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호와 고립 사이, 인간의 자리를 묻다
제5편
나는 종종 생각한다.
만약 기종이의 어머니가 세상을 떠나면,
그의 삶은 어디로 가게 될까.
그 대답은 이미 어머니와 동생의 입에서 나왔다.
“시설에 보내야지요.
나 없으면, 누가 저 아이를 거들떠보겠어요.”
그 말은 단호했지만,
그 안에는 절망이 섞여 있었다.
시설 그 단어에는 보호의 의미와 함께
버림의 그림자가 공존한다.
나는 과거 취재 현장에서
많은 시설을 다녀본 적이 있다.
그곳에는 부모에게서, 가족에게서,
혹은 사회에게서 맡겨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보호받고 있었지만,
동시에 세상과 격리되어 있었다.
커다란 건물, 규격화된 침대,
정해진 식사 시간, 일률적인 일정표.
모든 것이 ‘관리’를 위해 존재했다.
그러나 그 어디에도 ‘삶의 흔들림’은 없었다.
그들은 말이 적었고, 웃음은 더 적었다.
누군가 “여긴 괜찮아요?” 물으면
대부분의 대답은 이랬다.
“그냥 그래요. 여긴 시간이 안 가요.”
시설의 본래 목적은 보호였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그 보호는 ‘대신 사는 일’이 되었다.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자유가 사라지고,
정해진 틀 안에서 살아가는 삶.
그건 생존일 뿐, 삶이라 하기 어렵다.
기종이 어머니처럼
“시설밖에 없다”라고 말하는 부모들은
사실 포기를 택한 게 아니다.
그건 사랑의 마지막 형태다.
“그래도 누군가 밥은 먹여주겠지,
추운 날 따뜻한 방은 있겠지”
그 최소한의 안심을 위해
그들은 자식을 세상에 맡긴다.
시설의 벽은 단순한 콘크리트가 아니다.
그건 사회가 쌓아 올린 ‘거리의 벽’이다.
그 벽 너머에서 사람들은 잊혀진다.
잊힌 사람에게는 권리도, 이름도 희미해진다.
나는 예전에 장애인 복지시설을 취재할 때 한 중증장애인의 편지를 본 적이 있다.
“우리는 이 안에서 시간이 멈췄어요.
밖에서는 봄이 올까요?”
그 짧은 문장이 내 가슴을 울렸다.
시설의 벽 너머에는
봄이 있지만,
그들은 봄을 느낄 수 없다.
시설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어서는 안 된다.
진짜 복지는 시설이 아니라,
함께 살아도 괜찮은 사회의 구조다.
부모가 떠난 뒤에도
그 아이가 동네의 가게에서 물건을 사고,
이웃에게 인사하고,
시장에 나가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세상
그게 복지의 완성이다.
사람은 누군가의 관리 대상이 아니라,
관계 속에서만 존재를 느낀다.
‘함께 있음’이 없으면,
그건 아무리 따뜻한 방이라도
결국 감옥이 된다.
나는 기종이를 떠올린다.
그는 말을 잃었지만,
눈빛 하나로 세상을 말할 줄 안다.
그 눈빛이 시설의 하얀 벽 안에 갇히는 날,
그의 언어는 사라질 것이다.
기종이는 시설에서 살 수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잃게 될지도 모른다.
나는 이 글을 쓰며 묻는다.
우리는 장애인을 시설에 맡기는 사회로
안심할 자격이 있는가?
시설의 벽 너머에는
보이지 않는 수많은 삶이 있다.
그들의 목소리는 작고,
그들의 하루는 길다.
그들은 세상과 단절된 채,
오늘도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고 있다.
언젠가 기종이 어머니의 말이 현실이 된다면,
나는 그 벽을 자주 찾아갈 것이다.
그 안에서도 기종이가 웃을 수 있도록,
그의 미소가 세상과 이어질 수 있도록.
나와 기종이의 이 축복의 만남이 언제까지 일지는 모른다
내 나이도 올해 68세다.
그게 내가 할 수 있는
마지막 돌봄의 약속일 것이다.
나는 그 약속을 지킬 것이다.