得(몽득)이 寓言(우언) 하야. 所以譏刺新進(소이기자신진) 하야. 語似傷時(어사상시)라.

한 수의 시가 다만 옛 감정이니, 만약 지금 시대의 사람으로 말하자면 성대함을 좋아하고 쇠락함을 싫어하여 이 빈 성에 와서는 심하게 지은 것이 옛적의 달은 비록 밤이 깊어 적적하나 빈 성이 싫지 않아 성가퀴를 돌아오니, 곧 달이 옛적의 깊은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 이는 몽득(유우석)이 말을 붙여, 신진을 나무라고 풍자한 것으로 말씨가 시대를 아파하는 것 같다.

* 劉禹錫(유우석, 772~842) :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왕숙문은 투주사호참군(渝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누실명(陋室銘)>을 읊었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120> 烏衣巷(오의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