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쓰는 안데르센 세계 명작 - 눈의 여왕
눈의 여왕은 태초부터 존재했다. 투명하리라만치 새하얀 옷을 걸치고 있는, 뚱한 표정의 소녀였다. 어둠 속에서 하나님이 빛을 밝히기 시작하고, 하나님의 손길이 닿는 곳에 생명이 넘실넘실 태어나며 노래 불렀다.
소녀는 방금 갓 태어난 푸르른 강아지풀에게 다가갔다.
“안녕-”
소녀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강아지풀은 꽁꽁 얼어버렸다.
소녀는 너무 놀라 뒷걸음질 쳤다.
“다가오지 마!”
소녀를 지켜보던 장미가 앙칼지게 소리쳤다.
하지만 장미꽃을 미처 발견하지 못한 소녀는 이내 장미꽃을 꽝꽝 얼려버리고 말았다.
소녀는 서러움에 눈물을 터트렸다. 소녀의 눈에서 얼음장 같은 눈물이 뚝뚝 떨어지자 하늘에서 폭설이 내리더니 온 세상이 차갑게 얼어붙었다. 하나님은 얼어붙은 강아지풀과 장미꽃을 손으로 포개어 냉기를 녹여주었다. 그리고 태양의 온기로 옅게 감싸 영원히 얼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하나님은 소녀에게 얼지 않을 강아지풀과 장미꽃을 건네며 푸른 것들과 따뜻한 생명으로부터 떨어져 있으라고 일렀다. 소녀는 태양의 온기를 머금은 강아지풀과 장미꽃을 손에 꼭 쥐고, 숨 쉬는 모든 것들로부터 떨어지기 위해 발걸음을 옮겼다.
그 여정을 떠나는 내내 강아지풀은 투정을 부렸다.
“아! 재미없어! 몇 달째 어디를 그리 급히 간담!”
소녀는 도망치고 도망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스산한 땅에 도착했다. 소녀가 걷는 모든 곳은 얼음길이 되었고, 그녀가 머무르는 곳은 매 순간 찬바람이 쌩쌩 부는 척박한 장소가 되었다. 소녀는 눈과 얼음을 부려 겨울왕국을 만들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소녀의 손에는 항상 강아지풀과 장미꽃이 꼭 쥐여있었다. 소녀는 강아지풀과 장미꽃을 담을 만한 작은 얼음 가방을 만들었다. 항상 함께 있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강아지풀이 하도 질색을 하는 바람에 강아지풀과 장미꽃은 궁전 호숫가에 얌전히 놓여있었다.
“지루해! 재미없어! 이 궁전은 얼음장 그 자체야! 벽도 얼음! 살고 있는 여자도 얼음장 같지!”
강아지풀이 하품을 하며 분통을 터트렸다. 장미꽃 또한 꽃밭으로 돌아가 노래와 춤을 추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강아지풀만큼 내색하지는 않기로 했다. 대신 장미꽃은 매일 밤 옥구슬 같은 목소리로 노래를 불렀다.
“장미꽃이 달콤한 계곡에 틀림없이 예수의 아이가 있을지니.”
한동안 강아지풀의 툴툴거리는 투정과 장미꽃의 성스러운 노래만이 겨울왕국을 가득 채웠다.
수년 후, 눈의 여왕은 검은 가마솥에 눈송이를 내리고 다시 궁전으로 돌아왔다. 궁전에 도착한 여왕은 바로 강아지풀과 장미꽃부터 찾았다. 밖에서 주워온 썰매가 퍽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여왕의 눈에 들어온 강아지풀과 장미꽃이 싸늘하게 말라비틀어져 죽어있었다. 그들은 영생을 살지 못하는 생명들이었기 때문이다.
‘아아... 하나님은 왜 죽을 것들을 나에게 주셨을까’
여왕은 얼음 왕좌에 앉아 깊은 사색에 잠겼다. 여왕의 슬픔은 영원히 녹지 않는 얼음을 만들어냈고, 어느새 사악한 호브고블린 손아귀에 들어가 있었다.
눈의 여왕은 종종 궁전을 나와 푸른 것과 생명을 구경했다. 대부분은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멀찍이서 지켜만 보았다.
“하얀 꿀벌이 떼 지어 가는 것 좀 보렴.”
“여왕벌도 있어요?”
어느 날은 아이 둘과 할머니가 여왕벌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었다. 남자아이 이름은 카이, 여자아이 이름은 게르다였다.
“눈의 여왕이 여기 들어올 수 있을까요?”
“흠 들어오게 하자. 내가 뜨거운 난로에 확 녹여버릴 테니까!”
눈의 여왕은 이 모든 이야기를 엿듣고 있었다.
‘녹여보라지’
여왕은 콧방귀를 뀌었다. 눈은 누구에게나 내릴 수 있으며, 존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사 눈이 아니더라도 여왕이 갖고 있는 모습은 다양하다. 눈의 여왕은 카이를 가만히 보고 있노라면 장미꽃이 떠올랐고, 여자아이는 보면 태양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한참 동안 아이들을 구경하던 여왕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얼음을 훔쳐가는 호브고블린 때문에 할 일이 많았기 때문이다.
여왕의 바람과는 다르게, 얼음으로 만든 호브고블린의 조각난 거울들은 전 세계에 흩뿌려졌다. 눈의 여왕은 세상이 심상치 않게 변했음을 가장 먼저 알아차렸다. 호브고블린의 거울 조각은 생명들의 몸과 마음을 파고들어 모든 것을 흉측하게 보이게 했다. 거울은 소중한 존재일수록 더더욱 일그러져 보이게 하는 강력한 마법이 걸려 있었다.
“어쩔 수 없군...”
여왕은 무엇을 해야 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수개월 후, 눈의 여왕은 카이의 썰매에 마법을 걸어놓았다. 카이의 썰매는 한참을 미끄러져 내려와 여왕의 앞에 도달해서야 움직임을 멈추었다.
“추위에 떨고 있구나. 내 곰털 코트 속으로 들어오렴.”
여왕은 하얀 눈송이를 뭉쳐놓은 듯한 암탉이 이끄는 썰매에 카이를 태웠다. 카이의 심장과 눈에 박힌 거울 조각은 눈의 여왕이 이끄는 대로 순순히 움직이게 만들었다. 눈의 여왕과 카이가 탄 썰매가 꽃밭과 은빛 금빛의 왕국을 지나, 산적들과 라프족 여인과 핀족 여인을 지나갔다. 그들은 한참 후에야 겨울왕국에 도착할 수 있었다.
카이가 온 후 겨울왕국에는 많은 일들이 있었다. 눈의 여왕은 카이를 위해 온갖 재미난 것들은 연구했는데, 어느 날은 썰매장을 만들다가 산 하나를 통째로 날려버렸다. 눈의 여왕이 얼음으로 미로를 만들 때, 길 잃은 까마귀 한 마리가 겨울왕국에 발을 들였다가 동사한 사건도 있었다. 눈의 여왕이 만들어 놓은 것 중에 카이는 커다란 얼음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는 걸 가장 좋아했다. 이 넓은 호수에서 스케이트를 타면 온 세상이 자기 것처럼 느껴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카이의 몸은 추위에 의해 점점 파랗게 질려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카이는 한동안 ‘얼음 낱말 퍼즐’을 맞춰야 했다.
“카이 이제 마지막 단어만 남았구나.”
눈의 여왕이 교묘하게 짜 놓은 탓에 카이는 단 한 단어 ‘영원’만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카이의 몸이 추위에 의해 푸르다 못해 점점 검게 변해갔다.
“여길 보렴. 눈으로 무엇이든 만들 수 있단다.”
눈의 여왕은 카이에게 눈으로 만든 토끼, 눈으로 만든 원숭이, 눈으로 만든 곰, 눈으로 만든 코끼리를 연달아 보여주었다. 넘실넘실 눈으로 만든 동물들은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섬세하게 움직였다.
“와~ 최고로 아름다워요! 마치 여왕님처럼!”
카이에게는 눈으로 만든 동물들이 너무 아름답게 보였다. 하지만 카이가 아닌 다른 사람이 이 동물들을 봤다면 정말 기괴하다고 말했을 것이다. 얼음으로 만든 동물들은 이목구비가 괴상하게 비틀어져 있었고 표정도 음침했다. 카이가 눈으로 만든 동물들이 아름답다고 여긴 건 카이의 심장과 눈에 호브고블린의 거울 조각이 박혀 있기 때문이었다.
“우와~ 여왕님! 여왕님! 또 다른 동물은 없어요?”
순간적으로 여왕의 눈빛이 반짝이며 생기가 돋았다.
눈의 여왕은 카이에게 더 많은 눈으로 만든 동물들을 자랑했다. 그러는 와중에도 카이의 몸은 새까맣게 얼어붙고 있었다. 여왕은 잠시 이성의 거울을 비춰보았다가, 특유의 뚱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곧이어 눈의 여왕은 태양의 아이가 점점 가까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아차렸다.
“난 이제 따뜻한 나라로 가봐야겠어. 검은 가마솥을 들여다봐야 하거든”
눈의 여왕은 이제 카이를 보내줘야 할 시간이라고 생각했다.
'물론 마지막 퍼즐을 맞춰야겠지만!'
그렇게 눈의 여왕은 마지막 여운을 남겨두기로 했다.
얼마 지나지 않아 태양의 아이 게르다가 도착했다. 그녀의 옆에는 태양의 천사가 든든하게 서있었다. 게르다의 따뜻한 눈물은 카이의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녹였고, 카이의 슬픈 눈물은 눈에 박힌 거울 조각을 빼냈다. 카이는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갔다.
“카이, 집으로 돌아가자.”
“흑흑……. 응!”
한참을 엉엉 울던 카이와 게르다는 그렇게 다시 본래 살던 할머니가 살고 있는 집으로 돌아갔다. 그들은 순수한 아이의 마음을 간직한 채로 성인이 되었다. 눈의 여왕은 마을 멀찍한 곳에서 훌쩍 자라 버린 카이와 게르다를 한참 동안 지켜보았다.
그 순간 카이의 옆에 조그만 아이가 스쳐 지나가며 하는 소리가 여왕의 귓가에 닿았다.
“엄마 얼굴은 마치 호빵 같아요. 뚱뚱하고 빵빵해서 아무도 관심 가져주지 않을걸!”
“너 엄마한테 무슨 말버릇이니!”
그 아이의 심장에도 호브고블린의 거울 조각이 박혀있었다. 여왕은 그 아이가 강아지풀을 닮았다고 생각했다.
훗날 여왕은 아이에게 눈으로 만든 다양한 동물들을 보여줬는데 그중 원숭이의 입가에 미소가 지어져 있었다.
- 끝 -
<눈의 여왕>을 처음 읽었을 땐 물음표만 가득 남았던 기억이 있습니다. 성인이 된 후 다시 읽어보니 어렸을 때보다 이해되는 내용들이 있었는데, 그중 하나가 ‘눈의 여왕의 외로움’이었습니다. <눈의 여왕>에 나오는 캐릭터들은 모두 외로워 보였습니다. ‘눈의 여왕’이 어떤 삶을 살아왔을지 나름대로 상상했을 때, 왠지 ‘눈의 여왕’은 이런 삶을 살아왔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눈의 여왕’은 ‘시련’ 그 자체입니다. ‘시련’이란 관점에 따라 누군가에게는 성장의 계기가 되기도 합니다. 단, 주변 사람의 사랑과 도움이 있다면 더욱 빨리 본래 알던 사랑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갈 수 있습니다. <눈의 여왕>의 비하인드처럼 맞춰지지 않는 조각들을 맞춰보려 노력했습니다. 제가 전달하고자 했던 의미가 잘 표현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마지막으로 안데르센의 동화를 재해석할 수 있는 기회를 준 브런치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