석두성은 산으로 성을 만들었으므로 산이 고국을 둘렀다고 말하였으니 오나라 가리키는 말이다. 주조(周遭)는 성의 사방 변두리다. 재(在)는 나라가 오로지 이와 같음은 이르니, 성이 이미 텅 비어 한없는 감개의 뜻이 있다는 것이다. 석두성이 강에 임하여 있으므로, 강물의 조수가 밀려 닥침을 당하였고, 조수가 오니 소리가 있고, 돌아가니 곧 빈 성이 적막해진 것이다. 석두성의 동편에는 진나라의 회수가 있고, 달도 역시 절로 동에서 떠오르니 다만 옛적의 달이 오늘날의 사람과 같지 않은 것이 두려울 뿐이다. 구시(舊時)라는 두 글자에 가장 무게가 있다.
한 수의 시가 다만 옛 감정이니, 만약 지금 시대의 사람으로 말하자면 성대함을 좋아하고 쇠락함을 싫어하여 이 빈 성에 와서는 심하게 지은 것이 옛적의 달은 비록 밤이 깊어 적적하나 빈 성이 싫지 않아 성가퀴를 돌아오니, 곧 달이 옛적의 깊은 것을 잊지 않은 것이다. 이는 몽득(유우석)이 말을 붙여, 신진을 나무라고 풍자한 것으로 말씨가 시대를 아파하는 것 같다.
* 劉禹錫(유우석, 772~842) : 당나라 중기 낙양인(洛陽人)으로 자(字)가 몽득(夢得)이다. 덕종(德宗) 정원(貞元) 초(785)에 진사로 정계에 진출한 후, 795년 박학굉사과(博學宏詞科)에 급제하여 회남절도사 두우(杜佑, 735~812)의 막료가 되었으며,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된 후에는 왕숙문(王叔文, 758~806) · 유종원 등과 함께 환관과 권문세족들의 잘못된 권력을 쇄신하는 정치개혁을 시도하였다. 왕숙문은 덕종 때 왕비(王 )와 더불어 태자의 독서를 맡은 동궁시독(東宮侍讀)을 지냈다가, 태자가 순종(順宗)에 즉위하자 한림학사(翰林學士)가 되었다. 순종의 신임을 받은 왕숙문은 위집의(韋執誼)를 재상으로 추천하였으며, 또한 유우석과 유종원 등을 조정의 대신으로 기용해 개혁정치를 펼쳤다. 왕숙문이 어머님의 병환으로 물러난 지 146일 만에 환관 구문진(俱文珍)이 순종을 퇴위시키고 헌종(憲宗)을 옹립하면서 왕숙문은 투주사호참군(渝州司戶參軍)으로 쫓겨난 뒤 다음 해 피살되었다. 그 결과 유우석과 유종원도 헌종 영정(永貞) 원년(805)에 지방으로 쫓겨났다. 유종원은 영주(永州, 호남 영릉)로, 유우석은 낭주(朗州, 호남 상덕)로 좌천되었다. 유우석이 좌천되었을 때, 지방 관원은 그가 못마땅하여 숙소를 세 번이나 옮겼는데, 세 번째 옮긴 숙소는 딸랑 침대 하나만 놓여 있었다고 한다. 그럴 때 그는 이렇게 <누실명(陋室銘)>을 읊었다. “산이 높지 않아도, 신선이 살면 이름난 산이요. 물은 깊지 않아도, 용이 살면 영험한 물이지. 이곳은 누추한 방이나, 오직 나의 덕으로도 향기가 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