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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시간,인간의 노력

늦은 나이에야 닿는 사유

by 최국만


젊은 시절에는

‘신의 시간’이라는 말을 쉽게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말은 패배자의 위안처럼 들렸고,

노력을 멈춘 사람의 변명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인생을 칠십에 가깝게 살아오고 보니

그 말은 회피가 아니라

가장 깊은 질문에 가깝다는 생각이 든다.


왜 어떤 일은

죽을 만큼 애써도 끝내 닿지 못하고,

왜 어떤 인연과 사건은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도

마치 준비된 것처럼 다가오는가.


이 물음 앞에서

인간은 겸손해질 수밖에 없다.


인간의 노력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다


나는 노력하지 않은 삶을 살지 않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수십 통의 이력서를 냈고,

국가고시를 준비하며

잠을 줄이고 몸을 아끼지 않았다.


경찰대학 공채,

학사경위 시험,

국민건강보험공단 시험까지.


어느 시험이든

가볍게 치른 적은 없었다.


그중에는

가채점으로 거의 만점에 가까웠던 시험도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불합격이었다.


딱 2점.

군 복무 형태에 따른 가산점 차이.


그때 나는 처음으로

노력과 결과 사이에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절실히 경험했다.


불교식으로 말하면

이미 조건은 갖추었으나

연(緣)이 아니었던 것이다.


연기인가, 섭리인가


불경은 말한다.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사라지면 저것도 사라진다.”


연기(緣起).

모든 것은

홀로 존재하지 않고

관계와 조건 속에서 발생한다는 깨달음이다.


그러나 나는 여전히

거기서 한 발 더 나아가 묻고 싶다.


그 관계들을

그 조건들을

누가, 혹은 무엇이 배치하는가.


아내와의 만남은

계획한 인생이 아니었다.

가정이라는 울타리도

내가 설계한 결과가 아니었다.


어느 날

그저 조용히 내 삶에 놓였고,

그 인연은 어느덧

결혼 40주년이라는 시간이 되었다.


이 지점에서

나는 연기 너머의 무엇을 느낀다.

기독교적 표현을 빌리자면

섭리에 가깝고,

철학적으로 말하면

초월적 질서라 할 수 있는 무엇이다.


신의 시간이란, 인간의 시간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시간은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뜻이 아니다.

모든 것을 맡기고 손을 놓으라는 말도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인간은 인간의 시간을 살고,

그 결과는 신의 시간에 맡긴다.


나는 언제나

내 몫의 노력을 했다.

넘어질 만큼 넘어졌고,

좌절할 만큼 좌절했다.


다만 지금에 와서야

알게 되었을 뿐이다.


노력은

결과를 보장하지 않지만,

의미를 보장한다는 것을.


그 의미들이 쌓여

어느 날

설명할 수 없는 평안으로 돌아온다.


후반기의 삶에서 바라본 신의 시간


이제 나는

젊은 날처럼

미래를 장악하려 하지 않는다.


앞으로의 신의 시간이

축복일지,

시련일지,

혹은 아무 일 없는 평범한 날들일지

알 수 없다.


다만 하나는 확실하다.


신의 시간은

언제나

사람을 겸손하게 만들고,

자기 자리를 돌아보게 하며,

마침내 감사로 이끈다.


그 시간을 통과해 온 사람만이

그 의미를 안다.


조용한 결론 하나


나는 이제 이렇게 믿는다.


노력은

인간이 할 수 있는 가장 경건한 행위이고,

기다림은

신 앞에서의 가장 깊은 기도라고.


내 인생의 수많은 굴곡들은

아마도

그 기도가 응답되기까지의

침묵의 시간들이었을 것이다.


신의 시간은 늦게 온다.

그러나 빈손으로 오지는 않는다.


그것은

끝까지 살아낸 사람에게만

이해로 다가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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